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先從隗始(선종외시)' 작품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화 휘호 선종외시(先從隗始)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의 재상 곽외는 죽은 말의 뼈를 천금으로 살 정도로 천리마(千里馬)를 귀하게 구했다는 매사마골(買死馬骨)처럼 인재를 모을 때는 곽외부터 먼저 시작하여 인재를 모으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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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양금섭 선생님의 새김 순서를 보면 '먼저[先] 외[隗]로부터[從*전치사 from] 시작하소서[始]'로 의미는 '모수자천(毛遂自薦)과도 같은 훌륭한 인재를 구하시려거든 보잘것없는 사람, 즉 자신인 외와 같은 사람을 등용 시켜 천하에 소문부터 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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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 허헌(許憲, 1885~1951) 선생을 만난 게 1908년 15세 청소년기다. 1904년에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허헌 선생은 영어, 독일어, 일어를 공부하고 지계아문과 규장각, 법무아문에서 주사로 근무하며 1907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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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 법학부 법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908년 7월, 광무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 대한제국 변호사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 11호로 등록했다. 그리고는 변호사로서 첫 번째 업무를 지운 선생댁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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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으로 이동휘 선생과 김집 선생과 함께 고려공산당에 참여하여 거금의 볼셰비키 동양 혁명자금을 집행하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비록 허헌 선생과 함께 일할 기회는 없었지만 허헌 선생은 지운 선생의 향도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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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선생은 이인(李仁, 1896~1979), 김병로(金炳魯, 1888~1964)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1924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조선인 변호사회 회장으로 또 동아일보 사장직무대행 등으로 각종 사회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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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는 견문을 넓히고자 6개월 동안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1927년에는 신간회 단체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1943년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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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여 이극로 선생 등과 함께 잔류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 대학 총장 등으로 활동하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8월 대학 행사 참여차 청천강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 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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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은 인민군을 진두지휘하여 허헌 선생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고 직접 허헌 선생의 관을 메고 장례를 치르며 서럽게 곡을 했다. 아마 김일성 주석의 허헌 선생에 대한 통곡과 그 마음은 허헌 선생이 간직했던 '선종외시(先從隗始)'의 마음을 알았던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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