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39. 모택동 (毛澤東, Mao Zedong, 1893-1976)의 모순론 (矛盾論, On Contradiction) 1937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1.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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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NaEdPN-9wo

39. 모택동 (毛澤東, Mao Zedong, 1893-1976)의 모순론 (矛盾論, On Contradiction)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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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론(矛盾論)’은 모택동이 1937년에 쓴 저작으로, 실천론과 함께 모택동 사상이 될 정치적 정책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1937년 8월, 모택동이 옌안의 게릴라 기지에 있을 때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해석하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모택동은 존재를 끊임없는 변형과 모순으로 구성한다고 설명합니다. 형이상학에서와 같이 일정한 것은 없으며 상반되는 모순에 기초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순의 개념을 사용하여 다양한 중국의 역사적 시대와 사회적 사건을 설명했고 중국대륙을 장악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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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毛澤東)의 생애 – Life of Mao Ze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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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마오쩌둥, 毛澤東, Máo Zédōng, 1893 ~ 1976)은 1893년 12월 26일 청나라시절 호남성 샹탄의 고지식한 농부 모이창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모택동의 친구이자 혁명동지인 지운 김철수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모택동은 5살때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으며 7살에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읽었을 정도로 독서를 생활화했다고 합니다. 모택동은 8세부터 저자거리에서 배추장사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책을 눈에서 놓아본적이 없었습니다. 이미 그때 손자병법을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달달 외웠다고 합니다. 이후, 장사의 주성 중학에 입학하였고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혁명군에 잠시 가담했다가 후난성 공립 고등 중학교를 거쳐 후난 제1사범 학교를 졸업한 후, 25살때인 1918년 스승이자 후에 장인이 된 양창지 교수를 따라 베이징대학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습니다. 이때 모택동은 정식 학생이 아니었지만 베이징대학 철학과 수업에 들어와 계속 청강을 했습니다. 무정부주의 아나키스트 사상을 접하고 많은 독서와 토론, 강연 등을 통해 사상적 기초를 닦았습니다. 마오이즘 이론에 아나키즘 이론의 흔적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와 김철수가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코민테른의 국제형제지도당으로 중국공산당과 일본효민공산당 창당을 지도할때 모택동은 베이징대 교수출신 진독수를 따라 중국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며 동갑인 지운 김철수에게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조직이론을 배워 익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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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고향인 후난성으로 돌아온 후, 동생 마오쩌민과 마오쩌탄 등을 공산당에 입당시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고 후난독군 푸량쭤, 장징야오 등이 후난성의 민의를 가혹하게 탄압하며 독재를 펼치자 이들을 몰아내는 후난성의 반장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이동휘가 민족주의계열 상해조선임시정부와 합작한것을 본으로 삼아 결정한 중국공산당 대회의 결의로 1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자 1924년 1월에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37호라는 이름으로 참석하여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중국국민당 우파들을 몰아내고 국공합작이 결성됨에 따라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였습니다. 이후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후난성의 향촌 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모택동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전부장 대리, 농업부장 등을 맡는 등 꽤 잘나갔으며 이 때문에 국민당우파인 서산회의파에서 모택동을 저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력을 거치면서 대표적인 농업전문가가 되었으며 펑파이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도 유별나게 농촌혁명을 강조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925년 손문(쑨원)이 사망한 후 중국국민당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세력(당내 좌파)과 후한민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가 대립하게 되었는데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계기로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이 숙청되면서 왕징웨이를 비롯한 당내 좌파가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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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북벌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반발한 장개석(장제스)의 중산함 사건에 밀려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의 새로운 실력자가 된 장개석은 1926년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거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북벌 과정에서 장개석과 중국국민당 좌파 및 중국공산당의 관계는 반제문제에 대한 방법론 차이, 당권파의 영향력 강화 시도 등으로 인해서 급격히 악화되었고 천도논쟁과 영왕운동이라는 형태로 번졌습니다. 여기에 과격한 농촌혁명주의자들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중국국민당 장교들의 가족들까지 돌리며 주4일제와 상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최저임금제를 강요하는 등 사회적 소요가 심각해지자 중도파 내부에서도 중국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급격히 증가하게 됩니다. 결국 이 충돌은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이어졌고 국공결렬이 일어나면서 공산당은 국민당과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 공산당은 보복을 위해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실패했습니다. 이에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천두슈는 실각했고 취추바이가 총서기에 올랐습니다. 이때 취추바이의 눈에 띈 모택동도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취추바이 역시 폭동과 봉기를 통한 혁명전략을 지휘했고 9월 9일 모택동도 고향인 후난성에서 추수폭동을 일으켜 장사의 점령을 시도했으나 국민혁명군에게 완패하고 모택동도 사로잡혔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했고, 이후 패잔병을 규합하여 후난성 남방에 있는 장시성으로 도피, 징강산(정강산)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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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자신들을 중국 공농 홍군(홍군)이라고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비슷하게 쫓겨온 주더가 이에 합류해 세력을 확장합니다. 중국공산당은 해풍 폭동, 광저우 폭동 등을 전개하면서 총폭동 노선을 지시했으나 모두 국민정부에게 참혹하게 진압당했으며 장타이레이, 펑파이 등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전체 당원의 80%가 처형당하는 등 세력이 급감하였습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한동안 세력을 확장한다는 노선을 추구했으나 중원대전과 대공황에 고무된 코민테른의 지시로 리리싼이 다시 총폭동 노선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1930년 창사 폭동을 일으켰고 모택동도 참여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이후 아내인 양카이후이는 창사 폭동의 직접적 피해를 입은 후난성 정부주석 허젠의 지시로 체포되었고, 모택동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면서 아들 마오안잉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습니다. 한편 모택동은 중앙의 무모한 폭동 노선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징강산, 이후에는 장시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가장 유력한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당시 주창한 16자 전법은 굉장히 유명하며 유격전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는 현대에도 비즈니스 모델로 주창되기도 합니다. 장시성에서 모택동의 해방구는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으며 이에 고무되어 장궈타오의 악예환 소비에트 등이 중국 곳곳에서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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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부는 수차례 이를 토벌하려고 초공작전을 발동하였으나 공산군을 그저 비적 떼로 얕잡아보고 무능한 지방군만을 투입하였으며 1차 양광사변, 만주사변, 열하사변의 잇다른 발생으로 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습니다. 모택동은 토벌군에 맞서 게릴라 전술, 매복 전술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군사전문가 주더와 함께 토벌을 수차례 분쇄하였고 승리에 힘입어 많은 무기를 노획, 세력을 더욱 크게 확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고무된 모택동은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건설을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주석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시기 모택동은 부전사변을 발동하여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훗날 연안정풍과 문화대혁명의 전조로 보이는 매우 잔혹한 숙청을 벌였으며 강서 소비에트의 철권통치자로 군림하였습니다. 하지만 상하이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임시 당중앙의 국민정부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장시성으로 퇴각하면서 모택동은 지나친 유혈사태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영도권을 당중앙에 내주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모택동은 이른바 '모택동주의'를 창시한 사상가로도 족적을 남겼으며 시인이나 서예가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초기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중앙 제7차 전국대 표대회 이후로 장개석과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 대항한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중 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1949년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과 1950년 임시 국가수반 을 거쳐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주석으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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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석 재직 중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습니다. 1959년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뒤에는 후임 주석으로 오른 류사오치와 갈등하다가 린뱌오 등을 사주하여 1969년 류샤오치를 실각시켰습니다. 중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인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멀쩡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죽어나가거나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고 각종 서적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문화 유산이 파괴되었으며, 학교 수업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이르렀고 탄압으로 인한 정신병자가 늘어나는 등 사회 전반이 개판이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7할은 공이 있고 3할은 잘못했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택동은 1970년 루산회의 이후 깊어지던 린뱌오와의 갈등이 린뱌오의 자폭으로 끝나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시원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린뱌오가 쿠데타까지 기도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1970년대부터 파킨슨병 혹은 운동 뉴런 장애로 보이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사인방의 기대와는 다르게 후계자 자리를 강청(장칭)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후배였던 화국봉(화궈펑)으로 지명했습니다. 이처럼, 대장정 이후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이후에는 중국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서 현재의 중국에 대한 기초를 닦아 놓고, 1976년 9월 9일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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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毛澤東)의 사상 – Thought of Mao Ze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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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사상은 모순론과 실천론을 근간으로 하고 신민주주의론, 인민민주전정론으로 국정관리사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1990년대 개혁개방정책 확산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인민 내부의 부작용문제를 치유하는 면에서 모택동의 사상을 통해 지혜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모택동 사상은 '중국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사상이 갖는 본질적 성격으로 인해서 모택동 사상은 산업 발전 수준이 낮은 국가 및 신식민지 국가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이기도 합니다. 중국 공산당은 1945년 9월의 제7차 전당대회에서 당규에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념과 중국 혁명의 실천을 통일한 사상, '모택동 사상'을 당의 모든 지침으로 한다."라는 문구를 추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택동 사상'이란 이념으로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면서, 그것을 중국의 실정에 적용시킨 혁명방식을 말합니다. 모택동은 1910년대에 이어진 중국 혁명의 흐름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중국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혁명 이론을 창안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이 건립되었을 때 그는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동력이 될 수 있는 요소를 탐색하였고, 1925년 '중국의 사회 각 계층 분석'을 기점으로 광범위한 통일 전선의 성격을 갖는 혁명 이론을 구상하였습니다. 군벌시대 당시 중국의 산업화는 유럽에 비해 훨씬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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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은 농촌의 지주제에 기초한 1차 산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소생산에서 벗어난 대량 생산 체계의 산업 라인은 극히 일부의 도시에만 국한된 상태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중국 혁명의 성격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이 실제 중국의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일반적인 경향이 되기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택동은 군중과 인민을 지도할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매우 적은 상황에서 노농동맹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세력을 단결할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모택동은 중국 현실에 맞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당대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교조주의 경향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1942년 옌안 소비에트에서 '당정풍론'를 발표하여 당내 우경투항주의, 극좌모험주의를 배척하는 일대 쇄신 노선을 새로이 밝혔고, 이후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 사상을 투쟁의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탈스탈린화를 추진할 때,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동시에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과 대립한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우경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아시아 및 남아메리카 공산주의 정당이 모택동 사상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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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반식민지 및 신식민지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모택동 사상의 영향력은 확고한 것이 되며 모택동 사상 신봉자는 마오주의자로 일컫게 됩니다. 특히, 아시아 일대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모택동 사상의 영향력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도 여전합니다. 모택동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며, 스탈린의 정식을 정설로 받아들였습니다. 모택동은 세계 사상사와 철학에 능통했기 때문에 여러 번역본 정독과 원어 강독을 통해 레닌주의의 최신 경향을 쉽게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모택동 사상은 중국 현실에 맞는 '신식민지 사회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으며, 1920년대 초부터 1931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에서 정설로 취급되었던 A. M. 데보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매우 다른 인식론 체계를 갖고 있는데, 특히 모순에 관한 이론과 그 모순을 인식하는 방식, 그리고 실천에 관한 이론에서 큰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931년 볼셰비키당은 스탈린을 중심으로 데보린 학파의 변증법적 유물론 해석이 ‘멘셰비키적 관념론’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마르크 미틴(Марк Митин) 일군을 기반으로 “멘셰비키적 관념론에 대항한 투쟁”을 지원하였습니다. 이후 데보린 학파를 사실상 변증법적 유물론의 해석권을 잃었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해석은 데보린 학파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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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사상에서 드러나는 모순, 실천에 관한 이론도 이러한 기조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스탈린이 저술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1938)'은 기존 데보린 학파의 학설을 비판하고 있고, 모순에 대한 입장이 모택동의 이론과 지엽적인 차이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택동 사상의 인식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같은 것이였습니다. 모택동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자 단체와 정당의 행동 반경을 넓힐 수 있게 한 원천 이론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모택동 사상은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등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실망한 서유럽 좌익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1970년대 흑표당을 비롯한 흑인 해방 운동,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저술에도 이론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남아메리카에서 모택동 사상은 종속 이론의 기반 사상이었습니다. 폴 스위지, 안드레 군더 프랑크 등의 서구 제국주의 비판 및 종속 이론의 계량경제학적 분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모택동 사상은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형성하는 데 기반 이론이 되었으며, 가나의 독립운동가인 콰메 은크루마의 신식민지 이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제3세계 이론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모택동 사상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학생 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서 모택동 사상은 지주제 타파를 위한 게릴라 투쟁의 기반 사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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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론 (矛盾論, On Contrad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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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론’은 모택동이 1937년 8월 옌안 항일군사 정치대학에서 한 강연논문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군을 물리친 후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은 다시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적은 안팎으로 있었습니다. 소련에서 교육받고 온 다른 공산당원들과 노선 투쟁도 벌여야 했던 것입니다. ‘모순론’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물의 모순 법칙, 즉 대립물의 통일 법칙은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변증법의 본래 의미는 대상의 본질 자체에 있는 모순을 연구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보편적으로 모순이 내재하고, 그 모순 각각은 개별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특수성을 지닙니다. 이 논문에서 모택동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 개념으로 ‘모순’을 지목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적 기초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세상 만물이 서로 대립하는 힘들의 통일과 투쟁을 통해 생성·발전·소멸한다고 말합니다. 모순이란 이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가리킵니다. 모순은 보편적이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은 국면마다 다르다는 것이 모택동의 관점입니다. ‘모순론’은 특정한 국면에서 도드라지는 모순의 특수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다시 말해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하나의 사물이나 과정에 모순이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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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순이 있을 테고, 그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주요 모순’과 ‘기타 모순’의 구분법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모택동의 말을 직접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따라서 어떤 과정이든지 그 속에 여러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중에 반드시 주요 모순이 있어 지도적·결정적 작용을 하며, 기타 모순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이든지 모순이 두 개 이상 존재하는 복잡한 과정을 연구할 때에는 주요 모순을 찾아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주요 모순을 파악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모택동이 이런 논리를 개발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국공합작을 펼쳤고, 일본군을 쫓아내고 난 후 다시 국민당과 싸우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공산당이 점령한 지역 내에서는 계급 해방을 앞세우지 말고 당면한 주요 모순인 국민당과의 전쟁에 집중하라고, 내부 분파들을 단속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모든 모순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며, “주요 모순과 부차적인 모순 양자를 구별하고, 주요 모순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모택동의 모순론은 이후 거의 모든 모순적 행위의 바탕에 깔린 원리가 됐습니다. 이처럼, 특정한 국면을 주도하는 모순이 바로 주요모순입니다. ‘모순론’이 쓰인 1937년 8월은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략해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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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철학 노트’와 소비에트 연방의 철학 논쟁에 영향을 받은 모택동은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국 사회의 모순 성격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투쟁에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철학 노트’에 따르면, 모순은 세계의 자기 존재 양식에 해당하고, 인류 이성의 발전 단계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소입니다. 레닌은 2천 년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이 관념으로서 변증을 사유했어도, 현실 투쟁에서의 변증을 사유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난점이 극복되는 단초는 임마누엘 칸트를 통해 마련됐지만, 칸트는 회의적인 불가지론에 빠졌고, 철학의 현실 적용을 소극적 의미로서 인간의 윤리도덕 활동 국한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이후 헤겔은 칸트를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인간 이성을 통한 변증에 의해 현실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고, 그에 따른 사회의 형식이 어떠한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논증했습니다. 하지만, 헤겔의 이러한 입장은 현실의 공간이 아닌, 관념의 공간에 머무는 형이상학 논리에 불과했기에 실천 투쟁으로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변증법의 오랜 발전에서 항상 등장한 모순율 개념을 현실 투쟁에 적용하였습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모순은 관념 속의 정형적 논증 구조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자기 존재 양식으로서 현실 세계에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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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이 모순을 계급 의식을 통해 해결하고 사회 발전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변증법의 모순 개념은 형식논리학이 모순율로써 금지하는 논리적 모순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지점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외적 세계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은, 혹은 논리의 발전은 일정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에 대해 형식논리학은 ‘A가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닐 수는 없다’는 모순율로써 그러한 논리가 잘못된 것임을 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대상에 존재하는 내적 모순의 운동은 불가피하게 논리적 모순을 야기합니다. 헤겔은 모순개념에 대해 “사변적 사유의 본성은 오로지 대립된 계기들을 그것들의 통일에서 파악하는 데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변적 사유 즉, 변증법은 대립된 계기들의 통일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헤겔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헤겔은 모순 개념을 대립의 통일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형식논리학에서는 성립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식논리적 모순 개념을 넘어서고자 한 헤겔은 대립의 통일, 대립의 일치와 동일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은 칸트를 결정적으로 넘어섰습니다. 헤겔은 대립이 상호 배척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호 의존한다는 것, 심지어 상호 전화한다는 인식을 하였고 그 결과 대립들은 대립하는 동시에 통일되어 있다는 인식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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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러한 대립의 통일은 단순한 통일이 아니라 심지어 동일성으로까지 나아가는 대립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립을 내포하고 있는 일정한 대상은 자기 운동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헤겔은 운동의 원천으로서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모순 개념에 대하여 레닌은 모순 개념이 변증법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변증법의 전체적인 논리적 체계에서, 변증법의 개념과 범주들에서 모순 개념이 핵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변증법의 주요 법칙인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는 그 원천으로 모순의 운동을 전체로 하는 것이며 부정의 부정 법칙은 그러한 모순의 운동이 갖게 되는 일정한 경향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순이 자기 운동의 원리라는 것은 모든 대상에, 심지어 인간의 사고에도 모순이 존재하며 그 때문에 운동이 발생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운동은 현존하는 모순 자체이다라는 명제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간단한 역학적 운동은 화살이 일정한 시점에 그 지점에 있으면서(불연속성) 동시에 그 지점에 있지 않기(연속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간단한 역학적 운동조차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는 대립물의 통일로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미시적인 원자 내부를 보면 원자핵과 전자의 운동이라는 대립물의 통일이 원자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원자 내부의 운동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운동 자체는 그것이 모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시에 운동은 그러한 모순의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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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증법적 모순 개념이 사회적 운동에 적용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의 통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운동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개인이 의도하지 않은 어떠한 상황에 부딪혀서 곤란에 직면했을 때도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그 상황에 숨겨져 있는 모순을 파악하는데서 가능합니다. 그러한 모순을 파악하고 그 모순의 운동 속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그러한 모순을 회피하는 것(우편향)도 아니며 그러한 모순을 파괴하는 것(좌편향)도 아닙니다.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그러한 모순의 운동의 필연성을 인식하면서 모순의 발전과정 속에서 그 모순을 지양하는 것입니다. 모순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순이 파괴되면 대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계의 모든 물질은 파괴불가능하며 단지 다른 물질로 전화될 수 있을 뿐입니다 (물질의 불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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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의 운동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전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모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운동입니다. 모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은 한편으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이익의 적대적 대립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주의 사회로의 전화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현실화할 사회주의당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모택동은 모순에 관한 레닌의 기본 입장을 중국 현실에 적용하였고, 그 결과로부터 나오는 문제점, 재논의 지점을 설정했습니다. 모택동은 ‘모순론’에서 “두 가지 세계관, 모순의 보편성, 모순의 특수성, 주요 모순과 모순의 주요 측면, 모순의 여러 측면의 동일성과 투쟁성, 모순에서 적대가 차지하는 위치” 등을 해명하였습니다. 이는 변증법적 모순 개념에 대해 전면적으로 접근한 것인데 모택동의 뛰어난 점은 모순의 보편성만이 아니라 중국혁명의 실제 경험에 근거하여 모순의 특수성을 해명한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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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과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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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스탈린이 시도한 것과 비슷하게 모순을 #적대적모순 (敵對的矛盾, Antagonistic contradiction)#비적대적모순 (非敵對的矛盾)으로 나눈 다음, 적대적 모순은 처음부터 끝의 과정까지 모순의 과정을 관통하며,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즉 본질적 모순에 해당하고, 비적대적 모순은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라고 하였습니다. 모택동의 모순론에 따르면, 적대적 모순의 경우는 계급 전쟁에서 최일선에 해당하는 모순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므로, 서로의 계급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갖가지 양태를 갖고 있는 모순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제국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 남성 권위주의자들과 여성 사이의 투쟁,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및 빈곤노동자 사이의 투쟁으로도 양태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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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이것들이 본질적인 모순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결국 매개 모순의 특수성, 즉, 모순의 진행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정합(整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모순의 진행도가 제각각인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 #자연변증법 (Dialektik der Natur)’에서 논한 자연물 사이에서의 모순을 포함하여 모든 본질적인 모순이 가진 보편적인 것(보편성)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분리가 된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적대적 모순이라는 대립 공간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순은 한 사건이라는 계기를 통해 일거에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인 정합, 과정을 거쳐서 감소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서, 완숙한 공산주의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러한 나아감은 모순에 따른 투쟁의 원리에 기초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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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모순(Principal Contradiction)과 기타 모순(Non-Principal Contrad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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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모순은 투쟁 당면에서 적대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모순, 그리고 그 결과로서 사건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반면, 부차 모순은 주요 모순으로 인해 파생된 여러 부차적인 모순과 그 결과로서 사건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모택동의 ‘모순론’에 의하면 주요 모순은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상황이라고 규정한 상황 외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요소들에 따라 변할 수도 있습니다. 즉, 주요 모순은 모순성의 특수성을 정합성에 따라 인식한 후에 판단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시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혁명의 제2단계'(1917년 4월 ~ 1917년 11월) 시기에도 산업프롤레타리아만이 아닌, 영세농 및 소농, 그리고 소영업자들과의 동맹을 추구한 것을 러시아 사회에서 레닌이 주요 모순과 기타 모순을 유동적으로 적용한 대표적인 예라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평가대로, 레닌은 당시의 주요 모순이 단순히 프롤레타리아와 모든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전면적 대결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 제국주의의 세계 재분할 과정에서 드러나는 약한 고리에 강한 연관을 갖는 사건들에 있다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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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탈린 집권 시기에는 사회주의 대건설이라는 것이 주요 모순으로 되었기에 모든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위한 농업집산화, 그리고 급진적인 국유화 단행이 진행된 것입니다. 모택동은 1937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전까지 중국 사회의 주요 모순은 이른바, 반제반봉건혁명의 주력이라고 불리는 계급·계층과 중국 국민당의 매판관료 사이에서 진행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노선에 따라 그는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농촌의 빈농, 반제애국적 소상공인, 민족 자본 등을 민주주의 혁명 투쟁 노선으로 묶으려고 하였고, 반(反)국민당 투쟁에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이후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주요 모순은 반국민당 투쟁이 아닌, 항일에 있었습니다. 이 노선에 따라 모택동은 중국 국민당과의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했습니다. 반면, 데보린의 정식을 받아들인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양태를 갖고 있는 모든 본질적 문제를 단적인 경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들의 속성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주의적 단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본질적 분쟁인 사건을 비본질적 분쟁으로 취급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습니다. 실제로 모택동의 비판 대상인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은 소부르주아이기에 본질적인 혁명 동력이 없다고 봤으며,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양분적 대립 등을 비본질적 모순으로 보아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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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당시 교조주의 기조가 본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며, 교조주의자들의 입장을 '혁명에서의 소극주의 경향'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투쟁 관계를 단순히 무산자-임금노동자와 유산자-사업가의 싸움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의 본질은 사실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라는 간극보다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력과, 반동으로 나가는 세력 사이의 간극이라고 본 것입니다. 모택동이 혁명의 시기인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농촌에 기반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지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모택동의 모순론의 정식대로라면 반봉건사회 또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격화된 양분의 대립은 계급 투쟁의 성격을 갖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대립은 모순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회주의국가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회주의국가 운영의 핵심은 이러한 모순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달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마오주의자들이 더더욱 현실 문제에 깊숙히 관여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모택동 사상은 제3세계 운동, 여성주의와 흑인해방운동을 포함하여 갖가지 해방운동에 기반 이론을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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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과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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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린 학파는 변증 투쟁에서 계급 의식을 대표하는 것은 혁명적 의식이고, 혁명적 의식은 감각적인 인지와 구별되는 이성(理性)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실천은 혁명적 의식에 기초하지만, 그 자체로는 현상계 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기에 완전한 이성과는 구분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실천은 혁명적 의식에로의 접근에 근거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부단한 노력과 오류가 항상 뒤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계급 의식과, 그 계급 의식을 표상하는 계급 투쟁은 다른 층위를 점하고 있으며, 계급 투쟁은 계급 의식의 현상적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보린은 계급 투쟁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계급 의식이 필요한데, 계급 의식은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혁명 사상에 의한 외부의 주입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는 점입니다. 한편, 러시아 혁명 시기 레닌은 ‘철학 노트’를 통해 데보린의 학설을 받아들여서 계급 의식의 외부 주입설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모택동은 실천을 통한 감각적 인식, 계급 의식을 갖는 것으로 대표되는 이성적 인식은 일체(一體)이며, 계급 투쟁에서 드러나는 실천에 참여하고 고민하는 것을 통해, 다시 그것이 계급 의식으로 화하여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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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에게 실천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 투쟁이 아닌 사고와 사고 사이의 전쟁도 포함합니다. 모택동은 혁명가가 군중 속에 들어가서 군중의 삶을 직접 겪으며, 군중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게릴라 이론 저서인 ‘ #지구전론 ( #持久戰論 )’에서도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입장입니다. 군중 속에 들어가는 주체는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 공산당과 같은 혁명적 당도 포함됩니다. 혁명적 당의 최고 적은 군중과 괴리되는 것이며, 이러한 군중과의 괴리, 즉, 관료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당이 군중에 의거해야 하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군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택동의 실천론은 주요 모순과, 그렇지 않은 기타 모순을 유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군중 속에 들어가는 실천은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가 어떠한 향방으로 흘러가는지, 그리고 투쟁에서 어떠한 모순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등,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파악해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군중 속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안다고 자부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란 게 모택동 실천론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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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의 논리에 따라 혁명가는 자신이 혁명을 목표로 하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깊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지식을 혁명가가 습득하지 못 한 상태라면 모순의 원리에 따라 시시각각 유동적으로 변하는 주요 모순을 빠르게 파악할 수 없으며, 이는 혁명 투쟁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남발하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혁명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이며, 그러한 실천을 할 수 있게 하는 혁명가의 의지(意志)입니다. 모택동 사상의 관점은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관점으로,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를 적절히 배합하는 작업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변증투쟁 내 발생하는 의식 일반으로부터 도출되는 의지에 대한 긍정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부터 견지되는 입장이나, 모택동은 그러한 의지를 상당히 강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계속혁명론 ( #繼續革命論 )입니다. 당이 관료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도달까지 끝이 없는 정치투쟁을 내부로부터 감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혁명적 군중에 의한 대규모 켐페인 등과 같은 정치운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역사적 사건으로는 문화대혁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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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론(矛盾論)의 흔적 – Traces of the On Contrad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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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이런 상황에서는 제국주의와 반식민지 중국사이의 모순이 주요모순이 되고, 반식민지 내부의 계급모순은 이차적·종속적 지위로 물러선다고 말합니다. ‘모순론’을 통해 국공합작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는 이상, ‘모순론’은 당 이념의 뿌리에 놓여 있고 ‘주요모순’ 개념도 여전히 유력하게 통용됩니다. 19차 당대회에서도 #주요모순 은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인민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와 불균형·불충분한 발전 사이의 모순’이 지금 시기 중국 사회의 주요모순으로 규정돼 당헌에 들어간 것입니다. ‘선진공업국에 대한 요구와 낙후한 농업국가 현실 사이의 모순’이라는 1956년 주요모순 규정과 ‘인민의 물질문화 수요와 낙후한 사회생산 사이의 갈등’이라는 1981년 주요모순 규정을 나란히 놓고 보면, 중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시진핑 의 집권이 끝난 뒤에는 어떤 모순이 주요한 것으로 떠오를까요? 모순론이 중국혁명의 사상적 분석을 통해 혁명의 길을 밝혀낸 모택동의 최대 공헌입니다. 철학의 일반적 의식을 뛰어넘어 새롭게 철학의 범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철학이 사회정치적 영역까지 확장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국내외로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은 반공 반일주의를 무기 삼아 야당과 시민사회를 탄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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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와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은 반공주의를 대한민국의 주요 모순으로 설정하고는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 경제적 평등 따위는 기타 모순으로 취급하거나 그런 요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택동#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쫓아내더니 ‘내부의 모순’을 찾겠다며 눈을 번뜩거렸습니다.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한반도 인구에 해당하는 8,000여만 명이 정치투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모순론이 내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택동은 모순의 해결 방법 중 하나로 폭력을 제시하고 “적대는 대립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라고 돌려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택동의 어록을 뒷주머니에 꽂은 홍위병들이 죽창을 들고 설친 이유입니다. ‘무엇이 주요 모순이고 무엇이 기타 모순인가’라는 판단의 원리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철학서적으로 보기에는 부족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모순이 주요 모순이고, 당신들이 주장하는 의제는 기타 모순이니, 토 달지 말고 나를 따르라”며 패권에 도전하는 정적들을 잠재우며 평생 권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모택동의 모순론은 현재도 유효한 정치기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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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론 ( #矛盾論 , #OnContradiction )’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택동 ( #毛澤東 , #MaoZedong )은 모순론을 통해 기타 모순은 잠시 미뤄두고 주요 모순에 집중해야 한다며 내부의 이견을 묵살하려는 인류의 모든 독재자가 악용하는 논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9번째 책 인문학 부문 9번째 책 “모택동 (毛澤東, Mao Zedong)가 1937년에 출간한 모순론 (矛盾論, On Contradiction)”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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