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푸른광장> |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 지금까지 충분히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그만 먹겠다고 사양하고 싶지만 어찌 그게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던가. 이상하게 한해 한해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조급해지고 상실감이 든다. 청춘의 시절에는 나이가 들면 그만큼 지혜로워질 줄 알았다. 하여 내가 가야 하는 길도 보이고, 그 길을 엽렵하게 헤쳐 나갈 줄 알았다. 그런 연유로 빨리 나이가 들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산란하고 갈등이 깊어만 진다. 오히려 살아온 날만큼의 아집과 독선으로 더 고집스러워지거나 예민해지기 십상이다. 아마도 내가 어리석은 탓일 터. 하긴 어른들의 간섭과 관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을 빼고 누가 나이를 먹고 싶을까. 가는 세월을 붙잡아서라도 나이가 드는 것을 막고 싶을 게다. 굳이 화무십일홍이라고, 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멀미를 일으키고 아쉬워하기 마련이다. 하여 젊음은 사람들의 영원한 소망이지 않던가. 어쨌거나 이제 얼마 후면 또 한 살 나이를 먹게 된다. 생의 이력에 한 해를 더 보태면서 어떤 이는 참으로 잘 살았다며 흐뭇해할 수도 있겠고, 어떤 이는 아쉬운 마음으로 지난 시간들을 더듬어보기도 할 것이다. 흐뭇하면 흐뭇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자신이 지나온 자취이니 어찌하겠는가. 그저 보듬을 수밖에. 한데 오롯이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해 벽두에 가졌던 이런저런 계획의 점검이나 반성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이즈음에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살다 보면 하늘의 뜻을 안다는데, 대략 그 나이가 이쯤이고 보면 나 역시 하늘의 뜻이 무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매양 청춘의 날들처럼 천방지축, 그리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한 여배우는 그랬다. 이제 여자로서의 자신을 놓아야 하는지 어떤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그렇다. 아직도 정상의 자리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도 오십이란 나이로 접어들면서 세월의 잔인함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진작부터 여자로서의 삶은 살아오지 못했으니 내가 고민해야 할 점은 어떻게 나이든 사람으로 현명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이다. 품 너른 사람으로. 그늘 넓은 사람으로. 한데 그게 쉽지가 않다. 어쨌거나 우리 세대만 해도 어느 자리에서든지 어른이 들어오면 냉큼 일어나 인사하고 한데로 옮겨 앉곤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시대 가치가 빠르게 어린 나이로 이동하다 보니 나이든 사람은 늘 서운하고 노엽다. 미확인비행물체(UFO)가 출몰하는 세상에서 노인의 지혜로 나라를 구한 이야기는 그저 옛날 이야기일 뿐. 전통의 가치는 낡고 진부한 것이며 시대에 통용될 수 없는 가치로 빛이 바랬다. 동방예의지국이라 했는데, 충과 예와 신과 의를 기본 덕목으로 삼았는데, 이제 그것들은 빛 바랜 책 속에서 죽은 활자로 만나볼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마음도 따라 나이가 들어야 하는데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니, 그 괴리가 사람을 더 맥 풀리게 하고, 허둥대게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덜 듣고 덜 보라는 뜻이라고 한 지인이 이야기 해줬다. 그만큼 욕망을 줄이라는 뜻일 게다. 시대를 탓하고 버릇없다고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나이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포기와 조화는 다를 터.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조화로운 삶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대에 진정한 어른이 없다고 늘 아쉬워 했다. 나보다 앞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기에 나는 편하게 그들이 닦아놓은 길을 갈 수 있었다. 노신이 그랬다. 본디 세상에 길은 없다고. 사람들이 가고 또 가면 그곳이 바로 길이 된다고. 나 역시 만만치 않게 나이를 먹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더 잘 살아야겠다.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정말, 내가, 나를 책임질 시간이 왔다. [[은미희 / 소설가]] |
기사 게재 일자 2009-12-17 |
80518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80518
반응형
'0. 韓山李氏 > 11_小說家殷美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른광장> 나의 경쟁 상대/문화일보[2010-02-18] (0) | 2010.02.18 |
---|---|
<푸른광장> 과유불급/문화일보 [2010-01-21] (0) | 2010.01.28 |
<푸른광장> 희망가/ 문화일보 [2009-11-19] (0) | 2009.12.04 |
<푸른광장> 훈훈한 이웃/ 문화일보 [2009-10-22] (0) | 2009.12.04 |
<푸른광장> 모성의 삶/ 문화일보 [2009-09-24] (0) | 2009.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