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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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의 생애와 사상

忍齋 黃薔 李相遠 2022. 12. 12.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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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의 생애와 사상

                 -선생이 가신지 30주기를 돌아보며-
                  강행원 (화가/동양미학)

 
1) 들어가는 말


근대미술의 선구를 살아오면서 공로가 지대하였던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이 가신지 30주기를 맞아 추모전의 뜻 깊은 자리에 참여의 예를 올린다. 선생께서 세상에 태어난 시기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구한말(舊韓末)의 불운한 시대였다. 그로부터 일제강점(日帝强占)의 식민시대에서 8·15광복을 전후한 격동기를 살다 간 한국예원의 추사(秋史)정신과 소치(小癡)를 잇는 마지막 남종화의 거장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삼애사상(三愛思想)'은 의재(毅齋)선생이 평소에 지녔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큰 정신이었음을 상기한다. 선생은 화가로써의 삶을 살아오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이러한 공문(孔門)의 철학사상을 품고 우리의 민족혼에 대한 홍익인간의 따뜻한 교육정신을 실천한 분이었다. 그가 영향을 끼친 미술사적인 관계를 넘어 한국의 다(茶)문화와 인간관계에 미친 도덕정신이 그의 삼애사상의 바탕이다. 이는 그의 예술인생을 통해서 애국정신과 차밭을 가꾸고 농업학교를 세워 삶에 문화를 계몽하는 한편 모든 인간을 존중하는 철학적 실천정신이 그것이다.

하지만 선생이 가신지 30년이 지난 오늘 의재 예술을 바라보는 필자의 눈은 후배예술인의 한사람으로써 그 감회가 새롭다. 그것은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흐름과 함께 살아온 그의 삶에 대한 궤적을 다시 살피는 계기가 주어져서이다. 특히나 현대사에 대한 한국미술의 근간이 되는 동양회화의 남종화에 대한 근대적 명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남기고 간 미술사적인 입장의 화관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재의 예술은 그 시기에 같이 활동했던 작가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추사와 소치를 잇는 남화적 전통을 수립함으로써 근대사회의 새로운 시대성과 만나게 되는 성공한 예술가였다.

이는 같은 세대의 신예들이 근대적 작품을 추구하는 단순한 쟁이 의식과는 달리 시대성과 밀착하기에는 보수적 토양에 박혀있는 사고들에 의한 보이지 않는 저항과 방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법에 충실한 화격(畵格)을 자신의 세계로 심화시키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는 여정이었다. 더구나 비평부재의 그 시대는 참다운 정서가치의 이념소통도 원활하지 못한 풍토로부터 그것은 오로지 자기회복의 문제였던 것이다. 한 인간이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그가 누구라도 그 업적을 조명함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점을 의재의 80평생을 통해서 어둠이 되고 빛이 되었던 시기를 단계적으로 나누어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특히나 의재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때는 일제통치의 농번문화기였으므로 미술이 갖는 이상(理想)에 대한 사색과 철학이 부재했던 때이다. 그러함에도 예술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은 무엇이며, 시대가 바뀌면서 만들어진 정신문화의 예술이념은 또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산업사회를 맞아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물질적 변화에 대한 정신문화의 사회성에 대한 그의 사상과 철학적 대응은 무엇이었는가도 알아보고자 한다. 이와 같이 거장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거울을 삼기 위한 일인 동시에 내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기 위함이다.
 
 
2) 유소년(幼少年) 시절 인격형성기의 삶


선생은 1891년(고종 28년 신묘년) 음력 11월 2일 전남 진도군 진도면 남동리에서 허경언(許京彦) 씨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이름은 백련(百鍊), 자는 행민(行敏), 아호는 의재(毅齋)였다. 의재의 유년기는 선친(先親)으로부터 유아교육을 받았으며, 조금 커서는 종친인 방조(傍祖)가 되는 미산(米山) 허영(許瀅)으로부터 그림수업을 받았다. 의재 인생의 결정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소치가(小癡家)의 영향은 조선예원에 대한 진도의 섬광이었으며 그 내림을 받은 아들 미산에게서 사군자를 비롯한 묵화와 서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소치 허유(許維, 1809-1892)는 의재의 2살 때 유명을 달리한 종고조(宗高祖)로서 같은 가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이미 의재의 천부적 소질은 예술의 길을 향해가도록 운명지어진 것이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운명의 시작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 선생과의 인연이다. 무정선생은 대학자로써 당시 구한말의 예조참의와 승지를 거처 1884(고종 31)년 내부참의와 궁내부 참의관을 지낸 고급 관리였다. 무정 정만조가 1895년 팔월역변(八月逆變)·시월무옥(十月誣獄)에 연루되어 이듬해 4월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그가 유배되었을 때는 의재 나이 6살 때였으며 유아교육을 부친 밑에서 받고 있었다. 무정선생은 낙후된 지역의 아동들을 계몽하기 위해 진도면 외동리에 한문서당을 개설 하였다. 인근 마을에서 20여명의 학동들이 모여들어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그때 의재 나이 8세에 무정선생과 사재의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무정은 의재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후견인이 되어 그림그리기를 독려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의재는 무정 문하(門下)에서 무려 10년간을 본격적인 한학수업을 줄곧 받게 된다. 의재는 그 사이에 1905년 뒤 늦은 15살에야 보통학교의 전신인 광신학교(光新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3년여를 열심히 다니다 한학 공부로 달통한 그는 학교생활이 흡족하지 못했던지 돌연히 학교를 그만두고 만다. 교육은 스승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의식과 사상이 그 생애를 좌우하기 마련이다. 의재는 거의 정만조 선생 한분을 통해서 학문을 비롯한 의식과 사상을 고취하게 된 셈이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데는 그 정신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갖게 되는 때로부터라고 한다. 아마 의재는 무정선생으로부터 의재(毅齋)라는 아호까지 받게 된 것을 보면 그는 경세(經世)에 대한 문리(文理)가 터져 소년기를 완성한 건전한 예비청년으로 성장하였음을 의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만조의 사상과 그 의식이 어떠한가에 따라 의재사상과 의식도 같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의재의 어린 시절은 국제정세의 회오리가 직접적으로 몰아쳐 고난의 영향이 미치거나 위기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곳은 육지와 격리되어 정보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유배지였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보다는 순수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의재가 태어나던 그 후부터는 개항을 시작한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청나라에 의존하던 조선은 숨을 죽이게 되고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아울러 이러한 여세를 몰아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해서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강제징발 당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는 씻을 수 없는 우리역사의 오점이었다. 이러한 정세를 고급관리인 정만조가 전혀 예상하거나 파악하지 못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의재에게 있어서의 인간형성은 이와 같은 위기와 세상을 보는 눈을 뜨도록 조국애의 사상과 몽매한 민족을 향해 계몽의식도 함께 불어 넣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사제 간에 대한 격동기(激動期)의 세월은 한없이 지속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의재에게는 섭섭한 일이지만 1908년 그의 나이 18세 때 무정 정만조 선생께서 12년이란 긴 적거(謫居)생활의 형량이 해제되어 귀경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정만조선생과 의재의 만남은 단순한 사제 간의 만남이 아니라 더 이끌어 주어야 할 아쉬움과 선생의 훈도가 다 끝나지 않았던 인연의 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재는 이미 한학에 막힘이 없는 어엿한 지식인으로써 그 의식은 개화된 사상을 어느 정도 지닌 건전한 청년기에 이르고 있었다.
 
 
3) 댕기머리를 한 채 서울로


청년 의재(毅齋)는 1910년 정월 그의 나이 20세 때(1911년 4월 21세설도 있음) 처음으로 진도 고향을 떠나 스승 정만조(鄭萬朝) 선생을 찾아 댕기머리를 한 채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된다. 물론 스승께서는 반갑게 맞아주어 그간의 감회가 벅차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의 상경은 일제 강점으로 한일합병(韓日合倂)의 경술국치를 앞둔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가 서울에 온 것은 2년 전 무정(茂亭) 선생이 진도를 떠나면서 기회가 있으면 유학하여 법학공부를 해보라는 말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생각을 가질 겨를도 없이 무정선생이 추천한 학교를 선택하여 중앙학교(中央學校) 전신인 기호학교(畿湖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의 서울유학생활은 일제하의 어려운 시기라서 경제사정도 여의치 않았으며 가난한 무정선생 댁에서 얹혀살기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치 못했다. 몇 개월도 채 안된 그해 8월 30일 한일합방으로 인한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한일합방의 분위기는 국권을 빼앗겨 나라가 없어져버린 국치의 설음과 울분으로 조선백성들은 온통 통한에 잠겨 있었다. 이러한 상황의 기로에서 나라가 없는데 공부는 지속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학우들과 함께 방황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를 잃어버린 비참한 현실 속에서 생활까지 궁지에 몰려 있었다. 비상한 상황은 그로부터 얼마간 학업을 더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중단하게 된다.

청운의 꿈을 품고 올라온 서울유학의 학교생활은 반년을 겨우 넘기고 꿈을 접어야 했으며 다시 귀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꿈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음인지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서울에 머물 수 있는 여력도 명분도 없어져 버렸다. 바로 그 즈음에 1911년 이른 봄 경성서화미술회(京城書畵美術會)가 창덕궁 왕실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창립되었다. 하지만 국권을 빼앗긴 후, 민족사회의 자주적 전통의 진작을 위한 자각의 일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은폐하기위하여 이완용 등의 세도가를 앞세워 그 후원으로 서화 강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정선생은 의재에게 차라리 서화미술원에 다닐 것을 권유했으나 묘하게도 그 인연을 피해가고 말았다.

의재 역시 그림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정선생께 더 이상 염치가 없었으며, 그 시대를 이끌어 갔던 화단의 중추들에 대한 회화관의 방향에 대하여 상반된 자신의 생각이 갈등을 불러왔다. 그러한 이유는 일제하의 근대사가 열리면서 조선화의 사회적 기반은 사실상 무너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치가의 생애를 흠모하여 그림공부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용단에서였는지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을 포기하고 낙향하게 된다. 그로부터 1년여를 고향에서 마음고생을 하며 지내다 서구의 근대화로 무장한 일본의 더 넓은 세계로 비상할 것을 꿈꾸며, 22세의 청년 의재는 1912년 봄 진도를 떠나 더 멀리 타국 일본으로 현해탄을 건너갔다.

그는 일본 교토(京都)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4개월여의 가진 고난을 격어야 했다. 그리고 서서히 안정을 찾게 되면서 그 해 가을, 비인가 단과대학인 경도(京都)법정대학(1913년 입명관(立命館)대학으로 명칭이 바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비인가 대학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학교 이름이 바뀌기 전에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다시 도쿄(東京)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개척을 하게 되면서 고난 속에서 알게 된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당시 조선 유학생들이었던 그 유명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정노식(鄭魯湜) 양원모(梁源模) 등이다.

의재는 당시 인촌의 전셋집에서 며칠간 신세를 지면서 도쿄 생활의 난관을 열어가는 중이라서 처음에는 이들과 합류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은 가정도 부유했을 뿐더러 조선유학생들 중에서도 엘리트들이었으므로 모이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선진문물에 대한 또 다른 의식을 키워가는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의재는 이들처럼 그러한 진지한 모임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조국애의 그런 얘기들이 귓전을 맴돌 때마다 가슴 뭉클한 각오만 새롭게 요동쳐왔을 뿐이다. 그리고 의재는 이들만 사귄 것은 아니며 강진의 김영수(金永洙) 순천의 김양수(金良洙) 등을 비롯해서 그 외에 여기에 소개하지 못한 많은 벗들을 사귀었다.

하지만 인촌을 중심으로 소개된 유학생들 중에 지운 김철수는 의재를 조명하는 문헌으로는 이번이 그와 사귀던 시기가 처음 밝혀진 셈이다. 하지만 의재가 조선유학생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가장 인간적인 친구가 지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간의 모든 문헌에 지운이 소개되지 않았던 것은 사상문제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비극인 남북한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반공법에 저촉된 탓이다. 그래서 지운 김철수가 공산주의 이념을 따랐다는데서 그간의 출판물에는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지운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이 걸어온 격동의 삶 속에서 광복이후 과거를 회상하며 여생을 마칠 때까지 가장 가까이 지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명하고자 함이다.

지운(芝雲: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1986)는 부안의 대부호였으며 조선 유학생으로써 1912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과를 다녔다. 1916년 장덕수(張德秀)·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으며, 정노식(鄭魯湜) 및 중국인과 함께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한 뒤 같은 해 귀국하였다.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로 1925년 중국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결성하고 책임비서를 지냈다(?). 조선공산당 장안파를 조직하였고, 1946년 8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의 당 대회를 소집하여 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박헌영(朴憲永)의 독선적 당 운영을 비난하여 무기한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광복 후에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이끄는 사회노동당에서 임시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의재의 이러한 지사들과의 교분을 상상해 보더라도 그가 진취해야할 목적이 무엇이며 다시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이 분명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온몸을 던져 그 목적을 향해 갈구했지만 쉽게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청년 의재는 유․소년기에서부터 그렇게 희구(希求)한 학교를 한 번도 정상적으로 다닌 적이 없다. 아마 식민치하의 불운한 격동기였던 그 시절에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누구라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 의재는 그대로 좌절할 수만은 없어서 다시 메이지대학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1913년 5월 청강(聽講)을 신청하여 등록하고 거기서 법학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의재가 신문 돌리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비용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 말(言語)까지 어눌하여 학교생활을 비롯하여 사회적인 여러 여건에서 부자유스러운 면이 늘 핸디캡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어눌했던 언어를 교정치료하게 되었는데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또 메이지대 청강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재의 유학생활은 미미한 보탬을 주던 고향에서조차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그것마저 모두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의재는 일본진출의 모든 생활이 극에 달한 사면초가였으며 그 궁지에서 교유하던 유학생 친구들에게 가끔씩 신세를 지며 한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 이때도 지운에게 많은 신세를 졌을 것으로 여겨지며, 의재가 일본에 진출하여 가장 긴 슬럼프에 빠진 기간이었다. 그러니까 1915년까지 무려 2년여의 방황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또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는 결국 가장 자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그간에 싸워왔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함께 조용히 미래를 숙고해 보았을 것이다.
 
 
4) 잠재의 개발(開發)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무정(茂亭)선생이 권했던 화업에 뜻을 되살려 화가로써의 입신을 결심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의재(毅齋)는 그간에 우정을 쌓아온 학우들과 헤어져 일본의 서구화된 현대 미술판을 전전하며 새로운 예술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고국에서 느꼈던 어쭙잖은 화단분위기와도 다를 뿐더러 유․소년기에 익혔던 문인적인 취향의 그림들을 쉽게 단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술성이라고 하는 것은 잠재적 저력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이상적인 것은 없으며 또한 그 길보다 빠른 것도 없다. 청년 의재는 이국땅에서 무명인으로써의 작가 지망생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또 다시 실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의재의 큰 재산은 유․소년기에 대학자(大學者) 무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학에 막히는 곳이 없이 뚫려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동시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몇 차례를 반복하여 학교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심장부까지 가서 최고학부인 대학문화까지 모두 접한 것만으로도 어떤 의미에서는 행운이며 진취적인 선구의 행동이었다. 이와 같은 의재의 삶은 성공한 예술인이 되기까지의 그 역경이야말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큰 실연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 분야에서 일과를 이룬다는 것은 만인에 값하는 위업이 아닐 수 없음으로 그것이 무엇이라도 결코 만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1915년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의재 인생에 있어 또 다른 큰 스승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그것은 의재가 새롭게 결심한 화업에의 숙제를 풀어내기 위한 용단이 가져온 광명의 길이기도 한 셈이다. 그는 대담하게도 자신의 남종화적인 취향과 비슷한 일본 남화의 대가 소실취운(小室翠雲)을 찾아가게 된다. 의재는 소실취운의 명예만으로도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값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의재를 테스트한 소실취운 역시도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인 화인(畵人)을 발견한 셈이며 제자로 삼기를 허락하게 된다.

그간의 역경 모두가 의재 인생에서의 예술의 길을 여는 두 번째 사제의 연을 맺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로부터 의재는 소실취운을 스승으로 모시고 화업에의 미진한 과정을 열심히 닦아나갔다. 이러한 의재의 용기 있는 도전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과 경험적 소산이며 소치가문의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림에 대한 잠재의 집념이 결국 성공의 길을 열게 된 것이라고 보아진다. 어떤 면에서는 학교교육보다 프로정신을 통한 도제중심의 현장교육이 의재에게는 훨씬 더 배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본생활의 전체를 아우른 인간수업의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경제적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스승 밑에서 닦아온 실력을 활용하여 필요한 화구를 비롯한 생활의 위기를 열어나가게 된다. 여기에는 강진친구 김영수의 도움으로 인삼을 행상하여 얻은 수입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진취적인 것은 자신에게 가장 잘 훈련된 문인취향의 그림을 그려 도쿄의 위성도시를 돌아다니며 화회(畵會)를 결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시작은 어렵게 출발한 아마추어적인 어수룩한 맛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림전시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도 만나게 되고 작가대접도 받게 되면서 자신의 성(城)을 쌓아갔다. 의재의 일본 유학길은 그가 고향진도에서의 댕기머리시절에 법조인이 되겠다고 품었던 꿈과는 달리 결국 미술인이 되었다. 하지만 타지에서 7년간의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얻은 결과는 참으로 값진 29세의 후회 없는 영광의 길이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5) 장년(壯年)의 자신만만한 인생 황금기


그는 1918년 금의환향은 아니지만 선친께서 위독하다는 통고를 받고 7년만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의 삶에 방식에 대한 터득과 작가지망생의 단계를 넘어 어엿한 예비 작가로써의 자신만만한 귀국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청년 의재가 아니라 지금부터는 장년 의재로써 청년기에서 그간에 갈고닦으며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결행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이제 의재의 역량은 청년기에 쌓아온 인생역경의 모든 것이 충분하고도 흡족한 지성(知性)이며 도탄에 빠진 조선사회에 대한 계몽의 선구가 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귀국 후 1919년 3월까지 고향 진도에 머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뒷바라지를 하느라 부친의 처진 어깨와 기울어진 가사를 지켜보게 된 의재의 심정은 착잡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달에 3.1운동이 일어나 그 물결이 진도의 섬마을에도 술렁이고 있었다. 그 때 의재는 다시 일본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에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술렁이는 시국의 원초적인 사명과는 무관하게 고향의 시골이 우선 답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목포에 나가 옛 스승 미산을 뵙고 도쿄에서 그림을 정진하게 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중이었다.

그 때 우연히도 일본에서 신세를 많이 졌던 친구 강진의 김영수(金永洙)를 만나게 되어 둘이서 다시 일본에 갈 것을 약속하고 준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도 김영수가 중병에 걸려 광주부립병원(현 전남의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그의 병간호차 광주(光州)에 머물게 된 것이 아주 한 생을 그 곳에 뿌리박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연유는 당시 광주가 목포(木浦)보다 더 작은 고을이었다고 하는데 대신 일본인들이 더 많이 살았던 까닭이다. 그것은 그림을 이해 해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들이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이 광주에서 심심치 않게 팔려나가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조건이 계기가 되어 의재는 광주에 정착하게 되면서 목포를 왕래하며 스승 미산과도  자주 만났으며 목포의 부호들과 일본인들을 소개 받으며 발을 넓혀가게 된다. 이렇게 다진 교제를 주축으로 일본에서 귀국 후 처음으로 1920년 목포공회당 2층에서 3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화회를 열게 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921년에는 광주에서도 그간에 닦아 놓았던 발판을 통해서 화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발표회를 통하여 대부호였던 현준호(玄俊鎬)를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을 사귈 수 있었으며, 또한 광주의 부호 박현경(朴賢景)의 화순별장에 초대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인연은 묘하게도 화순 그곳에서 인촌 김성수를 다시 만나게 된다.

갑장이었던 두 사람은 일본에서 헤어진 뒤 엉뚱한 곳에서 이렇게 회우하게 되어 그려놓았던 수작(秀作) 한 점을 인촌에게 증정했다. 인촌은 이 그림을 가지고 서울에 와서 1911년 결성되었던 경성서화미술회에 의재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의재는 그 뒤 화회에서 모처럼 목돈이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금강산 나들이를 훌쩍 떠났다. 그는 금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대자연을 마음껏 느끼고 스케치도 많이 하여 실질적으로 의재의 산수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에서 돌아와 서울에 머물게 되었는데 인촌의 집으로 옮겨 2층 방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대작 2점을 그리고 있었다. 그 작품은 금강산을 상상한 관념 산수로서 한 점은 수묵주종의 하경산수(夏景山水)였으며, 다른 한 점은 담채의 추경산수화(秋景山水畵)였다. 이때가 의재 나이 32세였으며 후일 그는 회고하기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인촌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를 잃어버린 조선사회는 일제의 무력정치에 온몸을 던져 항거했던 우리 독립열사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조선정치에 대한 방향을 유화정책으로 선회하여 처음 실시하게 되는 문화행사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가 열리게 되었다. 1922년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을 표방한 약칭 선전(鮮展)이 그것이다. 의재는 그 두 작품을 인촌이 정보를 주어 제1회 선전에 출품하여 동양화부문에서 1등이 없는 2등상을 받아 큰 영예를 안게 되었다. 그러니까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셈인데 두 작품 중의 추경산수가 영예의 상이며 하경산수는 입선이었다. 그로부터 의재는 크게 양명(揚名)하게 되어 화가로써 당당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때 서울화단에서 두각을 내고 있었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는 4등상을 받았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재는 서울화단에서 새로운 해성으로 떠오른 셈이다. 당시 심사위원으로는 천합옥당(川合玉堂), 고대성일(高大誠一),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 등이었으며, 심사위원장은 일본에서 직접 건너온 최정상에 있었던 천합옥당이었다. 영예의 당선작에 대한 천합의 심사평은 “중국 것도 일본 것도 아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조선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좋은 작품이다.” 이대로 정진하면 분명히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 평하였으며 매스컴도 의재를 높이 평가하였다.

의재의 이러한 입신이 계기가 되어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는데 그때 알게 된 또래의 화가들이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등이다. 이들이 거의 경성서화미술회 출신들인데, 의재도 그 창립초기에 거기서 공부할 뻔했던 곳으로 결국 10여년 뒤에 친구가 된 셈이다. 그리고 의재는 그해 가을 동아일보 사장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의 주선으로 9월 24일부터 보성고보에서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대망의 서울전시를 갖게 된다. 전시작품은 전부 매진되었으며 목돈을 잡게 된 의재는 또 일본 유학에 재도전을 하게 된다. 의재가 욕심이 많은 것인지 청년기에 세웠던 집념이 지나치게 집요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923년 5월 일본에서 귀국한지 6년 만에 다시 인촌의 소개장을 들고 일본에서의 전시 계획과 함께 스승을 찾아 나섰다.

 
6) 유학(留學)의 집요한 재도전(再挑戰)에서 깨어나다.


의재(毅齋)는 일본 동경에 도착하자 바로 천합옥당(川合玉堂)을 찾아가서 천합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기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것은 천합의 곧고 바른 양심관이 의재를 다시 일깨운 것이다. 천합의 생각으로는 의재가 조선에서의 그자세로 일관하면 좋은 화가가 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독자적인 개성 위에 자기세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오히려 자기가 끼어들어 그 화풍을 벼려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천합의 솔직한 양심의 언급을 듣고 의재는 감격하여 그때부터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의재는 도쿄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수운(首雲) 김용수(金龍洙) 등과도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를 이 시기에 여기서 만나게 되었다고 의재를 조명하는 문헌들에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며 앞에서 바로잡아 기록한 대로이다. 이는 지운선생 생존 시에 필자가 들은 증언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지운이 독립운동당시 1921년 5월 상해에 머물면서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였고, 1923년 초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중 검거되어 1년간의 주거제한 명령을 받고 있었던 때이다. 의재가 다시 일본에 갔던 1923년은 지운이 국내에서 법망에 묶여 제한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성립이 안 되는 말이다. 어떻든 지운과 같은 의식이 깨어있는 친구들이 의재 주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의재는 복이 많은 예술인라고 할 수 있다.

의재의 행보는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더 할 셈으로 출국할 때 인촌이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그곳 지사를 맏고 있던 백상우길(白上佑吉)을 찾아갔다. 백상우길은 경기도 경찰국장을 지낸 바 있는 조선실정을 잘 아는 거물로써 인촌과 고하와는 절친한 사이었다. 의재는 의외의 환대를 받으며 일본의 아름다운 휴양도시였던 천엽(千葉)시에서 백상우길의 주선으로 그해 8월 개인전을 가졌다. 그러나 의재는 끊임없는 진취성으로 좋은 일도 많았지만 어려운 난과도 많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하듯이 전시가 끝난 9월 도쿄와 요코하마를 강타한 관동(關東) 대지진으로 그들의 삶이 초토화되었다. 그때 조선인들이 폭동을 음모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조선인을 무차별 공격하는 환란(患亂) 속에서 그해 10월 귀국을 결행하게 되었다. 

의재는 이렇게 귀국하여 그해 겨울과 1924년 봄을 고향 진도에서 34살의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에서 알았던 순천 출신의 김양수(金良洙)가 당시 진도 군수였던 성정수(成貞洙)의 5촌 질녀 성연옥(成蓮玉)을 중매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김양수는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기에 의재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재는 늦은 나이에 성급히 결혼하여 5월에 광주에 나와 신혼생활을 하게 되며, 그해 선전에 수묵주종의 계산청취(谿山淸趣)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는 1927년까지 총6회를 출품하면서 특선을 한번 더하는 데 그쳤으며, 그 후로는 출품을 중단하게 된다. 이미 공모전정치의 부패한 타락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해 10월 서화 컬렉션을 좋아하는 지주들의 초청으로 신혼생활의 재미도 미룬 채 진주전(晉州展)을 성공리에 마치고, 부산전(釜山展)을 계획하여 8개월여의 시간을 보냈으나 전시를 갖지 못하였다. 그 후 그의 방랑벽은 서울, 광주, 진도를 오르내리다가 다시 일본나들이를 비롯하여 이당 김은호의 제안으로 함께 중국여행을 하면서 분주하게 살다보니 잠간동안에 불혹(不惑)의 나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친분이 돈독해진 이당과 서울에서 1932년 7월 18일부터 삼월오복점(三越吳服店,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에서 3일간 2인전을 갖게 되었다. 이후로도 진주에서 지방전(地方展)을 두 번 더 가졌으며 그의 방랑은 1936년 어언 46세의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의재는 이때부터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을 설정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당과 의재 그리고 서양화가 박광진(朴廣鎭) 조각가 김복진(金復鎭)과 조선미술원을 창립하기로 합의 한 것이다. 조선미술원 건물은 당시 개성갑부의 아들인 화가 박광진이 중학동(현재 한국일보사 옆)의 자기 집을 내놓기로 하였다. 창립합의 1년여를 거처 1937년 봄 드디어 조선미술원이 아담한 2층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 이들은 미술원 개원을 기념하는 개관기념전을 3월 31일부터 7일간 열어 조선미술의 새로운 기치를 들어올렸다. 미술원을 개강하여 강의는 의재가 맡기로 하였으며 경영은 이당이 맡았으나 겨우 3년여를 지탱하며 운영난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의재는 1937년 조선미술원 발족을 전후해서 광주의 무등산 계곡의 증심사(證心寺)에서 정착되지 않는 작품생활을 했다. 40중반을 넘기면서도 방랑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전주 제주를 마지막으로 뒤늦은 결단을 하게 된다. 조선미술원에서의 그의 생각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민족정신에 값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도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14년여 만에 광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 배경이다. 물론 가족들에게도 더없는 가쁨이겠지만 1939년 그로부터 연진회(鍊眞會)가 탄생하게 되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사실 의재 인생에 있어서 그의 정신세계를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도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7) 사상이 펼쳐질 연진회(鍊眞會) 탄생과 산인(散人)시대


연진회(鍊眞會)의 처음 시작은 광주에 있는 서화(書畵)동호인들이 모여서 만든 친목단체로 출발하게 된다. 회(會)가 조직되어 창립회원들이 20여명에 이르게 되는데 의재를 중심으로 그 주축이 되는 회원들은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 지봉(智峰) 정상호(鄭相浩), 동강(東岡) 정운면(鄭雲勉), 춘파(春波) 김동곤(金東坤), 목정(牧亭) 최한영(崔漢泳) 등이었다. 하지만 연진회가 탄생하여 도장(道場)을 갖기까지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형식은 회원들의 기금조성전을 통해서 이루려는 의도였지만 사실상 의재작품에 의지하여 어렵사리 그 숙원을 이루어 광주 남동에 회관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일제치하의 연진회 운영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명색이 예술을 창달하는 문화단체였으니 일제문화에 동화를 꾀하는 감시를 피해야 하는 어려움이 여간 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재는 자유인으로써 혼자서 예술혼을 개척할 때에는 이토록 나라 없는 설움이 큰 것인가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회관을 마련하고 보니 신전(神殿)설치를 비롯한 창씨(創氏)개명의 강요로부터 옥죄어 오는 억압은 오히려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운 저항이 되어 어려운 역경을 감내하게 되었다. 의재는 회원들과 이곳에서 조선서화의 앞날에 대하여 상호간의 진지한 논의들을 했으며, 자신이 그간에 정진해왔던 경험도 털어놓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의재가 경험한 이미 타락해 있는 선전의 식민제도미술(植民制度美術)에 대하여 등용의 문제를 두고 우리의 장래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식민지시대에서의 문화적배경은 선전과 같은 제도미술이나 근대미술의 교육에서 취해야 할 자신의 입장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적 지배교육에 있어서 정신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통과 근대사이의 의식갈등이 새롭게 나타나게 된 것은 당연하였다. 그것은 의재 입장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갈림길에서 근대 문인화(文人畵)와도 당면한 진통을 겪어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선의 몰락과 함께 당시의 교양적 문인은 일제하의 근대적 개화지식인으로 대체 되어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근대의 신교육을 접한 미술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신분상에서는 문인화라는 개념구별이 무의미해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문인화적(남종화)인 양식문제는 형식만 남게 되었을 뿐, 신분적 차별이 없어진 이상 상대적으로 문인화와 화공화의 그림구분은 논리상 무의미하게 되어버린 셈이다. 식민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일본적 회화문화는 근대남화와 신일본풍이 들어와 제도미술로써 우리에게 요구되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들은 전통적 보수와 일본적 진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기반을 닦을 것인가에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의재는 많은 역경을 헤쳐 왔음은 사실이지만 햇볕을 피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재는 무엇보다도 이들 작가들 중에서 민족의 정통성에 가장먼저 각성하게 된다. 의재는 방랑벽이 사라지면서부터 조선서화의 남종화에 대한 맥락을 호남정신(湖南精神)으로 승부를 걸고 확고한 신념의 걸음을 멈추지 않게 된다.

의재는 이때부터 아호를 의재산인(毅齋散人)으로 고쳐 쓰기 시작하였다. 관지(款識)를 하면서 산인을 붙일 때에는 그동안 쌓아왔던 명예도 버리고 더욱 겸손함을 쫓는 뜻이 담겨 있다. 의재의 작품세계는 산인을 붙이면서부터 더욱 농익어 의재산수의 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의재 그림의 달라진 모습은 연진회가 발족한 이듬해인 1940년 서울의 조선미술관에서 당시 한국화단을 주도하는 10명가(十名家)의 산수화전이 열렸다. 출품 작가는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을 비롯하여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심향(深香) 박승무(朴勝武),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정재(鼎齋) 최우석(崔禹錫) 등이었다. 여기서 의재의 작품은 큰 호응과 더불어 찬사를 받았다.

그러한 이유는 이 가운데 남화를 추종하는 몇몇 작가가 있었지만 그들은 유행의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작품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에 의재는 순수한 조선전통의 남화를 고수하였던 점이 달랐다. 이러한 의재의 진면목은 연진회를 이끌어오면서 새롭게 다짐한 민족문화에 대한 정서가치 이념의 반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남종화는 강남에서 발족하였듯이 호남지방의 서화가들에 대한 리더자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것이 의재에게는 조선서화정신을 잇는 화가로써의 절명한 민족정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조선정신의 추사(秋史)와 소치(小痴)를 잇기 위해서는 남화이론을 가리켜 남화를 지켜야한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깨어난 의재정신의 기치는 이렇게 연진회를 통해서 광주의 서화동호인들에게 꿈과 희망이 영근 수련원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러한 엄격한 후진양성과 전람회개최를 통해서 호남화단을 하나의 화파로 형성해 왔다. 이 시기에 연진회 회원으로서의 중요작가는 李範載, 具哲佑, 曺福淳, 成在烋, 金正炫, 金東坤 등이 배출되어 나왔다. 일제치하의 문하생 배출에 있어서의 제자양성으로는 가장 큰 화맥을 형성한 셈이다. 그리고 남화로써 정착되어지는 호남화풍의 공통적 특성은 근대산수의 리얼리즘에 대한 묘법보다도 사의성(寫意性)을 중요시하는 정신주의 미학을 고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연진회 회원들은 점진적으로 민족성에 기초해야 함을 깨달아 꾸준하게 성장해 왔다. 그러나 1944년 연진회는 제7회 모임을 마지막으로 불가피하게 임시 문을 닫게 된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면서 연합군의 대공습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회원들이 모두 뿔뿔이 피신을 떠났던 까닭이다. 이때 의재도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받고 고향으로 내러가서 상(喪)을 치르고 동향을 살피던 중 9개월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렇게 부모를 다 보낸 뒤의 애환(哀歡)을 압박과 설음으로 얼룩진 조국의 광복을 고향 진도에서 맞았다.
 
 
8) 감격시대의 기쁨과 선구의 개척정신


감격의 8·15 해방은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의 혼란을 야기한 남북이데올로기에 대한 대립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로 인한 6.25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또 한 번의 동족상잔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우리에게는 다시 문화를 논할 여유가 없었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꽃이 있어도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던 때이다. 생활은 이어가면서도 한국인의 의식주와 문화적 관습은 특히나 예술방면에 있어서는 더더욱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해방은 우리의 새날을 열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절명한 명제아래 의재(毅齋)는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섰다. 그것은 비록 광주라는 한정된 지역이지만 오직 신생국가에 대한 선결은 국력을 기르는 일 말고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의재의 그 대안으로는 농촌자원을 계발하고 농촌지도를 담당할 젊은이들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의재는 그림보다도 농촌근대화가 우선되어야함을 절감하며 농촌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양성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의재에 대한 화가로써의 명성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의 농업하교 설립계획은 참으로 의외의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의재는 광주의 무등산 기슭 증심사 입구에 있었던 당시 조성순의 별장자리를 인수하여 농촌교육을 위한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한다. 삼애라는 뜻은 첫째, 조상을 받드는 하늘(天)과 둘째, 풍요를 기르는 땅(地)과 셋째, 우리의 삶은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人)이 되어야 한다는 이 세 가지 교훈을 말한다. 삼애사상은 후일 의재의 좌우명이 되었던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과 땅 사람을 사랑하자는 홍익(弘益)사상이기도 하다.

의재의 이러한 인간중심의 린애(隣愛)사상은 의식주 외는 아무것도 돌아볼 수 없는 동포들의 어려움을 같이 나누고자하는 휴머니즘의 정신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삼애학원은 1946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光州農業高等技術學校)로 명칭이 바꿔 의재의 숙원대로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해방이후의 새로운 건국은 정치적인 사상문제로까지 얽혀 더욱이 민생문제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한 어려운 난관을 붓끝에 의지하여 학교를 운영하기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친지들은 차라리 미술학교를 운영하라는 권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의재는 한마디로 “농촌의 근대화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요. 이렇게 해서 농촌이 부흥해야만 여기에 진정한 예술이 나올 수 있는 것이오.”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의재의 이러한 사상은 그 이후 농업학교 운영의 실패와는 관계없이 그의 예술관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었으며, 참으로 건실한 예술관의 반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가 난국을 극복하는 데는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오로지 농촌을 부흥하는 길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농촌경제의 현실적인 부흥 없이 정서적 가치를 발양하기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의재의 이러한 예술관은 도시공간에 살면서도 그 시대의 현실적 그림에 대한 묘사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선구의 혜안(慧眼)이었다. 이것이 비록 외로운 길이었을지라도 여기서 예술은 시대적 역사성과 밀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연은 또 겹치게 되는데 6.25동란으로 인한 적지 않은 충격과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의재는 6.25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면서 임시 정부가 있는 부산으로 가서 당시 부통령이던 인촌의 도움으로 화회를 어렵사리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농업학교는 활성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답보 상태로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1953년 문교부 인가를 받은 농업학교는 1977년 1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마감하였다. 하지만 의재에게는 해방되면서 일본인에게 인수한 무등산의 다원(茶園)도 함께 운영하고 있을 때여서 그의 예술인생은 민족혼을 뒤늦게 일깨운 리더자로서 참으로 고달팠던 것이다. 의재는 벌써 노년기에 이르는 회갑마저도 자신이 가꾼 터전에서 축하를 받지 못하고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남에 사는 민동권(閔東權)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해방전 연진회 회원들과의 끈은 놓지 않고 폐허의 땅을 재건하는데, 경중의 순위만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재기의 연진회모임은 6.25전운이 걷힌 뒤였으며 그 때 모인회원들은 새로운 사람들도 있었는데 구철우(具哲佑)를 비롯해서 권계수(權桂洙), 고정흠(高廷欽), 김태즙(金泰楫), 吳승대, 오헌기(吳憲基), 윤관혁(尹官赫), 정상호(鄭相浩), 최경식(崔炅植), 최태안(崔泰眼), 최한영(崔漢泳), 의재선생의 동생인 허행면(許行冕) 등이었다. 의재는 농업학교를 시스템에 맡기고 주로 다원의 춘설헌(春雪軒)에서 차밭 가꾸는 일과 작품제작의 새로운 개척을 향한 정진이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진회의 문하생시대를 열어가게 되는데, 해방 이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인 약칭 국전(國展) 관문의 도약이 시작된다.

여기서 잠깐 국전이 시작된 배경을 살펴보면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국권을 회복하기까지 잠시 미군정의 우산아래서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정부가 수립된 1년 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바로 창립된다. 명분은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양상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창설의 진의는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좌우익의 이념 대립으로 방황하던 전체 미술인들에게 정치적인 이념과 국가적인 보호와 육성을 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군정국이 머물던 해방 공간에서 좌익미술인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던 민족미술인들을 감싸줄 수 있는 보호 장치로 국전이 창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든 호남그림의 황금기는 해방을 맞이하고 국전시대가 열림으로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며, 그 수용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는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9) 남화(南畵)의 정점(頂點)을 알리는 도인(道人)시대


의재(毅齋)는 화갑(華甲)을 넘기면서 작품의 관지 앞에 붙이는 아호를 의도인(毅道人)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자신이 가고 있는 예인(藝人)의 길을 확신한 듯, 이제 산인이라는 겸손을 지우고 학인들의 길잡이를 위해 등불을 밝힌 각오쯤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의재산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시기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의 운필은 조화롭기보다 자재로운 것으로써 그때부터는 어디에 걸림이 없었던 시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재의 어리석은 듯 한 붓질의 갈윤한 설체와 청담함은 과히 남화의 정점을 알리는 일기(逸氣)를 머금기 시작한 때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문하생들을 기르는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1955년 국전 4회부터 심사에 참여하여 1961년 10회까지 7회에 걸쳐 심사위원을 지냈다.

바야흐로 호남 그림은 연진회의 의재 문하에서 국전 등용의 모범을 보이면서 지방 미술로써의 유례없는 성과를 달성함과 더불어 팽창현상을 가져온다. 그때 국전 출신 초기작가로써는 옥산(沃山) 金玉振, 풍곡(豊谷) 성재휴(成在烋), 록설(綠雪) 이상제(李常宰),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희재(希哉) 문장호(文章浩) 등이 선차적으로 배출되면서 열기를 달구게 된다. 그리고 옥산(沃山)보다 입문이 빨랐던 우계(于溪) 오우선(吳禹善)을 비롯하여 월성(月城)이달재(李達才), 치련(穉蓮) 허의득(許義得), 연사(蓮史) 허대득(許大得) 등은 뒤를 쫒고 있었다. 그 뒤로 치암(痴巖) 남경희(南景熙), 인재(仁齋) 박소영(朴素榮), 우헌(愚軒) 최덕인(崔德仁), 계산(谿山) 장찬홍(張贊洪), 화정(和亭) 이강술(李康述), 우봉(友鳳) 최영신(崔永新), 연당(蓮堂) 이계원(李癸元) 그리고 만학 입문을 한 목산(牧山) 라지강(羅智綱) 등이 줄을 이었다.
또한 여류작가들도 많이 배출되었는데 허람전(許藍田)을 비롯해서 강용자(姜龍子), 향설(香雪) 김승희(金承姬), 오죽헌(烏竹軒) 김화래(金和來), 동작(東作) 김춘)金春, 월아(月娥) 양계남(梁桂南), 석란(石蘭) 장금순(張今順), 소릉(素綾) 김경애(金京愛), 우현(又玄) 장은정(張恩楨), 행원(杏園) 허산옥(許山玉), 숙아(淑娥) 최영자(崔英子) 등 최대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의재선생의 손자인 직헌(直軒) 허달재(許達哉)가 마지막 문하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은 집단적 개성의 강점이면서도 개별적으로 자기 개성의 미화에 대한 단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연진회를 중심으로 한 전후기의 사제인맥이 사군자를 흡입한 서예인들까지 포괄하면 상당수의 작가들이 더 있는데 여기에 그들을 일일이 다 거명하지 못하였다.

의재는 1964년까지 국전에 작품을 냈으나 또 국전의 고질적인 병폐와 파당싸움이 싫어 인연을 끊게 된다. 그 후 그는 항상 제자들에게 남화적 정통성에서 벗어나지 말고 그것을 지켜 개척해줄 것을 바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이 연진회는 국내 최대의 계파를 이루면서 발전해나갔다. 하지만 그가 줄곧 질곡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이루려던 현실자각은 일반적인 인식으로부터 결국 확대 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고 마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이로부터 은자(隱者)적 명성과 예도를 지키며 춘설헌의 생활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삶은 점차 산업사회로 변모되어가는 물질주의적인 도시 생활의 오염으로부터 도덕적 청렴함과 초연함을 보여주는 목가적인 모습이었다.

의재는 고희(古稀)를 넘어서면서부터 그 작품세계는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천진(天眞)의 눈을 뜬 도인의 승흥(乘興)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극력속기를 떨쳐버린 절진에 도달되는 문기를 품고 있었다. 송대의 화론가 등춘의 미학에서 제시된 문인화의 정의는 “문인화라는 것은 그림이 문의 극치에 있음이다.” 그리고 그림에는 서권기(書卷氣)를 담고 있으면서 사의(寫意)가 공치(工緻)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였듯이 그는 능숙함의 결여와도 같은 깊은 묘미를 창달한 천진에 이른 작품세계를 가고 있었다. 이는 의재만이 가질 수 있었던 남화를 주장해온 서권의 문인적 소양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게다가 그의 문인적인 은자적 삶이 춘설헌을 배경으로 한 한유(閒遊)의 감정과도 더욱 밀착하였던 점이다.

그러나 그의 춘설헌의 다(茶) 살림은 다원(茶園)에 받치는 수고로움과 더불어 차생활을 실천하며 그 중요성을 전하는 데도 물러서있지 않았다. 예도를 걷는 그의 일상은 지나간 농본시대에 자연과 함께 살았던 마지막 은자다운 도인의 모습에 세인들은 경이로운 흠모의 감정을 보냈다. 그리고 의재의 노년기에 대한 한유의 작품세계는 생활상의 숨김없는 토로였으며 무르익어 넘는 노작의 가격도 더불어 정점에 달해 있었다. 의재는 시․서․화가 서로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이고, 그 진정성은 격조 높은 정신과 올바른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문인의 이상(理想)으로 여겼다. 지금도 춘설헌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풍류를 아는 옛 선비들의 자리가 그런 풍경이었을 것이라며 못 잊어 할지 모른다.

의재는 인생의 마지막 생애의 승부를 민족정신의 기틀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지 민족의 뿌리인 단군신전을 모시는 천제단(天祭壇) 건립을 계획했던 모양이다. 1966년 무등산천제단신전건립위원회(無等山天祭壇神殿建立委員會)를 구성하여 천제단 일대의 땅을 사들이고 신전 건립을 위한 기금마련 전시를 갖는 등 황혼을 더욱 붉게 달구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새긴 굳건한 뜻은 또 실연을 맞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 측에서 반대하고 나섰으며 특히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내 성연옥(成蓮玉) 여사가 앞장서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의재는 단군을 모시는 문제는 종교를 떠난 민족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끝내 그는 굴하지 않고 1974년 천제단에서 개천궁(開天宮) 기공식을 가졌으며, 수련장을 비롯하여 도서관 합숙소 등의 6개동을 1976년 준공을 목표로 하였으나 계획대로 이루지 못 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의재는 자신이 지금껏 현실자각을 통해 이루려했던 사업들에 대한 마지막 결단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이기도 한 삼애사상(隣愛思想)에 대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큰 뜻을 실천하고자 했던 숙원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의재 인생에 있어서는 질곡의 시대가 요구하는 현실자각을 통해서 깨어난 구현의 행동은 바른 실천이었다. 비록 충족한 완성이나 숙원을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의 사상과 정신은 큰 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예술인생의 성례 또한 경이로운 작가였다.
                           

10) 맺는 말


의재(毅齋)의 생애에 대한 예술과 삶의 자취를 돌아보았다. 그의 예술인생을 통해서 질곡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있었던 현실자각은 비록 늦은 행보였지만 그의 깨어난 할(喝)의 울림은 자못 컸다. 의재의 80평생을 사등분하면 청년기, 장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청년기에는 지성을 갈구한 학업에의 몸부림이었으며, 장년기에는 예술인생으로써 입신의 활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년기에 이르면서부터 일제의 강압통치에서 잠을 깨어 그로부터 보이지 않는 저항의 행보를 지속해오면서 광복을 맞게 되고, 또한 조국전쟁의 비극으로 아파해야 했다. 이어 폐허의 조국건설에 의기(意氣)를 보태면서 노년기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의 확고한 사상은 조국광복을 맞이하고 나면서 드러나게 되고 그 사상은 실천운동 전개와 함께 빛을 발하게 된다. 노년의 후기에는 무르익은 예술인생과 함께 그 사상이 더욱 훨훨 불타오르게 된다. 사상의 총체(總體)는 이미 압살되고 있었던 내 문화를 지키는 애국운동과 농촌을 재건하려는 잘 살기 운동이며, 만년에는 홍익정신을 실천하려는 운동이었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삼애사상(三愛思想)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실천사상이다. 삼애는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조상을 받드는 하늘과 내(我)가 지탱하는 땅과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이 이 세 가지를 사랑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홍익인간은 한국의 건국이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헌법에 바탕을 둔 교육법의 기본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곧 교육법 제1조에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共榮)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정신이 의재 사상이었다. 호남화단을 우뚝 세운 원로(元老)는 그림과 차와 홍익인간의 민족혼(民族魂)에 기치를 들고 황혼을 더욱 붉게 장엄하였다.

의재의 박학다식한 보편적 사고는 평소에도 늘 삼애와 홍익사상 속에서 세상의 전변 무상한 모든 것을 성찰하여 실천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입지에 반대하는 기독교의 항의에도 그의 의지는 그 무엇도 민족혼을 넘어 설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 진리는 어느 쪽에도 불편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므로 일방(一方)만을 주장하는 것은 바른 사관(思觀)일 수 없다. 이러한 의재사상을 기초하게 된 것은 그가 예술인생을 살면서 쌓아온 지식이라는 자원으로부터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술에 있어서도 근대화과정을 극복하며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전환의 창작영역에서 단계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청년기에 소실취운(小室翠雲)에게서 받은 수업이, 내적인 문화와 작가적 개성은 다르지만 같은 남화계통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잘 부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는 한학으로 무장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인 즉, 지식인으로서 서법(書法)까지 갖추었다는 것은 의재만이 할 수 있는 특단의 조건을 지닌 셈이었다. 이러한 터전위에서 입신과 아울러 장년기에는 더욱 넘치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재도약을 꿈꾸던 의재는 민족혼에 대한 우리다운 화풍을 천합옥당(川合玉堂)으로부터 각성하게 되면서, 조선서화를 추사정신(秋史精神)의 결정으로 보았으며, 그 맥을 잇는 소치(小痴)를 생각했던 것으로 비춰진다. 그러므로 문인화 곧, 남종화의 새로운 한국정신을 추사로부터 소치로 잇는 계맥을 자신이 잇기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로부터 의재는 중년기의 산인(散人)시절을 거치면서 자신이 세운목표에 접근하는 완숙기를 맞았으며 비로소 모든 사상이 응축되어 분출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그 실천과 더불어 노년기의 도인(道人)시대를 열면서 그의 자품세계는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는 여생을 한결같이 홍익사상의 민족혼을 불태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술인생에 대한 성가(成家)의 여정은 참으로 길고 험난하였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고희(古稀)를 넘기면서부터는 그야말로 문인화의 고격인 소동파(蘇東坡)의 저술에서 “이루기 어려운 것은 교(巧)가 아니라 졸(拙)이다.” 라는 역설적 관념에 대한 응용(應用)의 그것으로부터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동양의 문인사상이 지닌 회화미학은 지식이라는 자원을 통해서 얻어낸 특단의 문화현상이 아닐 수 없다.

동양이외의 다른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문(詩文)과 서예(書藝)를 포괄하여 화격을 부여한 그림으로서의 격법(格法)을 갖추기까지는 지식(知識)의 자원과 더불어 고양한 인격의 극치이다. 의재의 공헌은 동양회화의 지류인 한국회화문화의 정통남화에 대한 한 축을 이어왔다는 미술사적인 평가를 넘어 남도화의 현대를 잇는 조종(祖宗)이었다. 그가 어렵게 이어낸 독특한 한국의 문인화 양식은 그대로 이어져 화격을 중요시하는 근현대를 대표하는 회화로서 현재도 성장을 멈추지 않고 전국에 분포하여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 전통의 농본사회를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정신문화의 예술이념은 물론 자연과의 동화를 이끄는 부동의 미학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보화사회를 살고 있는 작금에 와서는 물질주의의 편리성에 동화되어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의 흐름은 일방적으로 서구주의에 젖어있는 혼돈의 시대에 직면해 있다. 더욱이 영상문화에 길들여지거나 서양미술만을 친숙하게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미적기준에 맞추어 가치관이 전도되고 있다. 결국 상반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 시대적인 새로운 미학의 이상이 요구되는 불가피한 시기에 선생의 30주기를 맞아 삶과 예술을 다시 돌아보는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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