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 Prison Notebook by Antonio Gramsci, 1926-37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 치하인 1926년부터 시작된 11년간의 감옥 수감기간 중 역사와 정치 분석을 기록한 공책을 30개 이상 남겼습니다. 이 공책들에는 그람시의 이탈리아의 역사와 국민주의 그리고 그람시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인식, 비판적 이론과 교육 이론 등이 담겨 있습니다. 이 공책들은 그의 사상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람시의 관심사는 자본주의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이 불투명해지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화되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와 차이를 보입니다. 그람시나 루카치에게는 물적 토대에 대한 분석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의식,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가 더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상부구조의 이론가”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차별성은, 고전적 정치경제학자가 빠지기 쉬운 경제적이고 기계주의적 위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점입니다.
1926년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구상하기 시작해서 1929년 2월부터 공책에 쓰기 시작한 이 글들은 1937년 그가 죽을때에는 모두 32권의 공책으로 총 2848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그람시는 감옥 안에서 “여기에서는 죽은자로서 하루를 살 것인가? 양으로서 백 년을 살 것인가? 사이의 선택조차 없다. 여기서는 죽은자로서의 삶이란 단 1분도 가질 수 없으며 양보다 훨씬 더 천한 어떤 것으로서의 삶이 몇년이고 계속되며 또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수리에게 뜯어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살면서도 나는 무언가 영원한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확실한 계획에 따라, 나를 빨아들일 수 있고 나의 내적인 삶에 초점을 줄 수 있는 어떤 주제를 위해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노력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이 ‘옥중수고’를 집필했습니다.
그럼 우선 안토니오 그람시의 생애 (Life of Antonio Gramsci)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이자 정치지도자이며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22~1937.4.27)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섬의 알레스에서 7형제 중에서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사르디니아의 민중들은 이탈리아 변두리에서 사는 가난한 소작인들이었지만, 그람시의 집안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여유가 있는 알바니아 사람의 후손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부르봉 왕가의 헌병대 대령이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대령 계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나폴리출신으로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람시의 어머니도 조반니 보카치오 시인의 글을 읽을만큼, 보기 드물게 지적 소양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부친은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하급정부관리로 일하다가 공금횡령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구속된 진짜 이유는 지방유지들에게 밉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방유지들의 독재가 만연해 있었는데, 안토니오 그람시의 아버지는 이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함을 받아 구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1904년 아버지가 석방될 때까지 삯바느질과 텃밭농사로 가정을 돌봐야 했고 쓰다버린 초의 토막을 다시 써야만 했습니다. 4살때 사고로 곱추의 장애를 가지고 무척 병약했던 그람시도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일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호기심, 상상력, 밝은 성격,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몸이 약하니까 격렬하고 거친 놀이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렸고 독서와 나들이를 좋아하며 고슴도치와 도마뱀을 보고 관찰했습니다.
아버지가 석방되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람시는 1908년 칼리아리 고등학교에 재입학하여, 형 젠나로와 함께 자취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형 젠나로는 토리노에서 군복무하던 중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o, PSI, 1892년 결성-1994년 해산)을 선전하는 팸플릿을 동생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사르디니아는 영화 ‘빠드레 빠드로네(Padre Padrone)’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들이 배움의 중요성을 모르는 무지와 가난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학교가 아니라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서 양을 치게 할 정도로 가난한 동네여서, 광부들과 농민들의 민중 운동이 치열했는데, 그들의 생존권 투쟁은 모두 군대와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자란 그람시는 자연스럽게 역사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11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람시는 학문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토리노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대학교 시절 그는 그리스 문학, 역사, 철학, 언어, 법학을 공부했으며, 그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산 언어학 교수의 권유와 언어와 철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나쁜 건강 탓에 1915년 4월 문학시험을 끝으로 대학교를 중퇴했습니다.
1913년 친구 타스카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입당한 그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공업도시인 토리노에서는 노동운동이 활발하여, 1904년 가두시위, 1912년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75일간 진행된 금속노동자들의 파업투쟁, 1913년 93일간 진행된 금속노조(FIOM)의 지도로 진행된 파업투쟁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이를 본 그람시는 토리노 노동자들이 북부 자본가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단결력과 남부 농민대중을 이끌 수 있는 지도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915년부터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전진(Avanti)’ 토리노판 편집위원회 활동과 사회당 지역주간지 ‘민중의 외침(Grido del Popolo)’에 정기적으로 글을 썼는데, 그의 관심분야는 사회와 정치, 노동운동, 제 2 인터내셔널의 짐머발트 회합, 반전결의, 문화비평등 다양했습니다.
1917년에는 ‘전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말하는 ‘자본에 대한 혁명’을 기고했습니다. 1917년을 전후로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대단히 전투적으로 전환되어가는데 서구사회에서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몰두, 점차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1919년 토리노 대학교 동창인 안젤로 타스카, 움베르토 테라치니, 팔미로 톨리아티와 사회당 내 급진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잡지 ‘신질서(Ordine Nuovo)’를 창간하는데 이 잡지는 후일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가 됐습니다.
붉은 2년이라 불리는 1919-20년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벌인 공장평의회운동이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의 결탁으로 실패하자 그람시와 그의 공장평의회 동료들은 노동운동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사회당의 미온적 공장 평의회 지지 및 전반적인 보수주의 성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그람시와 동지들은 사회당이 좌파정당으로서 계급투쟁을 하기보다는 지배계급 및 자본가와의 타협을 하는 보수화를 비판하여 사회당을 이탈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20년대 초에는 두 가지 상극적이지만 중요한 현상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났습니다. 노동운동이 대단한 호전성을 띠고 전개되는 한편,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확산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15년 전직 사회주의자 무솔리니에 의해 시작된 이탈리아 파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에 공포심을 갖고 있던 제대군인들과 자본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당은 우유부단하고도 개량주의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부와 타협하며 노동운동의 급진화에 제동을 거는 한편, 파시즘의 확산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으로 1921년 리보르노에서 전투적 맑스-레닌주의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진보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이유는 사회당이 투쟁정신을 잃어버린 채 적당히 자본가, 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어용정당이 되어간다는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초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아메데오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사회당(PSI)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통해 이탈리아 내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도록 명하던 코민테른과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절감하면서 차츰 보르디가의 완고한 비타협적 태도에 회의를 갖기 시작,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습니다. 결국 끝까지 공산당 독자혁명을 고집하던 보르디가는 당내에서조차 차츰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1924년에서 1926년 사이 그람시가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22년 10월 로마 진군과 자본가, 제대군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토양으로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집권 초기인 1922년과 1926년 사이, 노동운동에 대해 강온정책을 함께 사용해 대응했습니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회진출을 허용하는 한편, 공장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같은 노동운동은 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사회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이탈리아내 진보세력을 탄압했습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24년 4월 선거에서 10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의회에 진입하는데, 이때 코민테른 집행위원 자격으로 모스크바, 빈 등에서 활동하던 그람시도 베네토에서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의회정치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람시는 1926년 1월, 프랑스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이 그 해 가을 국가 파시스트당(PNF) 이외의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한 새 법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1926년 11월 경찰에 그람시는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은 불법정당 활동을 구실로 그람시를 체포했으나 실제로는 무솔리니가 그의 선동술이 두려워서 벌인일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수석검사는 재판에서 그람시는 매우 머리가 좋으니 20년간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로맹 롤랑을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은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에 갇혔다.'고 비판하며, 그람시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람시는 재판에서 20년 4개월 5일의 형을 언도받아 가혹한 감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감옥은 그에게 혁명가로서 뿐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그의 활동을 일시 중단하도록 하였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불후의 역작 ‘옥중수고’를 집필하였습니다. 하지만 복역하던 중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됐고 결국 1937년 4월 별세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사실상 그의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된 후에야 그람시의 석방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숨을 거두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문화 및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비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람시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개성적인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단하고 그 지도자로서 활동한 그람시의 이론과 사상은 유로코뮤니즘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정치학, 사회학, 철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Thoughts of Antonio Gramsci)
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람시는 수감 기간 중 역사와 정치 분석을 기록한 공책을 30개 이상 남겼습니다. 이 글은 감옥에서 공책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옥중수고 (Prison Notebook)’라고 불렸고 그람시의 이탈리아의 역사와 국민주의 그리고 그람시가 인식한 마르크스주의, 기타 비판적 이론과 교육 이론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첫번째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문화적 헤게모니; (2) 두번째 노동 계급으로부터 지식인을 배출하기 위한 노동자 대중 교육; (3) 세번째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경찰, 군대, 법률 제도등의 정치사회와 지도자층이 자발적으로 또는 비강압적으로 형성되는 가족, 교육 제도, 노조 등의 시민사회; (4) 네번째 절대적인 역사주의; (5) 다섯번째 경제적 결정주의 비판; (6) 여섯번째 철학적 유물론 비판입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당면 과제는 파시즘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파시즘에 대한 그들의 대체적인 태도는 반동적 부르주아 운동의 또 다른 운동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파시즘 운동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라는 면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자유주의적 학자들처럼 단순히 서구문명의 일탈로 보는 것도 아니고 독점 자본주의의 극단적 지배 형태로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해야할 소시민인 쁘띠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조차도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점은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옥중수고’에 의하면, 그람시의 중요한 이론적 관심사는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과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화되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와 차이를 보입니다. 이 “상부구조의 이론가” 그람시의 더욱 중요한 차별성의 하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자가 빠지기 쉬운 경제적이고 기계주의적 위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람시는 비결정주의적 역사관을 지향했습니다.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참가하는 인간의 투쟁, 의지, 참여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그때 그때 인간자의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본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 지향은 사회주의이나 그것의 필연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람시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양쪽 모두를 비판합니다.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여러 형태로 변화되긴 하나 필연적으로는 붕괴할 것이라고 여깁겼습니다. 이에 비해 그람시나 루카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들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장기간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왜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설명하려한 것입니다. 루카치의 물화이론도 이런 맥락이며, 그람시는 정치학적 견지에서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는 1871년 파리 꼼뮨을 전후한 혁명적 노동운동을 보면서 그러한 것을 자본주의의 몰락의 징조로 보았으며, 레닌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보면서 자본주의 몰락의 징조를 발견하였음에 반해 그람시는 1871년 이후 혼란 속에서 자본주의가 안정화되고 확산되어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람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 특히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중요성에 주목하였습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안정화되어가는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그람시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또 한 번 전도시켰다고까지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관념보다는 물질,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헤겔을 전도시켰다면,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강조하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기초를 떠나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즉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를 보완, 확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람시의 주요개념은, (1) 첫째 정치와 헤게모니, (2) 둘째 역사적 지배블록, (3) 세째 시민사회와 통합국가(Integral State), (4) 네째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5) 다섯째 진지전과 기동전 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정치와 헤게모니 - 정치 또는 지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강제의 측면과 동의의 측면으로 어떤 사실, 어떤 지배도 100% 강제와 100% 동의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 두 개가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유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 마르스크주의과 다른, 진보된 국가론입니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에서는 국가는 강제기구라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위한 수단,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비해 그람시는 국가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다고 간파했습니다. 국가가 지닌 기능의 복합성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람시는 현실주의적 정치이론을 최초로 정리한 마키아벨리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훨씬 더 확장, 발전,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가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적 자본주의로 발전해가면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갔다고 보았습니다. 경찰국가가 아니라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입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국가는 경쟁적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로 시장질서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면서 기본적 질서만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국가는 경제사회영역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주도하며 더 나아가 복지 국가로까지 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해주는 기능과 역할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국가는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시민사회를 통해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확장시키려고 확립하였습니다.
국가라는 것은 공적 영역의 대표이며 시민사회는 사적인 영역의 대표입니다. 그람시는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질서가 국가를 매개로 공식화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시민사회가 국가영역을 지배한다고 본 것입니다. 국가기능이 점차 확대되면서 시민사회는 국가의 사적 네트워크가 됩니다. 그 시민사회를 통해 국가는 모든 의식과 조직에 침투할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며, 그런 속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측면을 담당하는 부분은 정치사회이고, 동의를 창출하는 부분은 시민사회입니다. 그람시는 국가를 “강제하는 정치사회와 동의하는 시민사회”의 복합체로 보았습니다.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서구의 사회과학속에는 공적 영역의 국가와 사적 영역의 사회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회집단,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바로 이런 시민사회 영역에까지 침투, 사회 각계 각층의 동의를 창출하면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입니다. 통합국가는 시민사회까지 포괄하면서 ‘강제하는 독재와 동의하는 헤게모니’를 구축해나가는 것입니다.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에 의해 계급동맹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마르스크주의 이론가들에게 헤게모니는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 헤게모니를 그람시는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계급적 동맹의 원칙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지배질서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매개로 기본적 집단과 추종집단이 융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지적·도덕적 수준에서까지 통합을 이루어내고 추종집단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까지 창출해내는 것이 헤게모니입니다. 즉 헤게모니는 정치적 강제와 지적 도덕적 동의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의 헤게모니는 계급동맹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농민계급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융합이라는 완전 통일, 통합된 형태입니다. 헤게모니 구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단순히 기본계급의 이익을 추종세력이나 동맹세력이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집단의 근본적 이익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추종동맹세력의 이익을 수용, 융합해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헤게모니 지배가 구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헤게모니 집단이 되려면 좁은 의미의 자신의 조합주의적 계급적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집단의 이익을 포괄,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적 지배를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 계급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2) 역사적 지배블록 - 정치적 수준에서 출발, 도덕적, 지적 수준에까지 통합, 공통의 집단의지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이럴 경우에 역사적 지배블록이 형성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번째 유형은 변형주의(Transformism)입니다. 수동적 동의이며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기본집단들이 동맹집단에 의해 산출되는 능동적요소, 심지어는 적대적 집단으로부터 나오는 요소까지를 점진적으로 흡수, 그들의 반대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지배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으로서 추구합니다. 두번째 유형은 확장적 헤게모니입니다. 진정으로 다양한 계급의 융합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마침내 민족적, 민중적의지로까지 확장되어가는 헤게모니입니다.
기본계급집단에 대해선 그람시가 분명하게 규명하지 않았습니다. 계급이란 개념은 경제적 개념이고, 집단이란 개념은 반드시 경제적 개념은 아닙니다. 기본계급이라고 할 때, 경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계급을 들 수 있습니다. 부르죠와와 프롤레타리아입니다. 기본집단이라고 할 때, 사회,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영역에서 공통의 같은 이익을 공유라는 집단이라고 하기에 이것은 상부구조의 표현입니다.
기본집단을 통해 나타나는 헤게모니는 그러므로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토대에서 형성되는 질서와 상부구조에서 형성되는 질서를 어떻게 집중시키느냐의 문제를 그람시는 애매하게 남겨두었습니다. 기본계급만이 기본집단으로서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람시를 마르스크주의자라고 취급하는 것입니다.
(3) 시민사회와 통합국가(Integral State) - 기본계급이 헤게모니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추종계급에 대한 확실한 리더쉽을 확립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공통이익과 세계관이 같은 이들의 지도적 집단이 역할을 수행하며 지도적 집단을 매개로 헤게모니질서가 확립됩니다. 시민사회에서 기본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면서도 다른 세력의 이익을 이용하여 접합함으로써 헤게모니질서를 확립합니다. 이때 나타난 국가는 통합국가입니다. 통합국가는 강제적인 정치사회와 동의적인 시민사회가 결합된 국가입니다.
그람시는 서구 부르죠와 지배 질서가 얼마나 강고하며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장고한 기간과 인내가 필요한가에 대한 것을 생각했습니다. 서구의 진지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는 이들은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보았습니다. 대중운동으로서 노동계급보다는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을 상당히 강조했습니다. 레닌이나 루카치에게 있어서는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에게서보다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그람시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4)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 그람시는 지식인을 크게 두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입니다. 지식인이란, 인간의식, 관념, 사상 등의 상부구조 영역을 담당하는 집단입니다. 따라서 모든 지식인은 어떤 형태로든지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계급과 독립된 지식인이라는 관념은 허구입니다. 새로운 하부구조가 형성될때에는 그것을 옹호하고 전파시키는 그들 나름의 지식인 계급을 배출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보면 모든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계급이 가진 집단의지를 결집하고 확산시키는 특수한 성격의 집단이고 이것이 바로 유기적 지식인입니다.
전통적 지식인은 유기적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창출한 생산양식이 붕괴되었음에도 살아남아 현존하는 사회계급과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인이지만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지식인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배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집단은 이른바 전통적 지식인인 성직자, 문필가, 예술가, 철학자 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복하고 융합하기 위해 투쟁하며, 또한 새로운 지식인을 길러냅니다. 모든 질서는 지도집단이 나오면 유기적 지식인 집단이 없이 헤게모니적 질서는 창출될 수 없습니다. 지배 계급에 의해 포섭되거나 계급의 목적에 따라 길러진 지식인들은 지배 집단의 대리인으로서 사회적 헤게모니와 정치적 통치의 하위 기능을 수행합니다. 상부구조의 측면에서 기본계급, 지도적 집단의 세계관과 의지를 형성, 결집확대시키는 역할, 즉 계급적 지배가 헤게모니적 지배가 될 수 있게 합니다.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대항해 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것대로의 헤게모니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의싸움입니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쟁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싸움인 상황에서 유기적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과 세계관을 대변할 자신들의 유기적 지식인 집단들을 창출해내야 합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기 계급의 새로운 유기적 지식인을 창출함과 동시에 전통적 지식인을 자신들에게 동화시키려 했으며, 이러한 유기적 지식인의 진정한 존재 방식은 대중과 깊이 연결되어 실천 활동에 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유기적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다른 계급의 이익을 포괄할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 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여 부르죠와적 이데올로기를 파괴시키고 나중에 정치적 부분에서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 그룹의 총체가 “당”이라고 봄으로써 당의 지도적 역할을 인정합니다. 기본적으로 레닌주의적 전통속에 서구사회의 독자성을 추구하면서도 레닌주의의 틀속에서 그것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5) 진지전과 기동전 -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강제기구로서 국가기구를 붕괴시킨다고 해도 강고한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한 부분이 남아 있는 한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경우 혁명적 세력이 강제기구인 국가를 파괴하고 점령한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우, 핵심에는 국가기구로서 국가가 있지만 그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으로서 장구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러시아 볼세비키의 혁명전략이 왜 서구사회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람시의 공로라고 한다면, 1920년대, 30년대에 정통적 마르스크주의들의 논리의 밑바탕에서 깔린 경제주의적 해석을 극복하려고 했던 최초의 마르스크주의 이론가입니다. 경제주의적 해석의 특징은 환원주의와 반영주의입니다. 환원주의는 정치문화 등 상부구조의 영역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경제적 요인에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저항한 인물들이 계급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한 루카치와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독자적 자율성을 갖는 영역으로 인식한 그람시입니다. 반영주의는 국가는 부르죠와 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도구적 기구라는 식으로 토대적인 것을 반영하는 기구로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고 그 자체는 물질성을 갖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람시에게 이데올로기는 토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피동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자율성을 갖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기본명제에 주요한 수정을 가합니다. 상부구조의 자율성과, 이데올로기영역의 상대적 자율성, 물질성 등입니다.
결정론적 해석을 또한 배격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배제된 어떤 객관적 힘, 관계,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점을 배격합니다. 그람시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투쟁과 노력, 승리와 패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람시는 마르스크주의자이기에 자본주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의 강고성과 노동자 계급의 패배를 바라보면서 상당한 기간의 노력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적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단순한 기계론적 과학주의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어서 그람시의 옥중수고의 내용(Contents of Prison Notebook)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 : 현대의 군주를 살펴보면, 이 장의 목표는, ‘현대의 군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공산주의 정당은 어떠한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그람시에게 마키아벨리는 공산주의의 선구자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현대의 군주론은 마땅히 그 일부를 자코뱅주의를 위해 할애해야 합니다. 자코뱅은 ‘국민적-민중적’ 집단 의지를 일깨우고 전개하는 모습을 독창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조숙한 자코뱅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 이전에는 정치 과학이 유토피아의 형식을 빌어 표현되거나 현학적인 논술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아주 구체적인 환상이며, 제각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집단 의지를 일깨우고 조직하는 정치 이념의 본보기입니다. ‘군주론’의 결론 부분에서 마키아벨리는 민중과 함께 섞이고 민중이 됩니다. 이때의 민중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지금까지의 주장으로 설득한 민중입니다. ‘군주론’은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현대의 군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행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인한 하나의 집단 의지가, 그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 유기적 사회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정치 정당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공산주의 정당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현대의 군주는 국민적-민중적 집단 의지를 형성함과 동시에 지적, 도덕적 개혁의 선포자이어야 합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에서의 ‘군주론’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마키아벨리는 무언가를 폭로했습니다. 그런데 그 폭로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마키아벨리는 행동을 촉구하는 사상가였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그는 요즘의 상식으로 보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엉성한 마키아벨리주의자인 셈입니다.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정치학은 절대적 국민적 군주국의 조직을 지향하는 당대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권력 분립과 대의제의 맹아가 발견됩니다. 그의 ‘흉포함’은 봉건 세계의 잔재를 향한 것이지 진보적인 계급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시민군에 대해 언급한 것의 목적은 도시와 농촌의 연결이었습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읽으며 국민 혁명의 단초를 발견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민중, 즉 당대의 혁명적 계급을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효율적인 지도와 지배가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까요? 정당이 존재하려면 세 가지 기본요소가 모여야 합니다. (1) 첫쩨 일반적, 평균적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적 요소, 그러나 이들만으로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 둘째 중요한 응집적 요소, 장군이 필요합니다. 장군을 만드는 것보다 군대를 만드는 것이 쉽습니다. (3) 세째 중간적인 요소, 앞의 두 요소를 연결하고 각 요소 사이의 비율을 조절하는 기능을 합니다.
정당을 세움에 있어서 지도자와 추종하는 대중 사이에 동질성이 확보되게끔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결정적인 순간에 지도자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정당’으로 옮겨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키아벨리의 半人半馬인 켄타우로스가 혁명 정당이 갖추어야 할 이중적 전망의 상징입니다. 당은 ‘강제와 동의’, ‘권한과 헤게모니’, ‘폭력과 교화’, ‘선동과 선전’, ‘전술과 전략’이라는 두 계기들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해야 합니다.
이어서 2장 : 국가와 시민사회에서는 케사리즘(Caesarism), 진지전, 시민사회 등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서 파시즘의 성격, 서구에 적합한 혁명 전략, 국가이론 등이 설명됩니다.
보나파르티즘은 적대 계급의 조정자를 가장한 독재 체제로 케사리즘과 유사하긴 하지만 같지는 않습니다. 케사리즘은 두 개의 기본적 사회세력 사이의 타협을 가리킵니다. 케사리즘이란 갈등하는 세력이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는 과정이며, 결국 상호파괴로만 종식될 수밖에 없는 잠정적 균형 상태를 뜻합니다. 결과론적으로 케사리즘이 가져올 파국의 상황이 진보적일지 반동적일지 알 수 없습니다. 헤게모니의 약화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는데 그중 하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카리스마적 신의(神意)를 지닌 듯한 인간에 의해 대표되는 알려지지 않았던 세력들의 활동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어떤 위대한 인물에게 중대한 임무를 기꺼이 위임하는 것입니다. 히틀러주의의 팽창을 기억하십시요. 이것은 개인이 아닌 의회 다수 세력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연립 정부는 케사리즘의 첫 단계입니다. 지배 세력에게는 진보적 세력의 허약성을 존속하는 것이 권력 유지의 관건입니다. 따라서 현대에서 케사리즘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건이 케사리즘으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 상황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초래한 결과는 혁명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반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지배 블록 내의 어떤 잠재 세력이 지배 블록의 반동화를 저지했습니다. 즉, 구 사회 속에는 반동적인 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잠재해 있는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 내재적 힘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적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능력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정당들의 허약성은 선동과 선전 사이의 불균형에서 기인합니다. 정당이 계급을 대표하기는 했지만 그 계급을 강화하고 보편화하지는 못했습니다. 계급 연구가 없는 정당이 지도자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정부 권력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맙니다. 즉 관료제가 강화됩니다. 국가가 보나파르티즘적 정당과 다를 바 없어진 것, 그것이 관료제입니다.
군사 작전과 마찬가지로 정치 투쟁의 세 종류는 기동전, 포위전, 진지전입니다. 기동전이 효과적이었던 경우는 참모부가 관료화되어 복무 태도가 무뎌진 나라들에서였습니다. 트로츠키는 여러가지 점에서 정면 공격이 단지 패배로 이어질 뿐인 시기에 기동전을 주장했습니다. 트로츠키가 실패한 것은 이 문제를 문학적 형식으로만 다루었지 실천적 지도(指導)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구 사회에 적합한 것은 진지전이 주가 되는 방식입니다. 시민사회라는 상부구조는 근대적 전쟁에서의 참호체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진지전은 단순히 참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군대 후방에 위치한 영토의 조직적, 산업적인 전(全) 체계로 이루어집니다. 진지전은 장기전이며 보급전입니다. 전쟁의 태세를 갖춘 다양한 인간들의 능력, 대중적 세력이 필요합니다. 정치 분야에서 진지전의 승리는 실로 결정적입니다. 진지전의 승리 뒤에는 국가에 관한 문제가 뒤따릅니다.
마키아벨리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에 관한 책을 쓴 것이지 유토피아에 관한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마키아벨리의 관심은, 인간을 통치하고 인간에게서 영속적인 동의를 확보하여 위대한 국가를 창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를 읽으면 그 또한, 경제적 평등 없이는 완벽하고도 완전한 정치적 평등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국가와 통치(government)를 동일시하는 풍토 속에 살고 있는데, 이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혼동입니다. 국가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를 합친 것입니다. 국가의 목표는 바로 국가 자신의 종식과 소멸이라는, 다시 말해 정치사회를 시민사회로 재흡수한다는 원칙의 체계를 창출하는 일입니다. 국가숭배(Statolatry)는 관료에 의한 지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시민사회를 위한 교육의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방치되거나 광신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비판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3장 : 미국주의와 포드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3장은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생산방식이 유럽에 미친 충격에서 출발합니다. 미국은 유럽과 달리 봉건의 잔재가 없었습니다.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의 근본적 전제는, 혁명적인 노동계급 운동이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서 후퇴와 패배의 국면에 들어섰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의 의의는, 기존의 경제적 개인주의에서 계획 경제로의 이행입니다. 유럽이 미국의 포드주의를 도입한 방식을 분석해 보면 전후 각국의 정치적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가 길수록 그 나라에는 선조의 유산으로 살아가는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간들이 많아집니다. 미국은 위대한 역사적 전통은 없지만 또한 사회가 지탱해야 할 이런 납덩이 같은 부담도 없습니다. 미국에 견실한 자본 축적이 가능했던 이유입니다. 포드는 생산물의 수송과 분배를 효율적으로 경영하여 임금은 높게, 상품 가격은 낮게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공장 내부에서 강제와 설득이 동시에 헤게모니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작업과 생산 과정에 최적화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양성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생산 방식에서 분업화된 노동자들의 묶음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간주되었습니다. 부품을 자주 갈아끼우는 것은 곧 손실이었습니다. 그러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고임금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업가 입장에서는 고임금이 쓸모없는 곳에 소진되지 않고 기계나 노동자에게 재투자되어야 했습니다. 기계의 효율성을 저하하는 알코올은 기업가의 적이 되었습니다. 국가가 기업가를 대신해 그 적과 싸웠습니다. 바로 금주령입니다. 성문제 또한 알코올의 문제와 연관되었습니다. 생산과 작업의 합리화를 위해 노동자의 성적 본능이 다소 제한되어야 했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이 강조되고, 각종 청교도적 이데올로기가 발전했습니다. 포드와 같은 기업가들의 청교도적인 노력에는 노동자의 인간성이나 정신성에 관한 관심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저 작업과 생산의 효율 만이 중요할 따름이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생산 방식에서 낙오하지 않도록 하는 마지노선 같은 것이었습니다. 반면, 상층 계급은 이러한 문제에서 사실상 자유로웠습니다. 언제든 유럽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습니다. 계급 간의 차이는 새로운 신분화를 초래했습니다. 유럽에 도입되고 있는 미국주의는 천박한 유행을 좇는 천박한 화장처럼 보였습니다.
계속해서 교육, 역사, 철학, 문화에 관련된 옥중수고의 의미(Meanings of Prison Notebook)를 살펴보겠습니다.
교육에 대한 옥중수고의 의미를 보면, 1923년 무솔리니 정권은 중대한 교육개혁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이 교육개혁의 기치는 ‘능동적인 교육’이었습니다. 이 교육개혁에는 어떤 면이 과장되어 있었고, 또 정치적 구호 속에 가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교육이란 일종의 순응주의를 획득하려는 교육입니다. 학생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교육은 학교와 생활이 긴밀하게 연계를 맺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새로운 교육개혁이 능동성을 강조할수록 그것은 학생과 교사와의 명목상의 협동을 중시하는 것이며, 그럴수록 오히려 학생은 더 수동적으로 됩니다.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는 것은 사적인 일이 아닌 공공사업입니다. 국가와 사회의 법칙은 역사상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가장 잘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말하자면 인간의 노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드는 인간사회의 질서를 창출합니다. 노동이란 자연을 깊고 폭넓게 변형하고 사회화하기 위해 인간이 자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체적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초등 교육에는 이러한 노동의 원리가 기저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사회와 국가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이것을 매개하는 것이 노동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발견해야 세계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가 과거를 토대로 하고 있고 미래는 현재를 기반으로 한다는 인간의 총체적인 노력과 희생의 진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직업학교, 즉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관심을 충족하기 위해 고안된 학교 형태가 그렇지 않은 인격형성적 학교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사실은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학교가 민주적이라는 미명하에 등장하고 사람들의 충분한 지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일단 겉으로는 민주적입니다. 다양한 학교들 중에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별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간과됩니다. 직업학교의 증가는 사회적 차별을 영속화할 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를 더욱 풀기 어려운 상태로 고착화합니다. 교육을 통해 대물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학교들의 난립을 막고 균등한 초중등 학교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노력과 지겨움 그리고 고통을 통해 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노력없이 손쉽게 어떤 것을 획득하는 사회적 행태에 대한 저항감을 키워야 합니다. 노동자계급 출신의 지식인 창출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혁명적 정당의 유기적 지식인이 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옥중수고의 의미를 보면, 지배 계급들의 역사적 통일성은 국가를 통해서 실현됩니다. 그것은 정치 사회와 시민 사회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역사가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 출발하여 완전한 자율성으로 나아가는 발전의 경로를 기록하고 그 원인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국민적 리소르지멘토, 이탈리아 통합 부흥운동을 주도한 혁신 세력들을 검토함으로써 역사 연구의 많은 원칙들을 수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회집단의 우위성은 지적, 도덕적인 지배와 지도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적대적인 집단을 지배하고, 동류의 집단은 지도하는 것입니다. 한 사회집단은 통치권을 획득하기 전에 이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또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그 집단이 권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 집단은 지배적으로 됩니다. 그러나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할지라도 지도는 계속해야 합니다. 마치니를 비롯한 정당 지도자들은 농민을 일으켜 세워 국가 통일 과정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리소르지멘토에 민중적 특성을 부여하거나 자기들 자신에게 견고한 계급적 기초를 부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허약성은 나중에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프랑스의 자코뱅은 도시와 농촌을 연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대중적 작업, 가령 외젠느 슈의 소설로 그것을 수행하였습니다. 농촌과 도시를 하나로 묶는 한 가지 방법은 시민국민군의 창설인데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이것을 주장했습니다. 실상 현대에서 민주적인 제도 없이 의무징집제의 시민군을 창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농촌의 포섭 문제는 이미 오래된 과제였습니다.
소위 행동당이라 불리는 세력은 이탈리아 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 문화적 통일을 대다수 민중의 정치적, 영토적 통일과 혼동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난제는 남부와 북부 사이의 심각한 괴리입니다. 북부에서는, 남부는 이탈리아에게 하나의 족쇄이며 이 족쇄가 없었다면 북부의 근대 산업 문명은 한층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불만에 가득찬 확신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행동당이 온건파에 대하여 반대 세력으로서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농촌 대중, 특히 남부의 농촌 대중과 동맹해야 했으며, 또 외적인 형식이나 기질 면에서만 자코뱅일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내용을 지닌 자코뱅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만 있었다면, 여러 정통주의적 지식인 층을 통해 반동적인 블록으로 묶여있던 다양한 농촌 계급들간의 연계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자유주의적, 국민적 결속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자코뱅당이 형성되지 않은 것은 경제 영역, 즉 이탈리아 부르주아지의 상대적 허약성과 1815년 이후 유럽의 상이한 역사적 풍토 때문입니다.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모두 달랐습니다. 정치적으로 가장 다채롭고 적극적인 활동이 벌어진 곳이 프랑스였습니다.
농민과 지식인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하는 두 방향의 활동은 상호 변증법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대혁명 당시 프랑스를 보면, 농민들이 자생적인 추진력에 따라 움직이면서 지식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반면 한 지식인 집단이 구체적인 농민정책을 설정하면 대중 속에서 더 중요한 요소가 도출되었습니다.
철학에 대한 옥중수고의 의미를 보면, 철학은 철학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철학은 종교나 상식이 될 수 없는 지적 질서입니다. 상식이란, 어떤 특정 시기에 일반화된 무비판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 인식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상식을 만든 세력들을 타파하는 것이 지적 혁명입니다. 철학은 상식(common sense)과 구별되는 양식(good sens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상이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는지, 또 현재 우리의 사고 방식을 창조하는 데에 쏟는 노력 속에 어떠한 어리석음과 과오가 있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철학은 소수의 전문적 지식인들의 추상적인 관념 유희가 아니라 암암리에 모든 사람들이 관계하는 구체적인 사회 활동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철학적’이라는 말은 잔인무도하고 본능적인 인간 행위를 극복하겠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상식 속에 존재하는 건강한 핵, 즉 양식입니다. 따라서 대중의 철학과 학적 철학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지식인들이 대중을 위한 지식인으로서 대중과 유기적 관계를 맺을 때, 곧 대중의 실천적 활동에서 생겨난 문제와 원리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완성해 낼 때 문화적, 사회적 블록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관성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철학은 역사적으로 되며, 한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실천 철학의 발전 과정은 지식인과 대중이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실천 철학이 발전하는 과정 속에는 끊임없이 지식인과 대중을 갈라놓으려는 움직임이 되풀이되기 마련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만족스러운 답변은 ‘사회 관계들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인간의 본질은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통일에서 시작되지는 않지만 그 자체에 통일 가능성의 근거를 지니는 ‘불일치의 일치’가 일어나는 ‘생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역사에 부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전체 인류 역사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생성이 철학적 개념인 반면 진보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어떻게 진보란 이념이 나타났을까요? 생성 개념 속에 진보의 가장 구체적인 측면을 구제하려는 시도가 들어있습니다. 생성은 진보가 보통 천박한 진화 개념과 연결되는 것을 막아 줌으로써 더 깊이 있는 발전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개별자로서 규정된다면 진보와 생성 같은 문제들은 해명되지 못하거나 아니면 순전히 언어적 차원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외부 세계를 변형함으로써 동시에 스스로를 계발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의식적으로 지도하고 변형하는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성과 인간 본질을 실현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입니다. 정당은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도가니라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그 역할은 더욱 강조됩니다.
그람시는 이 ‘옥중수고’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성으로 위장되는 속류유물론자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을 가합니다. 그 중에서도 니콜라이 부하린의 이론을 비판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람시는 실증적인 과학인 마르크스주의를 부하린이 ‘사회학’의 위치로 떨어뜨리려는 어떠한 주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지배 계급을 구축하는 일은 하나의 세계관을 창출하는 일과 같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문화를 살찌우고 문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새로운 세계관 (Weltanschauung)의 창출과 독창적 세계관에 입각한 철학적 창출을 마르크스는 그것을 수행하였습니다. 마르크스가 창출했던 세계관은 레닌에 이르러서야 특정한 영토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에 이릅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을 비교하려는 것처럼 불합리합니다. 세계관 자체인 그리스도와 그 세계관의 조직가이자 행동가인 바울이 동등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동등하게 역사적 중요성을 지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바울주의’로 호칭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렇게 부르는 편이 정확한 명칭에 가까울 것입니다.
.
실천 철학은 근대 문화 형성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천 철학은 낡은 사고 방식을 변형하였습니다. 실천 철학과 여타의 철학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실천 철학 전개의 진보와 정체에 관해 쓴 로자 룩셈부르크의 글을 세밀히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로자에 따르면, 마르크스-엥겔스와 같은 새로운 철학의 창시자들이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요구와 나아가 다가올 시대의 요구보다 훨씬 앞서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보다 앞서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당대에는 쓸모가 없지만 훗날 언젠가 사용될 무기들을 비축해 둔 무기고를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인민대중들 사이에, 특히 종교의 영역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전(前) 자본주의 세계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 실천 철학은 외부로부터의 여러 경향과 제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천 철학은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실천 철학 자체의 독자적 지식인 집단을 형성하기 위해 가장 세련된 형태의 근대 이데올로기와 투쟁하는 일이며, 둘째는 중세적 문화에 젖어 있는 인민대중을 교육하는 일입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독일 철학과 프랑스 혁명 칼뱅주의와 영국 고전경제학, 근대적 인생관 전반의 근거가 되는 세속적 자유주의와 세속적 역사주의 등, 실천 철학은 과거의 모든 문화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실천 철학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간의 대비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진행되어온 지적, 도덕적 개혁 전반의 운동을 통틀어 그 최고 정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실천 철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을 합친 관계에 해당됩니다. 즉 실천 철학은 정치학이기도 한 철학이며, 철학이기도 한 정치학입니다. 실천 철학은 역사의 주도권을 박탈당한 부차적 사회집단의 세계관입니다. 이 집단은 국가의 장악 하에 있으며 사회 전체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될 때 비로소 지식인 집단의 발전에서 어떤 유기적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실천 철학은 19세기 전반기의 최고로 발달한 문화적 토양 속에서 싹텄으며, 이러한 문화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 독일 고전철학, 영국 고전경제학, 프랑스 정치이론입니다. 이들 세 운동은 하나의 새로운 통합을 위한 예비의 ‘이론적, 경제적, 정치적’ 계기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유물론과 관념론을 한쪽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태도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재가 보다 발전된 역사의 국면에 처해 있다고는 하나, 마르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보다 고차적인 수준에서 실천 철학 발전을 종합하는 작업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통일은 인간과 물질 사이의 모순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부여됩니다. 실천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헤겔주의의 개혁이자 발전입니다. 실천 철학은 일방적이고 광신적인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로부터 해방된 철학이며, 동시에 모순으로 가득찬 의식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개인인 동시에 전체 사회집단으로 이해되는 철학자는 스스로 모순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모순의 한 요소로 정립하고 이 요소를 인식의 원리, 나아가 행동의 원리로까지 고양합니다.
부하린은 ‘대중 독본’에서 실천 철학을 형이상학과 혼동함으로써 ‘물질’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속류 유물론에 빠집니다. ‘대중 독본’은 전문적 지식이 없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상식적인 철학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서 출발했어야 했습니다. 실천 철학을 제시하는 데에는 전통적 철학들과의 논쟁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대중 철학이 되고자 하는 본성상, 실천 철학은 논쟁적인 형식과 연속적인 투쟁의 형식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부하린처럼 실천 철학을 일종의 사회학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엥겔스가 비판한 바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세계관을 기계적인 공식으로 환원하려는 것이며 전(全) 역사를 한 손에 거뭐지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실천 철학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험은 도식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인과율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사회학 이론들은 전혀 인과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중 독본’에는 변증법에 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실천철학을 역사의 새로운 국면과 사유 세계의 발달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통합적이고 독창적인 철학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대 사유의 역사에서의 위대한 성취는 분명히 철학의 구체적인 역사화이며, 철학의 역사에의 동화입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63번째 책 사회학 부문 3번째 책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1926-37년에 걸처 출간한 옥중수고(Prison Notebook)’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