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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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조연 - 나는 여성가장 근로자 -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27.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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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조연 - 나는 여성가장 근로자 -  
http://blog.news.go.kr/yejung20/v/40070955 2006.09.26 18: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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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동안 내가 가진것 이상으로 넘치는 평가를 받아온 편이다.

어릴적엔 공부를 좀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들께서는 내 거짓말을 진실인양 받아들여주셨고, 어릴때 몸이 좀 약했다는 이유로 어떤날 말짱한데도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면 엄마께서는 전전긍긍하며 내게 온 관심을 쏟으셨다.

그 뿐인가? 사춘기때엔 날 쫒아다니던 남자를 백선(선발집단이었던 J여고 교복에 붙은 마크)에 걸맞는 교만과 자만심으로 점철된 시커먼 마음을 들키지 않고 새침이란 얼굴로 점잖게 거절함으로써 모범생이라는 의젓한 훈장까지 덤으로 얻었다.

애 아빠와 결혼할 당시 난 그 새침을 무기처럼 두르고 애아빠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다. 드디어 그는 나 없이는 생명을 부지 할수 없을것 처럼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으며 나는 그 선택에 대한 갈등은 있었지만 조금 비약하면 선심쓰듯 결혼을 허락했다.

여기까지 쓴 나의 글을 보면 윽, 정말 구토라도 날것처럼 공주병에, 새침에 거기다 교활한 마음까지... 내가 쓰고도 돌아보고 싶지 않을만큼 밥맛 떨어지는 여자였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또 한번 특혜를 받게 되었다.

결혼 후 바로 출국하여 유학생의 아내가 된 나는 지금껏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엌일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을 힘든 공부와 함께 가사도우미로 부려먹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그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날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일부러 그런것은 아니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고 처음 독일에 가려했던 본연의 임무대로 남편 뒷바라지를 잘 해보려고 노력을 다했지만 난 늘 능력이 부족했다.

열심히 반찬을 만들어 주면 남편은 그 맛없는 음식을 웃는 얼굴로 먹어주어야 했던 고역이 어땠을까 상상이 간다. 그래서 남편은 차라리 자신이 밥을 하고 내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처음에 감사했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맛이 별로 없네 이건 이런 맛이 아니네 하고 품평까지 해대고 나중엔 저녁하는데 거드는것도 하기 싫어서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의 신문들을 뒤적거리며 귀가시간을 연장하곤 했다.

 

 

 

귀국 후, 아무것도 없던 우리 부부에게 친정아버지는 텃밭에 석류나무와 자두나무가 있는 엄마의 추억이 서린 정읍 친정집에서 살게 해주셨다. 그리고는 아빠께서 우리의 모든 생활비를 담당하셨다. 그 뿐인가? 남편이 학생이므로 늘 기도 못펴고 숨죽이는 딸이 안쓰러웠던지 집에 혼자남을 딸을 위해 잡비라는 명목으로 늘 2만원씩의 용돈을 주고 출근을 하시곤 했다.

(십삼년전에 2만원은 지금보다 훨씬 큰 가치를 지닌 돈이었다.)

남편을 학교에 보낼때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 몇천원씩 차비를 넣어주는 일을 행복으로 알고 살았던 나날이었다. 그러면 남편은 꼭 2천원은 텔레비젼 위에 놓고 갔다. '너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그 말없는 마음을 그가 출근한 뒤 눈물로 받곤 했다.

때로 남편은 그 박봉(?)의 용돈을 아껴 꽃다발 선물을 하곤 했다. 어떤땐 맆스틱을 선물하면서 "평생 내가 먹는 맆스틱의 양이 얼마나 될것 같니?" 하고 키스에 대한 기대를 넌지시 던지곤 했다.

처음 남편이 취업되어 첫 월급 모두로 사준 루비반지는 그동안 다 팔아치웠어도 그것만은 간직해왔다. 지금도 난 그 첫월급의 선물을 잊지 못한다

 

 

 

명절날, 시댁에 가면 정말 난 시댁의 남자들로부터 특혜를 누렸다.

완고하고 무서운 시아버님께서는 이상하게도 나에게만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장날 큰며느리에게는 어림도 없을 금팔찌를 사오셔서 뒤란 텃밭으로 작은며느리인 나를 몰래 불러서 손목에 채워주시며 말씀하셨다. "손목도 지렝이(지렁이)만큼이나 생겼네. 아가, 니 형님이나 올캐한텐 말 허지 말어!"  그 어른이 날 예뻐하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지금은 살도 찌고 팔목이 장작만큼이나 두껍지만 그땐 40킬로가 살짝 넘는 빼빼마른 몸매에 작은키여서 그 어른 생각으로 난 늘 안쓰러운 초등학생 손녀같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내 쪽에서도 자라면서 친정 아버지에게 발칙하게도 온갖 심부름을 시켜대도 아버지께서는 늘 웃는 얼굴로 "우리 이쁜 딸"로 답해주시곤 했다. 예를 들면 밤에 푸세식 변소를 가려면 너무 무서웠으므로 좀 만만해보였던 아버지에게 망을 보게하고 "아빠! 아직도 있지?"를 외치며 오래오래 볼일을 본다든지,  아버지께서 걸레질을 하고 계시면 난 그 등을 말삼아 타면서 " 더 빨리!"를 외쳐대며 자란탓에 남자 어른들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습관탓도 있는듯 했다.

그래서 무서운 시아버지의 마음을 돌릴일이 있을 때는 식구들은 나를 이용했다.

"동서, 동서가 아버님께 잘 말씀드려봐라" 경상도댁인 형님은 꼭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뿐인가? 남편보다 훨씬 미남인 시아주버님은 나를 꼭 막내여동생 돌보듯 돌봐주셨다. 부엌일에 소질도 없고 솜씨도 없었으므로 명절날 부엌일에 관한한 늘 나는 음식솜씨 좋은 시어머님과 형님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이나 숟가락 젓가락 놓는 일들을 하거나 상을 물리면 설겆이가 주로 전공이었다.

그것도 날씨가 추운 설날에 설겆이감이 꽤 많은 날이면 남편은 식구들의 눈총을 아랑곳 하지 않고 본인이 다 해주었다. "아들아, ** 떨어진다!" 하는 소극적인 시어머님의 태클쯤은 남편은 적당히 둘러댔다. "엄마, 주리 감기 걸렸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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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가 가진것보다 갖은 특혜를 다 누리고 살아온 나는 정말 하루아침에 가난한 콩쥐에, 불쌍한 여성가장의 신분이 되어 노동부에 들어왔다.

아이의 돌반지를 팔아서 쌀을 사던 극심한 가난의 나날이었거니와 한 세계로 알고 믿어왔던 사람에게 배반당했다는 정신적 충격은 감당하기에 너무 힘이 들었다. 거기다 아직 어렸던 아이들을 홀로 돌보는 일이 얼마나 내 심장을 조여왔는지 나는 늘 숨을 쉬는것이 어려웠고, 날마다 수면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했다.

하루 열세시간의 노동, 낮엔 직장에 밤엔 영어강사로 학원에, 아이들은 어린이집과 남의집에 맡겼다가 데려오는 고된 하루하루가 진행되던 그 즈음에 인력은행 임시직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폐소 되었지만 인력은행이라는곳은 전라북도와 노동부가 반반씩 관여하는 기관이었고  취업알선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 그곳에 나는 명예상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각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흥미검사나 적성검사를 하고, 그 결과지를 입력했으며 출력해서 다시 그 학교에 가져다 주는 일을 하곤 했다. 월급은 한달에 44만원 하루 이만이천원씩 20일분의 급여를 받으며 일했다. 그러니 나는 4시 반이 되면 퇴근을 하고 학원에 가서 강의를 해야 세식구 생활이 되던 그 시절이었다.

 

 

 

그 때 유난히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여자상사가 있었다. 일찍 퇴근하는것을 처음 근로계약할때 전제하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4시 30분에 나오려면 그 상사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알고보니 명예직업상담원은 한시간정도 일찍 퇴근할수 있다는것이 공문에 명문화 되어있었다.) 

업무중에 화장실 가려고 자리를 일어서면 또 어김없이 그녀의 감시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난 점심시간에 사무실 뒤에 있는 건지산 중턱에 올라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외치듯,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일몰의 타라에서 외치듯  "너 인생아, 두고보자. 내 반드시 성공할거다!" 하고 외치곤 했다. 그러고 나면 답답했던 가슴이 그때서야 뚫려 숨을 제대로 쉴수 있었다.

 

 

 

한 학교에 흥미검사나 적성검사 문제지를 가지고 가려면 어떤땐 라면박스 두개정도 되는 분량을 차도 없이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야하는때도 있었다. 전주시내라면 시내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순창 복흥 무주등에 나가려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시외버스로 비포장도로를 달려가곤 했다. 나중에 생각다 못해 미리 문제지등을 학교에 택배로 보내고, 검사를 실시하고 난 그 날 답안지만을 가져와 입력하고 결과지 출력은 다시 택배로 부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그 여자상사분은 내게 그 택배비는 관리과 예산에 잡혀있지 않으니 본인 부담으로 하라고 했다.

그녀가 한달 44만원 받아 출장비도 여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차비하고 택배비 하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어렸으므로 열이나거나 아픈날엔 나는 전전긍긍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없이 그 어린것이 혼자서 앓고 있을 생각을 하면... 그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자식도 좀 대범하게 길러야해. 지가 할일은 지가 스스로 하라고...너무 자식에게 벌벌 떠는것, 그것도 직장인의 자세로 좀 생각해볼일 아니야?"

심지어 검사지가 든 박스 두어개를 들고 뜨거운 날씨에 학교로 나가는것을 본 정규직원이 나를 자기 차로 데려다 주려고 하니 질투하는 아이처럼 " 방향이 틀리잖아!" 하며 소리를 치곤 그 남직원을 못나가게 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박봉이긴 하지만 노동부의 직업상담원이 되었고, 사십이 넘은 나이에 나의 길을 찾아 글을 쓰고 있으며, 글은 내게 위안이 되어주었고, 또 어느정도의 성과로 내 노고에 보답해주었다. 예전의 상황에 비해 이렇듯 편안한 나날이 되었던 탓도 있지만, 내가 지금껏 받아왔던 이유없는 특혜가 억울한 조연이 있었음에 가능했다는 생각으로  남을 원망하는 마음을 어느정도 다스릴수 있었다.

 

 

 

이제 그 상사와는 무엇보다 나의 고등학교 선배가 되시고, 서로가 같이 늙어가며 서로의 성격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것 처럼 지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엄격한 자기관리, 즉 오랜 공무원생활에서 오는 조직의 기여도등 옛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햇던 장점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나의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내 가슴에 남긴 흉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윗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사실 직원의 업무에 대한 평가는 상사가 할지 모르지만, 상사의 인격에 대한 평가는 아랫사람들이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사무관 시험공부를 아주 오래했다. 이상하게도 될듯될듯 하다가 안되는 시련의 시기를 거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다른 사무소에 오래 계시다가 이번에 科는 다르지만 나의 직속 상사가 되어있다.

 

 

 

그 여자 상사분만 내게 그런 시선을 보낸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인격이 좀 된사람의 경우에는 안타까운 시선, 불쌍한 시선으로, 인격이 좀 덜된사람의 경우에는 멸시하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을 견디는 나날이 나의 노동부 생활이었다. 거기다 내가 조금 잘하거나 뛰어난 면이 보이면 어떻게 하든 어필되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질투의 직원들도 있었다. 삼년전 신인상으로 시 등단을 했을때, 내가 글을 쓴다고 소문이 나자 " 그여자, 글쓴다고 업무도 안하고 글만 쓰는거 아냐?"에서 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올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하자 "조직사회에서 개인의 영광이 무슨 상관이냐?" 고 했던 직원부터 "혹시 신춘문예라고 이름 붙인 이름 모를 잡지에 당선된것 아니야?" 하는 직원까지, 방송출연 한다고 하니 방송국에서 전자 팩스로 온 출연 요청서를 삭제해버린 직원도 있었다. 물론 이건 어느정도 나의 자격지심이 섞인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나의 노동부 생활을 한두마디로 이렇게 요약할수 있을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멸시와 내재화된 질투 그리고 어쩔수 없는 불쌍함....그것이 아이둘을 혼자서 기르는 여성가장 근로자에게 쏟아지는 시선이었다.

여기에는 직원들과 이런 차이를 좁히고자 노력을 하지 않았던 내 잘못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이므로 내 잘못은 아마 최소화해서 생각할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또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선생님, 힘내세요" 이런 직원들도 있고, 아주아주 친한 동료들도 있으므로 이젠 나에대한 안티들에게도 제법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그런 시기에 그 여자상사분과 같이 근무했던 분이 이제 우리 취업지원과 과장님으로 오셨다.

그는 여자상사처럼 직접적으로 날 미워하진 않는다. 그러나 얼마전 자신도 모르는 다른 방법으로 내 가슴을 다치게 했다.

그가 9월 부임한 뒤로, 난 한달 두번 운영하는 프로그램 진행을 연 4주나 강행해야 했다. 한달에 두번 이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때도 많았지만 격주 진행에는 이유가 있다. 진행을 하지 않는 주에 참가자 모집이나 사후관리, 교재준비, 이것저것 보고업무등 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 본부에서도 격주진행을 원칙으로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 9월 첫주부터 시작해서 11월말까지 난 한주도 빼지않고 진행을 해야만 한다.

실적위주의 체제여서 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학교에서 지금 내가 하고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요구가 많았던 것이다. 더우기 갑작스런 업무분장으로 파트너가 바뀌는 바람에 파트너는 프로그램 진행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두사람이 오전 오후로 나뉘어서 강의를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여섯시간 강의를 혼자서 해야만 했다. 한주일 하고서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었는데 누군가 대체할수 없다는 긴박한 긴장감이 연 4주를 진행하게 했다. 물론 몸은 많이 망가졌고, 집안일이나 글쓰는 일에 소홀할수 밖에 없었다. 거의 매일 병원을 다니고 잠자리에 들땐 내가 내일 일어날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되곤 했던 나날이었다.

내가 나가 진행을 하는 전주공고에서는 오히려 내게 이렇게 말했다.

"보기보다 정말 건강하신것 같아요. 우리도 교사지만 어떻게 매일 6시간씩 강의를 해요? 쉬엄쉬엄 하세요. 우리 학교 봐주시다가 큰 병 얻으시면 어떡해요?"

 

 

 

그런데도 과장님은 내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대신, 출장나가고 들어올때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가라고 팀장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거기에는 두가지 뜻이 담겨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사무관이므로 전임 상담원과 직접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는 권위의식과 혹시 이 직원이 학교로 출장간다고 하고 대충 시간이나 떼우고 일찍 퇴근하는등 복무사항을 흐지부지 할까봐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과장님 입장에서는 절대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노동부에서 지녀왔던 못난 피해의식은 그럴것이다는 생각을 굳히게 했다.)

아침 시작시간을 30분 연장시켜 반드시 사무실에 먼저 출근하고 과장님께 다녀온다는 인사를 하고 학교로 나가서 진행을 하고,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반드시 사무실로 들어와서 과장님께 인사를 드려야 했다.

물론 조직사회에서 상사에게 인사를 하고 들고나는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인사성 이전에 아랫사람이 자신이 일에 지금껏 최선을 다해 해왔던 그 노고에 따뜻한 긍정을 먼저 해줄수는 없었을까?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난 내일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면 어떨까? 이렇게 전달하면 어떨까? 늘 수업에 대한 스킬을 나름대로 연구했고, 상식을 풍부하게 하려고 인터넷 검색이나 책을 읽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복무에 대해서도 노력했다.

전에 계시던 과장님께서 무거운 짐을 들고( 빔 프로젝트와 노트북 그밖에 프로그램 진행에 필요한 물품들, 아이들 간식까지...) 각 학교로 강의하러 다니던 나를 배려해서 강의가 끝나면 5시가 넘을텐데 바로 그곳에서 퇴근하라고 일부러 불러서 말씀하셨는데도 난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유없이 나만 특혜를 받는것이 조금 늦게 퇴근하는것보다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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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이런 노력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니 서운한 생각이 밀려왔다. 아마도 내 인격이 아직 덜된 탓이리라.

그것까진 좀 슬프지만 견뎠는데 이번 회식때 난 정말 피가 거꾸로 솟았다. 과장님 커피를 잘 타주고 특히 남자직원들에게 예쁜 미소를 지어주는 직원이 있었다. 그 여직원은 예뻤고, 마음씨도 고운것 같았으므로 내 입장에선 특별하게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직원들이 이상하게도 그 여직원을 은밀하게 따돌리며 싫어했던 이유를 알수 없었다. 이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과장님께서 " *** 선생, 임신까지 했는데 3층에 올라오자 마자 이렇게 격무를 시켜서 미안해"

이렇게 말씀하시는게 아닌가?  격무라... 많은 직원들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고, 나 또한 같은 시기에 쓰러질듯한 체력을 가까스로 일으켜 일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명예직업상담원과 같이 하고 있었고 다른 직원들에 비해 특별히 일을 많이 한것까지 없는 그녀에게, 커피를 잘 타주고 예쁜 웃음을 지울줄 아는 그녀에게 과장님은 '격무에 시달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받았던 이유없는 혜택을.  그 혜택과 긍정은 아마도 억울하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왔던 억울한 주변인들의 희생위에 세워졌다는것을.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그 억울한 조연이 된다한들 억울할일은 아니다.

지나간 날, 나의 거짓말이 무사통과 되었을때 선생님께 억울하게 맞고 울던 아이들이 내 주변에 있었고, 내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릴때 정말 아픈데도 열이나는 이마를 짚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은채 홀로 앓는이가 있었으며, 내가 아빠에게 나의 이쁜딸이 되었을때 추운곳에서 손이 부르트며 일하던 가정부 언니가 있었고, 시아버지로부터 이유없는 이쁨을 받았을때 묵묵히 억울함을 참던 손윗동서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뿐인가, 내가 서울에서 주문해온 새옷을 입고 맛있는 도시락을 먹고 있을때 언니에게 물려받은 헌옷을 입고 깍뚜기뿐인 도시락을 먹고있었던 가난한 친구가 있었고, 내가 남편이 벌어다준 월급봉투의 돈을 세며 남편의 노고를 아랑곳 하지 않고 이번엔 보너스가 이것뿐이냐고 물었을때 식당에서 열두시간씩 일하며 손이 부르트게 일하며 아이들을 기르고 있던 여성가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억울한 조연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유없는 혜택을 마치 훈장인양 두르고 자만심이나 살찌우며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비록 내 노력을 인정 받지 못한채 직장내에서 반쯤의 멸시와 반쯤의 안타까움으로 불쌍한 여성가장이 되어 일만 하는 억울한 조연의 역활이 내게 주워진다고 해도 난 할말이 없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걸 가졌었다.

부끄럽다.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봄부터 생살을 찢고 움을 틔운 새싹들, 붉은 열정 안으로 안으로 스미어 꽃이 된 이파리들, 이제 시간속에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가랑잎들, 그러나 뿌리로 남아 그 정신을 지켜가는 억울한 조연을 닮은 모든 것들에게.... 정말....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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