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미당문학상 폐지 유감 / Thu, Oct 4, 2018, 2:57 PM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7. 20.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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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앙일보가 소설 분야 상금 5천만 원의 황순원 문학상과 함께 시 분야 상금 3천만 원의 미당 문학상을 만든 지 17년 만에 미당의 친일을 문제 삼아 폐지한다는 인터넷 문학뉴스를 보았다. 

서울 시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허여물그럼한 서울 사람으로 자란 큰형, 작은형, 누나와는 달리 나는 어린 시절 서울 근교 시골에서 원예 꽃 농장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꽃 속에서 태어나고 꽃 속에서 자랐다. 

의사를 하는 내 큰형은 언젠가 형제들 술자리에서 내가 꽃 농장에서 나고 자라 감수성이 풍부하여 문학가로 살아갈 줄 알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사생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다니기도 했으니 이루지 못한 그 기대는 나름으로 일리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이런저런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여학생들과 문학회 모임도 더러 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난 꽃 농장에 뻔질나게 놀러 오던 쟁쟁한 문학인들을 보면서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로는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 최면을 걸기 시작했던 게 중학생이던 시절이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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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인가 만들어진 한국일보 문학상은 상금이 무려 백만 원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 상금을 받은 양반이 잔치하고 친구들과 술 퍼먹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부인이 울고불고하던걸 보기도 했다. 

1977년 만들어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데 한턱내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먹고 죽을 돈이 없다고 엄살을 부리고 다닌다는 이문열의 소문도 들었다. 

그 엄살이 엄살이 아닌 것이 출판사들이 이 책에서 밑진 것 저책으로 막아내고 막아내다 거덜 나기 일수였다. 

내 아버지 친구 이종익 선생의 신구문화사만 전집판매 월부책 판매 전문가들을 운영해서 돈 버는 족족 다른 사업으로 전환하는 바람에 쪽박 신세를 면했지 출판사만 붙들고 있었으면 진즉에 거리로 나앉을 뻔했다고 생전에 늘 말씀하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글 쓰는 직업으로는 식구들은 물론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1953년 자유문학상을 시작으로 1955년 현대문학상, 같은 해 동인문학상, 1957년 시협작품상, 64년 한국문학상과 한국여류문학상, 68년 한국일보 문학상, 73년 만해문학상, 77년 오늘의 작가상과 이상문학상, 81년 김수영 문학상, 82년 신동엽 문학상, 내가 미국 나오던 1988년 문학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노동자 문인을 배출한 전태일 문학상 등이 내가 한국에서 기억하는 문학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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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1995년 문학동네문학상, 96년 한겨레문학상, 98년 소설상금 5천만원의 삼성문학상, 2000년 이효석문학상, 2001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 등이 생겼다. 그런데 미당의 친일을 빌미로 시분야 상금 3천만원짜리 미당문학상을 폐지시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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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변변한 부업이라도 없으면 경제적으로 글쓰기조차 궁색한 시인들을 위해서 그냥 놔두었으면 한다. 송경동 시인처럼 미당의 친일과 전두환 찬양을 손가락질하며 3천만 원을 거부할 수도 있다.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폐지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다. 다양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당문학상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당문학상을 통해 미당의 그 친일과 독재 미화의 역사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30여 년을 사는 나도 한국의 시인입네 하는 분들의 시집을 물경 30여 권을 가지고 있고 더러는 뜨거운 냄비 받침대로 사용하고 있다. 

예전부터 남산에서 돌멩이 던지면 시인이 맞는다고 농하듯 자칭 시인 이 널려있는 한국에서 미당문학상은 진짜 시인들 스스로 자신들을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일전에 내가 쓴 [전업작가의 모습]의 한 부분을 소개하며 이글을 마친다.

"한국에도 글에 전념하고 싶지만, 생계가 안되고, 글쓰기론 살 수 없어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교편을 잡고, 강사를 하고, 문화체험장 지킴이나 공사판을 전전해야 하는 작가들이 널려있습니다. 수십 년째 문학지 소설이나 수필 고료는 원고지 한 장에 5천 원에서 만원, 시는 한 편에 3만 원에서 10만 원입니다. 

다른 직업 없는 전업 작가는 배우자나 집안 가족의 등골을 빼먹든지 아니면 도시 빈민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천하의 미당 서정주도 전두환 찬양시를 쓰고 그의 시 '찬술'에서 

한 수에 오만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찬술) 

라고 썼겠어요. 소동파는 "가난한 사람의 시가 좋은 법(窮者詩乃工)"이라고 했습니다. 배고픔은 글 쓰는 이의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그 극단적 모습을 한국 중견작가의 작품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출간하여 1년을 지내보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문학적으로 역량 있는 작가들이 너도나도 말초신경이나 건드리는 삼류소설이나 쓰고 남의 자서전이나 대필하고 있는지 말이지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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