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4_해월의딸용담할미

해월의 딸 용담할미(9회)-오빠의 죽음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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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고은광순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읽어보니 흥미진진 합니다. 어쩌면 토지나 혼불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는건 아닌지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하여 고은광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분의 소설을 연재합니다. 활자화된 책으로 나올때 까지 이곳에서나마 갈증을 풀어보기 바랍니다. [퍼와 편집한 이 주]


(2년간의 합법투쟁은 소용이 없게 되고, 청산으로 이사한 뒤 오빠를 잃게 됩니다.)

-보은 취회

“엄니, 일이 점점 커지나봐요.”

“그래, 수천 명씩 모여서도 일이 안 풀리니 이제는 수만 명이 모이려나 보더라.”

“연화 언니랑 형부는 벌써 청산 집에서 보은 쪽으로 오가며 준비를 하고 있대요.”

“연화가 고생이 많구나. 여기저기 연통 다니랴 아버님 말씀 받아 정리하랴.”

“정말이에요. 연화 언니랑 연국이 형부가 없었으면 어땠을까요? 아이가 안 생기는 게 걱정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니까 남장도 하고 홀가분하게 이 일 저 일을 맡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에요.”

“그래 수행도 열심히 한다지? 둘이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지.”

“보은 취회 때는 우리도 가야지요?”

“그럼, 전국에서 못해도 수만 명이 모인다니 모두 가자꾸나. 일손을 거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아야겠네.”

“그런데 며칠 만에 어떻게 수만 명을 모아요?”

“글쎄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해 온 걸 보면 힘들 것 같지 않구나. 연화 언니만 해도 여자 몸으로 하루에 100리씩 다닌다잖니. 아버지야 200리길도 다니셨다 하고. 그동안 아버지가 임명한 접주가 수천 명은 될 것 아니냐. 그렇게 한 동네만 전하면 거기도 또 얼른 발 빠른 사람이 다른 동네로 전하고…. 김낙중 아저씨처럼 말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1893년 3월. 취회가 벌어지는 보은 장내리에 도착한 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윤은 태어나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보았다. 공주와 삼례에도 사람이 많이 모였다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도 열 곱, 스무 곱이 넘는 사람들에 장사치까지 몰려들어 온 조선의 사람들이 다 이곳 보은 장내리로 모여든 게 아니냐는 소리도 들려 왔다. 집으로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아버지도 숱하게 나들이를 하셨지만 그래도 이렇게 수 만 명이 모두 동학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형부가, 손병희 삼촌이, 서인주 아저씨가, 덕기 오빠가 늘 바쁘게 어울려 일을 하는 건 알았지만 그 일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지는 진짜로 몰랐던 일이다. 척왜양창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케 한다)의 깃발이 멋지게 휘날렸다. 전국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제각기 포별 깃발 아래 집결하여 주문을 외기도 하고 경전을 함께 암송하기도 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동학 세상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좌우의 여러 도인들에게 이것저것 일을 지시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셨다.


임금이 보낸 관리들과 한 치도 물러남 없이 마주앉아 팽팽하게 담판을 하고 있는 병희 삼촌과 서인주, 서병학, 강시원, 황하일, 성두한, 조재벽, 유태홍 접주 어른들도 늠름하였다. 수만 명이 모였지만 대소변이며 머무른 자취는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엿장수, 떡장수, 쌀장수도 동학도들의 정직함과 질서 바름에 놀랐다고 했다.

그러나 조정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다.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면 평안케 할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공주, 삼례, 한양 상소, 보은… 모두 판박이다.

일단 입발림을 해서 해산시키고, 담당 관리를 야단치는 듯이 하여 도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리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물론 무위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동학도들의 어마어마한 세력에 놀랐다. 선무사 어윤중은 말이면 말, 글이면 글로 야무지게 응대하는 그들의 논리에 놀랐으며, 그들의 질서의식에도 놀랐다. 이 자들은 비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존재들이며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동학도들에게도 소득이 있었다. 조정은 소통불가의 귀머거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 있다. 자기 자신들에게 놀랐다. 수행만 하고 있으면 절로 새 세상이 온다고 생각하는 도인들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우리에겐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가 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무능한 조정 말고, 우리가, 우리 손으로 척왜양창의, 보국안민을 이룰 것이다. 우리 손으로 새 세상, 개벽을 일굴 것이다!!!



윤이, 새어머니, 연화언니, 올케언니는 물론이고 연락이 닿은 일가친척 여자들도 모두 모여 밥을 하고 뒷바라지를 했다. 돌아가신 손 씨 큰어머니의 손녀라는 조카 신태희도 처음 만났다. 이천 앵산동에서 온 태희는 아이들을 돌보는 솜씨가 탁월해서 애기삼촌 동희랑 조무래기들을 간수했다. 조카라지만 윤이보다 한 살 어리니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둘이는 금방 죽이 맞아 떨어질 줄 몰랐다. 한 달여 엄청난 경험을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태희와 함께 상주 왕실로 돌아왔다.




"Meet you in the dark universe of tears" by Sara is licensed under CC BY 2.0


-청산으로 이사하다

무장한 관졸들이 압박하며 다가오고 있었고 탐학은 금지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냈기에 보은 장안에서의 집회는 한 달 이상 지난 뒤에 해산되었다. 해월은 보은 집회 뒤에 아들 덕기와 사위 김연국과 함께 수운 처형 이후 세가 약해진 경상도 지역을 돌아보았다. 성주, 칠곡, 의성, 군위 등을 돌며 도인들을 만나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스승님을 잊지 않고 도를 이어 가는 노고를 위로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부하고 수행할 것과 아울러 작금의 세태에 동학도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4월 초순에 떠난 길인데 분주히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7월도 다 가고 있었다.

구미 인동에서  금산으로 가는 도중 덕기가 이상한 언행을 보였다.

“아버지, 저, 저게 뭐에요?”

“무엇이 말이냐?”

“검은 손이요. 막 내게 가까이 와요. 어, 어….”

해월은 얼른 아들 앞으로 나와 서서 아들을 안아 주었다. 아, 이게 무슨….

아버지 품에서 덕기는 조금 진정된 듯 했다. 해월은 덕기가 노독에 지쳐 헛것을 보았다 여겨 금산과 황간의 도인 집에 들러 요양을 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가 심해졌다. 8월 초순 해월은 상주 왕실 집으로 돌아왔다.


덕기 오라버니가 마당에 들어섰다. 눈빛이 예전과 달랐고 바지 앞자락은 소변자국으로 얼룩진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윤이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오라버니를 불러댔는데 옆에서 자던 태희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윤이는 혼절할 뻔했다. 꿈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라버니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눈빛이 예전과 달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오라버니. 이게 또 한 번의 꿈이 아닌가 하여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 보았지만, 분명 생시였다. 이럴 수는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얼마나 공을 들였던 아들이었던가. 오라버니가 이처럼 낯선 사람으로 변하다니. 그리고 그 꿈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내 꿈에 똑 같은 모습으로 앞서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에게 꿈 이야기를 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돌보느라 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8월 말, 김연국 내외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청산 문바위골로 이사를 했다.

흙탕물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윤은 강 가운데 솟은 작은 흙 섬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윗저고리를 벗은 몸으로 위쪽에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오고 있었다. 앗! 오라버니다. 윤은 얼른 손을 내밀었다.오라버니가 손을 뻗어 윤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만 놓치고 말았다. 아악 오라버니!

꿈에서 깨어 벌떡 일어난 윤은 오라버니가 자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밤새 아들의 곁을 지키느라 초췌해진 해월이 이제 막 세상을 떠나는 아들의 눈을 감기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밤을 지샌 올케언니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윤은 아버지의 눈에서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을 보았다. 그러나 그뿐.

제자들이 달려와 덕기의 주검을 수습할 때나 문바위 뒤의 산기슭에 매장할 때도 해월은 조금도 감정을 흩뜨리지 않았다. 흐느끼는 윤과 며느리에게 해월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슬퍼하지 마라. 한울이 주셨다가 한울이 데려가신 것을 슬퍼할 까닭이 있겠느냐.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똑 같은 일이다. 태어나는 것은 기뻐하면서 죽는 것을 슬퍼할 이유가 없느니….”

장사를 치르고 며칠 뒤 윤의 올케, 덕기의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 겨우 21세. 아이도 없는 며느리가 시집에 남아 살기란 피차 힘든 노릇일 터였다. 윤이 주변이 조용해지자 해월에게 물었다.

“아버지, 두 달 전 오라버니가 낯선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제가 바로 그날 새벽에 똑 같은 모습을 꿈에서 미리 봤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리고 며칠 전 다시 꿈에 물에 휩쓸려가는 오라버니가 내민 손을 제가 놓치고서 놀라 꿈에서 깨었는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윤이 다시 흐느꼈다. 

“슬퍼하지 말아라.”

“아버지, 제가 오라버니 손을 꼭 잡았으면 오라버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팔을 더 내밀었더라면…. 제가 오라버니를 잡지 못했어요….”

“네 탓이 아니다. 그러기로 하면 아비 탓이 더 크겠지.”

해월은 젖은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네 영이 맑아지는 모양이구나. 감사한 일이다.”

(다음주 금요일 청년 김구와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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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 해월의 딸 용담할미(8회) - 투쟁의 시작과 해월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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