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5_전라도_운암강

장편소설 운암강 [05] - 김여화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8. 1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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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운암강의 작가 김여화님의 허락을 얻어 제 어머님의 고향 전북 임실 운암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운암강을 올립니다. 작가의 허락없이 퍼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노란장미 주]

 

 

장편소설 운암강 [05] - 김여화

 

 


제목  [5회] 강변마을들 -2
등록일  2001-09-29
 
강변마을들-2


그곳에는 3,1운동을 주도하였던 김영원선생의 생가가 있으니 시동 골짜기 살기를 없애기 위하여 감시자 나무목으로 바꾸었다고 전하여진다. 아직도 밭가에나 울가에 감나무잎삭이 그 특유의 윤기도는 모양을 여름이면 볼 수 있는데 선생이 일부러 감나무를 많이 심었던 탓이리라. 고려말 쯤에는 불당골로 부르다가 김영원 선생이 은거하던 100여전 그리하셨다는데 시방도 시목동에는 효자로 명성이 높았던 그분의 아들, 그 손자 정갑옹이 삼요정 터 그 자리에 세워진 비석을 어루만지며 뜨내기 손님을 맞이한다.
선무봉 불당골은 부엉바위의 전설을 간직하였다.
오랜옛날 불당골에 큰 절이 있어 갈무스님이 창설하여 절이 꽤나 크고 스님들도 많고 갈무스님의 신심이 돈독하고 학성이 지극하여 신도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더니 갈무스님의 아래 스님 한분이 시주하러 올라온 여신도와 눈맞춤을 하여 간통사실이 알려지자 갈무스님은 이를 파계하였다 하여 절밖으로 �아내니 중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밥을 빌었은즉 더러 중의 비행을 아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하자 불당골 뒷산 층암 절벽 바위뒤에 숨어 지내니 어느해 겨울 혹독한 설한의 추위를 못이겨 한겹 장삼을 뒤집어쓴채 얼어죽어 바위가 되었다는데 그 바위가 부엉이의 형상이라.
후세에 사람들이 골짜기 주변을 부엉바우라 부르고 후에 중이 죽으면 화장하던 터가 있으니 이곳이 큰 스님들의 다비장과는 다른, 그저 죽은이를 화장하던 곳으로 보이는데 후세의 사람들은 그 터를 중상의 터(僧喪의 터)부르며 선거리는 상운암에 속한 곳이다.
상운마을도 수몰된 후에 새로 터를 잡았대서 윗 샛터로 불렸건만 각 마을의 중심이 되어 운암면 사무소가 있고 우체국 농협 파출소가 자리한 소재지가 된 것이다.
학암 광석 두언동 어리동 잿말 구암 용운마을이 상운암으로 속하여지니 순환도로로 마근댐에서 둔터니 모지굴 몇 구부를 용동쪽으로 돌아오다가 오봉산 다섯봉우리 여인의 호리낭창한 허리 같고 봉싯한 젖 봉우리 같이 동그다란 볼수록 아름다운 선,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물며 눈길은 다섯 봉우리에 찍어 박고 가슴속을 화선지 삼아보면 가슴속은 이내 터질 것 같고 뿌듯한 마음이 전율하게 만드는 곳.
푸른 강물 건너 거뜸이 물 찬, 작은 백련산을 중심으로 바라보며 일직선 금을 긋는다면 왼팔 용동쪽으로는 상운암이요. 오른팔 마근댐 쪽으로는 하운암이라.
상운암의 용동은 내마촌과 불암동으로 처음에는 세 개의 마을을 이루었더니 훗날 합하여 용운이라 부르고 내자형의 내마터는 지세로 인하여 내마촌이라 칭하던 곳은 전주이씨 양도공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불암동 앞산에 부처와 같은 바위가 있어 불암동으로 부르다가 바위는 물속에 잠기고 빙어가 이 곳에서 처음 발견되어 한때는 일본으로 팔려갔으니 왜인들이 강제로 막아둔 강에서 잡은 물고기라 그들은 훗날 빙어가 나올 것을 알고 잡히는 빙어는 그들이 더 허천나게 밝혔으니 그것은 그네들이 댐을 막고 치어를 넣었던 30년 후라.
본시 진필의 전답들은 구름들 마당벌 용당 들 이었다. 하운암은 아흔아홉골(장곡) 만가지의 화초가 핀대서 만화동, 박씨가 살았다는 박곡으로 푸른숲이 뒤덮인 마을의 풍경은 한폭의 그림이요 구름같다 하여 청운리로 부른것인데 거둔이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 양대복 장군이 전승지로 알려져 있다.
운암의 장곡 일대는 왜군 일천이백 명을 섬멸한 운암대첩지, 군사적 요충지임은 물론 양장군 전승장이라 불렀다는데 양장군이 적을 격파한 후에 나무를 베어 전공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양장군은 전주에 있던 초토사 고경명장군과 더불어 금산 무주방면으로 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남원을 출발하여 이해 유월 스무날 임실에 당도하였다. 운암방면에 왜군 일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는 탐지를 접하고 그는 당초의 진로를 바꾸어 유월 스므닷새 첫 새벽에 갈담역을 떠나 밤재를 넘으니 척후병의 전갈이 장곡에 왜군이 포진하고 있다 하거늘 양장군은 곧 병력을 둘로 나누어 적의 정면을 공격함과 동시에 적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하여 매복시킨 작전이 성공을 거두니 아군과 협공하여 적을 괴멸케 하여 벌정이란 지명도 그 후에 나온것이요.
또한 나머지 몇 몇 왜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상당기간을 이곳에 주둔하여 접전 끝에 격퇴시키니 대군의 주둔지라는 뜻으로 거둔(巨屯)이란 지명이 생겨난 곳이라. 이때 양장군은 적 일천 이백 명을 섬멸하여 이들의 시신이 근처에 널려 피가 흘러 강물을 벌겋게 물들이고 갑옷 사천이백 소총 일흔아홉자루 창이 이백서른자루 칼 일백열일곱 자루의 전리품을 얻고 이듬 해 칠월 진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거둔이 잿말사람들은 거뜸이라고 부렀다.
운암 사람들중에 손꼽히게 근면성실하여 거뜸이 사람들은 골짜기마다 화전을 일구고 그러면서도 이웃간에 정이 도타워 이들은 서로의 일을 내일처럼 아울었으니 울력도 다른 어느곳 보다 영차 영차 잘 일구어 나갔고 또한 살림살이도 제법 택택한 것이 오로지 전답 땅심에 의지하여 지악스럽게 사는 사람들이라.
꼴짝꼴짝 삐알대기 칠월에 무성한 수풀 쳐 눕혀서 사나흘 일주일간 말렸다가 불을 지르면 풋나무는 툭딱툭딱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칠월염천 불덩이 같은 땡볕에 벌건 얼굴 숯검뎅이 괴괴한 모습에 땀내 냇내 몸에 한꺼풀 입힌, 그렇게 화전을 일구고 들녘전답으로 치면 수십 수만평에 이르는 밭을 휘어잡는데 속모르는 사람들은 밭이 많아 부자라지 어찌 논 한 마지기에서 거두는 나락만 하랴. 오직 콩이나 팥 수수 조 기장 율무 녹두 강냉이를 심어 소득으로 광에 쳐 쟁여놓고 솔래솔래 꺼내 팔아 쌀로 바꾸어 가솔들을 먹이던 곳이라.
어느집에든 두태 몇 십 가마 들였다는 말은 흔하여 진필의 처가 거둔댁네는 한해 두태만으로도 자식들 대학까지 보낼 정도로 택택한 형편이었다. 하여 한때 거뜸이에는 초가삼간 자기집 한채 없어도 남의 아랫방에 세를 붙여사는 이들이 늘어났고 셋방을 살아도 골짝마다 파 먹을 화전이 눈 돌리는데마다 였으니 예전에는 이곳 청운리에 초등학교도 있어 거뜸이 박곡 만화동의 아이들만 가르쳤다하니 그 위세 대단 하였으리라.
마암마을은 둔터니와 센바우 (白岩)를 일컬어 마암리라 불렀는데 본시 막은댐은 왜인들이 이름을 짓기 전에도 마근댕이로 불렀다니 이곳에 왜인들이 완주의 치백이로 넘어가는 물을 막기 위하여 조성한 석축을 마근댐이라 부른 것은 본래 선인들이 지어낸 기가 막히게 예언된 지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이 쌓은 석축이 일천여평에 이르니 이곳의 어느집 몸채는 완주에 측간은 운암에 속한집도 생겨났다. 오늘날 낚시꾼들은 이곳에서 배를 빌려 용동 용당굴 앞에 낚싯대를 드리우니 뱃마당이 있는 곳이라.
박흔이 대종마을과 소종마을 면화골을 일컬어 운종리라 하는데 이 또한 지세와 관련지어 지은 것이니 흰구름 밑에 쇠북과 같다고 하였다. 운암대교가 세워진 이곳은 국도 27호의 연결지점 이곳이 박흔이로 지금껏 마을을 지켜온 이들은 몇 안되지만 하운암의 중심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옛날 운암 서지동 교촌 냉천 저동, 모시저를 써서 모시울이라는 이름 얼마나 예스럽고 아름다운가? 방기 벌정 샛터골을 묶어 신기라 하는바 냉천은 거뜸이 가는 길목에 방기는 방죽골을 그리부른다.
금이 많이 나왔대서 금계마을로 허나 터기자를 써서 금기로 더 잘 알려진 곳 시랑동은 시랑 벼슬이 나왔대서 시랑이니 항시 흰구름이 안개 같아서 백운곡 양대복 장군이 밤재를 넘어 이곳 백운곡 앞을 지났쳤을성 싶은, 금기는 금시내로도 불리어 이곳의 붕어는 쌀 한 가마니와 맞 바꾸었다는 이야기와 대원군이 금기의 붕어를 진상받고 감사의 편지를 남겼다는 일화가 있으니 이 모두가 하운암이라.
가는정이 장자골 범어리를 구름밑에 샘같은 형국으로 운정리인데 장자골에서 범어리 사이의 여울에 운암강 물을 빼내가는 취수구가 있어 저 옛시절에는 발매산 앞 범오리 앞에 닷새장이 섰다고 했다. 김제 정읍의 사람들이 장자골앞 들에서 거두어들인 쌀을 사러 오기도 하던 곳이라.
범어리는 범의 머리에 해당한다 하였다. 한발이 심하여 강물이 밭으면 걸어서도 발매산에 닿을 수 있는데 물이차면 발매산은 육지 속의 한점 고도가 된다.
오백년전 낙향한 선비의 호가 운암이었다는 하운암의 오늘날 행정을 관할하는 출장소가 있고 다른 기관들이 있는 곳이니, 대 운암의 명칭을 만들었다 했고 운암강의 중심부가 된 운암리, 이곳은 그야말로 구름이 몸을 이루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몸을 풀면 구름이 된다는 저 유명한 작가의 절묘한 묘사를 자꾸만 되씹게 하는 곳으로 넓은 수면에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곱디고운 물 너울 그 물 너울 사이로 튀어오르는 이름 모를 은비늘 어찌 필설로 표현하랴.
서지동앞에 건너편 장자골을 잇는 뱃마당이 자리하고 광활한 운암강 물 너울 그 건너 발매산 섬 하나 서쪽은 정읍의 산내가 되고 동쪽은 운암, 남쪽은 강진 이 모두가 하운암을 이룬 곳이니 전남 녹동에서 순창 삼례 군산을 잇는 국도 27호선은 우리나라 최장의 피시교량 이라던가 1928년 첫 댐이 준공되면서 물밑에누웠던 이 도로는 실로 62년만에 국도로서 제 몫을 하게 되었다.
피시공법이란 신종 용어로 운암대교가 세워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본시 아이비알디차관 전주개발권 사업으로 시작된 것이라했다.
공사에 소요된 비용만도 69억1천 6백만원으로 철근만도 1,525톤에 시멘트가 177,500포, 피시 강선이 320톤, 강촌 570톤을 쏟아 부은 대단위 공사로 다리 하부에 교각 두 기와 교대 둘, 다리 상층 넓이 십미터, 총길이 350미터로 접속도로 폭도 9,5m 연장 2,900km 이니 국27호선인 녹동 전주간 국도가 수몰로 인하여 절단되었다가 이 운암대교의 준공으로 재 개통되는 그리하여 갈담사람들도 이 길을 이용하여 전주로 나갔고 순창을 가는 이도 쉽게 이 길을 지나가니 그 편리함이야 더 설명해 무엇하리.
왜정시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들 상, 하운암의 마을들을 통합 운암면이라 칭하니 당시에는 임실읍과 둔남면에 비슷한 농지와 인구를 소유하였다가 1925년 1
차 섬진댐의 준공으로 농경지 25%를 강물이 단숨에 삼키니 그 인구도 급격히 감소하여 후에 1965년 저수량 4억6천6백만톤을 가둘 수 있는 옥정호라 이름하여 용수리에 준공을 하게되자 상운암으로 면소재지를 옮기고 근방 세 개의 마을 염재와 귀바우골 상운암을 제외한 모든 운암의 마을들은 물길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육지 속의 섬 낙도가 되었다.
수몰 이전만해도 찰지고 기름진 문전옥토로 모두가 윤택하고 행세깨나 부리고 삶을 살었으나 국사봉아래 몇 채 듬성듬성 남은 이빠진 꼴이라 그 옛날 운암의 영화는 흔적없이 물 밑에 묻고 말았다.
운암강에 댐이 처음 축조되기 전 이미 잿말사람들의 애환은 시작되었다. 본시 그는 잿말에서 그 조부 전주 최씨 진사 응숙의 후예라 이미 밝힌바 그 조부가 고종대에(1873년) 생원에 합격하여 그 사람됨이 근동에 알려지니 진필의 탄생은 손 귀한 집안에 경사중에 큰 경사였다.
독자로 태어난 진필이 어린시절 준공된 운암댐, 당시에는 수문 23개를 가진 댐으로 옥정리 배소앞에 활처럼 굽어지게 댐을 쌓고 옥정리 댐이 준공되고 건너편 산내쪽으로 도로를 낼적에(국도30번) 구경삼아 문방리 수방마을을 찾는이의 발길이 이어지니 진필, 그도 여러차례 묵방산 기슭에 올라 범어리 물찬 골짜기를 굽어보다가 더러는 문치를 넘어 강진의 배소, 손실까지 가 보기도 하였다.
본시 운암강은 거슬러 올라가 선조때 목사 홍석방의 기록에 의하면 관촌의 오천강인데 오천강의 시원은 마이산이요. 이 오천이 흘러 운암강을 이룬다하였고 강진의 갈담천을 거쳐 순창의 적성강에 이르며 강변에 수침동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말그대로 물에 잠겨 흔적이 없는데 수침동은 오늘날 산내에 속하였다 했다.
이곳에 대 운암 저수지를 막게 될 것을 예고한 옛사람들의 예언이었는지 아니면 수침동이라 해서 운암저수지가 생겼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저 이름으로 짐작만 할 뿐이라고 했다.그러니 댐이 있는 곳 수십길 물속에 잠긴 수침동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는 없을거라 하였다.
홍석방 선생은 호가 낙천으로 1508년에 태어나서 1546년 문과에 급제 인종,명종, 선조때에 이르기까지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으며 성균관에서 학유로 벼슬을 시작하여 호조정랑 한성서윤을 역임하고 운봉과 영산현감 원주목사로 관직을 마치고 고향 청웅에 은거하였는데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에 이미 여든 다섯의 고령이라.
의병에 가담을 못하는 것을 한탄하다가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시자 손자 홍우경을 시켜 일용품을 보내는데 면포와 모시가 600여필 쌀과 잡곡 500두와 콩
200두를 군량에 쓰도록 헌납하고 가솔들을 시켜 고경명 장군의 진중에도 군량을 보냈는데 이분이 소일하며 기록한 것이 오천기라.
오천기는 당시의 임실의 현황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산 기록으로 남양홍시 가랏 수시로 알려진 감을 널리 퍼뜨린 장본이 이라. 사후 선조께서는 예조참판겸 동지 의금부 성균관사를 추증하여 그분을 기렸다 하는데 사실은 안나 수녀님도 오천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하였다.
운암제란 일제에 의한, 그들이 붙인 이름이다. 처음 축조한 옥정리 배소앞 2,4키로미터를 내려와 해발 200여미터 지점에서 손실쪽 더 아래로 내려와 용수리 사동 산날등 잘록한 허리를 꽉-꽉 묶어 흘러가던 강물을 막아버리고 댐을 다시 축조하기 시작한 것이 42년.
이전에 1937년 38년 두 해를 거듭 한발이 들어 폐농을 하다시피 하였더니 김제와 정읍 군산 옥구 대야 등지, 이때에 일인들은 우리의 영세한 농민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펼쳐 빚에 쪼들린 농민들은 농지를 포기하므로써 대 지주가 형성되었으니 이들은 군산항 개항을 전후로 토지 점탈의 도를 높였던 것이라.
하여 전북의 14개 군에서 일인들에게 토지를 판매한 농가는 1800여 농가로 토지를 파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부유층보다는 시세보다 좋은 값을 쳐 주는 일인들에게 넘겼는데 이때에 정읍과 부안등지에 일인들이 대 지주로 떠 오른거라.
이들 일인들은 두 해에 걸친 한발로 농사를 못 짓자 총독부에 찾아가 정읍 부안 김제등 수원이 별로 없는 그곳 평야를 반대로 수원이 풍부하고 기존 베소앞에 막았던 운암제를 높여 많은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강력히 건의하니 총독부는 이를 받아들여 38년부터 42년 재 축조 할 때 까지 토지를 확보한 것이라.
일제는 그때에 조선 전업을 통해 1천1백97만평의 토지를 매수하였다. 본시 물이라는 것은 자연적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법 사람이 그 물길을 막고 한편으로는 엉뚱한 곳으로 물 길을 돌려 놓은 것이니 사람으로 인하여 사람이 상하고 핍절에 울어야하는 잿말 사람들의 애환이 생긴 것이다.
실제 댐구역 8백1만9천평은 그만끔 땅을 부려먹던 강변 사람들에게는 득 될 것 없는 오히려 댐구역을 제외한 3백9십5만1천평의 땅심을 돋우어 땅, 그 자체로 제 할일, 제 몫을 해 낼 기회를 주지 않음이니 사람들은 제 몫을 못해내는 땅을 일컬어 유휴지라 부르는 것이라.
그 평수만도 2백89만2천평으로 20년후 이땅은 전라북도에 양여가 되지만 1백12만9천평의 기름진 땅을 유휴지라는 이름으로 쟁기질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산골짝 눈깔배미라도 붙여먹던 사람들을 물 밑에 수장시키거나 등 떠밀어 내모는 인해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람들을 떠 둥굴리기란 쉽지 않은 일로 일인들은 이들 대 지주들의 요구대로 정읍 부안 대단위 평야를 적실, 댐의 용도를 높이기 위한 필사
의 노력으로 42년 재 착공을 하였던 것이 대동아 전쟁으로 인하여 댐을 짓는 일을 그대로 놓아둔채 해방이 되어 떠나갔다.
운암댐은 해방이후 48년 재재 착공하기에 이르는데 이 역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로 여러차례의 필유곡절 재 착공과 중단을 반복하던 운암댐은 그만끔 사람들을 고달프게 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38년부터 그들이 용수리에 신댐을 축조 할 계획를 세우고 4년동안 토지를 매입하는데 저들은 수몰지역의 토지와 가옥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긴 했지만 그것은 매입이 아닌 반강제 반착취라 할 것이요.
제멋대로 매긴 보상이었으니 게다가 농지의 보상금은 지주가 받아가고 남의논 붙여먹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국유지를 무단 점유하는 황당무계, 어처구니 없이 억울한 누명에 살길이 물길 막히듯 막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42년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터의 물자수송에 혈안이 되자 2년만에 댐공사를 중단해 버린 뒤 해방 후 48년에 우리 정부가 공사를 시작했지만 다시 2년만에 북괴의 남침은 또 한번 강물을 더럽히고 세 번째로 재,재,재 공사가 시작된 것이 61년, 쉰 석달만인 65년 10월20일 완공된 운암강의 댐은 그 이름하여 섬진 다목적 댐.
수문 열 다섯에 높이 64미터 질기디 질긴 사람의 목숨마냥 수 십차례의 설을 쇠고 스물다섯번의 잔설이 녹아 흘러드는 물소리를 듣고 봄싹을 틔우는 강변을 바라보며 이렇듯 공식 이름을 얻게되니 잿말 주민들의 실향은 거뜸이의 누구처럼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오늘에 이르도록 실향의 한을 이기지 못하여 그러다가 필경장에는 한을 안고 눈을 감지 못한채 운암강 흐르는 물 길을 바라보며 산끄뜨리에 맷동 하나 더 만드는 신세가 되어왔다 하였다.
당시에는 국내 최대의 저수량과 발전을 할 수 있었고 하운암 장자골 범어리 사이의 여울에 일인들이 만든 취수구를 통해 정읍 김제 부안까지 농업용수 공급은 물론 홍수 조절 기능을 갖춘 이름하여 다목적댐이 된 것이라.
첫 댐의 담수는 기껏해야 운정리 일대 범오리 수암 장자골 일부를 채우고 지금의 막은댐까지 운종리 대종소종 마을 앞 까지만 물이 차던 이 다목적 댐이 경제개발 1차년도 사업으로 불붙은 정부 차원의 국가적 사업으로 국익을 위한 대대적인 사업이었으므로 운암강변 사람들은 집과 조상과 붙여먹던 전답까지 그대로 수장시켜 그들이 가진 꿈마져도 사그리 물 밑에서 썩고 곯아버리는 비운 처절한 아
픔을 감내케 된 것이다.
재 착공할 때 흡수된 토지에 대하여는 추가 보상은 허울로 배제 되어버린 임
도 뻥끗 못하는 신세에 이농비와 보상비 명목의 밭 한평은 16원 논 한 평은 36원, 수천만평의 기름지고 찰진 문전옥답을 비롯해서 강변의 물 좋은 논을 꿀꺽 삼켜버리니 신 댐의 수면은 아흔아홉골로 불러지던 거뜸이를 통째로 삼키고 용당굴, 잿말 앞들과 도마태 월면 들까지 더 나아가 선거리까지 넓혀가니 장마가 지고 만수위에 큰 물이 질 때는 신평의 북창리까지 바다를 이룬다.
가보지 못한 중국 대륙의 황강이 저러려니 구경삼아 물너울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황하(黃河) 라도 연상해 봄직 하건만 실제로 그곳에서 하루세끼 쇠살슬로 밥을 뜨는 사람들이야 어떻게 말로 표현하여 위로하랴.
산골짝 천둥지기 두-어 마지기 붙여먹던 사람들은 이불 꾸러미 챙겨 옮기는 경비조차 되지 못할 소소한 돈은 게나마 10년간 분할 지급되어 버리니 보상비는 쌈지에서 조끼 주머니에서 푼돈으로 녹아 버리고 그들이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의 정착에는 도움이랄게 되지 못하고 댐은 부지를 사 들이기 시작한 후 25년의 긴긴 세월 운암강 사람들을 피 밭아 말린후 준공됨으로서 그 실갱이도 반세기로 이어내린다.
준공 당시 잘못된 수몰선의 측량은 상류의 백가호(百家戶)를 하루 아침 수장시켜 이재민 700여명을 내고 피해액은 차치하고라도 그 참사를 속수무책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애꿎은 땅만 굴러야 했으니 그 모두가 사람이 내린 재앙이라. 더욱이 이들이 분노에 치를 떨며 아우성을 쳐야 했던 그날의 한은 당시 수몰선내에는 피해가 없다는 거짓보고와 의지가지 바람막이 없는 향리에서 슬픔과 원망으로 뭉친 그네들을 안옥그리지 못한 까닭이다.
차 오르는 물을 피해 뭉청뭉청 뒷 걸음으로 물러앉은 산중턱에는 정부에서 공급한 천막을 치고 천막 하나에는 두 세집 아니면 세 네집, 그런고로 천막하나에 24 명이 함께 살았다는 그야말로 구물구물 해를 넘기며 살을 부비고 살아온거라. 그네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에 주린배를 채울 배고파 젖을 빨려야 뜨물같은 젖 한방울 나오지 않는 에미의 젖통을 안고 우는 아이를 달래야하는 전쟁보다 더 흉흉한 세월을 살아왔다.
게중에 진필이나 그 아들 기수는 운암강 사람들 중에서는 선택된 사람으로 1666년 1월22일 이 때는 병오년의 설이라. 전북일보의 내용을 보면 배가고파 주린배를 채워달라고 아우성치는 강변 사람들의 극빈 피해자들은 누더기 옷을 걸쳐입고 면사무소를 찾아 구호를 호소하지만 대책이 없다는 내용과 이들은 이주예정
지정서 그나마라도 팔아 설날 밥 한끼 자식들에게 먹이겠다는 부모들의 슬픈 내용이 담겨있다.
그런가하면 69년 8월12일 운암면 소재지 일부가 잘못된 수몰선 측량으로 강물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삼키고 �점 잃어 희멀건한 흰눈자위 허탈의 늪에서 지친 넋나간 운암강 사람들의 모습이 실리고 홍수 수위를 다시 측량해서 수몰선 내의 토지는 다시 보상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허나 평당 보상 단가는 21원으로 여기에 공과금과 나락 5되가격의 종자대 비료 한 포 값 기타의 영농비가 포함되어 마지기당 쌀 한가마 씩 배분하는 이농비는 이들 강변 사람들의 대부분 경비도 모자라는 경우가 되고 만다.
이때에 정부가 고시한 월평균 소득은 4천환으로 1인당 천오백원씩 보상되어 당시의 이농 보상비는 십오만원 십칠만원 그때의 쌀 값은 삼천원 이었으니 그네들에게 내주는 농지 배분 딱지는 겨우 일만팔천원 딱지 한 장씩을 들고 바닷물이 출렁 남실 거리는 계화도를 찾은 그네들의 가슴은 눈물보다도 한숨보다 앞서 분노만이 들끓었으리라.
보리를 심었던 구름들이 벌판의 밭들은 평당 12원의 이농 보상비는 71년까지 아홉번에 걸쳐 분할 지급되고 공사시안 65년에 집단 이주키로 했던 계화도 시흥 반월 폐염전 지구 개답공사는 댐이 준공된 후 10, 15년후에 끝이 났으니 운암강 수몰민들은 정부의 이주대책 실패로 하여 고난과 핍절의 기간이 늘어난 셈이었다.
진필을 비롯한 잿말 사람들이 계화도에 찾아갔을 때는 기존 주민들의 운암사람들 정착을 거부하고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막았으니 결국은 모두가 딱지를 팔아 넘기고 다시 잿말로 돌아오고 더러는 도시로 입석리 물우에 두언동 산기슭에 비탈진 곳에 터를 닦아 움막하나 더 늘리던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정부는 삼년간의 유예기간을 갖고 간척지 농지를 집과함께 운암강 사람들에게 준다고 약속 하였지만 그것은 말뿐으로 임시 거처에서 기다리는 수몰민들에게는 희망이 되지 못하였다.
임시 거처라는 것이 일가집 문간방 하나 얻는 경우는 대궐이요. 그리 못하면 나무 몇 다발 엮어세워 초막을 만든 것이었으니 그들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총 5억7천8백만원 그걸 질끔찔끔 아홉번에 걸쳐 손에 쥐어주니 분통을 삭이느라 애쓰는 그들에게 막걸리 값에 불과하였다.
그 무렵의 잿말에는 술집이 성하였다. 노름판이 예사로 성하고 술집에는 작부가 상주하곤 하였다. 이들 진홍빛 아낙들 웃음과 교태는 그나마 분노에 떠는 남정네들에게 위안이 되었음이니 목숨부지하고 사는것도 힘에 부친 아낙네들에게는 또다른 아픔으로 조여드니 기수의 모친 거둔댁도 이중의 한 사람이라. 86년 용담
댐 용지는 무상으로 증여하는 정부가 운암강변 사람에게는 징허게도 약게 하였으니 운암강 가양에 농지 무상 양여를 놓고 지금껏 탱탱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아무리 외장을 쳤지만 한낱 모기소리에 그친 그네들에 슬픈 사연을 뉘라서 알리오
해서 댐 준공 당시 운암강 사람들은 잿말을 떠나기 시작했고 이웃마을 혹은 친척집에는 7,8명의 가족들이 얹히는 신세로 대 도시나 계화도 간척공사가 끝나는 싯점까지 대책없이 유랑민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토지 양여에 대한 진정과 건의를 한 두번 해 온 것은 아니다. 뚜렷한 대안책이 없이 오늘도 강가에서 고기잡이 어부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네들에게는 무엇 이든 불법이라는 딱지와 벌금처분이 기다리고 아직도 굴레를 벗지못한 사람들의 서글픈 눈망울이 살빛어린 겨울 강가에 머물고 있다.
잿말 사람들은 이렇듯 피울음을 울적에 동진 도수로 공사가 완공되어 물길을 고속도로화 시켜 풍요로운 농촌을 구가하며 살찐 내일을 향해 줄달음 친다 노래하고 축시를 지었거늘 도수로 기념비에는 "말하리라 우리의 후손은 부지런했던 조상을" 계화도 1만정보 들녘의 갈증을 풀어 가뭄없는 땅을 만든다 하였다. 도수로 주변의 농경지를 가진 평야 사람들을 위하여 잿말 사람들은 집을 내주어야 했고 눈물을 쏟아 밑거름에 보태주었다.
누가 기억하랴 운암강변 물 너울 춤추는 이곳은 이들의 피 빛 설움인 것을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가 추가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염치없은 거라고, 강물이 짙푸른 것은 피멍든 잿말 사람들의 눈물인 것을... ... 고향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안나수녀님의 가슴 도려내는 핏빛 설움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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