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4_해월의딸용담할미

해월의 딸 용담할미(6회) - 열 살 윤을 남기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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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고은광순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읽어보니 흥미진진 합니다. 어쩌면 토지나 혼불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는건 아닌지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하여 고은광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분의 소설을 연재합니다. 활자화된 책으로 나올때 까지 이곳에서나마 갈증을 풀어보기 바랍니다. [퍼와 편집한 이 주]



 

 (어머니 김씨가 돌아가시고 손병희의 누이가 새어머니로 오게 되는데...)

보은에서 돌아오니 해월은 아직 봄인데도 도인들에게 악질에 대한 위험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었다.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묵은 음식은 반드시 새로 끓여서 먹을 것이며, 침을 아무 곳에나 뱉지 말고 길에다 뱉을 양이면 반드시 흙으로 덮을 것. 대변을 보고는 노변이거든 땅에 묻을 것. 가신 물은 아무 곳에나 버리지 말 것. 집안을 하루 두 번씩 청결히 닦도록 할 것. 몸을 청결히 할 것….

그로부터 동학도인들 사이에서는 ‘부엌이 깨끗해야 한울님이 지나다가 복을 주고 간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그해  6월 하순부터 전국에 괴질이 돌았다.1) 괴질이 번지면 마을 전체가 벌벌 떨었다. 환자가 하나 생기면 그 가족, 그 주변으로 빠르게  병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쌀뜨물 같은 설사가 어찌나 심한지 환자들은 하루 이틀 후에는 토하고 설사하다가 맥없이 죽어 버렸다. 전국에서 엄청난 사망자가 속출했는데 괴질은 추석이 지나 찬바람이 불고 나서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해월이 살던 상주 앞재 40여 호는 위생을 강조했던 탓인지 희생자 없이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아들 덕기를 장가 보내고 눈 감는 김씨-

김 씨도 여름 내내 위생에 힘썼는데 특히 덕기를 위해서는 더욱 정성을 쏟았다. 보은의 황하일이 조심조심 가져와 건넨 달걀꾸러미를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고 죽 끓일 때 한 쪽에 익혔다가 덕기를 조용히 부엌 뒤로 불러내어 따로 먹인 것도 그 무렵이다. 큰댁 손 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 아이들, 특히 덕기에 대해서 더욱 각별한 생각이 들던 그녀였다. 덕기는 남편이 쉰이 다 되어 처음으로 얻은 아들 아닌가. 어미의 정성 덕분인지 덕기는 가을이 되자 부쩍 자라 제 어미 키를 넘어서게 되었다.

겨울 갈무리를 시작할 때쯤, 김 씨는 덕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때가 많아졌다.  첫서리가 내릴 무렵 며칠째 온종일 많은 양의 열무 시래기를 데쳐서 새끼줄에 엮어 처마 밑에 걸어 놓느라고 바빴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김 씨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등잔불을 켜 놓고 경전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남자아이가 열세 살에 장가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덕기가 설 쇠면 이제 열 셋이에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오?”

“우리 덕기가 부쩍 큰 거 같아요. 일찍 장가를 보내면 안 될까요?”

해월은 아내의 조바심이 심상찮게 느껴졌다.

“조만간 서인주가 올 터이니 한 번 알아보리다.”

서인주(서장옥)는 청주 율봉에 사는 음선장의 첫째 사위다. 생각하는 것이 곧고 강직하여 해월이 아끼는 제자중의 한사람이었다. 서인주의 권고에 그 장인인 음선장도 이태 전에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서인주한테서 얼핏 손아래 처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던 것이다. 과연 며칠 후에 찾아온 서인주에게 물으니 15세 되는 처제가 있다며 장인에게 고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두어 달 만인 정해년(1887) 정월, 열세 살의 덕기는 제 어미의 원에 따라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음선장의 둘째딸과 혼례를 올렸다. 덕기에게야 난데없는 일일 수도 있으나 큰형님 같은 서인주와 동서지간이 되고 나니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음선장 역시 해월과 사돈지간이 되는 것이 큰 기쁨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꼬마신랑을 맞아들였다. 양반네들은 사주단자며 허혼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혼수를 준비해서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렸다. 신랑신부는 처가에서 살다가 일이 년 뒤 노비들을 데리고 신랑집으로 들어가 폐백을 올리니, 혼례가 실제로는 몇 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민들에게는 그런 의례는 딴 세상 일이었다.

김 씨 부인은 어린 아들 덕기를 장가보낸 뒤 평생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기뻐했다. 장가를 들어 처가에 가서 살면 이리저리 이사 다니며 관의 지목을 피해야 할 일도 없어지리라. 아버지와 사는 것도 다시 바랄나위 없으나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이제 덕기는 김 씨의 원대로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오, 천지신명이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긴장이 풀린 탓인지 김 씨는 아들 장가보내고 나서 보름 만에 덜컥 자리에 눕고 말았다. 

신열이 뜨거워 윤이 열심히 찬 물수건으로 이마를 식혀 주고 해월이 열심히 죽을 쑤어 간병을 하였으나 김 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더니 20여 일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제자들이 나서서 원통봉 아래 그녀를 묻었다.

윤이는 어른스럽고 속이 깊은 아이였지만 그래도 엄마 옆에 누우면 어미가 뿌리쳐도 어미젖을 만지려 손을 스물스물 들이밀던 열 살짜리에 불과했다. 아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맛보았다.

어미와 함께라면 깜깜한 밤길을 걸어도 좋았다. 추운 겨울에 홑거풀 옷을 입고 있어도 좋았다. 불을 때는 아궁이 옆에서 눈이 매워 눈물이 나와도 좋았다. 어미가 곁에 있으면, 어미가 엉덩이를 토닥여주면, 어미가 안아 주면 세상에 근심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어미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내쉬지를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들이쉬지도 않았다. 어미의 뺨과 손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감은 눈은 두 번 다시 뜨이지 않았다. 아아, 엄니, 엄니…. 나는 이제 누구를 의지해서 살라고…. 엄니, 엄니, 엄니 보고 싶으면 어딜 가야 하나, 엄니, 엄니, 어딜 가요 엄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제자들은 초상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다가오는 해월의 환갑을 준비하자며 상주를 떠나 보은 손 씨의 거처로 옮기자고 했다. 덕기도 장인 집으로 떠났고 부녀만 앞재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해월과 윤이는 보은의 손 씨 집으로 살림을 합쳤다.


손 씨와 윤은 일 년 만에 재회를 했다.

“아이고, 윤아…. 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네 에미도 이렇게 어린 걸 어찌 하라고 그리 급히 먼 길을 떠났단 말이냐.”

윤의 손등을 쓰다듬던 손 씨는 일 년 사이에 윤이 부쩍 큰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키가 커진 것은 물론이지만 더 달라진 것은 윤의 눈빛이었다. 아이의 눈빛이 부쩍 더 깊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윤의 성장과 반대로 손 씨의 건강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기침을 더 심하게 그리고 더 자주 해댔다. 몸도 훨씬 수척해졌다.

살림을 합쳤다고 하지만 손 씨는 병 때문에 도저히 가족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오히려 해월이 아내의 간병을 위해 꼼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손 씨의 해수병은 나날이 깊어졌는데 한 번 기침이 터지면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숨도 쉬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제자들이 여러 가지 약이라고 가져왔지만 깊어 가는 병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해월은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나 하려는 듯이 그녀의 간병에 매달렸지만 옆에서 보는 제자들의 가슴은 안타깝기만 할 뿐이었다.

3월 21일, 사양하는 해월의 만류를 무릅쓰고 제자들은 환갑잔치를 치렀다. 잔치가 끝나자 해월은 600리 길 정선의 갈래사로 홀로  떠나 49일의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강화의 가르침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육임의 직제를 마련하여 각각 적합한 제자들로 하여금 일을 맡게 하였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교도들을 혼자서 모두 지도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제 새로운 교도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어도 일말의 손색이 없는 수제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동학의 조직을 더욱 확장시키고 또 심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는 다시 익산으로 전주로 삼례로 돌아다니며 포덕에 힘썼다.


새어머니 손씨(1888)

다시 봄이 돌아와 손 씨의 기침은 조금 잦아드는가 싶었지만 이제 열한 살 된 윤이에게  아버지가 수시로 집을 떠난 빈 집에서 몸이 불편한 손 씨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할 일 많은 스승이 병간호에 붙잡혀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다가 새 부인을 맞아 병석의 손 씨 부인과 어린 윤을 돌보게 하자고 의논을 모았다. 손병희가 나서서 얼마 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자기 누이가 스승님을 모실 만 하다고 하였다. 무자년(1888) 봄, 해월이 전주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삼례를 거쳐 보은으로 돌아왔을 때 해월이 극구 만류하는데도 제자들은 26살 손병희의 누이를 보은으로 데려올 궁리를 했다. 손병희는 윤을 번쩍 안아들고 말했다. 곧 새어머니가 오실 것인데 당분간은 낯설겠지만 얼마 안 가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는 윤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주었다.


윤이가 새끼를 꼬고 있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새엄니 맞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큰어머니나 네 어머니에게 모두 큰 빚을 지었다. 나야 여기저기 바쁘게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내게 또 다른 부인이란 필요치 않다. 그러나 큰어머니 병세가 위중하고 어린 너를 집에 두고 할 일 많은 애비가 걱정 없이 돌아다니기는 어렵겠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이제 열한 살이 되었어요. 도솔봉 아래 살 때보다 많이 크긴 했지요. 그렇지만 바느질에 손님들 뒤치다꺼리에 큰어머니 병수발을 저 혼자 할 수는 없어요. 새어머니가 오셔도 전 괜찮아요. 살다보면 연화 언니처럼 좋은 새아버지가 생길 수도 있고 저처럼 새어머니가 또 생길 수도 있는 일이지요 뭐.”

“이번에 오실 분은 손병희 아저씨 누이로 스물여섯 살밖에 안 되었다는구나.”

“연화 언니보다 한 살 더 많네요. 젊은 분이 오래도록 아프지 말고 우리랑 함께 살면 좋지요 뭐.”

윤이는 무언가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냐?”

머뭇거리던 윤이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우리 엄니를 잊어버리실까 봐서요.”

그러더니 소리를 죽여 가며 한참을 흐느꼈다.

해월도 어린 것의 걱정을 알고 나니 목이 메어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 어미가 덕기 오라비를 서둘러 장가를 보낸 걸 보면 뭔가 예감을 하고 있었던 걸까? 참 고마운 사람이었느니라. 열심히 살았지. 정말 감사한 사람이야. 덕기 오라비와 너를 낳았고 잘 키워 준 사람 아니냐. 다 꺼져 가던 동학의 포접도 단양에서 네 어미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일으켰지. 어찌 네 어미를 잊을 수 있겠느냐. 윤아, 어머니가 멀리 갔다고 생각지 말아라. 네 어미의 심령은 네 마음속에, 그리고 이 아비의 마음속에 깃들어 사느니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하시는 일이니 너무 연연해하지 마라.”

해월은 꺼칠한 손으로 윤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손병희의 누이 손 소사. 몇 년 전에 혼인을 했다가 남편이 죽는 바람에 아이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친정으로 돌아왔으나 한 번 출가했던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와 사는 것은 여러 모로 힘든 일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눈총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늙어 가면서 혼자 외롭게 살 일도 걱정이었다. 오빠의 부탁으로 해월 선생의 옷을 몇 차례 지어준 적이 있는데 해월 선생이 그 때마다 바느질 솜씨를 칭찬했다고 한다. 오빠 손병희에게는 스승의 칭찬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해월을 옆에서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 아닌가. 손병희는 누이에게 딸들과 아들은 출가했고 열한 살 영민한 딸아이가 하나 있는 자기 스승에게 개가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중을 물어보았다. 출가 전부터 해월의 됨됨이를 들어 알고 있던 손 소사는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리고 청주를 떠나 보은 행 가마에 올라탔다.

 

(다음주 금요일에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되는 손병희의 누이, 윤의 새어머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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