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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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11

02. 성우 이명직 대감이 이성구 선생의 조부였으며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조부였는지 모른체 다들 작고하셨습니다.

https://youtu.be/YtVKffR2v0Q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 선생,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

스탈린은 왜?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했을까?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이주의 이유 -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에만 골몰하는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 백낙천 시에 '식분지족(識分知足) 외무구언(外無求焉)'이라고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밖에서 또 뭘 구하리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교도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1925~1975) 선생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식분(識分)'이라는 휘호로 내 부친인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1927~2018) 선생의 중년 시절 호인 방산(芳山)을 위해 남기셨습니다. 미천한 입장에서 그 심오한 뜻은 뒤로하고 '자기 분수를 알라'는 확실한 거 같습니다.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찰 등을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글픈 이야기]

지운 김철수 선생의 이야기를 페이스북, 블로그에 그분의 서화와 함께 소개하다 보니 별 인간들이 빨갱이라 비난하고 또 어떤 이는 잘못된 이야기라 항의하고 또 어떤 이는 소설 쓰지 말라며 비난한다. 아무튼, 아직 절반도 숙독하지 못하였으나 해방 이후부터 시간대별로 정리하여 주마간산 격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찰과 메모 등을 훑어보았다. . 해방 이후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작고하던 1986년까지 일분일초도 남한 땅에서는 좌익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지운 선생이 조선의 사회주의 역사에 차지하는 부분의 무거움을 알고 수많은 관심자들이 몰려들어 물어보고 녹음하고 취재도 하여 언론 보도도 더러있었지만 지운 선생은 주변 지인들과 남아있는 식솔들을 위해 말을 아끼고 살수 밖에는 없었다. . 지운 선..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

https://youtu.be/dwI4WVvi1ok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이주의 이유 -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에만 골몰하는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찰 등을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분열(分裂)과 자멸(自滅)을 막는 길은 수신(修身)일 겁니다. 바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야'만 한다는 거지요. . 1917년 박진순 선생,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선생 등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한 민족적 ..

[식분(識分) - 자기 분수를 알라! -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야']

https://youtu.be/dwI4WVvi1ok 백낙천 시에 '식분지족(識分知足) 외무구언(外無求焉)'이라고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밖에서 또 뭘 구하리요'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불교도인 동정 선생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식분(識分)' 휘호로 방원(芳園) 선생의 중년 시절 호인 방산(芳山)을 위해 남기셨다. 미천한 입장에서 그 심오한 뜻은 뒤로하고 '자기 분수를 알라'는 확실한 거 같다.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찰 등을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분열(分裂)과 자멸(自滅)을 막는 길은 수신(修身)일 거다. 바로 '배고픈 건..

[코민테른 유학장학생, 이극로, 나용균, 장덕수 ... ]

지운 선생은 맹자의 ⼀樂也, ⼆樂也를 건너뛰고 '得天下英才⽽敎育之, 三樂也'를 ⼀樂也라 쓰신 이유는 영재를 교육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거다. 지운 선생은 서당의 서택환 훈장이 보여준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조선 천지에 똑똑한 젊은이는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구라파로 로시야로 하다못해 일본으로라도 유학을 가서 신식문물을 배워 미래를 대비하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일본으로 유학을 나왔다. 그리고 1915년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동탄 자택에서 일제에 독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립투쟁의 길에 떨쳐나섰다. 1921년 코민테른 군자금을 받아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조선의 영재들을 미국으로 구라파로 유학을 보내는 일이었다. . 더구나 이동휘 선생이 레닌과 독대할 때 조선의 철도와 철도망을 물어볼 때 꿀 먹은 ..

[11/11 - 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모색한 정치지도자]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11/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11번째 작품[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모색한 정치지도자]이다. 이 작품의 해설 역시 댓글로 재능기부를 해주신 양금섭 교수님의 해설을 함께 공부해 보고자 한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해설은 다음과 같다. . " 巖身徑晝 别風塵 惟我江山 一恨新 寇倭方驅 臨近海 相殘南北 是邦人 . 바윗 몸체 하룻 새에 먼지로 날려 흩어지니 오직 내 강산에 한 슬픔이 새로워라. 섬도적 방금 달려와 근해에 이르려는데 서로 죽이는 남과 북은 우리나..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398~410

지운 선생의 서화 작품 해설이 돌팔이가 왈가왈부 할 사안이 아니다. 주변에 한문 공부 좀 했다는 일본 중국 대만 친구들 조차 돌팔이 내 한문실력(?)에 감탄 할 정도로 한국이 한문실력의 종주국이긴 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한문에 한소식 하신 분들의 댓글 재능기부에 맞기고자 한다. 난 내 기억과 지운 선생이 사사로이 내 부친에게 보냈던 서찰 내용 중에 한국정신문화원 간 '지운 김철수' 증언집에 거론된 내용을 중심으로 비사형태로 남겨보고자 한다. . [코민테른 군자금의 행방과 지운 김철수] . 증언집에는 코민테른에서 받은 군자금의 내용(200만루브르, 100만루브르 금괘)도 나름 나온다. 지운 선생은 그 엄청난 공로조차 증언집에서는 자신과 함께 움직였던 동지들에게 돌린다. 사회혁명당과 러시아 한인사회당이 박진..

[단독 발굴]서찰을 통해 본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

1916년 일본에서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과 1920년 조선에서 사회혁명당을 만들었고 1921년 성재 이동휘 선생과 함께 상해 고려공산당 창당의 주역이며 1926년 6월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3000명 이상의 조직원이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공산당이 해체된후 2차 후반기 조선공산당과 1926년 9월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1927년 스탈린을 독대하여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특별혁명군자금을 수령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선생, 그는 무슨 이유로 북조선의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한의 시골에 칩거하며 여생을 마처야 했을까요? 2018년 4월 한국에서 허겁지겁 급작스레 작고하신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10월에 휴가를..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영원한 우정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을 중심으로] .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 . 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한국 대만 중국 유학생을 모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다. (2) . 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기 책임비서로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참가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

[1956년부터 1986년까지 지운 김철수 선생과 방원 이성찬 선생이 주고받은 서찰을 통해 본 근대사]

위키백과에 의하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 선생은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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