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전두환! 이 사회악이란 말인가...

忍齋 黃薔 李相遠 2005. 5. 11. 08:10
반응형

전두환! 그분이 사회악이란 말인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몇몇 정신병자들의 지역감정조장과 허위사실에 대해 과거자료들과 함께 몇자 적어봅니다...

전두환 당시 3s정책...
섹스,스크린,스포츠... 요것들로 국민들을 현혹시켜
관심을 딴대로 돌리고 대부분의 언론사들 장악해서
자기 멋대로 기사 쓰게 만듭니다.
심지어 어떤 신문사는 세금 한푼 안내면서 한달에 22일을
전씨와 정부에 대한 찬양기사로 일관하며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신문사가 되어있답니다.(이쪽 집안 부동산 엄청가지고있구 재산이 지금 장난아니지요...)

3s정책으로 광주전남사람들의 관심을 돌립니다.
3s정책을 가장 잘 활용한 곳이 광주,전남입니다.

5.18당시 절도 강간 하나 없던 도시가 광주입니다. 이건 세계역사상 그정도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죠..
그런데 3s정책으로 당시 약 십여년만에 광주,전남이 많이 변해버렸지요. 삼청교육대 만들어 놓구 전라도 출신 깡패들 중 일부는 일부러 또 키웠답니다... 그게 바로 더러운 정치세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역감정 조장하고 전라도 이용해먹고... 뒤로 딴짓하고..

하일성씨가 책에 써놓은걸 보면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답니다.
해태 띄워달라고... 몇가지 일화를 들어 설명하더군요...
광주 전남 사람들이 야구에 미치도록 

온갖 것들 동원해서 분위기 만들어 댑니다.

당시 회고하는 사람들은 광주전남사람들이 대단하긴 대단하다고 말들하죠... 저런 사람들의 기를 반세기동안 죽여왔느니.. 나라가 잘 될리 있나. 요즘에도 정정당당하게 평가받는 곳들에서는 전라도 출신들이 가장 능력인정받고 승승장구 한답니다.
예를 들면 문화,예술,스포츠,연예계,사법고시,서울대 합격률,공무원시험,바둑기사들 등등... 모두 본적,인구,학교출신별 대비 최고죠 특히 바둑은 15억의 중국과 일본은 한국을 이겨보는게 국가적 소망이랍니다.

아무튼 당시에 신문 방송에서는 해태 엄청띄워줍니다. 대구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대구구장에서 해태가 이기니까 해태선수버스를 뒤집으려구 난동부리죠.. 당시 3s정책으로 국민들 완전히 바보되었죠...
대구경북 사람들도 지역감정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한거라고 보지 그지역 사람들 전체를 나쁘게보지는 않습니다.
여기게시판에서 날뛰며 미친년 그네널뛰듯 서커스해대는 
글들 빼구요...

63빌딩 잠긴다구 하니 벌벌벌 떨구... 성금 엄청내구...당시 몇몇 인물들이 그 방송들 과대포장이다라고 말하자...바로 불이익받았죠..

스포츠와 영화 섹스에 미쳐 요 세가지가 가장 판치던 시절도 그시절입니다.


--------- 아래는 당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임 -------

2002. 8. 26 ~ 27 한국 대통령 평가위원회
(위원장 : 박동서) (해당분야 전문학자 320명) 

1. 업무수행능력 
· 1위 : 박정희(63.56%) 
· 2위 : 김대중(58.64%) 
· 3위 : 김영삼(50.96%) 
· 4위 : 이승만(49.40%) 
· 5위 : 전두환(49.30%) 

2. 업적수행분야
· 1위 : 박정희(66.58%) 
· 2위 : 김대중(65.08%) 
· 3위 : 전두환(56.72%) 
· 4위 : 김영삼(55.16%) 
· 5위 : 노태우(52.84%) 

3. 자질분야 
· 1위 : 박정희(62.7%) 
· 2위 : 김대중(58.45%)
· 3위 : 이승만(56.95%)
· 4위 : 김영삼(56.04%)
· 5위 : 전두환(51.90%) 

이밖에 민주주의기 이여한 대통령과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한 대통령등의 조사결과는 1위 김대중
50~60년대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당시 정권의 치적들을 중심으로 분석했다는 오해도 받지만 보시다시피 각계의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면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십년간 조중동 및 정부와 손잡은 언론들에 꽤 큰 영향을 받은 일부지역과 국민들의 평가는 판이하게달라진답니다.

아래는 60~70년대 정권과 대선주자들의 지지도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의 지지도를 보면 국민들의 평가는 또 지금과 달랐습니다.


------ 60~70년대 대선 투표율 ---------------

아래 내용은 네이번 각종 게시판들을 돌며 지역감정을 조장하고허위사실 유포하는 분들을 위해 준비한 글입니다.



박정희가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처음 윤보선과 대통령선거를 치룰때에 전라도는 박정희를 지지했습니다. 이때의 투표형태는 서울등 중부권역은 윤보선씨를 영호남등 남부권역은 박정희씨를 지지하였죠. 한마디로 여촌야도 (당시 여당을 공화당이라고 볼때)입니다. 서울 경기 부산(영남이라하더라도 대도시인 부산) 및 충청 강원까지 모두 윤보선씨가 앞섰습니다. 

호남= 박정희 (49.9%) > 윤보선 (33.8%) 
영남= 박정희 (53.3%) > 윤보선 (30.5%) 

부산= 박정희 (45.6%) > 윤보선 (44.9%) 
서울= 박정희 (28.6%) < 윤보선 (61.8%) 
경기= 박정희 (25.8%) < 윤보선 (51.7%) 
강원= 박정희 (35.6%) < 윤보선 (44.1%) 
충청= 박정희 (36.1%) < 윤보선 (43.9%) 

도시와 중부지방은 윤보선씨를 밀고 영호남은 박정희씨를 지지하였죠. 그 결과 박정희가 겨우 10만표의 차이로 어렵사리 이겼습니다. (물론 엄청난 부정투표가 기인한 것이므로 실제로는 윤보선씨의 승리라고 봅니다) 자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때 영호남 지역감정이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러던 것이 71년 9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3선개헌을 비판하며 민주세력의 결집으로 신민당 김대중후보가 등장하였습니다. 초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김대중후보를 꺽을 방법을 찾던차 선거 3일전 박정희측은 영남지방에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삐라를 뿌려대며 영호남 대결구도로 몰아갔습니다. 

'쌀밥에 뉘가 섞이듯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된다. 경상도 사람 치고 박대통령 안찍는 자는 미친 놈'(「조선일보」 1971. 4. 18.)이라든지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54만 표 이긴다'(「중앙일보」 1971. 4. 22.)는 등의 여과되지 않은 발언들이 유세과정에서 쏟아져 나왔다. 


호남 = 김대중(58.7%) > 박정희(32.7%) 
부산 = 김대중(42.6%) < 박정희(54.4%) 
영남 = 김대중(23.3%) < 박정희(71.9%) 
그밖에 서울,경기는 김대중 (58%) 
이외 지역은 엇비슷한 결과 


호남은 김대중에게 몰표를 하지 않았지만 부산을 제외한 영남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보냈습니다. 이때 호남은 90%가까운 지지율로 김대중을 지지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띠죠. (호남의 김대중에 대한 맹목적 지지율이 90%를 공산당투표라고 욕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은 광주사태와 호남고립정책이 낳은 비극입니다. 보시다시피 호남이 처음부터 김대중을 90%지지한것이 아니니깐요. 오히려 박정희를 30%넘게 지지했습니다.) 


이런 투표결과가 나온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김대중이 집권하면 호남이 영남 다 죽인다하고 지역감정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부산같이 깨어있는 도시에서는 별로 약발이 안먹혔지만 부산을 제외한 영남에서는 유언비어가 퍼져서 결국 일거에 전세를 역전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쪽수가 많은 영남을 잡으면 이긴다는 아주 간단한 선거전략입니다. 






조선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지역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핵심이 영호남간의 갈등이나 차별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각한 것은 기호와 서북의 대립이었는데, 그 역시 분단으로 서북세력이 지역기반을 상실함으로써 1950년대에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서 영호남 지역갈등이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였다. 그것은 1980년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호남인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으며, 전두환 정권 하에서 그 상처는 더욱 곪아갔다.

20세기초부터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의도치 않게 생겨났던 지역간의 경제력 격차가 박정희 정권 하에서부터 영호남간의 문제로 좁혀져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당시 집권세력이 엘리트 충원과 지역개발 면에서 의도적 차별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3선 개헌 이후 치러진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부터였다. 공교롭게도 이 선거는 각각 영남과 호남에 연고를 둔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이었다. 이미 3선 개헌이란 무리수를 둔 박정희로서는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젊은 야당 후보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세력은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선거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2005/05/11(01:0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