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43.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 1947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3. 10.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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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Lqj_1nXYJI

43.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의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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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이지만 아도르노를 이해해야만하는 책입니다. 아도르노는 보수적 인간유형을 이해한 캘리포니아 F지표를 주창했습니다. 독일이 나치에 부역한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부인(denial) 상태에 놓여있음을 고발했습니다. 하이데거처럼 나치 당원이었고 나치의 정신적 수호자로서 자신이 했던 연설들을 공식적으로 번도 철회하지 않았던, 나치에 동조했던 자들이 패전후에도 마치 나치가 없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고, 그들은 히틀러와 나치 비밀결사단의 권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는 듯이 나치의 지도자들에게 죄를 돌렸음을 고발했습니다. 마치 전두환에 협력하고 협조했던 자신들의 죄의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한국국민들처럼 말이지요.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20세기의 야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이성과 지배의 상호연관을 설명하는 하나의 전형을 제시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다음의 가지 주장으로 요약될 있습니다. 첫째, ‘계몽의 변증법’, 20세기의 야만은 계몽의 필연적인 변증법적 자기 파괴의 결과입니다. 둘째, 총체적 이성 비판, 이성은 필연적으로 억압적 지배와 결합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합니다. 셋째, 아나키즘, 지배는 억압이며 정당한 권력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생애와 그들의 공저계몽의 변증법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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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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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 2 14 - 1973 7 7) 1895 2 14일에 슈투트가르트의 보수적이고 부유한 유대계 가정에서 아버지 모리츠와 어머니 바베트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슈투트가르트의 주펜하우젠 구역에서 여러 개의 섬유공장을 소유한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부모의 강요에 의해 호르크하이머는 1910 16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기업의 경영 후계자 수업차 부모의 공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기간 동안 부친이 싫어했음에도 8 연상으로 이방인이자 하층민인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그가 마이돈(Maidon)이라 불렀던 로즈 리커(Rose Riekher) 만났습니다. 그와 마이돈은 1926년에 결혼하여 1969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그는 부친의 바람과는 다르게 사업에 뜻이 없었습니다. 1914 이후부터 그는 쇼펜하우어에 감명받아 철학공부를 결심합니다. 1917년에 그의 제조업 경력은 끝났고 그의 가업을 이어받을 기회는 그가 1 세계 대전에 징집되면서 중단되었습니다. 1919 , 군대 신체검사에 실패한 Horkheimer 뮌헨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뮌헨에 살던 혁명극작가 에른스트 톨러로 오인되어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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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되고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 마인 으로 이사하여 존경받는 한스 코르넬리우스 밑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 했습니다. 학기 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편입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는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신칸트주의 철학자 한스 코르넬리우스와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행하던 신칸트주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점점 거리를 두게 되고, 코르넬리우스(Cornelius) 추천으로 프라이부르크에서 에드문트 후설을 1년간 열정적으로 연구했습니다. 1 세계 대전 후에 뮌헨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25 한스 코넬리우스의 지도 아래 이마누엘 칸트에 관한 논문목적론적 판단의 이률배반에 관하여 철학박사학위와칸트의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사이의 연결고리로서의 판단력 비판이란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고 이듬해1926 그는 코르넬리우스 밑에서 무급조교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 했고, 로즈 리커(Rose Riekher) 결혼을 했습니다. 1930 7월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철학 교수로 임용되어 10월에 펠릭스 바일(Felix Weil) 마르크스주의 스터디 그룹에서 시작한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조사연구소의 창설에 참가하여 1931 1 24 소장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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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도르노, 프롬, 벤야민, 마르쿠제 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를 이끌어갔습니다. 그동안 나치당은 독일 의회에서 번째로 정당이 되었습니다. 나치의 부상을 둘러싼 폭력의 와중에 그와 그의 동료들은 연구소를 독일 밖으로 이전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1933년에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어 연구소를 폐쇄하고 건물은 게슈타포에게 압수당한체 그는 교수직과 이사직에서 해임되고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1934 미국 뉴욕으로 망명하였습니다. 1934 7 사회조사연구소를 컬럼비아 대학으로 이전하여 1940 미국 시민권을 받고 1941 로스앤젤레스의 퍼시픽 팰리세이드 지역으로 이주하기까지 뉴욕에 살았습니다. 1942 호르크하이머는 미국 유대인 위원회 과학 분과의 이사직을 맡았습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연구에 몰두하여 1947 공저계몽의 변증법 발표하여 철학계의 인정을 받았으며, 2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물러난 1948 4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객원 교수로 강의하다 1949 7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로 복귀하고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하여 소장으로 재취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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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 프랑크푸르트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총장직을 수행하였고, 이후 미국을 드나들면서 미국 의회의 외국인 자문위원으로 위촉돼기도 했습니다. 이때 시카고 대학의 객원교수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53년에 그는 프랑크푸르트 시로부터 괴테 상패를 받았습니다. 1955,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연구소 소장 자리를 테오도어 아도르노에게 물려주고, 1958년에는 은퇴해서 스위스 몬타뇰라의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잡았습니다. 스위스로 떠나는 그에게 프랑크푸르트시는 명예시민권을 수여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가끔 대학에서 계속 가르쳤습니다. 1960년대 후반, 호르크하이머는 인공 피임, 특히 피임약에 반대하는 교황 바오로 6 대해 그것이 낭만적인 사랑을 종식시킬 것이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1973 7 7 78세의 나이로 뉘른베르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고 나가면서 아도르노, 마르쿠제, 벤야민, 로웬탈, 키르히하이머, 폴록, 노이만 등과 함께 비판 이론을 발전시켰고 그가 탄생시킨 비판 이론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회 이론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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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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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비판이론의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독일의 사회학자, 철학자,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그리고 작곡가였던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1903 9 11 - 1969 8 6) 1903 9 11일에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개신교 개종한 그의 아버지 오스카 알렉산더 비젠그룬트는 포도주를 취급하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코르시카 출신의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마리아 칼벨리-아도르노는 오페라 가수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아버지의 성을 보완하여 자신의 성인 아도르노를 추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초기 출판물에는 테오도어 비젠그룬트-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Adorno)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미국 시민권 신청 , 그의 이름은 Theodor W. Adorno 수정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 번째 어머니'라고 불렀던 피아니스트 이모 아가테(Agate)에게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아 음악과 예술을 접했는데, 열두 살이 되었을 피아노로 베토벤 작품을 연주할 정도의 신동이었습니다. 음악은 아도르노의 인격에 있어서 근원적인 뿌리가 되었습니다. 6세에 도이치헤렌 중학교에 진학한 카이저-빌헬름 김나지움으로 편입하여 1913년부터 1921년까지 공부했습니다. 수석으로 졸업하기 전에 아도르노는 이미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아도르노의 지적 비순응주의는 그가 1 세계 대전 동안 제국을 휩쓸었던 민족주의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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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동급생에게 응석받이로 보이던 소년 아도르노는 비교적 일찍 철학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도르노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 교육자적 자질이 대단했던 크라카우어를 만나 칸트를 배웠습니다. 크라카우어는 아도르노에게 '철학책을 읽는 ' 가르쳐 주었습니다. 철학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대부분 음악을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운 그는 명이 함께 치는 피아노 연탄곡을 특히 즐겼습니다. 그는 음악 분야에 광범위한 친분을 쌓고 있어서 하이든, 브람스, 슈베르트는 물론 말러의 곡까지도 함께 연주할 파트너를 언제든지 구할 있었습니다. 1921 프랑크푸르트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교에 입학했을 아도르노는 아직 18세가 나이였습니다. 이때 이후 평생 동안 학문의 동료가 되는 호르크하이머를 만났습니다. 대학교에서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음악학 분야의 강의들을 수강하였습니다. 1924 21세의 나이에 비정통 신칸트주의자 한스 코르넬리우스 지도 아래 에드문트 후설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교수자격 논문이 통과될 1931년까지 아도르노는 본격적으로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직업으로서 음악평론가의 길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을 향한 열정이 넘쳤던 아도르노는 1924 여름부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작곡가 알반 베르크 밑에서1 정도 지내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교수자격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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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음악세계와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음악잡지시작(anbruch)’ 음악평론을 쓰면서 편집에도 관여했고, 자신의 곡을 연주무대에 올리기 위해 비엔나와 베를린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호르크하이머가 1930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과 정교수로 임명되는 동시에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을 , 아도르노는 사회조사연구소의 비공식 연구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렵 교수자격 논문도 통과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하려고 했으나 아도르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소속되어야 했던 3제국 문화공무부의 회원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1933 9 11, 30세가 되던 생일날, 나치는 아도르노의 강의허가증 마저 무효화시켰습니다.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아도르노는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을 떠날 때까지 아도르노는 이미 100 이상의 오페라와 콘서트 리뷰 그리고 50개의 작곡 비평을 작성했습니다. 그는 1934년에서 1938년까지 옥스퍼드 머튼 칼리지 박사과정 학생 자격으로 4년간 런던에 머물렀습니다. 이시기 아도르노의 자존심은 최악의 상태였는데, 편의 글을 썼지만 영국의 지식 클럽 어디에서도 강연 초대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이모 아가테가 1935 6월에 사망했고 절친 베르크(Berg)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아도르노는 생이 끝날 때까지 베르크의 미완성 오페라 룰루를 완성하겠다는 다짐했습니다. 옥스퍼드의 누구도 아도르노를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았고 그저 댄디(멋쟁이)로만 취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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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자, 호르크하이머는 아도르노에게 미국으로 넘어오라고 권유했고, 1937 6 9 아도르노는 이를 받아들여 2주간 뉴욕을 방문했습니다. 유럽으로 돌아온 직후 그레텔 카플러스(Gretel Karplus) 영국으로 이주하여 1937 9 8 아도르노와 결혼했습니다. 1938 216 뉴욕으로 돌아와아도르노가 얻은 직장은 뉴저지 뉴어크의 프린스턴 라디오연구 프로젝트였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록펠러재단이 지원금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는, 새로운 형식의 대중매체가 미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아도르노는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으로 고용되엇지만 실제 업무는 프로그램 제작자에게 어떤 종류의 방송이 시청률을 극대화하는가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런 일에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1941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이런 실증주의적 방식이 음악을 수량화시키고 청취자와 음악 자체의 관계를 오직 경제적 가치로만 결정되게 만든다는 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상업라디오는 청취자에게 라디오가 제공한 상품음악만 선택하게 만들어, 청취자를 저질음악만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든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습니다. 일단 공식이 성공적이면 산업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틀어대고, 결과 청취자는 똑같은 것만 듣고 형식이 대단한 것마냥 치켜세웁니다. 아도르노는플러깅 연구라는 글에서 라디오 음악산업의 성공공식을 "밥그릇에 개밥을 쏟아 붓는 소리가 나면, 그것을 들은 개가 달려오는 것과 같다." 비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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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4 호르크하이머는 심장이 좋지 않아 온화한 기후에서 지내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습니다. 같은 11 아도르노 부부도 호르크하이머를 따라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 서쪽에 위치한 부촌 브렌트우드에 월세를 얻었습니다. 여기에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 도망쳐 망명 독일 지식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1941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 미국은 이민자들을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여 감시하고 제재를 가했습니다. 1943 11월까지 귀화되지 않은 아도르노와 같은 이민자들은 저녁 8시에서 오전 6 사이에 통금이 있었고 집에서 5마일 이상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더하여, 토마스 , 브레히트, 쇤베르크, 프리츠 , 한스 아이슬러 등등 저명한 예술가들이 이웃이었기 때문에, 당시 아도르노는 무명의 철학자에 불과했지만 그들 몇몇과 교류를 있었습니다. 그런 대가들의 예술과는 대조적으로, 바로 할리우드에서는 저질 영화를 일회용 상품처럼 대량생산하고 있었고, 아도르노는 문화마저도 산업화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정형화된 공식과 이미지들을 반복하여 무의미한 웃음을 안겨주는 할리우드 영화는, 여가와 오락를 제공하므로써 환상을 만들고 환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효과적으로 숨겨주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돈으로 파악하고 돈이 권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자본주의 문제점인데, 대중문화는 문제점마저도 마치 가벼운 일인양 웃어 넘기거나 도리어 매혹적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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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돈의 권위에 순응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러한 순응은 분명 권위친화적인 태도를 확산시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아도르노의 생각이었습니다. 1944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아도르노는 파시스트 프로파간다의 성공을 분석했습니다. 그는 분석에서,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캘리포니아의 목사들이 라디오방송에서 설교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습니다. 부류는 자신의 연설을 듣는 청중으로부터 권위를 얻어내기 위해 단계의 수사적 과정을 활용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나약함을 표명하면서 메시지를 듣는 나약한 청중과 동일시합니다. 둘째, 자신이 선택된 소수의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청취자들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면 소수에 동참할 있다고 설득합니다. 결국 성공한 선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평범함을 강조하는 위대한 소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추종자들과 하나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집단적 희망과 덕목을 강요할 있습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히틀러의 천재성은 "킹콩과 이발사를 결합시킨 태도를 보여주었다" 있었습니다. 심포지엄은 아도르노가 1947년에 연구한 '캘리포니아 F지표' 알려져 있는 성격테스트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F지표(Fascist scale)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탐색하기 위해 고안되었는데, 아도르노는 지표를 사용한 연구에서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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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은 또한 호르크하이머와의 공저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 발표한 해이기도 합니다. 1944 5 작은 등사판으로 처음 출판된 텍스트는 철학적 단편(Philosophical Fragments) 으로 3년을 기다린 암스테르담 출판사 쾌리도 밸락(Querido Verlag) 의해 최종 제목인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자연을 지배하고자 발달된 인간의 이성(계몽),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서서 도리어 인간 자신까지도 지배하게 되는 역설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설에 의하면 가치중립적인 과학과 자본주의는 세상을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자연을 '수량화'합니다. 나무를 있는 그대로의 나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땔감 1개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의 합리성이 극한으로 확대됨에 따라, 이런 '수량화' 기어코 인간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는 자체로 존중받아야 인간이 아니라, 단지 '2명의 노동력' 불과한 것이 되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2명의 노동력은 언제든지 대체될 있고 소모될 있는 어떤 것으로 여겨집니다. 인간이 일종의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자연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인간의 이성' 발전시켜 왔으나, 결국 이성에 인간마저도 효과적으로 지배당하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 인간의 자유는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지배가 인간을 향할 , 우리는 ' 이성이 무엇을 희망하고 있었던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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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본래 인간의 자유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있습니다. 나치가 패망한 , 아도르노는 1949 10 ,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로 돌아와달라는 공식 서한을 받고 독일로 귀환했습니다. 나치에 동조했던 자신의 동포들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나치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는 그들이 지난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부인(denial) 상태에 놓여있음을 목도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서류가방에 넣어 들고 왔던 원고였고 1951 극찬을 받으며 출간된 격언집인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는 이렇게 썼습니다. "재난의 자명성이 변명하는 이들에게 자산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상징적인 인물은 하이데거였습니다. 위대한 독일 철학자는 나치 당원이었고 나치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수호자로서 자신이 했던 연설들을 공식적으로 번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전후 독일에서 어떤 역할을 의도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과오를 고통스럽게 마주하기보다는 도피처를 제공했던 침묵과 부인의 문화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1950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에 다시 취임한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아도르노는 연구소의 재건에 힘썼습니다. 새롭게 바뀐 연구소는 당시 독일에 퍼져있던 침묵의 공모를 조사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학적 기획에 착수했습니다. '집단 실험'이라고 알려진 연구는 죄의식과 방어태세를 조사하기 위해, 그룹 20 정도의 사람을 모아서 나치에 대해 토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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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1220개에 달하는 토론을 진행하였으며, 참가자들은 전직 군인, 패션전공학생들, 홈리스와 심지어 SS요원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도르노는 연구에서 참가자들이 나치 전범의 극악무도함을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방어적이 되어가는 경향을 발견했습니다. 일부 답변자들은 유죄를 인정했지만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기연민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나머지 참가자들은 마치 히틀러와 나치 비밀결사단의 권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암시하려는 듯이 나치의 지도자들에게 죄를 돌렸습니다. 집단토론에 참가한 절반 정도가 나치의 범죄에 대한 죄의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연구가 1955 공개되었을 아도르노에 대한 공격이 쏟아졌습니다. 함부르크의 사회심리학자 페터 호프슈타터는 평론에서 아도르노가 국민에게 반성을 강요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 ' 국가' 구성원 대다수가 수년 동안 끝없이 자기비난을 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있을까?" 아도르노는 이를 두고 "교수형 집행인의 집에서는 밧줄이란 말을 언급하면 된다. 만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원한에 사람이라고 의심받게 된다." 말했습니다. 참고로 아도르노의 미국 시민권은 1952 중반에 그가 계속 해외에 머물렀다며 미국 이민국에서 박탈했습니다. 부정변증법은 이제 아도르노의 사유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악의적인 형태' 경험해야 했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당시 베트남 전쟁과 냉전군사주의로 인한 핵전쟁의 위협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상시적으로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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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가 일어났던 초기에는 아도르노도 학생시위대들과 연대를 표명했었습니다. 6월에는 이란의 독재자인 팔라비가 서독을 방문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총을 맞고 사망한 오네조르크를 추모하기 위해 아도르노는 학생들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묵념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격한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개선할 점이 많은 민주주의라고 해도,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된다"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1969 4 22일에는 아도르노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겪습니다. "유방 테러(Busenattentat)" 불리는 사건의 경과는 이렇게 진행됐습니다. 강의 도중 명의 학생이 그에게, 경찰을 부른 것과 크랄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것에 대한 사과와 자아비판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학생이 칠판에 "누가 평생동안 자본주의를 유지하게 만든 이기적인 아도르노만이 지배하도록 놔두는가."라고 썼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고발자를 타도하라!"라고 외쳤습니다. 아도르노는 모두에게 5분의 시간을 테니 강의를 계속할지를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죽 재킷을 입은 명의 여성시위자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서 연단 위의 아도르노를 에워싼 마치 바바리맨처럼 벌거 벗은 가슴을 노출했습니다. 그들 명은 그의 뺨에 립스틱 키스를 시도했고 나머지 둘은 장미와 튤립 꽃잎을 그의 머리 위에 뿌려댔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그녀들에게서 벗어난 아도르노는 곧장 모자와 외투를 집어 들고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 자신의 강의를 모두 취소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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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아도르노는 자신이 목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철학이 '실천없는 이론'이라는슈피겔 지적에는 "철학은 본질적으로 즉각적인 조치나 변화를 제시할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이론은 정확히 변화를 초래합니다. 내가 쓰는 방식(부정변증법)대로 생각하고 쓰는 것도 저항의 형태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쯤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도 진정한 실천의 형태가 아닙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도르노는 사건으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 그레텔은 스위스의 알프스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최근에 겪은 시련을 극복하려던 계획이었습니다. 주치의가 힘든 활동을 피하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는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3 미터로 올라가 스위스의 산악을 등산했습니다. 하이킹 도중에 그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날 늦게 스위스 비스프(Visp)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969 8 6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도르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비판이론의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학자로는 외에도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이 있으며 위르겐 하버마스 2세대 학자이다. 아도르노의 대표 저서로는 미국 망명기간 동안에 호르크하이머와 공동으로 작성한 계몽의 변증법을 비롯하여, 부정 변증법, 미니마 모랄리아, 신음악의철학, 미학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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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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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공동저술한 철학 사회비평서적입니다. 1947년에 암스테르담의 궤리도 벨락(Querido Verlag)에 의해 출판된 책은 저자들이 원래 1944 5 철학적 단편 (Philosophical Fragments)이라는 제목으로 작은 등사판으로 뉴욕의 Social Studies Association, Inc. 통해 만들어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 배포했던 내용의 개정판입니다. 2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인 1947년에 출간된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지 못하고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라는 현대의 근본물음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대답이 야만으로부터의 해방을 내걸었던 계몽의 이념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비판이론의 핵심 텍스트 하나인 계몽의 변증법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계몽시대의 실패로 간주 원인이 사회 심리학적 현상유지를 탐구합니다. 자유주의 국가와 시장 몰락과 함께 사회혁명의 여파로 실현되지 못한 문제들과 파시즘의 부상으로 제기된 문제들은 책의 전반적인 주장을 구성하는 이론적, 역사적 관점을 구성합니다. 인간 사회의 역사와 개별 자아 또는 자아 형성의 역사는 당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로 인식한 사회의 붕괴와 퇴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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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국가 사회주의의 발흥과 함께 역사적 진보나 발전의 결과로 이성이 출현했다고 추정되는 바로 형태의 미신과 신화와 유사한 계몽으로 변했습니다. 계몽과정에서 현대철학이 과도하게 합리화되고 기술주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과정의 절정을 실증주의로 특징짓는데, 비엔나 학파의 논리적 실증주의와 그들이 운동의 연속성에서 경향을 모두 언급합니다. 실증주의에 대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비판은 너무 광범위합니다. 그들은 특히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실증주의자로 해석했는데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검토하지는 못했습니다. 역사적 진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노동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초기 이론에 포함된 철학적 인류학을 포함하여 다양한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저자들은 문화 산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 문화는 표준화된 영화, 라디오 프로그램, 잡지 등 문화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과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균질화된 문화 상품은 대중 사회를 온순함과 수동적으로 만듭니다. 매스 미디어의 도입은 이상 독자에게 어떤 응답 메커니즘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일방적인 객체일 뿐입니다. 이책은 1969 S. Fischer Verlag 의해 재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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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본으로는 1972년 뉴욕의 Herder and Herder출판사를 통해 John Cumming이 출간한 것과 2002년 에드먼드 제프콧(Edmund Jephcott)이 호르크하이머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번역하여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를 통해 출간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나치즘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상징되 20세기의 야만은 계몽이 약속하는 인류의 지속적인 진보 하에 타난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이 아니라 계몽 자체의 변증법적 자기 파괴의 결과물입니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자기 파괴는 이성이 갖는 자기 파괴적 경향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성은 인간의 자기 보존의 충동에 의해 자연 지배를 위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면서 맹목적인 지배의 원리가 되었으며, 자연 지배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배로 확장되면서 자기 보존이라는 본래의 목적과 반대되는 자기 파괴의 원리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란 도구적 이성과 결합한 억압적 지배가 자연지배에서 인간지배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의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로 전개 되는 과정입니다. 아도르노의 이러한 주장들은 20세기의 야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이성과 지배의 상호 연관을 설명하는 하나의 전형을 제시한 것입니다. ‘계몽의 변증법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첫째, 계몽의 변증법- 20세기의 야만은 계몽의 필연 적인 변증법적 자기 파괴의 결과입니다. 둘째, 총체적 이성 비판-이성은 필연적으로 억압적 지배와 결합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합니다. 셋째, 아나키즘-지배는 억압이며 정당한 권력이란 가능하지 않습니다.” 3가지로 요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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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번째 장인계몽의 개념진보적 사유라는 포괄적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시작합니다. 이러한 역설을 가능하게 하는 계몽의 기획은 지식을 통해 신화를 해체함으로써 세계를脫주술화’(Entzauberung)하는 것입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계몽의 개념을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탁월함(sovereignty) 의심할 여지없이 지식에 있는 것이다. 지식은 많은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말로만 자연을 지배할 자연의 강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의 인도를 받아 발명에 전념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자연에게 명령내릴(command) 있을지 모른다.” 여기에는 계몽이 추구하는 지식이권력’(Macht) 동일한 것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완전한 지배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계몽의 원리는 지배인 것입니다.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해 계몽은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따라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을반복 가능한 으로 변형시키며, 이성은 과정에서 계산적이고 도구적인 이성으로 전락합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대의 실증주의는 도구적 이성의 최종적 형태로서 계몽이 자기 파괴를 통해 신화로 회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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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제물이 되어버린 신화 자체도 이미 계몽의 산물입니다. 신화가 죽은 것을 것과 동일시하는 애니미즘으로써 지배를 추구한다면 계몽은 것을 죽은 것과 동일 시하는 동일성 사유로써 지배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개념을 인류의 태고사(太古史)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역사철학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계몽이 도구적 이성과 산물로서의 지식권력을 매개로 하는 지배의 원리임을 밝혀냈습니다. ‘지배 정당성이 없는 폭압적 권력이기 때문에 계몽은 억압의 원리입니다. 사회 속에서의 자유와 분리될 없는 원리로서의 계몽이 20세기의 야만으로 발현되는퇴보의 함유 하고 있습니다. 아도르노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해방의 원리로서의 계몽이 억압의 원리로 변질된다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 이성과 억압적 지배가 결합된 자기보존의 원리로서의 계몽이 자기 파괴적인 원리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아도르노는 계몽을 도구적 이성과 억압적 지배의 결합으로 정식화합니다. 아도르노는계몽이 염두에 두고 있는 체계란 인식의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인식은 사실들을 능숙하게 요리하며 자연을 지배하는 있어서 주체 가장 효과적으로 지지해준다. 원리는 자기 보존의 원리다. 미성숙이란 생존능력을 결하고 있음을 말한다. 노예소유자, 자유기업가, 관료로 탈바꿈해나가는 시민은 계몽의 논리적 주체다라며 계몽이 자기 보존의 원리임을 강조 하면서미성숙이라는 말로 칸트를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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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억압적 계몽 개념은 도구적 이성과 억압적 지배의 결합으로 온전히 환원될 있으며, ‘계몽 억압적 지배와의 결합을 함축하고 있는도구적 이성이기도 합니다. 도구적 이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의 논리 구조를 분석해보면 개념이 20세기의 야만과 계몽을 인과관계로 연결시켜주는 매개항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있습니다. 도구적 이성은 자기 보존의 충동에 의해 억압적 지배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나치즘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20세기의 야만이 결과물로 제시됩니다. “계몽이 신화로 퇴보하게 원인은 이러한 퇴보를 위해 고안된 국가주의적 신화, 야만적 신화 혹은 외의 현대적 신화들에서 찾을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직된 계몽 자체에서 찾을 있다.” “파시즘과 2 세계대전은 합리적 이성이 가져온 악마적 결과다.”라며 아도르노는 파시즘이 역사적으로 우연적 산물이 아니라 계몽의 자기 파괴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파시즘은 역사적으로 성공한 국가가 아닌 허약하거나 실패한 자유주의 국가, 혹은 지체되거나 망가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흔히들 파시즘은 자유주의의 위기로부터 생겨났다고 단언하는데, 허약하거나 실패한 자유주의의 위기라고 수정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민주주의, 시민권, 법치는 프랑스와 영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국가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표시였지만 대다수 독일인들에게는 외국에서 수입된 생소한 개념이었다.” 20세기의 야만이 계몽의 필연적인 변증법적 자기 파괴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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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은 자기 보존의 충동에 기초하고 있으며, 충동이 이성을 억압적 지배와 결합해 있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시킵니다.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에서 이성의 세계인 인지적 이성, 도덕적-실천적 이성, 미학적 이성이 모두 계몽의 자기 파괴에 의해 해방적 계기를 상실하고 억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합니다. ‘계몽의 개념 인지적 이성이 자연과 인간의 완전한 지배를 목적으로 삼는 권력의 수단으로서의 지식의 형태로 발현됐습니다. ‘줄리엣 혹은 계몽의 도덕 도덕적-실천적 이성이 계몽의 자기 파괴에 의해 해체되면서 칸트의 도덕적인 엄격성과 니체-사드의 절대적인 무도덕성의 대립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사라집니다. 대중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 계몽은 대중문화의 분석을 통해 오락과 합병된 예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비판적-해방적 동력을 상실했다고 폭로했습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희망은 오직주체 속에 있는 자연의 상기(Eingedenken)”라는 이차적인 반성에 있을 뿐입니다.  사유, 자신의 강압 메커니즘 속에 자연을 반영하고 되풀이하는 사유는 자신의 철두철미함 덕분으로 스스로가 또한 강압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잊혀진 자연임을 드러낸다. 스스로가 지배임을 고백하고 자연 속으로 퇴각하는 결단을 통해 정신은 자신을 바로 자연의 노예로 만드는 지배에의 요구를 분쇄할 있다.” 아도르노는 이처럼 이성의 해방적 잠재력 자체를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제를 전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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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성은 필연적으로 억압적 지배와 결합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합니다. 따라서 이성은 지배의 원리이며 이성의 사유와 구성요소로서의 개념은 지배를 반영합니다. “담론 적인 논리가 만들어내는 사유의 보편성, 개념영역에 있어서의 지배는 실제적인 지배의 토대위에 세워지는 것이다둘째,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이성은 목적에 대해서는 맹목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규범성이나 정당성도 제공할 없습니다. “이성은 계산과 계획의 기관이며 목표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다. 이성의 요소는 조종이다. 이성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되었으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모든 목적 속에서 팽팽한 긴장을 일으킨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순전히 계획을 위해 고안된 계획이다이러한 가지 논제를 전개함으로써 아도르노는 칸트를 거부하고부르주아 계급의 어두운 사상가 니체, 사드와 결합하게 됩니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이성에 기초한 도덕론을 전개하려는 칸트의 노력은 성과 억압적 지배 사이의 밀착관계를 은폐하려는 부질없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니체와 사드가 이성을파괴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배의 동일성을폭로했기에 아도르노는 이들과 동일한 사실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성에 기초하여 규범성 혹은 정당성에 대해 논의하는 행위는 자체로 권력의지의 발현이자 기만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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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현실에 내재하는 객관적 이성의 원칙이거나, 정신의 주관적 이성능력입니다. 객관적 이성 개념은 수단보다는 목적을 많이 강조했으며이성적인 객관적 질서를 자기보존의 충동과 이해관심을 갖는 인간적 현존재와 화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계몽은 종교적-형이상학적 세계관과 함께 객관적 이성 개념 자체를 해체했으며, 이에 따라 이성은 정신의 주관적 능력으로서 목적 자체의 합리성에 대해서는 맹목적이면서 단순히 주어진 목적에 대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발견하는 도구로 전락하였습니다. 정신의 주관적 능력인 이성에는 자기 보존과 지배의 충동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이성이 해체된 지금 도구적 이성을 극복하기 위해 객관적 이성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자체로 권력의지의 발현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객관적 이성이 돌이킬 없이 해체되었고 주관적 이성은 지배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해방적 잠재력을 이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성공할 없습니다. 이성의 존재론적 지위와 관련 하여 아도르노의 근대적인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은 물리와 심리라는 실증 주의적 실체 이원론으로 변합니다. 이성이 만약 존재자라면, 그것은 객체인 자연과 물리에 존재하거나, 주체에 정신과 심리로 존재합니다. 이성이란 사유작용과 동일한 것으로서의 내성(introspection) 의해서 언제든 자신 안에서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있는 심리적 존재자이며, 감정, 본능 등과 함께 인간의 정신 혹은 마음을 구성하는 하나의 실재적인 부분 혹은 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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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하나의 심리적 사실로 환원된 이성이야말로 비로소 다른 심리적 사실인자기보존의 충동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도구적 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정당한 지배의 가지 순수한 유형을 합리적 지배, 전통적 지배, 카리스마적 지배로 구분합니다. 이중에 근대 이후의 사회 구성의 핵심원리가 있는 것은 합리적 지배뿐이지만, 아도르 노의 총체적 이성 비판은 정당성의 근원으로서의 이성 혹은 합리성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아나키즘을 함축합니다. 노직(R. Nozick) 지적하듯이 아나키즘은 만약 타당하다면정치철학의 전체 주제를 밑동에서부터 잘라버린(undercut)”다는 점에서 정치철학적으로 매우 강한 주장입니다. 일반적인 형태의 아나키즘이 무정부상태를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아도르노는 권력의 정당성과 함께 무정부상태도 부정하는 보다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형태의 아나키즘을 주장합니다. 아도르노의 아나키즘이 이처럼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부정으로 전개되는 이유는 아도르노가지배 개념을 근대적인 주체와 객체 도식을 기초로 하여 정식화하기 때문입니다. 아도르노의 정식화 따르면지배 기본적으로 객체에 대한 주체의 지배, 혹은 자연에 대한 정신의 지배이며, 이러한 지배는자연지배에서인간지배 그리고인간의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 확장되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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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에게지배 단적으로 악이며 정당한 지배는 존재 없는데, 왜냐하면 지배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억압이라는근본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해방되는 과정에서 나머지 세계와 운명을 공유한다. 자연 지배는 인간 지배를 포함한다. 모든 주체는 외적 자연, 인간적이거나 비인간적인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가담할 뿐만 아니라, 이를 수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연을 지배한다. 지배는 지배를 위해 내면화된다. 내적ᆞ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의미 있는 동기에서 비롯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은 실제로 초월되거나 화해되지 않고 단순 억압된다.” 주체 또는 객체 혹은 정신 또는 자연의 도식에 따라 재구성된 같은 지배의원역사’(Urgeschichte) 다음과 같은 가지 주장을 함축합니다. 첫째, ‘지배’(Herrschaft) 객체에 대한 주체의 억압에서 유래하는화해되지 않은 자연으로서 자체로악마적 성격 가지며, 사회란 이러한지배 원리로 삼아 구성되므로 자체로 억압적입니다. “상징(Symbole) 의미하는 반복되는 자연은 갈수록 상징 속에 표현된 항구화된 사회적 억압임이 증명된다. 사유형식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사회적 연대감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와 지배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지배는 사회 속에서 확립된 것이지만 또다시 사회 전체에 차원 높은 일관성과 힘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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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지배란 주체 또는 객체 도식 내에서 주체가 객체에게 필연적으로 가하게 되는 억압이기 때문에 지배의 해소를 위해서는주객 동일성혹은정신과 자연의 화해 같은 형이상학적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주체는 결코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없으며 객체가 주체에 표상되는 한에서만 인식할 있다는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곤경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부당하지만 해소 불가능한 지배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정치철학적 주장으로 변주됩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지배연관이 해소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자기 보존의 충동이라는 주체의초월론적성격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책략(List der Vernunft) 인간을 점점 유능한 야수로 만드는 있는 것이지 주객동일성을 수립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아도르노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필연적인 지배연관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소하기보다는주객동일성혹은화해 이념을 완전히 포기하고 체념합니다. “양지바른 곳을 외쳐 대는 것은 우상숭배다.” 이에 따라계몽의 변증법 다음과 같은 운명론적 체념을 담은 문장으로 종결됩니다. “동물계의 종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 내에서의 정신적인 단계들과 인간 개개인의 맹점들은 희망이 정지된 지점들로서, 여기서 화석화된 희망들이 보여주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은 굴레를 벗어버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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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20세기의 야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이성과 지배의 상호 연관을 설명하는 하나의 전형을 제시합니다. 이와 관련하여계몽의 변증법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다음의 가지 주장으로 요약될 있습니다. 첫째, 계몽의 변증법, 20세기의 야만은 계몽의 필연적인 변증법적 자기 파괴의 결과입니다. 둘째, 총체적 이성 비판, 이성은 필연적으로 억압적 지배와 결합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합니다. 셋째, 아나키즘, 지배는 억압이며 정당한 권력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계몽의 변증법 어렵다고 하지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한 난해함과는 다른 성격의 어려움이 요구됩니다. 읽는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첫째는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과 둘째는 책을 읽는 못지않게 문장 문장을 읽고 사유해야 하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번째 어려움은 자극적이고 유치한 유행을 따르는 인간의 천박한 지적 풍토(트렌드) 싸워야하고, 번째는 차례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띄엄띄엄 되새김질하는 독서가 필요하는 말입니다. 대중은 단순히 문화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 나름의 문화적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고, 우리들의 해독능력 역시 증가하고 있다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아직까지는 아도르노의 비관과 벤야민의 낙관 사이를 오가며 의지의 낙관에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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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에서 인간을 계몽되지 못한 신화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이성(理性) 힘이 오늘날 도리어 야만상태로 인류를 몰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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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43번째 인문학 부문 13번째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1947년에 출간한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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