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3eiF6k5UXiE?si=5Ct8fu7AWEMD0v2Y
065.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65번째 책 사회학 부문 5번째 책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1936년에 출간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시작합니다.
케인즈는 영국의 거시 경제학자입니다. 이전의 학설들을 토대로 하여 ‘케인즈 경제학’이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창시해, 경기후퇴와 불황에 대해서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케인즈의 이론은 케인즈 경제학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거시경제학파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케인즈는 현대 거시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 인식 되었고, 20세기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케인즈는 1936년에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흔히 ‘일반이론’ 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기존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시장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유효수요이론을 제시했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동안, 케인즈는 경제적 사고의 혁명을 주도하면서, 자유 시장이 노동자들의 임금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한, 단기에서 중기적으로 자동적으로 완전 고용을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을 폐기시켰습니다. 그는 경제의 총지출인 총수요가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수준을 결정하며, 총수요가 부족하면 높은 실업률이 장기화될 수 있으며, 임금과 노동비용이 하향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가 자동으로 완전고용으로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케인즈는 경기 침체와 불황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재정 및 통화 정책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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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금융위기 이후 케인즈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근본적인 기둥인 자유무역에서도 돌아섰습니다. 그는 자유무역의 기초인 리카르도의 비교우위 이론의 초기 가정이 비현실적이라고 간주하며 보호무역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엔 선진 서양국가의 경제정책이 되었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나머지 서양국가들도 케인즈의 이론을 채택하게 됩니다. 케인즈의 영향력은 1970년대에 밀턴 프리드먼과 다른 통화주의자들의 케인즈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영국과 미국 경제를 괴롭힌 스태그플레이션의 결과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케인즈 경제학은 2007-2008년 금융 위기에 대응하여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 및 기타 정부 수반들이 수행한 경제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밀턴 프리드먼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맞아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케인즈학파는 몰락의 길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2007~2010년 금융 위기의 등장과 함께 케인즈 경제학이 다시 신케인즈주의 (New Keynesianism)로 반짝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1999년 타임지가 케인즈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에 선정하며, “정부가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을 써야 한다는 그의 급진적인 생각이 자본주의를 구했을지도 모른다”고 보도했습니다. 케인즈는 경제학자일 뿐만 아니라 공무원, 은행 이사, 지식인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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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선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생애(Life of John Maynard Keynes)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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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경제학의 아버지” 존 메이너드 케인즈 남작(John Maynard Keynes, 1st Baron Keynes of Tilton in the Country of Sussex, CB, 1883년 6월 5일 ~ 1946년 4월 21일)은 1883년 6월 5일 영국 케임브리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존 네빌 케인즈(John Neville Keynes, 1852-1949)는 경제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의 윤리학 강사였고,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 에이다 케인즈(Florence Ada Keynes, 1861-1958)는 지역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케인즈는 맏아들로 태어났고, 1885년에는 마가렛 네빌 케인즈-힐(1885-1970), 1887년에는 제프리 케인즈 경(Sir Geoffrey Keynes, 1887-1982)이 태어났습니다. 케인즈의 부모는 사랑이 많고 세심했습니다. 케인즈는 장학생에 선발되도록 전문적인 과외를 받았고, 젊은 시절과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어 그가 가난해졌을 때도 아버지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케인즈의 아버지 존 네빌 케인즈는 케인스보다 3년, 어머니 플로렌스 에이다 케인즈는 케인즈보다12년 더 살았습니다. 케인즈의 동생 제프리 케인즈는 저명한 외과 의사이자 학자, 애서가였습니다. 케인즈의 여동생 마거릿 힐은 노벨상을 수상한 생리학자 아치볼드 힐과 결혼했으며 저명한 사회개혁가였습니다. 그의 조카로는 생리학자인 리처드 케인즈(1919–2010)와 모험가이자 애서가인 쿠엔틴 케인즈(1921–2003)가 있습니다. 그의 조카딸 폴리 힐(Polly Hill, 1914-2005)은 경제인류학자이자 케임브리지 클레어 홀(Clare Hall)의 명예 펠로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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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다섯 살에 케인즈는 페르세 여학교의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산수에 재능을 보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몇 차례 장기 결석했습니다. 대신 집에서 가정교사와 어머니에게 과외를 받았습니다. 1892년, 여덟 살 되던 해에 그는 세인트 페이즈 예비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케인즈는 학급수석에 수학에도 뛰어났습니다. 1897년 케인즈는 이튼스쿨(Eton College)의 킹스 장학생(King's Scholarship)으로 입학하여, 다양한 과목에서 재능을 보였으며, 1901년에는 수학 부문 톰린 상(Tomline Prize)을 수상했습니다. 이튼에서 케인즈는 훗날 총리가 될 해롤드 맥밀런의 형인 댄 맥밀런에게서 생애 첫 '동성애'를 경험했습니다. 중산층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케인즈는 상류층 학생들과 쉽게 어울렸습니다. 1902년 케인즈는 이튼스쿨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로 진학해서 장학금을 받고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알프레드 마셜은 케인즈에게 경제학자가 되기를 간청했지만, 케인즈 자신은 무어의 윤리 철학체계를 공부했습니다. 케인즈는 무신론자였습니다. 1904년, 케인즈는 킹스 칼리지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개인휴가를 보낸 몇 달을 제외하고는 케인즈는 대학에서 비공식적으로 계속 토론에 참여하고, 철학을 더 공부하고, 유일한 공식 교육으로는 대학원생으로서 한 학기 동안 경제학 강의를 수강한 것이었습니다. 케인즈는 1906년에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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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는 자신이 관심을 같는 문제는 항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고, 관료들은 선행만 한다는 관료지상주의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케인즈는 제국권력이 절정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였고, 또한 전문가보다는 관료가 통치할 자격이 있다고 느꼈던 마지막 세대였습니다. 19세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영국에서는 잘 교육받은 기득권층 범생이들이 모든 분야의 문제를 잘 다루고 잘 해결한다는 믿음이 팽배했습니다. 1906년 10월, 케인즈는 제국인도 사무소의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일을 즐겼지만 1908 년에 지루해졌고 케임브리지로 돌아가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 (Alfred Marshall)과 아서 피구(Arthur Pigou)가 사적으로 만든 경제학 강의를 통해 확률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공무원을 사임했습니다. 그는 1909년에 킹스 칼리지의 펠로우가 되었습니다. 1909년 케인즈는 당시 세계 경제 침체가 인도에 미친 영향에 대해 경제저널(The Economic Journal)에 첫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토론 그룹인 정치경제학 클럽(Political Economy Club)을 설립했습니다. 케인즈는 과외개인교습을 하여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1911년 케인즈는 경제저널(The Economic Journal)의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1913년 그는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인도 통화 및 금융(Indian Currency and Finance)’을 출판했고, 그 덕으로 케인즈는 ‘인도 통화 및 금융에 관한 왕립 위원회(Royal Commission on Indian Currency and Finance)’ 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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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케인즈가 경제 이론을 실제 문제에 적용하는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케인즈의 전문성을 활용했습니다. 1914년 공식적인 공무원은 아니었지만, 전쟁이 시작되기 몇 일 전에 케인즈는 정부의 요청으로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은행가들은 금본위제 중단을 추진해 왔지만, 케인즈의 조언으로 당시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재무장관은 금본위제가 중단되면 혼란이 야기될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1915년 1월 케인즈는 재무부의 공식 정부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의 책임 중에는 전쟁 중 영국과 대륙 동맹국 간의 신용 조건을 설계하고 희소한 통화를 획득하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케인즈는 그의 업무권한을 이용해 스페인계 지폐 페세타를 사 모으는 화폐투자에 성공해서 치부를 했기 때문에 ‘외환투자의 전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16년 징병제가 도입되자 케인즈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는데, 그 신청은 정부 업무를 계속하는 조건으로 면제를 받았습니다. 1917년 국왕 탄신일 기념식에서 케인즈는 전시 공로를 인정받아 바스 훈장(Order of the Bath of the Bath)의 수상자로 선정되어 제국의 충성맨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케인즈는 1919년 베르사유 평화 회담에서 재무부의 재정 대표로 임명되었습니다. 케인즈는 이 파리 베르사유 평화 회의(1919-1920)의 조약의 경험이 미래를 전망하는 데 영향을 미쳤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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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의 주요 관심사는 독일의 보상금이 너무 높게 책정되어 무고한 독일 국민에게 충격을 주고, 국가의 지불 능력을 손상시키며, 다른 나라로부터 수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져 독일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제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케인즈는 불행하게도, 1918년 쿠폰 선거로 등장한 보수세력이 독일로 부터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케인즈를 고위급 회담에서 파면하고 대신 판사 섬너 경(Lord Sumner)과 은행가 쿤리프 경(Lord Cunliffe)을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케인즈는 직책없이 뒤에서 독일보상금을 낮추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리 회의의 세 명의 주요 인물은 영국의 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었습니다. 로이드 조지만이 케인즈가 직접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1918년 선거 전까지 그는 케인즈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조했지만, 선거 운동에는 독일을 가혹하게 처벌하겠다는 공약만 유권자의 호응을 얻을 수 있어서 그의 대표단은 독일로 부터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는 파리 회담에서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일 시민들이 필요한 식량을 공급함으로써 케인즈의 의견을 어느 정도 반영했습니다. 프랑스의 클레망소는 안보를 이유로 영국보다 많은 배상금과 가혹한 배상을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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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은 처음에는 독일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대우를 선호했는데, 그는 너무 가혹한 상황이 극단주의의 발흥을 촉진할 수 있다고 우려했고, 독일이 보상금을 지불할 수 있는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로이드 조지와 조르주 클레망소는 우드로 윌슨에게 압력을 가해 배상 법안에 연금까지 포함시키게 했습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케인즈는 가난한 독일과 중부 유럽국들을 도와주고 세계 경제에도 도움이 될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전쟁 부채의 급진적인 탕감을 포함했는데, 이것은 전방위적으로 국제 무역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지만, 동시에 유럽 재건 비용의 3분의 2 이상을 미국에 떠넘기는 것이었습니다. 로이드 조지는 그것이 영국 유권자들이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 계획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최대 채권국이었고, 이 무렵 우드로 윌슨은 가혹한 평화협정의 장점을 믿기 시작했고, 미국이 이미 과도한 희생을 치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케인즈의 노력은, 케인즈를 친독일파로 혐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파리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예상되는 피해에 대한 케인즈의 분석은 1919년에 출간한 저서 ‘평화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에 실려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경제적 분석 외에도 독일을 좀 봐주자는 독자의 연민에 호소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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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의 추종자들은 독일 경제가 1923년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을 때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재앙에 대한 케인즈의 예측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루스 헤니히(Ruth Henig)의 주장에 따르면, 파리 평화 회담의 경제적 측면에서는 이 조약이 독일이 한 짖에 비해 독일에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았으며, 파리 회담 토론에서는 의무와 손해가 불가피하게 강조되었지만, 오히려 독일의 배상 일정이 실제로 수행되던 방식을 수정함으로써 독일을 도와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독일은 배상금의 극히 일부만 지불한 적도 있었습니다. 역사학자 스티븐 A. 슈커(Stephen A. Schuker)는 1919-33년 미국의 독일에 대한 ‘지원’에서 미국 차관으로 유입된 자본이 독일의 상환액을 초과했기 때문에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셜 플랜의 4배에 해당하는 지원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1920년대에는 학문적 업적 외에도 케인즈는 저널리스트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자신의 이론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런던에서 금융 컨설턴트로 일했습니다. 1924년 케인즈는 그의 전 가정교사 알프레드 마셜의 사망 기사를 썼는데, 조지프 슘페터는 이 기사를 “내가 읽은 과학가의 가장 빛나는 삶”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922년 케인즈는 조약의 개정을 통해 독일의 배상금 삭감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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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는 1923년 ‘화폐 개혁에 관한 소책자(A Tract on Monetary Reform)’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디플레이션 정책을 공격했는데, 이는 국가가 자국 통화 가치 하락을 허용하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디플레이션을 피하면서 국내 물가의 안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영국은 1920년대 내내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고, 케인즈는 영국의 수출품을 더 저렴하게 만들어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주장했습니다. 1924년부터 그는 정부가 공공사업에 지출함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재정 대응을 주장했습니다. 케인즈는 영국과 같은 나라들이 금본위제에 참여하는 것이 더 이상 순이익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재무부와 영국은행은 여전히 금본위제를 지지하고 있었고, 1925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도 금본위제를 다시 확립했는데, 이는 영국 산업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케인즈는 이에 대응하여 ‘처칠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Mr. Churchill)’를 썼고, 1931년 영국이 마침내 금본위제를 포기할 때까지 금본위제에 대한 반대 주장을 계속했습니다. 영국을 제외하면 케인즈의 관심은 주로 미국에 쏠려 있었습니다. 1931년, 그는 당시 주류에 대한 대안적인 경제적 견해의 미국 최고의 중심지였던 시카고에서 반순환적 공공 지출에 대한 그의 견해로 상당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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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통 경제 여론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 대공황을 완화하기 위한 재정 개입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1933년 말, 케인즈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제안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개인강습을 하게 되어, 1934년에 루즈벨트 대통령과 케인즈는 서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케인즈의 노력이 미국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이후부터였습니다. 케인즈의 대표작인 ‘고용, 이자 그리고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은 193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뒤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이 ‘일반이론’은 종종 현대 거시 경제학의 기초로 간주됩니다. 1930년대 내내 케인즈의 의견에 동의한 고위 미국 경제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는 곧 널리 받아들여졌고, 앨빈 핸슨과 같은 저명한 미국 교수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일반이론’에 동의했습니다. 케인즈 자신도 1937년 심장마비를 일으켜 오랜 기간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이론’의 발표 이후 이어진 이론적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이먼 민스키(Hyman Minsky)와 포스트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은 그 결과 케인즈의 이론이 고전 경제학자들과 타협하거나 IS-LM 모델과 같은 수학적 모델로 케인즈의 이론을 표현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고 희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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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는 1920년대까지 영국의 두 주요 정당 중 하나였던 자유당의 평생 당원이었으며, 1916년까지만 해도 종종 정부에 자문권을 행사했습니다. 케인즈는 1906년경부터 선거에서 자유당의 선거운동을 도왔지만, 1920년에 세 차례에 걸쳐 출마를 요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출직은 거부했습니다. 1926년 로이드 조지가 자유당의 지도자가 되면서 케인즈는 당의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무렵 자유당은 성장하는 노동자 중심의 노동당에 의해 제3당으로 밀려났습니다. 1939년 케인즈는 케임브리지 대학의석을 가진 무소속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졌습니다. 연로한 토리당 의원의 병환으로 인해 보궐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고, 막달레나 대학의 교장은 케인즈가 입후보하면 주요 정당 중 어느 곳도 후보를 내지 않키로 했지만 케인즈는 자유계약선수(FA)로 남는다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 같아 대학의석 무소속 출마를 거절했습니다. 케인즈는 1939년에 건강이 회복하기 시작했지만,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그의 전문성의 여력은 주로 경제학의 실용적인 측면, 즉 전쟁 노력을 위한 최적의 자원 배분 보장 문제, 미국과의 전후 협상,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제시된 새로운 국제 금융 질서에 집중되었습니다. ‘일반이론’과 그 이후의 저서에서, 케인즈는 특히 1930년대 대공황 기간 동안 자본주의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 사회주의자들에게 대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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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본주의가 국내외적으로 관리된다면, 조정된 국제 케인즈주의 정책, 국가들의 이익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는 국제 통화 시스템, 높은 수준의 무역의 자유와 함께, 이 관리 자본주의 체제는 국가 간의 갈등보다는 평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의 창설에 기여했고, 이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과 ‘세계무역기구(WTO)’의 창설에 기여했던 국제경제기구와 정책에 대한 그의 계획은 이 비전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케인즈가 차입에 의한 재원을 마련하는 무책임한 정부 지출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시카고 경제학파의 구성원들에 의해, 널리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케인즈는 1940년에 출판된 ‘전쟁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에서 전쟁 노력은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적자 지출보다는 더 높은 세금과 노동자들이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강제저축에 의해 조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1년 9월, 그는 영국은행 이사회 임원을 제안받아, 이듬해 4월부터 임기를 수행했습니다. 1942년 6월, 케인즈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왕 탄신일 기념식 (King's Birthday Honours)’에서 세습 훈장을 받았습니다. 7월 7일 그의 직함은 “서식스 카운티의 틸튼의 케인즈 남작”으로 관보에 게재되었고, 그는 자유당 의석에 앉아 귀족 상원의원에 취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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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 보이기 시작하자 케인즈는 영국 대표단의 지도자이자 세계은행 위원회 의장으로서 1944년 중반 미국 뉴햄프셔 브레튼우즈에서 44개국이 참여해서 금 1온스를 35미국달러로 고정하는 일명 브레튼우즈 체제를 수립하는 협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국제청산연합(International Clearing-Union)’에 관한 케인즈의 계획은 화폐 관리를 위한 급진적인 제도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공통의 세계 통화 단위인 방코르(bancor)와 새로운 글로벌 기구인 세계 중앙 은행(World Central Bank)과 국제 청산 연합(International Clearing Union)의 창설을 제안했습니다. 케인즈는 이들 기관이 국제 무역 및 결제 시스템을 관리하고, 각국이 상당한 무역 적자나 흑자를 피할 수 있도록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협상력이 더 강하다는 것은 협상 결과가 해리 덱스터 화이트의 보다 보수적인 계획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훗날 세계은행(World Bank)과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으로 알려진 이 두 개의 새로운 기구는 주로 미국의 비전을 반영하는 타협안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국가가 대규모 무역 흑자를 피할 인센티브는 없습니다. 대신,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할 부담은 계속해서 적자 국가들에게만 전가될 것인데, 케인즈는 적자 국가들이 자국민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가하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가장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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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케인즈는 최종 합의안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기뻐하면서, 그 기관들이 그들의 설립 원칙에 충실하다면 인간의 형제애는 실현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케인즈는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협상에서 영국을 계속 대표했습니다. 그는 영국 경제의 재건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미상환 채무에 대한 특혜 조건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잠시 동성애자였던 케인즈가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하게된 사연을 살펴보겠습니다. 1921년, 케인즈는 러시아의 유명한 발레리나이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의 스타 중 한 명인 리디아 로포코바와 이성애에 빠졌습니다. 구애 초기에 그는 로포코바와 함께 연하남 세바스찬 스프로트와 동성애 불륜을 유지했지만 결국 로포코바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아름다움과 두뇌의 결혼, 아름다운 로포코바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둘은 1925년에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이 케인즈에게 “새로운 초점, 새로운 정서적 안정감, 그리고 그가 결코 지치지 않는 순수한 기쁨”을 주었다고 합니다. 케인즈의 블룸즈버리 친구들 중에서, 로포코바는 적어도 처음에는 그녀의 매너, 대화 방식, 그리고 소위 겸손한 사회적 출신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표면상의 원인들 중 마지막은 특히 바네사와 클라이브 벨,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 (1925)’에서 울프는 레지아 워렌 스미스의 캐릭터를 로포코바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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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아이를 갖기를 바랐지만 그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리디아 로포코바는 케인즈보다 35년을 더 살다가 1981년에 사망했습니다. 케인즈가 런던에 있는 동안 고든 스퀘어 (Gordon Square) 46번지에 머물렀습니다. 결혼 후 케인즈는 브라이튼 근처 시골에 있는 농장인 틸튼 하우스(Tilton House)를 장기 임대하여 케인즈가 런던에 있지 않을 때 부부가 머물렀습니다. 케인즈는 궁극적으로 개인적 부를 축적한 성공적인 해외, 무역, 화폐를 포함한 종합적 투자자였습니다. 그의 자산은 1929년 월 스트리트 붕괴 이후 거의 사라졌지만 곧 회복시켰습니다. 1946년 케인즈가 사망했을 때 그의 순자산은 50만 파운드에 조금 못 미쳤으며, 이는 2023년 기준 23,000,000파운드에 해당합니다. 케인즈는 1920년대부터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기부금을 관리했는데, 처음에는 시장 타이밍에 따른 전략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배당금을 많이 지급하는 중소기업의 상장 주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전환했습니다. 당시에는 주식이 고위험으로 여겨졌고 수백 년 된 기부금은 전통적으로 농지와 채권과 같은 고정 수입 자산에 투자되어 왔기 때문에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케인즈는 소수의 자산을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그의 노련한 경영 덕분에 기부금의 이 부분은 기부금 자산의 대다수가 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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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포트폴리오의 구성 요소는 25년 동안 매년 평균 6%에서 8%까지 영국 주가지수를 능가하여 워렌 버핏과 조지 소로스 같은 투자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케인즈는 또한 투자 다각화의 선구자로 여겨지는데, 그는 “일반적인 변동이 있을 때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대 위험”이 있는 자산을 보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또한 영국 이외의 주식에 실질적으로 투자하여 본국 편향을 피한 초기 국제 투자자였습니다. 케인즈는 투자를 생명 보험 기금에 적용한 최초의 투자자였습니다. 케인즈의 매력은 그가 어디를 가든 대체로 호평을 받았고, 원한을 품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브레튼우즈 협상 종결식에서 케인즈의 연설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케인즈가 이룩한 업적의 규모를 인정하여 국제관계에서 보기 드문 기립박수로 받았습니다. 타임즈에 실린 케인스의 사망 기사에는 “빛나고, 찬란하고, 발랄하고, 열정적이고, 동성애자이며, 무례한 농담으로 가득 찬 그 남자가 있다. 그는 공동선의 대의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찬사가 실렸습니다. 케인즈는 일생 동안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의 재정을 늘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금미국달러본위 브레튼우즈 체제의 수립을 도왔던 그는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될 국제 통화 체제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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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케인즈는 미국 조지아 주 사바나에서 영미 차관 협상을 하며 그 협상에서 미국으로부터 영국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는 그 과정을 “가옥한 지옥”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몇 주 후, 케인즈는 1946년 4월 21일 62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이스트 서식스 주 브라이튼 근처에 있는 농장인 틸튼 하우스(Tilton House)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골이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의 지하실에 안치되기를 원했지만 그 소원에 반하여, 그의 유골은 틸튼 하우스(Tilton House) 자택 위의 다운스에 뿌려졌습니다. 케인즈의 초기 낭만적이고 성적인 관계는 전적으로 남성과의 관계였습니다. 케인스는 이튼스쿨에서 처음으로 동성애에 입문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동성애 관계를 지속했습니다. 케인즈의 초기 파트너로는 딜리 녹스(Dilly Knox)와 다니엘 맥밀란(Daniel Macmillan)이 있습니다. 케인즈는1901년부터 1915년까지 그의 많은 동성애적 만남을 표로 정리한 별도의 일기를 썼습니다. 케인즈와 맥밀란과의 긴밀한 관계는 맥밀란의 회사가 처음으로 그의 소책자 ‘평화의 경제적 결과’의 출판으로 이어졌습니다. 케인즈 반대론자들은 케인즈의 동성애와 후손이 없기 때문에 케인즈의 이론은 장기적 파급 효과에 관심이 없는 폭탄돌리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케인즈의 친구들은 케인즈가 말년에 여성들과도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하여 케인즈가 꼭 동성애자만이 아닌 양성애자하고 옹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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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올리버 스트래치와 결혼 한 레이 코스텔로는 케인즈의 초기 이성애 상대였습니다. 1906년, 케인즈는 “나는 레이와 약간 사랑에 빠진 것 같지만, 그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심각하진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케인즈는 훗날 오직 던컨 그랜트만에게서만 아름다움과 지성을 발견할수 있었다고 ‘동성애 최고’의 회고를 남겼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케인즈가 나치즘에 동조했고, 반유태주의자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케인즈의 사적인 편지 중 일부가 반유태주의적인 초상화와 묘사가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특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나치 점령하의 오스트리아로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영국에 거주할 수 있도록 로비를 벌이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케인즈는 시온주의의 지지자였으며,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유태인과 다른 소수 민족에 대한 나치의 공격적인 성향이 명백해지자, 케인즈는 나치즘에 대한 혐오를 분명히 했습니다. 평생을 평화주의자로 살아온 그는 처음에는 나치 독일의 평화적 봉쇄를 선호했으나,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여전히 유화책을 주장하고 있을 때 강력한 반나치 결의안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후, 그는 좌파가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기 위해 정신을 잃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좌파의 지식인들은 나치의 침략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막아야 한다고 가장 큰 소리로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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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의 내용(Contents of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케인즈의 대표작인 '고용, 이자 그리고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은 193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THIS book is chiefly addressed to my fellow economists. I hope that it will be intelligible to others.” 케인즈가 머리말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 책은 주로 나의 동료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접할때 많이 쫄았습니다. 그런데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수 있는 책 임을 알았습니다. 이 일반이론(General Theory)은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되는 서적으로 현재에도 재정정책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서적입니다. 케인즈는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주류였던 경제학파들을 고전학파로 총칭해 세이의 법칙과 자유방임주의를 부정하였고, 유효수요의 원리와 그에 근거한 정부의 공공투자 유효성, 유동성, 선호설, 승수효과의 이론을 제창해 기존의 고전학파 경제학 체계를 뒤집으면서 케인즈 경제학 체계를 수립했습니다. 이를 케인즈 혁명이라 하며, 케인즈 경제학은 그 후 거시경제학으로 발전했습니다. 케인즈 이전의 거시경제학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세이의 법칙에 의하면 노동은 항상 완전고용수준에 있어야함에도 현실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실업을 케인즈는 주목했습니다. 케인즈는 이 일반이론에서 당시의 주류경제학의 결론과 현실사이의 불일치를 비판하고 실업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제시하며 노동의 완전고용을 이루기 위한 정책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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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케인즈의 애제자 데이비드 벤수산-버트(David Bensusan-Butt)가 연구하고 색인을 붙였습니다. 이 연구는 케인즈가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던 개입주의 정책입니다. 비록 케인즈가 그의 서문에서 그의 일반이론은 실전에 적용하는 것은 부차적이라 했지만, 이 개입주의 정책이론이 출판된 상황은 그의 제안이 1930년대의 진로를 형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케인즈는 조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세상에 소개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통화 가치 하락에 의한 과세”라며, 이 숨겨진 세금은 그 가치의 기준을 신중하게 결정해야하고, 디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 사이의 중간 정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해석은 대공황 이후 학계에 스며든 국가의 경제통제를 말하는 겁니다. 이 ‘일반이론’은 정부의 간섭에 구애받지 않는 한 시장은 자연스럽게 완전고용을 한다는 초기의 신고전파 경제 패러다임을 부정했습니다. 이로써 케인즈는 옛 스승들인 마셜과 피구에 대항했습니다. 케인즈는 고전 이론이 19세기에 존재했던 특정한 조건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경우”라고 믿었고, 그의 이론은 “일반적인 이론”이었습니다. 고전 경제학자들이 믿었던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를 통하여 형성되는 가격과 거래량이 최선이라는 고전적 자유시장경제는 일반 상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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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경제는 사려는 수요와 팔려는 공급이 있습니다. 가격이 오르면 사려는 수요는 줄어들지만 팔려는 공급은 늘어나며, 그로인해 가격이 떨어지면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재화의 가격은 이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수준에서 결정되고 경제의 참여자들은 이 시장 가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누구도 물건을 시장가격보다 싸게 사고 싶다고 해서 싸게 살 수도 없고, 물건을 시장 가격보다 비싸게 팔고 싶다고 해서 비싸게 팔 수도 없습니다. 이베이에서 중고품을 팔 때도 거래하려는 물건이 최근 얼마에 거래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건 상식입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 즉 노동의 가격 역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노동자들이 받을 수 있는 균형 임금 수준이 결정됩니다. 이 균형 임금 수준에서 고용될 수 있는 노동자들은 전부 다 고용되기 때문에 실업은 예외적 경우 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고전파 경제학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못구하는 실업자들은 늘 존재하고, 불황이 되면 실업자의 수는 더욱 늘어납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 실업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돌렸습니다. 노동 시장에서 형성된 균형 임금 수준을 순순히 받아들여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감지덕지하고 일자리를 찾을 것이지, 감히 노조 같은 단체를 결성하거나 최저임금을 인상해달라고 하니 일자리를 줄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수요와 공급의 균형에 대하여 이곳저곳에서 들어본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반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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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케인즈는 이 ‘일반이론’을 통해서 이러한 상식적인 고전파 경제학의 실업이론을 통열하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를 재검토하기 위해서는 고전파의 임금 결정 이론을 좀 더 자세히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케인즈는 과연 노동자들이 경제의 실질 임금을 마음대로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습니다. 아무리 노동자가 봉급을 많이 받고 싶더라도, 결국 자본가가 그 임금을 주고 난 이후에도 이익이 나야 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습니다. 고전파 경제학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줄 의향이 있는 화폐 임금은 노동 1단위를 더 투입하여 추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재화를 팔아서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인 노동의 한계생산가치와 일치하는 수준에서 결정됩니다. 이는 화폐임금이 노동의 한계생산에 따르는 물가[w(화폐임금) = p(물가) * MPL(노동의 한계생산)]라는 노동의 수요곡선으로 설명할수 있습니다. 이것을 수학적 식으로 다시 쓰면 실질임금은 노동의 한계생산[w/p (실질임금) = MPL (노동의 한계생산)]이 됩니다. 이는 기업가는 생산성인 노동의 한계생산 이상의 실질임금을 노동자에게 주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는 화폐임금(w)은 더 달라고 할 수 있어도 생산한 물건의 시장가격 내지는 물가(p)를 죽었다 깨나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즉, 노동자는 화폐임금(w)을 가지고서만 자본가와 임금협상을 하는 것이지 물가를 고려한 실질임금(w/p)을 협상 대상으로 삼지도 삼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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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노동자들은 화폐임금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는 ‘임금의 하방경직성’의 성향이 있지만, 반대로 물가가 오른다 해서 이에 비례하여 임금수준을 바로 높여달라고 조르거나 구직활동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화폐임금(w)과 실질임금(w/p)은 비슷하게 움직이는 걸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마치 노동자들이 고용시장에서 화폐임금을 넘어 실질임금까지 마음대로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화폐임금(w) 상승 자체가 물가(p) 상승 요인이 되므로 화폐임금(w)이 올라도 실질임금(w/p)은 크게 안변할 가능성이 크며, 현실에서 화폐임금과 실질임금은 오히려 반대로 움직이는 경향도 있음을 케인즈는 지적합니다. 게다가 불황이라 해서 노동자들이 더 과격하게 변하는 것도 아니니 대량실업을 노동자 탓으로 돌리는 건 더욱 어불성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케인즈는 고전파의 논리를 가지고 고전파를 반박해 나갑니다. 그렇다면 이제 케인즈 본인이 생각하는 실업의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케인즈는 이 실업 문제에는 더욱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더 큰 그림을 보려면, 만일 고전파 경제이론이 옳다고 치고 이 노동의 시장 균형 가격을 계속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사고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파가 이야기한 대로 노동시장에서의 균형에서 임금이 결정되고 자원이 최적의 비율로 깔끔하게 배분된 후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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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든 자본가든 사람들은 벌어들인 돈을 소비하고, 이 소비가 있어야 다음에 또다른 시장이 열리고 경제는 계속 돌아가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때 발생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벌어들인 소득을 다 쓰지 않고 장농에 보관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업가가 벌어들일 미래의 매상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기업가가 노동자를 고용하려는 수요 역시 전보다 더 줄어들게 됩니다. 이는 우하향하는 노동 수요 곡선 그 자체가 점점 더 아래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01.jpg - 경제 전체의 소득 수준 감소에 따른 개별기업의 고용량과 임금 수준 변화
이렇게 되면 고용량과 균형 임금 모두 하락합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만 소비되는 상황에서, 노동이 주류 고전경제학의 가스라이팅 조언에 따라 또다시 노동 공급과 노동 수요를 일치시키는 균형점으로서의 균형임금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는 노동이 전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계속 ‘자유방임’하다보면, 소비가 하락하게 되고, 기업의 매상이 감소하여, 노동에 대한 수요가 저하하게 되어, 균형 임금이 하락하고, 소비의 하락이 악순환처럼 계속되고 경제는 불황의 늪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개별 경제주체들은 분명 경제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위기가 초래되는 겁니다. 앞서서 다른 조건이 같다면 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균형 임금이 결정된다고 이야기 했는데, 이 다른 조건인 경제 전체의 산출인 소득이 계속 변하므로 균형임금과 균형 고용량 역시 계속 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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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여파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케인즈의 dynamic한 동태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케인즈는 사람들이 화폐 임금의 저하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이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악순환에 빠지지 않게 하는 안전핀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케인즈는 경제 전체의 수요와 공급 총량을 보기 위해서, 전통적인 미시경제학에서의 계별 경제주체가 직면하는 수요와 공급이 아닌, 경제 전체의 총수요곡선과 총공급곡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총수요곡선은 각각의 고용 수준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벌어들인 소득으로 얼마를 소비하는지의 합계를 나타냅니다. 일을 전혀 하지 않을 때도 기본적인 소비는 해야 하니 총수요곡선은 고용량 제로에서도 positive 수준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고용량이 늘면서 소득 수준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소비를 계속 늘릴 터이니 총수요곡선은 고용량증가에 따라 우상향하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벌어들이는 돈을 전부 다 소비하지는 않기 때문에 총수요가 증가하는 폭은 실질소득 증가인 고용량증가 폭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그러므로 총수요곡선은 45도 미만의 기울기로 우상향합니다. 즉, 이 총수요곡선은 특정 고용량이 달성될 때 경제 내 사람들 전체가 일을 해서 번 소득을 가지고 얼마나 지출할 수 있는지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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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G. 헤이스의 ‘케인즈 경제학을 찾아서’에 의하면, 총공급곡선은 반대로 생산자의 입장에서 그려집니다. 기업가는 주어진 고용량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써서 재화를 생산하게 될 것인데, 총공급곡선은 각각의 고용량만큼 노동력을 고용하여 재화를 생산하여 판매할 때, 사람을 이 정도 써서 사업을 하려면 최소 이정도는 벌어야 수지가 맞는다라는 수준을 표시해주는 궤적입니다. 다른 말로 총공급곡선은 기업의 총공급가격이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은 생산량을 늘리면 늘릴 수록 한계비용이 체증하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고용량과 생산량이 늘면 늘 수록 기업들은 그 체증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매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이 총공급곡선은 우상향하되 그 기울기는 점점 더 가팔라지는 모습을 띠게됩니다. 종국적으로 완전고용상태에 도달하면 노동력을 추가로 더 투입하더라도 아예 생산이 안늘어나는 상태가 되므로 결국 총공급곡선은 수직에 가깝게 될겁니다.
02.jpg - 고용 수준에 따른 총수요, 총공급, 유효수요의 결정
이 총공급곡선과 총수요곡선이 만난 점에서 경제의 균형 고용량과 산출량이 결정됩니다. 이 때 소득인 산출량을 케인즈는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라 정의 합니다. 만일 유효수요에 해당하는 고용량에 현재 고용량이 미치지 못할 경우 기업가는 고용을 추가적으로 늘리면 얻을 수 있는 총수요인 수입이 받아야 할 최소 가격인 총공급보다 많으므로 고용을 늘려 더 많이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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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기업가는 유효수요에 해당하는 고용량에 도달할 때까지 고용을 계속 늘리게 됩니다. 현재 고용량이 유효수요에 해당하는 고용량을 초과하고 있다면 같은 논리로 기업은 유효수요에 이를 때까지 고용량을 계속 떨어뜨리려고 할 겁니다. 결국 총공급과 총수요가 일치하는 수준에서 균형 고용량이 결정되고 그 균형 고용량에서의 산출 또는 소득 수준이 바로 유효수요가 되는 겁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경제 주체들은 버는 돈만큼 다 쓰지는 않기 때문에 총수요곡선은 기울기가 그만큼 완만해지므로, 완전고용 수준에 못미치는 수준에서 총수요곡선이 총공급곡선과 교차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일 거라고 케인즈는 생각합니다. 총수요곡선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그 기울기인 ‘한계 소비성향(MPC)’입니다. 소비자들이 벌어들이는 돈 중 얼마를 쓰는지를 의미하는 이 소비성향은 경제의 불평등 정도나 기타 문화적인 특징 등에 의해서 결정되므로 단기적으로는 거의 고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고용 수준으로 유효수요 고용량을 올려 실업을 없애려 한다면 기존의 소비수요 이외에 투자수요가 추가적으로 더 필요합니다. 즉 투자수요가 더해지게 되면, 총수요곡선 그 자체가 위로 움직여 균형 고용량과 유효수요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설비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하면 기계를 사 와야 하므로 발주를 받은 기계 제조 회사의 고용이 증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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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용이 증가하게 되면 그만큼 사람들이 월급을 많이 받고, 그 중 일부를 저축하고 일부를 소비하게 되며, 이러한 소비의 증가는 또다른 소득의 증가와 소비의 증가를 다시 야기합니다. 이것이 케인즈가 말하는 승수효과입니다. 투자가 1 늘어나면 경제 전체의 소비 및 산출은 케인즈의 승수효과식[1+MPC+MPC^2+MPC^3+MPC^4... = 1/(1-MPC)] 만큼 커집니다. 즉 소비성향이 높으면 높을 수록 ‘메아리가 잘 울리므로’ 승수효과 또한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프상으로 보면, 총수요곡선이 가파르면 가파를 수록 투자 증가로 총수요곡선이 상방 이동할 때 총수요와 총공급의 교차점인 유효수요가 더욱 큰 폭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과소 소비로 인하여 발생하는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면 투자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고, 이 투자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정부가 나서서 정부지출을 늘리든지 투자를 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정부개입이론의 주장입니다.
03.jpg - 투자의 증가와 이에 따른 유효수요 증가와 완전고용의 달성
과소 소비가 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케인즈 이전에 맬서스를 비롯한 많은 선대 경제학자들이 이미 발견한 것이기도 하고, 케인즈 본인 역시 이 책의 곳곳에서 이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쎄(Say)와 같은 기존의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일단 벌어들인 돈은 나중에 언젠가는 다 소비될 것이니 ‘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는 ‘쎄의 법칙’으로 반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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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가 소비되지 않고 저축된다 하더라도 그 저축이 장농보관이 아니고 이자를 기대한 저축이라면, 이 저축은 경제 전체적으로 자금의 공급원이 되고 저축이라는 자금 공급 증가는 이자율을 낮추어 투자를 늘릴 것이기 때문에 자유 방임 상태에서도 충분히 경제 전체적으로 완전 고용이 달성될 수 있다는 주장도 매우 설득적으로 들립니다. 이것이 바로 고전파 경제학의 대부자금설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전파 경제학의 논리를 반박하지 못하면 케인즈의 거시 이론은 반쪽짜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케인즈 본인의 참신한 시각이 들어간 ‘일반이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대부자금설을 반박하는 이 책의 중반부입니다. 그는 저축의 증가가 저절로 투자를 늘릴 거라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자본의 한계효율’과 ‘유동성선호’라는 두 가지 개념을 도입합니다. 유동성 선호가 클 경우 사람들이 저축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이자율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이자율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미래의 수익에 대한 전망이 어두워지면 자본의 한계효율이 떨어지게 되어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을 수 있으니 고전파의 주장처럼 저축이 바로 투자로 연결되기 힘듭니다. 이것이 고전파의 대부자금설에 대한 케인즈의 주된 반박 논리입니다. 자본의 한계효율이란, 기업가가 현재 기계를 한 대 더 살지 말지 결정할 때, 투자에 들인 돈에 대비하여 미래에 얼마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지를 따져 보는, 즉 자본 투자의 예상수익률이라 할 수 있는 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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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칙(Victoria Chick)의 ‘케인즈 이후의 거시경제학 (Macroconomics after Keynes)’에 의하면, 이를 방정식으로 간단하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방정식을 풀어서 구해야 하는 미지수 d가 ‘자본의 한계효율(Marginal Efficiency of Capital)’입니다. 유의할 것은 기계를 사는 건 현시점이지만, 그 기계를 돌려서 만든 제품을 팔아서 이익을 내는 건 미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기계의 공급가격(Pk)은 현재 기준인 반면, 이윤(πi)은 미래의 각 시점에 대한 기업가의 예상치입니다. d로 표시되는 이 ‘자본의 한계효율’은 투자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일 것입니다. 투자가 계속 늘어나다 보면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수익(πi)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며, 너도 나도 투자를 위하여 기계를 사다보면 기계 가격(Pk)이 결국 올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도해화하여, X축을 투자량, Y축을 수익률로하고 자본의 한계효율을 그려보면 우하향하는 궤적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만일 현재 경제 전체의 투자량 수준에서 자본의 한계효율이 이자율보다 높다면, 기업가들은 이자놀이를 하는 것보다 기계를 사서 돌려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이 더 유리하게 되므로 투자를 늘릴 것이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투자가 감소할 겁니다. 그러므로 경제의 총 투자규모는 현행 시장이자율이 자본의 한계효율과 같아지는 점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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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jpg - 자본의 한계효율과 이자율 사이의 균형으로서의 투자량 결정
이는 단순히 이자율이 낮다 해서 기업가가 투자를 늘리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자율이 낮아지면 균형 투자량이 늘어나겠지만, 이자율이 조금 떨어진다 하더라도 기업가들이 비관적 전망을 가지게 되면 자본의 한계효율 곡선 자체가 아래로 이동해 버리므로 투자가 늘어나지 않거나 오히려 감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의 한계효율은 기업가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는 심리적인 요인을 반영하므로 그만큼 예측이 어려운 것이며, 케인즈가 기업가의 투자는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에 좌우된다고 표현한 것도 이때문입니다. 게다가 자본시장의 도입으로 인하여 이제 투자자들은 대박의 기회와 쪽박의 위험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는 자본의 한계효율 자체가 언제든지 급변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시장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투자금을 쉽게 회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경제주체들은 투자 그 자체를 꺼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경기를 유지하려면 기업가가 자신이 만든 물건이 앞으로도 잘 팔릴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하는 것이 이자율을 낮추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케인즈는 이 자본의 한계효율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경제주체들의 미래에 대한 예상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모델에 제대로 반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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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한계효율과 함께 투자를 결정하는 또다른 변수인 이자율에 대한 개념 또한 케인즈는 근본적으로 재정의합니다. 이제까지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은 자금의 수요인 투자와 자금의 공급인 저축 사이의 균형점에서 이자율이 결정되며 저축이 늘어나면 자금 공급이 늘어 이자율이 떨어지고 투자도 늘어난다는 대부자금설을 신봉해 왔지만, 케인즈는 이자율을 결정하는 다른 중요한 변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동성 선호’입니다. 대표적인 유동성자산은 물론 현금입니다. 이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로 이자가 발생하지는 않지만, 보관비용이 거의 안들면서도 가치를 유지하며 언제든지 다른 자산과 교환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집니다. 현금을 직접 가지고 있는 경우와 함께, 은행에 무이자에 가까우며 즉시 출금이 가능한 보통예금에 두는 돈 역시 이러한 유동성으로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목적으로 인하여 자산의 일부분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여윳돈도 준비해 놓는 것을 케인즈는 화폐 보유의 거래적 동기와 예비적 동기라고 각각 명명하며, 이러한 동기로 인한 화폐수요는 소득 수준에 비례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거래적 동기 외에 투기적 동기로도 화폐를 보유한다는 것을 케인즈는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금리가 지나치게 많이 떨어지게 되면 채권가격이 이에 비례하여 올라가게 되므로 사람들은 고평가되어 가격이 떨어질 일만 남은 채권을 사려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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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향후 금리가 오르고 채권 가격이 떨어질 때 채권을 사기 위한 화폐를 확보해 놓기 위해서 현금을 보유하려 합니다. 이것이 케인즈가 말한 화폐 수요의 투기적 동기입니다. 사실 금리가 떨어지게 되면 현금 보유의 기회비용이 감소하기 때문에 편의를 위하여 화폐를 그냥 들고 있으려는 성향도 증가할 것이니, 이래 저래 화폐에 대한 수요는 이자율과 역의 관계에 있게 됩니다. 이와 별개로, 경제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이 불안하게 느끼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금이 최고라 생각하여 현금보유가 늘어납니다. 만일 유동성선호가 극심하다면, 정부가 투자 증대로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이자율을 낮추기 위한 목적으로 돈을 풀어도, 그 중 상당 부분은 사람들의 장농으로 직행하거나 은행의 보통예금 계좌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풀린 돈이 채권을 사야 시장 금리가 떨어질 것인데 이런 심한 유동성선호상황에서는 채권 매수세가 부족할 것이니 시장금리 역시 쉽사리 떨어지지 못합니다. 화폐에 대한 거래적, 예비적 수요는 당시 소득 수준에 의해 거의 결정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지만, 이 투기적 수요는 언제든 급변할 수 있으며, 이처럼 정부의 통화정책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이를 보면 케인즈는 이자율에 대한 개념 정의 그 자체를 고전파와 매우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고전파는 이자를 미래의 소비를 위하여 현재의 소비를 희생하는 댓가라고 정의하며,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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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케인즈는 현재 소비를 안한다 해서 그게 미래 소비로 이어질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케인즈가 생각하는 이자는, 유동성인 현금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돈을 채권을 사도록 유혹하는 당근입니다. 그러니 유동성선호가 심할 경우, 즉 현금을 쥐고 있는 게 최고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 이들에게 채권을 사게 만들려면 더 많은 이자를 주어야 하니 시장 금리가 잘 안떨어질 것이라 설명합니다. 화폐는 다른 자산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많이 가진 투자대상입니다. 화폐는 널리 사용되는 지불수단이며 썩지도 않고 예외적인 경우 이외에는 공급도 제한되어 있어 가치도 유지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화폐를 보유할 때 많은 혜택을 누립니다. 그러한 현금의 혜택을 포기하고 채권을 사게 만들려면 이자라는 댓가를 주어야 하는 겁니다. 케인즈는 이책에서 과거엔 현금 대신 토지가 유동성자산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화폐와 같은 유동성 자산의 가격은 실수요가 아닌 투기적 시장에서 대부분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이 풀려도 그 대부분이 다 장농에서 잠자고 있다면, 이렇게 잠겨있는 돈은 돈의 시세인 이자율을 떨어뜨리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돈보기가 힘들게 됩니다. 돈의 가격, 즉 이자율을 낮추기 위해 실비오 게젤은 엉뚱하게도 돈에다 정기적으로 사용료를 부과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케인즈는 우리가 고전파의 세뇌를 받아 우리들의 생각처럼 저축이 많아지면 이자율이 낮아져 투자가 자동으로 늘어나 완전고용이 저절로 달성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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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유동 자금이 많아져도, 시장 금리가 일정 수준 이하로 낮아지거나 경제에 불확실성이 심하여 유동성선호가 심할 경우에는 이자율이 더이상 낮아지기 힘들게 되는 상황이 온다고 케인즈는 지적합니다. 또한 이자율이 낮아진다 해도 기업가들이 미래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하게 된다면 자본의 한계효율이 낮아져서 투자는 쉽게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냅니다. 이 책의 제목에 나오는 세 가지 주제인 고용, 화폐 및 이자율 에 대해서 케인즈는 이런저런 설명을 마치고, 18장에서 자신의 논리를 ‘일반이론’으로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케인즈는 한 나라의 경제가 얼마나 많이 생산하는지, 즉 얼마나 많이 국민들이 소득을 벌어들이는지를 결정하는 변수는 여러가지 변수가 있다고 합니다. 국민들의 습속과 문화, 국민성, 사회 시스템과 같은 질적, 제도적 측면이 그 나라의 국민소득을 결정하는 변수가 된다는 것도 언급합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제도적 측면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국민소득 결정의 독립변수는 한계소비성향, 자본의 한계 효율, 금리 이 셋이라고 보고 이 세가지 변수에 대해서만 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한계소비성향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 소비심리, 분배상태입니다. 빈부 격차가 큰 나라에서는 한계소비성향이 높아질 수 없습니다. 많이 버는 부자들은 버는 돈의 극히 일부만 소비할 것이지만, 적게 버는 사람들은 버는 돈의 대부분을 당장 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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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경제가 벌어들이는 부의 대부분을 일부의 부자들만 독점한다면 경제의 한계소비성향은 떨어지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본의 한계효율은 기업가의 장기적인 수익 전망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금리는 경제주체들의 유동성선호의 강도에 큰 영향을 받는 화폐 수요와 화폐 공급량 사이의 균형에서 결정됩니다. 그렇게 결정된 자본의 한계효율과 시장 이자율인 금리의 균형에서 투자 규모가 결정되고, 이 투자와 소비가 합쳐져 총수요가 되고, 이 총수요가 총공급이 만나는 점에서 유효수요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케인즈 모델에서 산출을 늘려주기 위해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소비성향을 늘려, 즉 총수요곡선의 기울기를 45도에 가깝도록 더 가파르게 만들어 유효수요를 증가 시키는 것과, 정부가 지출과 투자를 늘려 총수요곡선 자체를 위로 이동시켜 주는 것입니다. 한계소비성향을 늘리려면 상속세와 같은 부자 세금을 올리고 대신 소득세나 소비세를 낮춰주는 조세제도 개혁 등의 정책으로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하며, 투자를 늘리려면 정부의 직접 투자를 늘리거나, 유동성선호를 억제하여 돈이 풀려나오게 하고 화폐 공급을 넉넉하게 해서 낮은 이자율을 항상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케인즈의 결론은 시간이 약이고 노동자들이 더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고전파의 주장과 상극을 이룹니다. 너도 나도 더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게 되면 당장은 취직이 되더라도 경제 전체의 유효수요가 낮아지게 되어 일자리는 더 없어지게 되므로 고전파의 해법은 결코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케인즈는 단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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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의 의미(Meanings of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이 나온 이후 90여년간 세계의 경제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케인즈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가지 사태들도 일어났습니다. 케인즈의 학설 자체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케인지언이라 불리던 주류 경제학자들도 고전파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케인즈의 이론을 단기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만 설명하는 보완적 방법론으로 격하시키기도 했습니다. 더하여 케인즈의 이론은 70년대 오일쇼크때나 코로나사태와 국제적 갈등으로 인한 공급망 경색과 같은 공급 충격에 의한 경제불황과 동시에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문제에도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케인즈의 반대파들도 경제를 좋아지게 하는 실천적 대안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세계 경제는 또다시 주기적인 금융위기와 그에 이은 불황을 겪어왔고, 코로나 이후 국제적 갈등으로 인하여 또다른 성격의 경제적 충격이 왔습니다. 코로나사태 당시, 미국과 한국 정부는 다시 케인즈를 소환하여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금융위기의 불을 어느정도는 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부 개입은 미국의 양적완화와 같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통화정책이 대부분이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 기간이나 그 이전의 금융위기 때 정부가 직접 지출을 늘리는 재정정책도 간헐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증세를 통한 재원확보라는 정공법을 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재정위기가 발생하곤 했고,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재정정책을 공격적으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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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의 일환으로 다양한 금융자산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장단기 금리는 제로, 심지어는 마이너스로까지 떨어졌지만 유동성 선호 문제는 여전히 발목을 잡았습니다. 케인즈는 유동성 자산 중에서 현금으로만 지나치게 자금이 쏠릴 가능성을 우려한 바 있지만, 최근에는 유동성자산의 특징을 가지는 또다른 자산인 부동산, 비트코인 등에 투자가 집중되었고, 이는 그만큼 생산적 분야에 대한 투자와 그로 인한 고용의 창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로 쓰여야 할 돈이 부동산과 비트코인으로 들어가 잠겨 버렸습니다. 최근 코로나 구간에서 금리가 그렇게 떨어졌는데도 케인즈의 말처럼 유동성선호가 폭증하여 이자율 하락이 저지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시장금리가 제로 수준까지 떨어진 이유는 현금을 대체하는 부동산과 비트코인 같은 유동성자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케인즈 말처럼 이자율을 무조건 낮추는 게 능사는 아니라도 그의 이론의 핵심인 유동성선호 문제와 과소소비의 문제는 다른 형태로 계속 나타나고 있는데도 한국은 그 심각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몇일전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비상계엄을 빙자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세 번째 쿠데타가 일어나 한국에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을 남겼습니다. 이후 국회가 신속히 계엄령을 해제결의 하여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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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에 동조한 지휘관들이 속한 조직은 강도 높은 구조개혁이 이뤄질 것이 확실시 됩니다. 또다시 육사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심대하게 훼손시키는 쿠데타를 저질렀습니다. 한국재계는 내년 경영계획을 다시 짜야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고 우려합니다. 2024년 12월 19일 현재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돌파하고 1453원까지 급등하여2009년 3월16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15년 9개월여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계엄령 전에는 1,400원 아래로 떨어지려는 상황에서 완전히 찬물을 끼얹은 셈입니다. 이에 따라 원화로 표시된 외화 환율이 덩달아 오르면서 한국내 기업과 해외 직구를 이용하는 한국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계엄령 선포가 외국 언론들에게도 전해지며 당시 미국 증시의 한국 ETF가 2.7%p 급락했습니다. 계엄령이 발표되는 순간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막대한 패닉셀이 터지며 비트코인를 비롯한 코인 가격이 순간적으로 30~40% 가량 폭락하고 거래소의 접속 폭주로 서버가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따라 업비트 등 가상화폐 앱에서 접속자 폭주로 매수/매도버튼도 비활성화되고 서버 자체가 접속되지 않아 제때 매도하지 못하여 피해가 발생한 사례도 생겼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패닉셀 사태는 한국에만 한정된 이슈여서 해외 거래소의 코인 가격에는 큰 변동이 없었고, 1시간 이내에 본래 시세를 회복하며 안정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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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암호화폐 시장에서 불과 1~2시간 만에 막대한 변동성을 보였던 이 날의 혼란은 한국내 암호화폐 커뮤니티에서 일명 ‘계엄빔’으로 불리며 회자되고 있습니다. 계엄 사태 이후 한국의 유가증권시장은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계엄 선포 직전인 12월 3일 2046조원에 달하던 코스피 시장 시가총액은 9일 1944조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코스닥 시가총액도 344조원에서 315조원으로 30조원 가까이 빠졌습니다. 불과 6일만에 130조원이 넘는 시가총액이 ‘증발’한 겁니다. 불안심리가 커지면서 외국인, 기관, 개인 가릴 것 없이 주식을 내다 판 결과입니다. 앞으로도 원화가치 하락과 치솟는 환율은 수입품 가격 상승을 불러올 것이 뻔합니다. 당장 원유같은 필수 품목 가격이 오르면 물가 상승에 ‘도화선’이 됩니다. 자국우선주의를 강조해온 미국 트럼프 대선 후보의 당선으로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기름을 붓는 겪’이 됐습니다. 대통령의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외교·통상 등 정부 기능 공백도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당장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에 달하는 방산·원전 등 수출에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방산업계에 따르면 폴란드와 연내 체결하려고 했던 9조원 규모 K2 전차 수출계약이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체코 역시 한수원과의 원전 계약을 일시 보류한 상태입니다. 계약 금액만 24조원에 이릅니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이 체코 원전 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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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자원부가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던 ‘대왕고래 프로젝트’도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국가 신뢰도 하락에 따른 외국인 투자도 위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계엄 사태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성공 신화를 흔들고, 국제적 신뢰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고 분석했습니다. 계엄 이후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들의 자금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외국인 투자자들의 얼어붙은 투자심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불안한 소비심리 탓에 내수 경기도 침체 조짐을 보입니다. 당장 한국의 여행, 관광, 호텔, 유통업계가 직격탄을 맞고 있는 상황입니다. 해외여행객이 줄면 한국의 주 수입원인 관광수입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나던 명동이 한산해졌다는 소식은 한국의 암울한 경제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관광수입이 줄면 당장 관광수지 악화를 우려해야 합니다. 지난해 한국의 관광수입은 약 20조원에 달했는데, 정국이 조속히 안정화되지 않으면 역대 최악의 관광수지 적자가 예상됩니다. 한국 여행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해외 단체 여행객이 급증하고 있는 데다, 시민들 역시 불안한 소비심리가 이어지면서 지갑문을 닫았습니다. 800만명에 달하는 자영업자·소상공인들은 경기침체에 계엄 여파까지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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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는 이번 계엄 사태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경제 수장인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금융시장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케인즈의 후예답게 60조원 규모의 유동성 공급을 결정했습니다. 단기 자금 수혈이 절벽으로 내몰린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경제가 바로 서지 않으면 서민들의 고통은 가중됩니다. 계엄 관련자들의 수사도 중요하지만, 경제를 살리는 일이 우선시돼야 합니다.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통과됐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 누군가는 “국민의 승리”라고 평가했고, 또 다른 이는 “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켰다”고 치켜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는 혼란을 잠시 잠재운 것일 뿐이며 한구경제는 이미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각에선 내란죄 혐의가 있는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유무형의 경제적, 사회적, 외교적 손실이 최소 300조원, 최대 900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치적 혼란에 따른 국내총생산 (GDP) 감소부터 대외신용등급 하락으로 인한 국채 금리 상승, 외국인 투자자금 이탈, 국민 불안과 사회적 갈등까지 국민들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직간접적 피해를 겪어야 합니다. 당장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한국 정치경제는 새로운 불확실성에 진입하게 됐습니다. 헌재가 탄핵을 기각하면 윤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복귀하지만 남은 임기 동안 야당의 더욱 큰 압박에 직면하게 됩니다.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진보와 보수 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사회 분열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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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장기화하면 레임덕보다 더 극심한 권력 공백인 ‘데드덕(Dead Duck)’ 수렁에 빠지며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리더십 부재는 ‘트럼프 2.0 시대’와 맞물려 한·미 관계를 약화시키고 무역정책 변화에 대한 신속하고 정교한 대응력을 낮출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부동산이라는 유동성자산에 쏠림현상을 없애려면 세금을 부과하여 축장, 즉 사재기 수단으로서 부동산의 메리트를 제거하는 정책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오히려 세금을 깎아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세의 대상은 주로 최근 수년간 자산가격 급증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이런 사람들의 소비성향은 어차피 높지 않을 것이기때문에 감세가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미미할 것이며, 오히려 재정정책의 재원을 부족하게 만들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 한국정부는 낮은 금리의 대출을 계속 제공하여 부동산 버블을 계속 유지하는 데 정성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 저금리 대출의 재원은 십중팔구 국민세금일 터인데, 이 정책들은 어떻게든 집 가진 사람들의 표를 얻어야겠다는 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겠지만,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정부가 내놓은 정책으로는 빵점입니다. 분명한 건 한국정부의 정책은 경제가 불황으로 가고 있다는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케인즈의 처방과 거의 반대방향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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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사사로운 개인의 입장에서 내린 윤석열의 계엄내란결정이 한국경제 전체의 파국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일족의 부귀로운 앞날의 영달을 위해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남녀노소가 피땀흘여 이룩한 성과를 하찮은 계엄난동으로 망치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케인즈는 그의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의 제24장에서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습니다. 자신은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입니다. 허공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인 잡문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입니다.”라며 우리에게 제발 좀 인간답고 조화롭게 서로를 생각하며 살아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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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65번째 책 사회학 부문 5번째 책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가 1936년에 출간한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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