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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며칠 전 일이다. 구상하고 있는 새 소설에 필요한 자료조사도 하고, 책도 읽을 겸 집 근처 도서관엘 갔다. 제법 경사가 진 산비탈에 오도카니 들어서 있는 도서관은 울긋불긋 단풍이 든 주변 나무들과 어울려 구도가 잘 잡힌 한 폭의 풍경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냉찬 바람결에 우수수 단풍비도 쏟아져 내렸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마음먹고 단풍놀이 한번 가보지 못했으니 아쉽게나마 그런 식으로라도 가을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하여, 낙엽 쌓인 그 길을 걸었다. 가끔 너무 좋은 풍경을 볼라치면 그 풍경에 마음을 뺏겨 아무것도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연유로 글 쓰는 이는 너무 좋은 풍경 속에서 사는 것을 경계하라 했다. 오히려 그 좋은 풍경이 글 쓰는 일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수능이 끝난 뒤라 그런지 도서관에는 넉넉하게 좌석이 남아 있었다. 조금만 늦게 가도 자리가 없어 대기표를 받거나 아니면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한가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느긋하게 자료실에서 필요한 책 몇 권을 골라 열람실로 올라갔다. 한데 널따란 열람실에서 골똘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나이가 들어 보였다. 백발의 노인도 있었고 성근 머리카락을 지닌 초로의 사람들도 있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낮에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일반인은 많지 않았다. 거의가 학생들이거나 임용고시를 눈앞에 둔 취업 준비생들이었는데, 이제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제법 눈에 많이 띄었다. 부동산 중개업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도 있었다. 평생직장인 줄 알고 다녔던 직장에서 나와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려는 사람들로 열람실은 언제나 조용하되 뜨거웠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빌려온 책을 쌓아놓고 보고 있는데 부르르, 진동으로 돌려놓은 휴대전화가 울었다. 소설을 공부하고 있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나이는 마흔일곱. 혼자 몸으로 고등학생 딸을 가르치고 있는 싱글맘이었다. 방금 집에 왔습니다. 지리산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삶이 벅차서요. 그가 보낸 문자의 내용이 가슴에 먹먹하게 와 닿았다. 그는 지방의 한 대학 문예창작과에 적을 두고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김밥집에서 아르바이트로 김밥을 말고, 전단지 배포일을 하며 공부를 하고 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문창과는 예술대학에 속해 있어서 등록금도 만만치 않았다. 한 달을 꼬박 김밥을 만다고 해도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여의치 않을 터. 게다가 소설가로 데뷔한다고 해도 짜잔, 빛나는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등록금을 아끼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평생 김밥 집에서 김밥만 말 수 없잖아요. 게다가 우리 딸에게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 염려에 그렇게 답하는 그의 표정이 꿈에 젖어 있었다. 그랬다. 그가 꿈을 꾸고, 그 꿈으로 인해 지금의 힘든 삶이 행복하게 여겨질 수만 있다면 대학 4년의 등록금은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터였다. 내일을 걱정하고, 오늘을 불평하는 사람보다 그는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아등바등, 하나라도 더 움켜쥐기 위해 그악스럽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꿈이 있는 자는 당장에 행복하리니, 그 꿈만으로도 오늘이, 내일이 충만할 것이다. 어쩌면 도서관 안의 그 많은 사람도 그와 같은지 모른다. 당장은 힘들고 불안해도 꿈이 있기에 알뜰히,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 꿈에 투자하고 있을 것이다. 그 꿈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룰 수도 있을 터. 그런 중에도 문득 삶이 벅차다며 지리산에 가 살고 싶다는 그가 가슴 먹먹하게 얹힌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는 결코 김밥 마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가 마는 것은 김밥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사실을. [[은미희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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