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64. 라인홀트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by Reinhold Niebuhr, 1932

忍齋 黃薔 李相遠 2024. 12. 17.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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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XhnVQRk3pE

 

064. 라인홀트 니부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by Reinhold Niebuhr,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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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출신의 대통령이 불법계엄 난동을 부리다 무산되어 탄압위기에 처하고 내란수괴자로 처형될 처지에 놓이자 검찰이 총동원되어 내란수사권한도 없으면서 괴변을 늘어놓으며 내란수사를 강행하며 검찰집단의 비도덕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 개개인은 어떤 행위를 할 때 비교적 집단보다는 타인을 배려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존중할 줄 알기 때문에 '도덕적'입니다. 이에 반해 인종집단, 민족집단, 계급집단, 직업집단, 국가집단 같은 집단은 한국 검찰집단이 보여주듯 개인보다 훨씬 더 이기적입니다. 도덕적인 개인이 일단 집단의 일원이 되면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종교, 교육, 이성, 양심, 이성과 같은 개인 윤리적 접근은 집단 내 문제 해결에서 무력합니다. 특히 집단 속 인간은 집단이익 충동에 훨씬 강하게 의존합니다. 검찰집단이 지닌 이같은 강력한 충동과 이기심을 꺾으려면 불가피하게 내란죄 수사권한을 지닌 경찰집단 간의 투쟁과 같은 강제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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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강제적 수단을 최소화하고 강제력 동원에 신중하지 경우 다른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는건 자명합니다. 이 경우 경찰집단을 지원하고 검찰집단을 견재하는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피억압 경찰집단은 반드시 정치권력의 지지를 받아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유수사권을 강탈하려는 검찰집단에 강력한 힘으로 맞서야 합니다. 이것은 제 논리가 아니라 1932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라는 책을 통해 라인홀트 니부(Reinhold Niebuhr)가 제시한 현실주의 정치학의 해법입니다. 니브어의 예언처럼 책 출간 이듬해 히틀러 집단이 집권하고, 2차 세계대전이 터졌습니다. 아더 슐레진저 2, 조지 케넌, 맥조지 번디 등 50-60년대 미국정책을 이끌었던 브레인들과 지미 카터, 빌 크린턴, 휴버트 험프리, 딘 애치슨, 버락 오바마까지 니부어를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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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선 라인홀트 니부의 생애 (Life of Reinhold Niebuhr)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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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 6 21 ~ 1971 6 1)1892 6 21일 미국 미주리 주 라이트 시(Wright city)에서 독일 이민자로 선교사인 구스타프 니부어(Gustav Neibuhr)목사와 리디아 호스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구스타프 목사는 독일 복음주의 개혁교회(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의 신학을 따르는 북미 복음주의 시노드(Evangelical Synod of North America)의 목사(Pastor)였습니다. 동생인 헬무트 리처드 니부어(Helmut Richard Niebuhr)와 함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일리노이 주의 엘름허스트 대학(Elmhurst College)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했습니다. 후에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 있는 에덴 신학교(Eden Seminary)에서 공부하였고, 다시 예일 신학 대학교(Yale Divinity School)에서 1914년 신학사 학위(Bachelor of Divinity Degree)1915년 예술학석사학위를 받고 알파 시그마 파이회(Alpha Sigma Phi Fraternity)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니부어는 생전에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것을 항상 후회했습니다. 1915년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고 디트로이트에서 13년간 독일계 교회 목사로 활동했습니다.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독일계 이민자들은 충성심을 의심받아 탄압을 받아 1919년 교회에서 독일어 사용을 중단했습니다. 니부어는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미국에 애국심을 갖도록 호소하며 66명의 교회신자를 700명으로 늘리며 유색인종 노동자를 탄압하는 KKK(쿠 클럭스 클랜)와 맛서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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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에서 니부어는 포드 노동자들의 불공정노동 항의에 참여했습니다. 니부어는 좌파로 이동했고 산업주의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사기 저하 효과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니부어는 헨리 포드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었고 노조 조직자들이 그의 교회강단을 이용하여 노동자 권리에 대한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허용했습니다. 니부어는 조립 라인에서 발생하는 열악한 조건과 불규칙한 고용 관행을 공격했습니다. 포드와 자본주의에 대한 니부어의 비판은 진보주의자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니부어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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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28년 니부어는 디트로이트를 떠나 뉴욕 유니온신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어 나치반대 고백교회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에게 영향을 미친 기독교 윤리학과 실천신학 강의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사회주의 기독교인 연합은 1930년대 초 니부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조직되었습니다. 나중에 이름을 프런티어 연합으로 바꾸었다가 크리스천 액션으로 바꾸었습니다. 초창기 연합의 주요 지지자로는 에두아르트 하이만, 셔우드 에디, 폴 틸리히, 로즈 털린이 있습니다. 초창기 이 그룹은 자본주의적 개인주의가 기독교 윤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그룹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 철학을 인정했습니다. 니부어는 오늘날 국제 구조 위원회(IRC)로 알려진 국제 구호 협회(IRA)를 결성한 51명의 저명한 미국인 그룹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위원회의 사명은 히틀러 정권의 정책으로 고통받는 독일인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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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니부어는 미국 사회당의 급진적 파벌의 저명한 지도자였지만, 그는 완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신념을 빈약한 종교로 묘사했습니다. 1941년에 그는 강력한 군사적 개입주의, 국제주의적 외교 정책과 친 노조, 자유 주의적 국내 정책을 가진 단체인 민주행동연합(Union for Democratic Action)을 공동 창립했습니다. 그는 1947년에 이 단체가 민주행동을 위한 미국인(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으로 바뀔 때까지 이 단체의 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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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니부어는 우르술라 케펠-컴튼 과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영국 국교회 회원이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과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 그녀는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공부하는 동안 니부어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수년 동안 컬럼비아 대학교의 여자 단과대학인 바너드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종교학과를 설립하고 학과장을 맡았습니다. 니부어는 여러 주요 출판사에 근무하며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쓴 엘리자베스 니부어 시프톤과 크리스토퍼 니부어라는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부인 우르술라 니부어는 의회도서관에 보관한 논문전문에 남편의 후기 작품 중 일부를 공동 집필했다는 증거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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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는 기독교 현실주의의 틀 안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행동, 반공주의, 핵무기 개발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전쟁에는 반대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의 자유주의의 평화주의적 요소가 도전을 받았습니다. 니부어는 보다 자유주의적인 동료들의 평화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전쟁을 강력히 옹호했습니다. 니부어는 곧 평화 지향적인 신학자와 목사 그룹인 화해 펠로우십을 떠나 가장 가혹한 비평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동료들과의 이러한 이탈은 기독교 현실주의로 알려진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니부어는 널리 이 운동의 주요 옹호자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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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군을 지지했고 미국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속과 종교 분야에서 모두 인기있는 작가이자 유니언 신학 대학의 교수로서 그는 미국과 해외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 때문에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선언한 반면, 니부어는 독일과 일본의 승리가 기독교를 위협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적 관계와 신념을 포기하고 평화주의 화해 협회에서 사임했습니다. 그는 죄가 세상의 일부이며 정의가 사랑보다 우선해야 하며 평화주의는 절대적인 사랑의 상징적 묘사이지만 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개신교 신념에 근거하여 주장했습니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호의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반대자들과 나눈 교류는 니부어가 지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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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는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는 것에 대해 크리스찬 센추리(The Christian Century)잡지 편집자인 찰스 클레이튼 모리슨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모리슨과 그의 평화주의 추종자들은 미국의 역할은 엄격히 중립적이어야 하며 협상된 평화의 일부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니부어는 자신이 현실주의자라고 주장하며 도덕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모리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 이후에 시작된 전쟁 불법화 운동을 강력히 지지했습니다. 이 조약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니부어는 1932년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를 출판하면서 크리스찬 센추리(The Christian Century)와 결별하고 개입주의와 권력 정치를 지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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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는 에든버러대학의 기포드 강연에 미국인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초청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니부어는 1940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했고 자신의 잡지인 기독교와 위기(Christianity and Crisis)를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1945년 니부어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도덕적으로 변호할 수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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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8월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에 서명한 후, 니부어는 알려진 공산주의 성향이 있는 모든 동료 여행 조직과의 과거 관계를 끊었습니다. 1947년 니부어는 자유주의 미국민주행동(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을 창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냉전 동안 공산주의 확장을 억제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조지 케넌(George Kennan),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Arthur M. Schlesinger Jr.) 및 기타 현실주의자들 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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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니부어는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을 시민의 자유를 공격하는 것보다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을 근절하는 데 효과가 없다는 점에서 사악한 세력이라고 묘사했습니다. 1953년에 그는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을 지지하면서 "반역자는 결코 평범한 범죄자가 아니며 로젠버그 부부는 분명히 맹렬하게 충성하는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원자 비밀을 훔치는 것은 전례 없는 범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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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저서로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 인간의 본성과 운명등이 있습니다. 니부어는 기독교 신앙을 현실적인 현대 정치와 외교에 접목시키고 소비에트연방을 견제한 냉전체제를 구축시킨 현대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사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니부어는 그후 옥스포드, 글래스고, 콜럼비아,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국내외 유수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습니다. 니부어는 19716178세를 일기로 매사추세츠주 스톡브리지에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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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라인홀트 니부의 사상 (Thoughts of Reinhold Niebuhr)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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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의 사상은 이민, 이주, 경쟁, 주요 산업 도시로서의 개발의 장소가 된 디트로이트에서 목회자로 재임하는 동안 발전했습니다. 1920년대에 니부어는 급격한 사회 변화에 위협을 느낀 많은 구성원을 모집한 디트로이트에서 KKK(쿠 클럭스 클랜)의 부상에 반대했습니다. KKK(쿠 클럭스 클랜)는 흑인, 유대인, 가톨릭에 반대했습니다. 니부어는 특히 1925년 시장 선거와 관련하여 KKK에 대한 설교를 통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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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의 인종적 정의에 대한 생각은 사회주의를 포기한 후 천천히 발전했습니다. 니부어는 사회의 불의를 인간의 자존심과 자기애에 기인했으며, 이러한 타고난 악의 성향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표 민주주의가 사회의 병폐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니부어는 강요된 변화보다 자연적 진화를 지지했고 이론보다 경험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니부어의 버크적 이념은 종종 그의 자유주의 원칙과 충돌했는데, 특히 인종적 정의에 대한 그의 관점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니부어는 인종적 불평등에 격렬히 반대했지만, 분리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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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이 통합을 지지한 반면, 니부어는 평등한 기회를 달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변화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1960년대 평화 시위에 따른 폭력으로 인해 니부어는 강요된 평등에 반대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북부 빈민가 의 문제를 목격하면서 그는 평등이 달성 가능하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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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톨릭주의는 20세기 초부터 남부 유럽에서 가톨릭 이민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1920년대에 디트로이트에서 급증했습니다. 이는 디트로이트에서 많은 회원을 모집한 KKK(쿠 클럭스 클랜)의 부활로 인해 악화되었습니다. 니부어는 KKK를 공격하며 다원주의를 옹호했습니다. 1925년 디트로이트 시장 선거 동안 니부어의 설교인 "우리 공정한 개신교도들은 부인할 수 없다"는 내용이 디트로이트 타임스 와 프리 프레스의 1면에 게재되었습니다. 이 설교는 KKK가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던 시장 후보 찰스 볼스 에 반대표를 포기하라고 사람들에게 촉구했습니다. 가톨릭 현직자 존 W. 스미스는 30,00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습니다. 니부어는 KKK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디트로이트에서 KKK의 정치적 권력이 쇠퇴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데 일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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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의 사상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사상은 개인과 집단의 도덕성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니부어는 개인들이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사회가 반드시 도덕적이지는 않다고 밝힙니다. 도덕적인 개인도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비도덕적이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또한 개인의 도덕적 행위가 집단의 도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크게 작용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집단의 구조, 제도 등이 개인 행위의 도덕성을 결정할 수 있으며, 개인의 이기심은 결국 집단에서 더욱 강하게 표출되어 사회집단의 도덕성은 개인의 도덕성보다 현저히 떨어지게 됩니다. , 개인간의 문제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복잡한 사회 현상들은 이러한 방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의 도덕성만으로는 사회 제도나 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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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적 문제가 생기는 이유로는 인간의 이기심과 집단간의 힘의 불균형이 있는데, 먼저 개인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개인과 함께, 정부의 간섭이 없을 경우 힘의 논리에 의해 집단의 힘이 결정되는 이러한 것들이 사회적 문제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에 니부어는 이러한 문제와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적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개인의 양심 등으로만 해결하기 어려우므로, 개인의 도덕성 함양과 함께 사회적 제도의 개선도 병행되어야 하며, 도덕성과 선의지는 이러한 해결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높은 인물들이 찬성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사회 정의를 실현하여야 하며, 이러한 방법은 선의지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방법은 최소한의 강제력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며, 가급적 비폭력적인 강제력 사용을 권고하여야 한다고 말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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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니부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의 내용(Contents of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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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 윤리와 정치에 대한 연구(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in Ethics and Politics)는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 인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932년에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사람들이 개인보다 집단의 일원으로서 죄를 지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세속적, 종교적 자유주의를 공격하며 특히 존 듀이(John Dewey)와 사회 복음(Social Gospel)을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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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는 한 여름에 이 책을 썼습니다. 니부어는 유니언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기 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목사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에서 이 책의 내용을 얻었습니다.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니부어의 대중적 인지도를 상당히 높였습니다. 자유주의 기독교 비평가들은 처음에 이 책을 부정적으로 평가 했지만, 1930년대 전반에 걸쳐 파시즘의 부상을 이 책에서 예측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이 책의 평판은 금세 좋아졌습니다. 이 책이 출판된 직후, 폴 레만은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이 책 한 권을 주었는데, 본회퍼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의 주장에는 감명을 받았지만 평화주의에 대한 비판은 싫어했습니다. 이 책은 결국 미국 유대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미국 유대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신학적 감정이 팽배했던 시기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신학 연구로 돌아갔고 읽을 유대교 신학 작품이 없어지자 개신교 신학 작품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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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집단의 행동양태를 분석하고 사회적 정의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인문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사회내의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타인의 이익을 배려할 수 있지만, 사회는 종종 민족적-계급적-인종적 충동이나 집단적 이기심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미국경제가 공황에 빠지고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려는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자유주의적 사회과학자나 종교가들은 미국사회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부어는 이들이 사회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자선의 문제와 경제적 집단사이의 역학관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집단 간의 관계는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적 관계이며 따라서 사회집단 사이에 작용하는 운동의 강제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도덕과 사회-정치적 정의가 양립하는 방향에서 그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니부어는 많은 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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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개인은 이타적 존재일지 몰라도 집단만큼은 철저히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간의 갈등이건 집단 간의 갈등이건 그 갈등을 해소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은 강제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강제력은 도덕이나, 양심, 종교적 이상, 이타심 따위의 것들이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 존재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가끔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이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이상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상으로 인해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의 조절에 실패한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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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심적 일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편법을 사용하여 자녀를 명문학교에 부정입학 시키는 행위는 분명 나쁜 행위이이고 당연히 그 누구도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공평하게 입학경쟁을 할 것이라는 전제로 입학준비를 열심히 하지만, 누군가는 당신이 자녀는 힘들게 공부하고 입학준비를 하고있는 그 순간에 표창장을 위조하고 대필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하는 등 혁신적인 부정입학수단을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편법 수단으로 아주 적은 노력을 통해 당신의 자녀보다 월등한 점수를 얻어 명문학교에 입학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특히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집단 사람들은 굉장히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표출하게 될 것입니다. 사정기관에 고소고발을 한다든지 등의 일들 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 입학시험감독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때로 무용지물 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니부어는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강제력을 동원하자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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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사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내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사소한(?) 일들, 부정입학이나 신호 위반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아주 관대한 편입니다. 실제로 내가 속한 집단에 누군가는 부정입학을 했고 그것이 발각되었는데에도 집단내의 사람들은 다른 집단 소속원이 벌인 편법부정입학을 들먹이며 정치적 박해라며 부정입학한 그 아이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 인식이나 태도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박해받는 순교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또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노동자의 파업, 재벌 총수의 횡령이나 정경유착 등에서도 익숙해 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보면 한국 사회의 도덕성이 정말 밑바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소수의 도덕성을 가지고 전체로 일반화 시켜서 폄하하는 것은 한국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토크빌의 말을 증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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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니부어는 투쟁을 통한 정의로운 사회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투쟁의 과정이 폭력을 동반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비판하는 데에 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집니다. 그가 혁명을 변호하는 논리를 알기 쉽게 요약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외과의사가 환자의 몸에 칼을 댈 수 있습니다. 환자는 살결에 상처가 날 수 있지만, 환자는 건강을 회복하기 때문에 의사의 칼질은 정당합니다. 이런 논리를 가졌다고 해서 폭력적 수단을 통한 강제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니부어는 신학자이고 기독교인입니다. 니부어는 비폭력적 강제력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비폭력적 강제력으로는 파업이나 불매운동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단들은 적극적이지 않고 직접적으로를 흘리게 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때로 이러한 수단이 폭력적 수단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단을 통해 사회가 조정되고 수정되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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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니부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의 의미(Meanings of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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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부어가 이 책을 주요 목적은 도덕주의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드는 개혁, 진보주의자들의 비현실적인 타성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책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사람들은 주로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니부어의 주장에 대해 냉소주의, 비관주의, 패배주의 등의 딱지를 붙이며 맹공했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개인들이라도 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권한과 책임의 분산 때문에 전혀 다른 특성이 나타납니다. 집단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논리와 생리를 갖게 됩니다. 집단은 나라일 수도 있고 거대 검찰조직일 수도 있습니다. 느슨하게 조직된 연고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히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로 구성된 연고집단일지라도 탐욕과 후안무치의 집단으로 전락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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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건 공기업이건 언론사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거대 조직들의 구성원들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매우 예의 바르고 선량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평소 생각이 옳은 것인가 하고 회의하기도 합니다. 이게 딜레마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평가할 때에 주요 기준으로 삼는 명분이나 강령 따위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대인관계 태도나 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시원찮으면 아무리 숭고하고 고상한 명분을 위해 일하는 집단이라도 증오와 배척의 대상이 있습니다. 특히 이타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 도덕적 우월감 얼마나 혐오하는지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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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 함정도 있습니다. 니부어는 개인이 하나의 명분이나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 경우에도 권력의지 혹은 힘에의 의지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말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명분과 사적인 출세욕, 명예욕은 뒤섞이기 마련인데, 사적인 출세욕이 공적 명분의 성공을 압도하는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책이 개혁·진보주의자들에게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조직과 자기 자신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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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니 보수니 하고 나눌 없이, 어떤 집단의 지도자나 구성원 개개인이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집단이 몹쓸 일을 수도 있다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이기주의와 부패는 모든 조직과 집단의 속성입니다. 속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완화할 있는 길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문호 개방입니다. 잡다한 것을 뒤섞는 비빔밥 정신의 실천입니다. 일사불란한 효율성은 떨어질망정 집단이 공공의 으로 전락하는 막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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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인간과 집단의 본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개개인의 삶을 그리고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혁하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낭만적인 사회에 대한 생각들을 버리고, 살인마 전두환, 국민의 힘 윤석열, 사악한 한국 검찰집단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지 그런 사회의 정의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있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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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64번째 책 사회학 부문 4번째 책 칼 폴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932년에 걸처 출간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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