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과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화첩, 사의적(寫意的) 사생(寫生)의 세계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2. 2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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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과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화첩, 사의적(寫意的) 사생(寫生)의 세계

지난 주말 우체부가 한국에서 온 소포박스를 전해주었다. 안양에 사시는 배형모 선생님이 보내주신 소포박스에는 '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과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화첩, 사의적(寫意的) 사생(寫生)의 세계'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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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화백의 시집(詩集)이다. 이 시집은 1938년부터 고향인 광주에 정착한 허백련 화백이 호남 서화계의 후진 양성과 서화 교양의 도량으로 개설한 연진회(鍊眞會)에서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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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해설은 한문학 개론서인 '한문학 대개(漢⽂學 ⼤槪)'를 집필했고 유학의 10대 경전을 모두 완역하기도 했던 송담 이백순(松潭 李栢淳. 1930~2012) 선생이 했다. 이 시집은 1천부 한정판 비매품으로 1991년 10월 5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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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끝에 본문 내용이나 간행에 관계되는 사항을 의재 선생의 제자이자 후학인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1938~2014) 화백이 작성한 발문(跋文)에 의하면 이 시집은 의재 선생의 친구인 지운(遲耘) 김철수 선생과 여수에 살던 한량 백민(白民) 선생 세분이 주고 받은 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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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과 우리 집안의 오래되고 특별한 인연으로 인하여 의재 선생에게 내 큰형은 신재, 내 작은형은 노재, 그리고 나는 인재라는 호를 받은 적이 있다. 또 의재 선생의 제자 중에 옥산 선생과 내 부친 방원 선생은 의재와 지운에 이어 평생 절친한 친구로 일생을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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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보내주신 안양에 사시는 배형모 선생님께서 내가 이 블로그에 올린 지운 선생의 서화를 보고 그 서화의 시중에 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에 나오는 시들도 있어서 나에게 더 생생하게 그 시들을 접하라고 보내주신 거다. 또한 배형모 선생님은 이 근인당창화집의발문을 쓰신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사위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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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생존하신 희재 화백의 사모님께서 내 부친 방원 선생을 기억하고 계셔서 내가 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을 받아보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또 함께 동봉된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화첩, 사의적(寫意的) 사생(寫生)의 세계'를 통해 힘찬 남화 산수의 세계에 빠질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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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를 빌어 '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과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화첩, 사의적(寫意的) 사생(寫生)의 세계'를 보내주신 배형모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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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발문(跋文)을 소개 하면서 이 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의 내용을 접하길 원하는 분들에게는 배형모 선생님이 손수 올리신 근인당창화집(近仁堂唱和集)의 내용과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화백의 산수화를 접하도록 그 분의 블로그 주소도 올린다. https://blog.naver.com/bae12jm 이곳을 방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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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跋文)
近仁堂近世南畫大家毅齋許百鍊先生之堂号也先生之
故友遲耘志士出示義齋先生詩抄引一編曰此雖不過三
友和韻之集亦各言其志也思其三友酬答之情則此稿不
留於篋笥之中而乃竣毅友百周生辰日以備編纂之資故
僅爲掇拾編成與先後同門熟議則門下互相齊發編爲一
纂焉不肖等本是賦性愚魯寡聞未洽其情可畏而已然詩
者言志詩之遺音雖未得與論於鏗金戞玉之間遊於藝樂
餘生而捿身乎山林之間或畵或詩從容談笑以暢其情惑
從風流雲散之景取其所感而淘瀉性情感發聲氣足以風
動韻士之心詩書畵三絶古今人之所嗜好子冲澹之趣別
乎他藝也先生日常近仁保其眞元而竟成三絶焉論語云
剛毅木訥近於仁以近仁爲堂號感昔愴今不容無吾等之
一言故略述所懷書于編尾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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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인당(近仁堂)은 근세(近世) 남화(南畫)의 대가(大家)이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의 당호(堂號)다. 친구이신 지운지사(遲耘志士)가 의재(毅齋)선생의 시(詩)를 적어 일편(一編)을 내보여주면서 이것이 비록 세 친구가 주고받은 시집(詩集)에 불과하지만 역시 각기 그 뜻을 말한 것이다. 세 친구가 주고받았던 정(情)을 생각하면 이 초고(草稿)를 그냥 문갑(文匣) 속에 넣어 두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의재(毅齋) 친구의 백주(百周) 생신일(生辰日)에 인쇄를 해서 내놓으면 좋겠다하기에 이렇게 편찬(編纂)을 하며 선후의 동문(同門)들과 함께 숙의(熟議)하여 한권의 책자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으나 불초(不肖) 등이 재주가 미련하고 아는 것도 없어 이 일을 해낼지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나 시(詩)는 뜻을 말한 것인데 시(詩)의 깊은 내용은 그것이 금(金)처럼 옥(玉)처럼 울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는 못한다지만 평생을 예술(藝術)에서 놀며 여생(餘生)을 즐기고 산림(山林)의 사이에서 살며 그림이나 그리고 시(詩)도 쓰고 종용담소(從容談笑)로 그 심정을 풀고 때로는 바람이 흐르고 구름이 흩어지는 경치에서 소감을 피력하여 마음을 쏟고 성기(聲氣)도 발하여 족히 시인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을 것이니 시(詩), 서(書), 화(畵) 세 가지를 고금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맑고 깨끗한 취미가 다른 예술보다 다르기 때문이리라. 선생은 날마다 항상 인(仁)을 가까이함으로써 그 진원(眞元)을 보전하여 마침내 삼절(三絶)을 이룩하셨으니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강(剛)하고 끈질기고 소박하고 말이 적은 사람이 인(仁)에 가깝다”하였으므로 근인(近人)을 당호(堂號)로 삼으신 것이다. 옛날을 감상하고 이제를 슬퍼하는 정(情)을 우리들이 한 말씀 안할 수가 없어서 약간의 감회(感懷)를 기술(記述)하여 책 끝에 붙이는 바이다.
신미년 늦은 가을에 문하생 문장호 삼가 발(跋)을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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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1938~2014)
시서화의 대가인 희재 문장호 선생은 60여년 화업 동안 현대 한국화단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해 왔다. 1938년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명필이자 한학자였던 조부 율산 문창규에게서 어릴 적부터 글씨와 한학을 배웠다. 20세가 되던 1957년 광주로 온 후 목재 허행면에게서 사군자를 배웠으며, 산수의 기초를 닦았다. 그후 증심사 계곡에 있는 춘설헌으로 들어가 의재 허백련 선생을 사사하게 된다. 희재는 의재 문하에 있으면서 1959년 처음으로 국전에 출품해 입선한 이래, 모두 16차례 입선했으며, 두 차례 특선을 했고, 77년에는 국전 추천작가, 81년에는 초대작가가 되는 등 타고난 재능과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1969년부터 79년까지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과 동양화 교수, 1980년부터 83년까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과 예술대학 동양화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고, 샘클럽을 결성해 푸른장학회를 설립, 불우 청소년 돕기에도 앞장섰다. 그는 1981년 ‘현대한국화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1990년에는 ‘한국선면예술가협회’를 결성했다. 1993년 금호문화상, 2002년 대한민국 옥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2021.6.14 "사의적 사생의 세계" 타계 7주기 기획초대전에 즈음하여, 전남매일 신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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