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5_전라도_운암강

장편소설 운암강 [04] - 김여화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8. 1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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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운암강의 작가 김여화님의 허락을 얻어 제 어머님의 고향 전북 임실 운암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운암강을 올립니다. 작가의 허락없이 퍼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노란장미 주]

 

 

장편소설 운암강 [04] - 김여화

 

 

 

 


 

 

제목  [4회] 강변마을들
등록일  2001-09-17

강변 마을들

조선시대에 상운암과 하운암으로 나누어지던 운암은 상류인 신평과 인접하여 500여년 전에 이천현감을 지낸 배면(裵勉) 이라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 적에는 앞산 바위에 금이 섞여 빛이 났다는 광석, 학암이라는 명칭은 산수가 수려하여 마을 이름을 여산이라 하였다는 훗날 광석과 여산을 합친 학암마을로 바꾸어 불렀다하였다.


학암리는 신평에서 부터 들어가기도 하지만 임실에서 서쪽으로 거멍굴로 넘어가는 쉰재를 넘어가기도 하고 선거리로 들어갈 때는 물속에 잠기는 현수교를 건너가기도 하지만 이근처 강가에 보리밭이 물이 차고 현수교가 물속에 잠길 때면 선거리는 청웅으로 돌아가 등재를 넘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선거리는 여직도 삼밭을 일구고 삼굿을 해서 베틀에 삼베를 짜는 아낙들이 많다고 했다.

운암강의 중류지대는 영촌 구사촌 어리동 두언동 네 개의 마을이 서로 독립하여 있는 것을 통합 입석리로 부른 것인데 입석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마을 앞에 열 세척 가량의 하늘을 향하여 우뚝 선(立) 돌을 일컬어 지은 이름인데 잿말의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독재라 부르는거라.

네 개의 마을중 영촌은 진필의 선조 전주최씨 응숙선생이 사화를 피하기 위하여 낙향 이 마을을 터 잡았다하니 영촌 마을의 중심부를 뒷산 능선이 통하고 마을의 동서 쪽으로 재를 이루어 영촌(嶺村) 잿말이라 하였다.

 

여기 령재에서 부터 강가 순환도로가 시작되기도 하지만 이 길목에서는 쉬노라면 하얀 백로들이 물고기를 찾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고 청둥오리가 떼지어 유유히 물살을 가르기도 하는 곳이다.


잿말에서는 조선대 열 두 명의 진사가 배출되어 명성을 높였으며 현재의 댐이 완공되기 전에 운암면의 면청, 파출소가 위치 하던 곳이다.

이 잿말에는 전주최씨등 사표오현 (辭表五賢)을 모시었던 운암 유일의 사우(祠宇)로 고려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崔七夕)의 사당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전주에 내려와 숨어살다 세상을 마쳤는데 이태조께서 고려말 장군의 공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친히 하사금을 내려 전주 오목대 근처에 정남사(征南祠)를 지어 보전케 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자 후손과 유림의 성원으로 국사봉아래 중건하고 네분의 현인을 모셨으니 바로 죽천 이국로 긍재 최진기 희안재 최경성 구호 최익성 록동 임성주 선생이시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은 첩첩산중 운암까지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었으니 이때에 훼철당하고 그 자리에 단을 지어 삼월삼짓날에 제사를 모시고 그 공적을 기렸으나 이 또한 강물에 수장당하고 만 것이다.


결국 정남사우는 흔적이 없지만 그 후손으로 나라에 충성을 바친 조상의 사당을 어찌 몰라라 하겠는가?

 

더욱이 조선의 태조께서 은전을 내린 선조의 광영이라니, 국사봉아래 강당골에 단을 지어 모셔오고 있는 것이다. 잡인 출입을 막기 위하여 표석을 세웠음이라.

옛 같으면 주사, 주황이라 하여 붉은 빛깔의 육방정계(六方晶系)광석으로 돌에서 채취한 것을 유황 황토와 혼합하여 붉은물을 칠 하였을, 이 주사를 옛 사람들은 깊은 산골 홀로 들어가 한번 두번 열 두번에 걸쳐 불에 굽는데 이때 녹아내린 결정이 육면결정체 곧 그것을 경면주사(鏡面朱 ) 령사라 하는 것이다.

이 수은을 고아서 결정체로 만들어진 것을 곱게 가루지어 물에 개어 이게어 절에서는 부적을 쓰기도 하고 더러는 한방에서 어린아기의 경기(擎氣)할적에 이마에 개어 바르거나 머리의 갓 얇은 숨구멍에 바르고 먹이기도 하는 것이 령사라.

 

홍령사와 백령사가 있으니 그러나 많이 먹이면 돌가루 인지라 사람의 몸에 가라앉아 영원히 숙면에 이르는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니 주사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음이라.

옛적에는 흔히 염료로 붉은색을 낼 때 쓰이고, 아주까리 기름과 솜같은 것에 묻혀두어 인주로 사용해 왔으나 오늘날은 귀하디 귀한 것이 되어 구할 수 없으니 붉은기둥 양편에 세우고 머리위 높다랗게 가로지른 보(堡) 위에 끝을 송곳 모양으로 뽀족하게 만들어 박아 하늘로 솟게한 멀리서도 잡인을 금한다는 표시의 홍 살문을 세우련만 페인트가 흔한 오늘날 기억하는 이도 흔치않다.

 

그저 누군들 알 듯 말 듯 표석만 세웠음이니.

홍살문을 세웠다 한들 하필이면 단 앞에 순환도로가 허연 뱃대기를 드러내놓고 언덕배기를 만들었으니 단을 지은 이곳 강당골 둑이 생기고 앞과 옆이 툭 트인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개방된 성역이 되어버렸다.

왜인들이 우리네 흰 옷에 검정 먹 물을 쏘아대고 그리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차라리 아예 검정물을 들여 옷을 만들어 입는데 이 검정물도 그들이 들여온 산물이다.

왜인들은 우리 선조들이 고유의 염료를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 해 왔으므로 이때에 잿말의 닷새장 임실장 방물장수들은 검정물과 잿물 삭카리와 당원은 필수적으로 파는 품목이었다.

예대로라면 남 빛은 쪽풀을 물에 담그고 우려내어 그 우려낸 물에 매염재를 사용해서 남빛 물을 들였는데 쪽풀을 일러 남(藍), 목람이라 부르기도 해서 청출어람(靑出於藍) 이라는 말은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말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일컬을 때도 청출어람이라 하였다.

 

이 쪽풀은 일년생으로 붉은꽃이 이삭모양으로 줄기 끝에 모여 피는거라 하였다.

분홍색과 붉은 색은 홍화에서 얻는데 홍화는 잇꽃을 말함이다. 이 잇꽃이야말로 씨는 기름을 짜서 쓰고 꽃은 통경제로 또는 종양이나 구강염에 약으로 쓰며 꽃물을 붉은 색을 내는데 썼던 것이다.

또한 노란색은 황벽나무에서 얻는데 황벽나무는 은행나무와 같이 자웅이주로 꽃이 피고 가을에 빨간 열매를 맺는 것을 나무는 가구나 집을 짓는데 사용하고 열매는 약재와 누른 빛깔의 색을 내서 쓰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노란색을 낼때 치자에서 썼는데 그때에 계란 구하기도 어려워서 적반을 부칠때는 치자물을 우려내어 썼던 것이다.

자주색은 지치에서 썼지마는 본시 검정물은 밤 껍질이나 신나무를 삶아 쓰기도 하였는데 월이감이 검정물의 원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바 화학 염료가 들어온 것은 왜인들의 산물이었다.

소목(蘇木)이라 해서 붉은 색을 낼 적에나 한약제로 쓰이는 것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 붉은 소목의 속살을 통경제나 외과용 약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즘의 잿말에서도 이들 우리 고유의 염료를 사용하는 이들은 찾아 볼 수 없었느니 쉽게 구하고 쉽게 잘 바래지지 않은 왜인들이 만들어낸 거멍물을 사용한 것이다.

 

본시 선조들은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채색을 쓰는데도 엄격하여 적, 청, 황, 백, 흑을 정색으로 하여 녹색과 벽색 연분홍의 홍색 자색 유황색 등을 5간색이라 하였지만 사실 단청을 하는데 쓰이는 이들 오방색을 구하기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쉽게는 개울가나 산 자락 끝에 자라는 단풍나무처럼 생긴 신나무, 이 나무를 베어다가 가마솥에 삶아 삼베에 물을 들이기도 하였던 것이라.

 

이들 색을 낼 때 쓰이는 매염료를 반드시 쓰는데 이는 옷감에 잘들이지 않음을 촉매제로 이용하는 것으로 염분이나 백반을 이용하였다.

백반은 명반을 구워서 만든 것으로 피를 멈추는데 쓰이기도 하는데 명반이라 함은 황산의 알류미늄 수용액에 황산칼륨이라는 것을 넣었을 때 석출하는 정팔면체의 무색 결정으로 물에 넣으면 곧잘 녹아나고 떫떠름한 맛과 수렴성이 있다했다. 봉숭화 꽃물을 들일적에 소금과 백반을 넣은 것도 이와 같음이다.

신덕의 옥녀동천과 오원강 물이 함께 살을 섞는, 유유히 운암강에 흘러들어 한몸을 이루는 양수쟁이 강정이쏘 앞 장관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루각이 양요정으로 잿말에 있으니 이곳이 모다 상운암의 일부로 되어있다.

하여 옛 운암제 였을 때는 강가 마당벌은 넓은 들과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주변의 산수와 어울어져 천혜의 자연 경관을 지닌 곳이라. 가을 단풍이 양요정을 아름답게 만들때에 강정날 아래 푸른 물가에는 거울처럼 그림이 비치는 그 고운 빛을 놓치랴

지천마을 간좌촌과 도마촌 하적동 세개의 촌락은 독립된 마을이라 이 삼촌의 주봉은 건지산과 삼촌의 중간을 횡류하는 강을 상징하여 지천리라 이름지었거늘 간좌촌은 흔적이 없고 도마촌과 하적동도 만수선 위쪽의 산 중턱을 깍아 터를 만들고 움막을 지어 삼삼오오 모여 앉으니 이곳이 오늘날의 도마터이다.

또한 상운암은 마을 뒷산의 형태가 반달 같아서 월면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 뒤, 지형관계로 마을이 북향하고 산이높아 달빛을 흠씬 받지 못한다는 까닭에 월면리(月珉)라 불렀다는.

그러나 이곳 강 사람들은 월맹이로 입에 붙은 월면마을, 사양리, 귀바우골, 귀암마을은 거석유물이 그중 많아 삼한 이전부터 부족 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마을뒤에 귀와 같은 바위가 우뚝하여 귀바우골인 것을, 사람들은 제 사는곳 유래도 알려 하지 않은채로.

이를테면 먹이 왜 먹인가 붓글씨 쓰는 먹이라면 아교와 그을음을 반죽하여 굳힌 것이 먹이라는 것으로 붓글씨를 쓸 때는 이 먹을 벼루에 물을 부어 갈아서 다시 녹여쓰는 것을 그져 먹이면 붓글씨 쓰는 것이려니 생각하듯이 저 난 곳이 언제 생겨 형성이 되었는지 알게 해 준다해도 하루 세끼 목구멍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세상에 귀찮다 할 것이라.

6,25가 끝나고 이어서 혁명시대가 열리고 흉년이 들어 이때에 잿말 사람들은 누구든 헐벗고 굶주리며 과도기의 세상을 맞이하였으니 그저 누군가 부르듯 기바우골 하면 그냥 기암마을로 한자어를 따른 것이니 우리의 지명 또한 왜인들이 만들어낸 지명들이다.

하여 지금은 변형된 기암마을이라 칭하니 왜 기암인가 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뿐이라.

 

이 모양으로 쌍암 염재와 이웃한 산모롱이 하나 돌아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곳이라. 귀바우골에서 신평의 북창리로 막 넘어들지 아니하고 강따라 돌아들면 사양리다.

본시는 새가 알을 품고있는 형세로 새알골이라 이름하였다는데 지영이 이곳에 갔을 적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러한 뜻은 같아보이지 아니하였다.

 

예전에는 오십 육십여 세대가 윳간에 돌담 넘어 고샅정을 나누었더니 사십년 전만해도 아이들이 새앙리라 부르던 곳으로 오늘날은 겨우 서넛이 사는 모양새 별로 탄탄치 못하니 강물에서 건져올린 민물고기 가물치 잉어 참 붕어가 그들의 주업인 어획이요 이것은 살아가는 방편인 것이다.

선거리 옛 이름은 선근리 조선초기에 형성된 마을로 뿌리근자를 따서 선근리로 불렀지만 마을 앞산 봉우리가 신선들이 모여 춤추며 놀았다는 전설로 선무봉이라는데 선무봉과 가까운 마을이라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뜻의 선거리로 바꾸어 부르지만 근동에서는 선근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거뜸에서 임실을 갈랴하면 재를 넘어 선거리로 와서 등재를 넘어가거나 학암리 광석리 마을 앞길로 더듬어 올라가 쉰재를 넘곤 하였다.

 

지영이 선거리를 더돌아볼 때 거기는 베틀위에 앉아 달가닥 달가닥 북넘기는 소리를 들었음이다.

선무봉 골짜기에 시목동이 있는바 시목동이란 한자는 화살시자를 썼거늘 시목동에 은둔 천도교 접주로 독립운동을 하였던 저 유명한 임실 독립운동의 삼열사 최승우, 한영태 김영원 선생이니 선생이 화살시자로 살골이었던 이곳에 삼요정을 짓고 그를 따르는 제자를 가르치니 그중에 뛰어난 이가 독립운동 33인의 한분으로 만고에 길이 새겨진 박준승선생이라.

선생이 살이 �친 화살시자 대신 감시자로 바꾼 것은 민초들을 위한 사려깊음과 선견지명이라.

 

본시 이곳 살골 주변에는 검은곡(劒隱谷) 투구봉의 전설이 있으니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왜적을 크게 무찌른 유명한 박장군에 �힌 일화라 하는데 확인할 기록이 없지만 대강은 이러하다.

박장군이 거둔이에 군대를 머무를 적에 그곳을 거둔리라 하였던바 현재의 거뜸이로 일인들은 이곳의 지명에서 제 나라의 군대가 대 접전 끝에 패한고로 군대가 주둔하는 거둔이라는 지명 쓰기를 불쾌히 여겨 청운으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쨌거나 양대복 장군의 대첩지로도 알려져 있는지라 둘의 일화를 하나만 옳다 아니다 말할 처지는 못되겠기에 그 대강만 말함이라.

거둔이 안포마을 뒷산 이름이 백의산(白衣山)인 것을 이 백의산에 박장군에 관련된 지명이 몇 군데 있다.

 

박장군은 군사들이 사용하는 병기인 칼을 모아 남몰래 비장(秘藏)한 골짜기가 있으니 그곳이 검은곡이라 또한 화살을 숨긴 곳을 살골, 시동(矢洞)이라하니 이곳이 곧 선거리의 시목동과 같은 장소로 박장군은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과인하여 여러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쉴 때면 백의산에 들어왔는데 투구는 맞은편 산봉우리에 벗어 놓고 쉬었다 전해지고, 또는 전사할 당시 투구가 산봉우리에 걸쳐 있었다하여 백의산 건너편 봉우리를 투구봉이라 이르고 있으니 시목동의 또 하나 전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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