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5_전라도_운암강

장편소설 운암강 [20] - 김여화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8. 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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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lib.kll.co.kr/gen/main_0602.html?kkk=5&sss=1&sl=1&id=yehwa21&no=2355&sno=4459&n=20 

장편소설 운암강의 작가 김여화님의 허락을 얻어 제 어머님의 고향 전북 임실 운암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운암강을 올립니다. 작가의 허락없이 퍼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노란장미 주]

 

 

장편소설 운암강 [20] - 김여화

 

 


 

 

 

제목  [20회] 풍습-2
등록일  2001-10-15
풍습-2


황원삼 이라 하는 것은 용의 문양을, 홍원삼이나 자적 원삼에는 봉황 문양을 초록 원삼에는 꽃 문양을 수놓아 그 신분에 맞는 흉배를 다는 것이 보통이라.

초례청에서 예를 올릴때는 원삼을 입고 시댁의 사당이나 폐백을 드릴때는 활옷을 입었는데 활옷은 대개 붉은색에 화려한 자수가 가장 특징이요. 원삼은 둥근 깃을 박음질한 것이라.

계급에 따라 색상이나 문양에 세세한 법이 있었으니 이것은 원삼과 활옷이 갖추어 입어야하는 장신구가 각각 다양하고 화려한 때문이다. 우선 속곳으로 속속곳, 바지, 단속곳, 무지기 두루치기, 속적삼, 속저고리, 속버선,솜버선 등을 갖추어 입고 삼회장 저고리에 스란치마를 입는 것인데 삼회장 저고리라함은 본시 깃, 고름, 끝동, 곁마기에 다른 배색 선을 댄 것으로 주로 궁중에서나 상류 사회에서 입었던 것이라.

삼회장 저고리와 두겹의 스란치마 위에 원삼과 활옷을 껴 입는 것으로 원삼과 활옷을 입을 때에는 허리띠를 하는 것이 보통이라. 이는 옷이 몸에 붙게 하기 위함으로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것을 홍단대라 하니 이 원삼 차림에서는 머리 장식도 중요하였다.

원삼에는 큰 머리 어여머리 라 하는 다른 머리로 장식을 하고 족두리나 화관을 쓰기도 하였다. 이때에 잿말의 원삼은 숙고사에 화려한 자수 대신 금박을 찍은 것으로 빌려다가 입었던 집에서 보관을 하였다가 다른 집에서 필요하면 내어주며 서로 돌려가며 잘 손질하고 정히 보관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먼저 교배례로 신부가 신랑에게 두 번 절하면 신랑은 한번으로 답례가 있고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양측은 꿇어 앉아 기다리며 합근례란 신랑이 마신 술잔을 초례상위로 넘겨 신부에게 건네주고 신부는 초례상 아래로하여 신랑에게 술을 건네주는데 시중드는 이가 술을 조금씩 마시게하고 더러 신랑은 신부가 주는 술은 벌컥 마시고 싸릿갱이로 만든 젓가락을 쓰고는 등 넘어로 던지는 것이다.

이 합근례가 있으면 주례는 초례절차가 끝났음을 알리니 신랑신부가 나란히 서면 옆에 섰던 사람들은 쌀과 팥을 집어 신랑신부에게 뿌리는데 이 것이 뿌리는 정도를 넘어 장난기 심한 이는 힘주어 콩팥을 던져대면 신부가 얼굴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금새 불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울기도 하는 것이라.

울면 운다고 웃으면 웃는다고 흉되기 마련이라. 더러는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는데 신랑신부의 뒤켠에 구질구질한 집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병풍을 사람들이 들고 있거나 하는데 마루가 높을 경우 병풍위로 사람이 초례청을 내려다 보는사람, 병풍아래로 고개만 내민 사람 그림도 가지가지라.

살기가 그리 편안한 때가 아니므로 신부나 신랑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살펴보면 더러는 처마 끝에 매달린 씨가시 봉지까지 썰어말린 가지 꼭지까지 보이니 병풍을 든 사람은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올렸다 내렸다 팔이 빠진다고 고함을 치기 일쑤라.

온동네 사람들은 또한 이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고 즐기는 것이다. 초례를 올리고 신부는 방에 들어가 요대기 몇 개씩 깔고 앉아있기 마련인데 이는 구들장이 음식을 장만하느라 뜨거워서 제대로 앉아있기가 불편함 때문이라. 아무리 시집간다고 좋아하던 색시도 초례 올리는 날은 녹초가 된 듯 지치기 마련이라. 많은 사람들이 예처럼 혼례 올린후 일년이 지나서 신행을 가는게 아니라 당일에 신행하니 신랑집으로 따라가는 것이 보통이라.

박서방네가 마당에 나와 이미 신랑 친구들 함 잽이들과 여러차레 나가고 끌려오느라 시끄럽더니 어느새 함이 봉치떡 시루위에 얹혀져 있었다.
"아이고 언지 그러코롬 잽싸게 붙들어다 올리 놓았대라오?"
"머언 소리여 내가 모셔온게지"
"아니 이런법이 어디있다요? 신부집이서 함을 뺏어버릿당게?"
"대처 들으먼 참말로 뺏은종 알겄네라오. 날도 캄캄헌디 후딱 놓고 먼길 가시 야지 안그러요? "

함을 파는 사람들과 받는쪽 사람들의 입씨름은 계속 되고 박서방네는 넙죽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함을 들고 마룽으로 올라온다.
"아이 어여 떡시루 개서 상덜 내와 이?"
부엌에서는 상을 미리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랫방 2칸 장방에 상이 들여지고 우인들도 함께 따라 들어간다. 신랑과 그 친구들 모두 함께 교자상 그득 차려진 앞에 앉으니 저녁도 굶고 함을 판다고 고함지르고 떠들고 웃고 하였으니 시장기가 지칠정도라.

"아이고 엄청나게 많이 장만허싯네요. 잘 먹겄습니다만 지덜 양 채와 줄랑가 모르겄네요. 장모님?"
"아이고 채우다 뿐이겄소 많이 자시고 싸줄텅게 갖고 가쇼 이?"
"야 새신랑 너는 좋겄다. 저렇게 시원시원헌 장모님 처음 본다"
우인들은 한창때 장정들이라 술도 말술이요. 떡이건 다른 음식 모두 거침없이 비워대니 자꾸만 가져나르던 아낙네들의 한마디씩 핀잔을 준다.
"아이고 거봐요. 아 어채피 함은 주러 온것 후딱 주어뻔지고 배 고픈디 진작 밥 잡수게 허지 이 무신 꼴이다요?"

"글도 그리서 쓰간디요. 다 재민디 우덜이 배고파서 긍게 아니라 부잣집이서 잘 먹을라고 매칠 전부텀 굶어서 그렁고만요."

신랑의 친구들은 음식맛이 맛갈스럽다하여 접시를 비워대는데 한 사람이 몇 개씩은 비우는지라 심부름 하던 아낙들이 처갓집 거덜 낸다고 야단치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간좌촌 박서방네는 갱변에 떠드는 약장사 굿보다 더 시끌벅적한 채 밤이 깊어간다.

동짓달 초 닷새 박서방네 둘째딸 시집가는 날은 날도 늦가을날 갖지 않게 청명하고 맑아 입담좋은 아낙네들이 시집가서 잘 살겠다고 점치는 말를 보태고 초레를 마치고 신부는 신랑측에서 대절해 온 트럭에는 장롱 이불짐 모든 짐들을 싣고 시부모에게 드릴 이바지 폐백 음식까지 모두 실은 트럭에는 양쪽에 대나무를 매달고 대나무 가지마다 청실 홍실 색색의 테이프를 풀어 걸쳐 신행가는 차임을 표시하고 신랑과 신부는 운전석 옆에 우인들과 요각으로 따라 가는 사람들은 트럭뒤에 올라타고 신부를 떠나보내기 위해 둑으로 나와섰다.

이때에 자동차라도 불러서 신부를 태우고 갈 수 있으면 부자라. 가까운 거리는 가마로 신부를 데리고 가기도 하였으니 가마도 없는 경우에는 그져 걸어서 걸
어서 신행을 가기도 하는 것이다.

신부집에서 신랑집으로 따라가는 것을 요각이라 하고 신랑집에서 초례청에 따라 오는 이를 상각이라 부르니 보통 상각이나 요각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인품과 덕망 학식이 있는 집안사람들을 보내었다. 집안에 이러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동네 어른중에 이처럼 따라 보냈으니 이는 새 사돈네 동네에 굴하지 않으려는, 과시는 못할 망정 기 죽지 않으려는 심사라.

박서방네도 일가 붙이가 없으니 동네에서 여러사람을 모셔와 보내니 잿말에서는 수천댁이 함께 갔는데 수천댁은 나이도 지긋하고 또 있는집 잿말 최씨라면 그래도 모든 사람이 우러르니 수천댁은 동네의 요각이나 상각으로 더러 많이 따라가곤 하였음이라. 하여 새 사돈네 집에 가서는 어찌 어찌 해야 한다는 것을 따르르르 뀌고 있었던 때문이다.

박서방네는 구성물에 친정붙이가 하나 있어 요각으로 따라나섰다. 거둔댁은 본시 집에서 장만은 하여주고 동네에서는 일을 보아주지만 밖으로는 나가는 성질이 아니라 제외하였다. 신랑집에서는 손님들이 많아 트럭을 두 대나 불렀왔는데 차 바닥에는 덕석을 깔고 모두 앉았다.

다행이 날이 좋고 찬바람도 덜하니 박서방네는 한결 마음이 눅어있다.
"그려 잘허고 살어라 이? 시부모님 말씸 잘듣고 이?"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서는 그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데 박서방는 어서 출발하라고 손사래를 친다.
"딸자석 이라는게 다 그렁거여 인자 가서 삼서나 아들 잘 낳고 시부모 공경허 고 잘 헌다고 소문나야 발 뻗고 자능겨 그게 딸가진 부모여"
"아지매는 딸을 셋이나 여우셌응게 지보다 더 속상허싯겄어요 이"
"속상허다고 생각허지 말고오 시집 잘 갔다고 생각히 보아"
딸 가진 부모는 예부터 시집보내고 나면 잠자리도 편치못하다 하였으니 시집간 딸년이 쉽게 손주라도 낳아 안겨 드리면 다행이지만 그리못할적에는 바늘방석보다 더 고달픈 것이 친정 부모다.

거둔댁은 그렇게 셋이나 여우고 마음 한 번 편히 갖지못하였다. 아들 손주라도 보아야 다행인 것을 그네는 복이었던지 딸들이 모두 첫 손주로 딸만 내리 셋을 낳은 거둔댁을 닮지 않았던지 손 귀한 시댁 귀염을 받게 되었는데 지금이야 거둔댁은 마음편한 어미라. 딸들이 모두 그네를 닮아 손끝이 야물어서 바지런해 칭찬이 그네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다홍치마 끝 자락이 팔랑 가을바람에 춤을 추다가 그네를 태운 자동차가 우인
들과 요각들을 태우고 오색 테이프를 휘날리며 빵빵거리면서 간좌촌을 떠나고 시원섭섭 딸년을 보내는 박서방네는 저고리 소매를 잡아당기며 눈두덩을 찍어 누루고 차에 타고 앉은이나 남아있는 사람들이나 서로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자동차는 어느새 물레방앗간 모퉁이를 돌아 사양리 쪽으로 내달리고 허퉁한 심정 제 살길 찾아 베필 얻어 시집 가건만 에미된 마음이야 어찌 마음 놓이랴. 6,25 난리에 둘째 딸년 세 살박이로 밤낮으로 쏟아지는 발치산들의 총소리에 날이면 날마다 경기를 하면서 죽어 나자빠지는 아이를 들쳐 업고 둠벙소 넘어 망덕거리 구성물 침쟁이가 사관을 놓아대고 돌아올 때면 간좌촌에서 둠벙소 산 끄트머리로 뽕나무 밭이 있었더니 이곳에서
"이겨라 이겨라라아"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신호불이 나달아 가면 요란한 총소리가 퍼 붓었으니 간좌촌 앞보루 뒷 보루는 총쏘는 빨치산들이 시커멓게 있으니 죽은이들도 즐비했고 그럼에도 딸년은 용케도 목숨이 질겨서 다시 살아나곤 하였으니 죽었으면 그때 열 번도 더 죽었으련만 내것이 될랴 했으니 딸년은 살아나고 게나마 주인댁 진필의 개화된 의식 때문에 계집애도 배워야 한다는 배려인지라 잿말의 학교에 다녀 국문은 깨쳤던 바이요.

잿말에 있는 운암 국민학교는 1924년 5월에 교실 두칸을 짓고 4년제 학교로 시작되었느니 그 아이 늦은 아홉 살에 학교에 입학 할 적에는 교실을 여러칸 지은 뒤라 박서방네 딸년은 학교를 마친 것이다.

본시 박서방은 부모가 없이 떠돌이로 잿말에 흘러 들어왔더니 거둔댁네 더부 살이 장인의 눈에 들어 사위로 삼았으니 자연 주인댁 진필의 가솔이 된 것이다. 글자도 모르고 생긴것도 보잘 것 없지마는 심성은 고와서 진필이 그를 간좌촌에 집을 사서 제금 살게 해 주었고 대신 농사일은 오며가며 거들었던 것이다. 박서방은 진필의 말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은 물론 충직한 노복이었다. 하여 그 즈음 머슴이라도 제 살길 마련 해 주어야 한다는 진필이 그들의 살길을 찾아주었던 것이라.

거둔댁도 그러는 남편의 뜻에 못한다 하지 않으니 본시 그네의 심성이 여리고 후덕했던 때문이다. 잿말에서는 물론 근동에서도 박서방네는 부러운 사람중에 하나였는데 다 주인 잘 만난 탓이요. 주인을 잘 만났다 하더라도 진필의 사람됨이 남달랐기 때문이라.

박서방네는 연신 눈두덩을 찍어 누르며 쌍암리 쪽으로 달아난 자동차를 바라본다. 저 딸년이 국민학교에 다닐적에는 제 아우 업어키우며 젖먹이러 밭에 따라 다니느라고 쬐그만 등짝에 코 마를 날 없었더니 벌써 커서 열 여덟이라 시집간다 생각하니 그져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마당벌 앞에 서숙밭마다 따라 다니며 어쩌다 새참으로 내온 감자 몇 개와 삭카리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기도 어려웠던 때이다.

이때는 전쟁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사람 사는 것이 사람같지 않았는데 빨치산들이 모두 불을 질렀거나 새로 지었다는 집 조차도 보잘 것이 없었으니 거둔댁네 집은 몸채는 그대로 있었으나 쌔때기로 지붕을 이었던 헛간은 불타고 없어져 다시 지은 것이다.

또한 혁명이 일어나서 다시 운암댐을 막기 시작한지 두 해 되었으니 다행이 그네는 논 전답이 있어서 쉬이 일어났지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모양새 우습지도 않았음이라.

전쟁에 많은 동네 집들은 불타고 새로지어 건지산 백련산에 지천으로 나 있는 쌔때기를 비어다가 날개를 엮어 지붕을 새로 이은 집들이 잿말에는 솔찮이 되었다.
짚날개는 해마다 년년이 지붕을 이어야 했지만 쌔때기는 한 번 야물게 이어놓으면 오래가기가 몇 십년이라 보통 가실 일이 끝나고 나면 잿말 사람들은 쌔 비는 것이 일이다.

경각산 까지 가기도 하였고 있는 집에서는 초 빌 때 처럼 놉을 사서 몇 날이고 비어 날라 날개를 엮는데 보통 집 사칸짜리 한채를 이을려면 장정들의 힘으로 쌔떼기 백짐이 있어야 했지만 처음 이을 때 말고는 연신 작년에 이었던 지붕에 덧 씌우듯 하였으니 그만 못하여도 충분히 이을 수 있었다. 쌔 백짐을 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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