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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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변을 돌아보니 (7) : 호연지기를 가르친 교장님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12. 5.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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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를 가르친 교장님

 

소년이 사관학교에 입학했던 그해에 정부권력의 실세가 이미 바뀌어 있었다. 그에 따라 군의 주요 지휘관도 교체되어 가고 있었는데 소년이 1학기를 마칠때쯤 사관학교의 교장님이 바뀌게 된 것이다. 새로 부임한 교장님은 신권력층의 거사에 반대한 댓가로 군 지휘관 인사에서 실권이 없는 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직되어 군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는 마지막 열정을 생도들에게 쏟아 부었던 것이며, 그래서 그당시 교육을 받은 많은 생도들은 그를 가장 훌륭한 교장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소년도 사관학교 생활을 적응하는 시기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서 그에게 보고 배웠던 방식대로 군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가 부임하고서 처음 생도들에게 모습을 보인 것은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위해 생도들이 야간에 불을 켜놓고 응원연습을 하고 있었던 학교 연병장의 스탠드에서 였다. 당시 학교 수뇌부 회식이 있어 술을 한잔 했던 그는 야간에 까지 응원연습을 하는 생도들이 생각나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는 생도들의 응원연습 현장에 와서 단상에 올라가서는 생도들에게 야간까지 수고가 많다고 하며 얘기를 했는데 취기가 조금 있었던 그가 말이 길어지자 동기생인 교수부장(교수출신 준장)이 ‘그만 내려오시죠’ 하니까 ‘야! 너 동기생이지만 내가 교장인데 상관인 나한테 내려오라고 명령하는 거냐’ 하니 동기생인 교수부장이 웃으며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라고 했던 것이다. 그때 소년은 권위적인 장군의 모습이 아닌 아버지 같고 스승같은 그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회식간 술을 한잔 하고서 행사준비로 야간까지 고생을 하는 생도들이 안스러워 찾아와서는 자신들의 30여년전 모습을 잠시 보여줌으로써 생도들에게 여유로운 웃음을 짓도록 했던 것이었다.

 

그해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못하자 그는 생도들에게 패배자의 쓴맛을 느끼라고 보름동안 근신하는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이듬해 우승을 하여 승자의 기쁨도 체험할수 있도록 하였다.

 

그후 생도들의 애로사항을 적어서 내도록 하고는, 천명이 넘는 생도들의 건의내용을 다 읽어보고 전생도가 모인 곳에서 그에 대한 조치방안을 본인이 직접 생도들에게 알려주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생도들이 제시한 내용중 조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생도들이 모인 현장에서 바로 관련 책임자에게 조치하도록 지시하였고, 생도들이 잘 모르고 건의한 내용은 왜 반영이 될 수 없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열정을 보고 생도들은 그를 믿고 따랐던 것이었다.

 

당시 생도들은 생도대장급 이상 지휘관의 승인없이 술을 마실수 없도록 되어있어 술을 잘 못했는데, 한번은 해·공군 사관학교 3학년 생도들이 견학차 학교를 방문했을때 학교장이 주관하는 격려만찬을 하는데 야전부대 회식때처럼 삼겹살에 소주를 먹도록 하여 참가했던 많은 생도들이 취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1학년이어서 참가하지 못했던 소년은 당시 그가 왜 그리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임관하여 야전부대에 가서 그렇게 회식을 하는걸 보고 그가 생도들이 임관하여 사람들과 잘 어울릴수 있도록 그리 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소년은 수업시간에 한 교수님으로부터 교장님의 생도교육 철학을 듣고서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교수는 10년전 자신이 생도시절 교장님이 생도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장차 리더가 될 생도들이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할수 있도록 규정을 최대한 완화토록 했다는 것이다. 당시 생도들은 평일날 외출은 할수 없었고 저녁식사후 1시간 반 동안 학교 주변에 있는 공원내에서만 산책할 수 있었다. 그랬던 것을 그가 시간만 정해주어 생도 스스로 알아서 들어오도록 하면 된다며 평시 외출할수 있는 장소 제한 규정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얼마되지 않아 서울 시내까지 다녀온 일부 생도들이 시간에 늦게 귀대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많은 간부들이 그러한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외출장소를 다시 제한해야 한다고 건의 하였던 것이다. 그때 그는 간부들에게 ‘귀대시간을 지키지 못한 생도들을 규정에 의거 처벌하면 되는 것인데, 왜 리더가 될 생도들이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자꾸 통제만 하려 하느냐’ 고 했다는 것이다. 그얘기를 듣고 소년은 학교장이었던 그가 먼 훗날 군의 지휘관이 될 생도들의 모습을 그리며 지도하려 했던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난 어느 겨울에 그는 군을 떠나게 되었다.

신권력층의 거사에 반대했던 그에게 군내에서 더 이상의 보직은 없었던 것이다.

이임식 하던 날, 강당에 모인 생도들은 단상에서 그가 이임사를 읽어 내려갈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그때 그가 마지막으로 생도들에게 들려준 이임사 구절을 소년은 지금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에 ‘나는 내가 졸업한 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군생활을 마치게 된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남은 여한을 교가에 담겠습니다.’ 하며 교가를 낭독하였던 것이었다. ‘동해수 구비 감아 금수 내조국...’

 

그렇게 소년은 정치군인이 되기를 거절하여 학교장으로 마지막 군생활을 하면서도 생도들의 먼훗날을 보고 자율적으로 지도하려 했던 그를 기리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소년도 군의 마지막 지휘관을 그교장님이 초대 지휘관으로 근무했었던 어느 특전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자신도 그렇게 하였던 것이었다.

 

출처 : 장훈고일사회
글쓴이 : 신 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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