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4_해월의딸용담할미

해월의 딸 용담할미(7회)- 큰어머니의 죽음과 새어머니의 등장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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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고은광순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읽어보니 흥미진진 합니다. 어쩌면 토지나 혼불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는건 아닌지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하여 고은광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분의 소설을 연재합니다. 활자화된 책으로 나올때 까지 이곳에서나마 갈증을 풀어보기 바랍니다. [퍼와 편집한 이 주]




(윤과 새어머니 손씨/ 심상훈은 어떤 인물인지 유의해보세요.)

윤은 손 씨 큰어머니에게 괜스레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 들어 젊은 어머니가 오게 될 모양이라는 걱정의 뜻을 비추어보았으나 이미 쇠잔할 대로 쇠잔해진 큰어머니는 다만 감사할 뿐이라며 윤이 어른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새어머니는 젊고 시원시원했다. 손 소사가 큰댁을 어머니처럼, 윤을 동생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고 집안 살림을 규모 있게 꾸려내는 것을 보고 주변사람들은 모두 한 걱정을 덜게 되었다. 

윤이는 집안일을 도우며 짬짬이 다시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언문으로 된 책은 쉽게 읽고 쓸 수 있어서 집을 드나드는 아저씨들에게 책을 구해 달라 부탁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저녁에는 언니 같은 손 소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달라고 졸랐다.

“새엄니는 어렸을 때 뭐하고 놀았어요?”

“너는 뭐하고 놀았니?”

“에이 또 내 얘기부터 묻는다.”

“나도 네 얘기가 궁금하거든.”

“음.... 나는 연화 언니하구, 덕기 오빠하구, 연국이 오빠가 집에 있을 때는 연국이 오빠하구두 같이 산채를 많이 하러 다녔어요. 덕기 오빠는 노는 걸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시간 있을 때마다 산채 나물을 많이 갈무리 해 놓으라고 하셨거든요.”

“뭘 뜯었는데?”

“고사리, 취나물, 참나물, 두릅…. 아유, 고사리 꺾는 건 너무 재밌어. 굵다란 게 그냥 톡톡 부러지거든요. 단양 송두둑에서 살 때가 제일 좋았었는데….”  

윤이는 잠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담엔 어디 어디서 살았어?”

윤의 얼굴에 다시 씩씩한 표정이 살아났다.

“그다음엔 상주 앞재로 갔지요. 우린 이사 다닐 때 밤에 다녀야 해요. 거기서 2년 살다가  또 멀리 불냇이래나 하는 데서도 잠깐 살았구 다시 몇 달 만에 앞재로 갔는데 길이 너무너무 멀어서 아주 식구들이 모두 죽는 줄 알았어요. 앞재로 돌아갔을 때는 집에 있던 게 깡그리 다 없어져가지고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고 있었지요. 나중에 누가 베를 가져다주어서 풀씨들을 훑어다가 솜 대신 옷에다 넣구….”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윤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리구 다음엔 어디서?”

“그리구 지금은 이렇게 보은으로 와 살구….”

손 소사는 어린 것이 품고 있는 너무 많은 기억과 슬픔에 자기의 가슴도 먹먹해졌다.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보구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동학 북접 주인.”

“아녜요. 최보따리라구 해요. 최보따리.”

“최보따리라니? 그 속엔 뭐가 있기에?”

“아버지의 큰 스승이 하신 말씀들을 적은 종이묶음들이요. 짚신하구….”

윤의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우리 아버진 자주 쫓기세요. 기미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보따리를 들고 뜰 준비를 하면서 사시는 거예요. 아주 큰일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잡히시면 안 된대요. 송두둑에서 떠난 뒤로 계속 그러시는 걸요.”

“아주 큰일이라는 게 뭔데?”

“세상을 바꾸는 일이래요. 지금은 양반이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잖아요. 자기네가 윗분이라구 하면서 때리구 빼앗구…. 그래도 아랫사람들은 아무 소리두 못하구…. 양반들은 우리네를 천것들, 쌍것들이라구 한대요. 연국이 오빠는 그런 세상이 싹 다 엎어져야 한다구 했어요. 물론 아버지 앞에서는 그런 소리 못하지요.  우리 아버지는 엎는 사람이 아니에요. 항상 만들어 가야 한다구 하셨어요. 살리는 거, 그게 더 크고 귀한 일이라구 하셨지요.”

젊은 새댁은 앞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있었다.

“진짜 이제는 새엄니 얘기 하실 차례에요. 고향부터 시작해요.”

“나는 청주에서 태어났어. 나두 큰어머니가 계시단다. 손천민 큰접주님이 큰어머니의 손자니까 나이는 많아도 내 조카뻘이지.”

“아, 그 글 잘 쓰시는 손천민 아저씨가 나이가 많은데두 조카에요?”

“응. 우리 어머니는 둘째 부인으로 들어와서 병희 오라버니랑, 나랑, 동생 병흠이를 낳으셨어.”

“그래서요?”

윤은 바느질을 하고 있던 손소사의 다리를 베고 누었다.

“병희 오라버니는 어렸을 때부터 장난이 심했지. 동네 대장노릇하면서….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둘째부인이니까 첩의 자식이라고 열여섯에 혼인한 뒤에도 집안 제사 지낼 때 집안 어른들이 무덤에 절도 못하게 했단다.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곡괭이를 들고 무덤을 팠더라지. 뼛조각이라도 몇 개 가지고 따로 무덤 만들어 절하겠다고 말이야.”

“이야. 손병희 아저씨, 아니 이제는 외삼촌이네. 외삼촌 참 대단하시다. 그래서요?”

“오라버니는 어딜 가서도 기죽는 법이 없이 당차니까 뭐 집안 어른들이 두 손 두 발 다 드셨지. 열일곱에 괴산서 수신사가 말 꼬리에 역졸의 상투를 매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끌고 가는 걸 보고 낫으로 말꼬리를 잘랐더란다. 관가로 잡혀갔는데 오빠가 한 방에 나를 죽이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다 복수하겠다고 소리를 쳤더니 사또 심상훈이 겁이 나서 풀어주더래.”

윤은 손병희 삼촌이 자라나며 사고 친 이야기를 더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보다도 잠의 힘이 더 셌던 것이다.


인제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새로 간행되고 해월이 활발하게 포덕을 하러 다닌 덕분에 무자년(1888) 들어 입도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단양, 충주, 청주, 목천, 보은, 공주, 예산, 청풍, 연풍, 괴산, 진천, 연기 등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가을에 엄청난 기근이 들었지만 동학교도들에게는 가진 것이 있으나 없으나 서로 돌보아 죽이라도 나눠먹도록 유무상자(有無相資) 연통이 돌았다.  기근이나 괴질이 돌아도 이러한 해월의 가르침 덕분에 동학에 입도하면 해를 입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웃을 하늘로 여기는 이러한 인정과 이적 아닌 이적 때문에 동학에 대한 민초들의 믿음은 커져만 갔다.


기축년(1889)에도 흉년이 들었지만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여전했고 구휼정책이라는 것은 백성을 우롱할 뿐이었다. 쌀값은 폭등하고 전국에 아사자가 속출했다. 양반들은 급할 때에 쌀을 빌려주고 제 때에 갚지 못하면 땅을 빼앗아 버렸다. 관에서 보릿고개에 빌려주는 장리곡은 쌀겨가 잔뜩 섞여 있었지만, 가을에는 천하없어도 알곡으로만 갚도록 했다. 내줄 때는 작은 됫박에 평미레로 깎아서 담아 주었고 받을 때는 큰되로 수북이 담아서 셈하여 받아갔다. 그렇게 해서 남긴 것은 수령과 향리들이 다 빼어 먹으면서 눈꼽만큼의 가책도 받지 않았다. 위로 좌우로 어디에서도 다 하는 짓이었으므로…. 흉작이 들 때마다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유리걸식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부자는 쉽게 땅을 주워 먹었다. 땔나무를 해 오던 산도 권세 있는 작자들이 수령에게 몇 푼 쥐어주고 자기네 산이라는 문서를 받아내어 임자 있는 산 선산이라며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양반들은 너나 없이 문어발처럼 쑤욱 쑥 앞으로 옆으로 뻗어가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온갖 명목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갈퀴처럼 긁어대는 벼슬아치들이 없는 산골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고, 빈 섬으로 숨어들어 호구단자조차 버린 사람 아닌 사람이 되었다. 조정은 대책을 세우는 대신, 남은 사람에게 그 몫을 부과하였고, 보이지 않은 족쇄를 찬 농민들은 산 채로 피를 빨리며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연초에 정선에서 민란이 일어나니 공연히 동학도들을 지목할 것이 염려되어 해월은 도인들에게 서로 왕래도 하지 말하고 일렀다. 그러나 인제에서도 연이어 민란이 터지자 각지의 관아들은 다시 동학에 혐의를 두고 날을 세웠다. 동학도들은 주로 친인척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연원이 있으므로 잡아다가 물고를 내면 연줄연줄 연이어 잡아 들일 수도 있었다. 해월은 지목을 피해 영남, 호서, 인제의 깊은 산으로 전전해야 했고  덕기와 연국을 비롯해서 동학도들은 너도 나도 피신을 서둘렀다. 가을에 서인주를 비롯해서 서울로 갔던 도인들이 체포되었다는 어수선한 소식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누구는 사형을 당했고 누구는 바다 멀리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했다. 그 북새통에 손 씨 부인은 젊은 손 씨부인과 윤의 간호를 받다가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44년간 해월의 아내로 살면서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여인. 많이 야위었지만 그녀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 다시 하늘나라에서 온 선동의 안내를 받게 되었을까.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손 소사는 불러오는 배를 안고 윤이와 해월이 보낸 제자들을 따라  강원도 간성 왕곡마을로 가서 겨울을 지냈다. 봄이 되어 지목이 뜸해진 틈을 타서 다시 오라버니 손병희가 마련해 준 충주 외서촌 보뜰에 당도했다. 오래전, 영양에서 손 씨 부인과 딸들을 잃고 지아비 된 도리, 아비 된 도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혹독한 아픔을 견뎌내야 했던 해월은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가족들의 피난길을 애써 챙겼다. 이제는 처남이 된 손병희가 크게 힘을 보태 한결 수월해 지기도 한 터였다. 젊은 손 씨는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들 동희를 낳았다.


해월은 강원도 중에서도 오지인 양구, 인제 등지를 전전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가족을 외서촌에서 공주 정안으로 옮기게 했다. 해월은 늦여름이 되어 공주로 와서 가족을 잠깐 만났는데 다시 한 달 후에는 진천으로 가족을 옮겨야 했다. 손 씨로서는 참말로 윤이 말대로 동학 교주와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젖먹이 아기까지 업고 다니며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이렇게 바쁘게 몰아치는 가운데에도 해월은 나뭇가지 위에서 우는 새의 소리도 시천주 소리라는 설법을 남겼다. 보따리를 메고 긴장의 끈을 놓치지 못하고 수 없이 산으로 들로 쫓기는 길. 그 길에서도 해월은 꽃에서, 나뭇잎에서, 벌레들에게서, 돌멩이에게서 하늘의 향기와 하늘의 힘과 하늘의 사랑을 보았고 이를 전했다.

가족의 거처를 진천의 금성동에 마련한 뒤 해월은 가을부터 영남지역을 돌며 조직 재건을 독려하고 강도(講道)를 잇따라 열었다. 김산에서는 여성 도인을 위한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발표했다. 임신 후의 주의할 점과 여성들이 수행할 때의 요점들을 단아한 경어로 안내했는데 이 글을 읽으며 아낙네들은 귀하게 대접받으며 귀한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뿌듯함을 맛보았다. 해월은 모든 도인들의 집에서 어린아이를 치지 말라는 간절한 당부도 덧붙였다.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하날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게 곧 하날님을 치는 것이오니 천리를 모르고 일행 아희를 치면 그 아희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안에 큰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을 힘쓰옵소서. 이같이 하날님을 공경하고 효성하오면 하날님이 조와 하시고 복을 주시나니 부디 하날님을 극진히 공경하옵소서.”

해월이 가는 곳마다 포덕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간의 조선 일상이 양반 중심의 가르침으로 권위와 위세를 강조했던 것에 비해 동학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다독여 주고 신선의 관용을 품게 하였기 때문이다. 늘 따듯한 시선으로 따듯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토닥이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니 해월의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하늘사람이 된 듯한 벅찬 감동을 주었다.

때리는 놈은 웅크리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는 민초들의 자조 섞인 말도 있었지만 해월이 설파하는 동학에서는 때리는 놈도 있을 수 없고 맞는 놈도 있을 수 없으니 그저 입이 벙실거려졌다.


주1) 조선후기부터 한말 개화기까지 약 200년 동안 2,30년 간격으로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여 한 해에 수만 명~수십만 명이 죽어갔다.

(다음주 금요일에 3장, 청산, 푸른 산 맑은 물이 피로 물들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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