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4_해월의딸용담할미

청산편)해월의 딸 용담할미(10회)-청춘은 꽃피는데(청년 김구와 만나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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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고은광순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읽어보니 흥미진진 합니다. 어쩌면 토지나 혼불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는건 아닌지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하여 고은광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분의 소설을 연재합니다. 활자화된 책으로 나올때 까지 이곳에서나마 갈증을 풀어보기 바랍니다. [퍼와 편집한 이 주]


 (17세의 윤과 19세의 김구가 청산에서 운명적으로 만나지만...)

-청춘은 꽃피는데(청년 김구 청산에 오다)

갑오년(1894)의 새로 떠오른 해가 청산 문바윗골을 비추었다. 세상 구석구석, 하루도 빼지 않고 따듯한 빛을 비추어 뭍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참으로 고마운 해다. 도인들이 계속 문바윗골로 찾아들었다. 공주와 삼례, 그리고 광화문에서의 상소에 이어 보은의 큰 집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신원 운동에도 조정은 식언을 반복하며 눈앞의 동학도들을 흩어 버리기에 급급했다. 더 큰 힘으로 더 세게 조정을 압박하자는 제안을 하는 도인들이 생겨났다.

전라도에서는 지난해 보은 집회 이후 유태홍,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 접주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라도 지역에서 관의 읍폐는 그 어느 지역보다 극심했다. 짚신이 2전, 소 한 마리 값이 6, 70냥 하는 시절임에도 전라 감사 자리는 15만 냥이라고 했다. 곡창이 넓으니 관리들이 야료를 붙일 기회가 많았다. 봉급이 없는 아전이나 임채를 내고 벼슬을 산 자들은 모두 백성을 쥐어짜야만 했다. 탐욕에 눈 먼 관리는 쥐어짜기 바쁘고 권력유지에 눈 먼 조정은 귀 막고 나라의 체통 운운하며 호령하기에 바빴다.


갑오년 새해가 밝자마자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해 고부관아를 들이쳤던 전봉준은 새로 부임한 고부군수 박원명의 순순한 조처에 농민군을 해산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사건을 수습한다며 뒤늦게 뛰어든 안핵사 이용태는 조병갑을 두둔했다. ‘국법의 준엄함을 보이고, 반상의 법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역도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마구잡이 체포, 방화, 약탈, 강간을 자행했다. 안심하고 해산했던 농민들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셈이었다. 농민들이 다시 들썩였다.

전봉준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부 봉기 이후 종적을 감추고 남도를 두루 돌며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의 대접주들을 만나 대대적인 봉기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뜻이 모아졌다. 이들의 움직임은 시시각각으로 해월에게도 전해졌다. 해월은 전면적인 봉기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한번 수십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쌓인 민심에 옮겨 붙은 불은 하늘에 사무치는 불길로 번져 올랐다.


작년 보은 집회에 국왕의 전권을 받고 나온 보은 출신의 선무사 어윤중은 동학도들의 주장대로 80만냥을 부정하게 취한 충청 감사 조병식과 공주 영장 윤영기의 부정을 밝혀내고 해임시키며 탐학의 금지를 약속한 바 있다. 청산 현감 조만희 역시 보은의 민회를 지켜보았으므로 그들의 모임이 민회(民會)이며 비적이 아니라 민당(民黨)이라고 보고한 어윤중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학 도인들이 보통의 백성들보다 훨씬 더 품성이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려운 가운데에 그렇게 서로를 도와 가며 격을 높여가는 것은 놀라운 일 아닌가. 보은 민회를 경험한 떡장수, 엿장수, 쌀장수들이 모두 동학의 전도사가 되었고 동학도들이 오고가는 길목에서 만났던 백성들이 모두 동학도가 되었다. 보은, 청산, 옥천, 영동 일대는 동학도들이 숨을 쉴 만하게 되었다. 특히 해월이 자리를 잡은 청산은 마음 놓고 동학하기 좋은 곳이 되었던 것이다.2)


이 무렵이었다. 황해도를 출발한 열다섯 명의 도인들이 보은 장내로 해월을 만나러 왔다. 지난 가을 각기 연비(連臂)3)의 성명 단자를 보고하라는 경통이 도착하여 황해도를 떠난 이들은 내려오는 도중 포접도 하고 산사에서 수행도 하며 겨울을 보냈다. 노자를 벌 겸 동네일도 거들며 오느라 봄이 되어서야 도착한 것이다. 일행 15명 중에 나이가 가장 적은 이는 19세의 김구(당시 이름 김창수)인데 17세에 과거에 낙방한 뒤 동학에 입도해 열심히 포교를 해서 연비가 수천 명에 달하게 되어 이 일행에 끼게 되었다.


일행 중에 젊은 축인 이 접주가 총각 김구를 찔벅거렸다. 젊은이가 수천 명의 연비를 거느렸다니 신통하기도 했고 시험을 해보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2년 전에 과거에 떨어지고 나서 상심하고 있다가 아버지가 권해주시는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보았지요.”

“어째서?”

“관상에 능한 것도 사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그런데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라는 글귀를 보니 희망을 갖게 되더군요. 관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같지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은 아무데도 쓰여 있지 않더라구요. 그러다가 동학 이야기를 듣고 갯골 오응선 어른을 찾아뵈었지요. 그분의 가르침과 인품을 보고 내가 마침 찾던 것이로구나 하고 입도를 하게 되었지요.”

“동학에선 무엇이 가장 마음에 들던가?”

“빈부귀천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 마치 별세계에 온 것 같았습니다. 내 안에 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무엇이든 가진 자와 안 가진 자가 서로 돕는다는 유무상자(有無相資), 포악한 정치에서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 뭐 다 좋은 말 아닌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하. 나 역시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더러워 억장이 무너져서 툭하면 술을 마시고 집사람이나 아이들에게 패악질을 하곤 했다네. 그러다가 법헌께서 부부화순이 으뜸이라며 법설하신 것을 필사본으로 보게 되었지. ‘부화부순(夫和婦順)은 우리 도의 제일 종지니라….’ 이렇게 시작된다네.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 혹 성을 내더라도 남편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한 번 절하고 두 번 절하며 온순한 말로 성내지 않으면 반드시 화할 것이라’고 하셨더군.”

“아니 사내보고 여자에게 절을 하라니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어이구… 저는 아직 장가를 안 가 봐서 모르겠지만 이해되지 않는 말인데요.”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그 글을 읽는 순간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었지. 갑자기 엉엉 울음보가 터지지 뭔가. 아내는 평소에 나를 무서운 짐승 보듯 했었거든. 그게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고. 집에 가서 아내에게 앉으라 하고 큰절을 몇 번 했다네. 집사람이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모르더라고. 내가 그동안 미안했다고 했더니 아내의 눈빛이 대번 달라지는 거야. 집사람도 크게 감동했는지 바로 동학에 입도했지. 아내도 친정 쪽으로, 우물가로 사방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포덕을 했다네. 내가 술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우리 부부 사이도 예전과 달리 다투는 일 없이 진정 화평하게 되었다네. 집안에서 연일 웃음꽃이 피어나니 천국이 따로 없대 그려.”


김구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무리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지만 그래도 어찌 사내가 아녀자에게 큰절을 한다는 말인가?


계사년(1893) 늦가을에 해주를 떠난 지 반년이 지나 갑오년(1894) 봄이 되었다. 보은과 가까운 청산 한곡 문바위골에 대도소가 마련되었다기에 그리로 향하는 동안에도 김구의 가슴 한 쪽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계속 걸려있었다. 청산에 도착하고 보니 도소로 가는 길에 집집마다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놀라웠다. 해월을 찾아오는 무리도 있고 만나고 가는 무리도 있어 문바위골 전체가 북적거렸다.

도소 가까이에 도착하니 키가 큰 장정이 일행을 막아 세웠다. 해월 선생을 만나려는 사람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행은 도소가 바라다 보이는 길가 평상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김구는 도소 주변에서 열심히 안팎을 드나들며 뒤치다꺼리를 하는 처녀를 보았다. 곱게 빗어 뒤로 길게 땋아 댕기를 묶은 머리는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고 앙다문 빨간 입술이 고왔다. 약탕관에서 약을 짜들고 “아버지….”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해월 의 딸인 모양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김구는 슬그머니 일행을 떠나 처녀에게 다가가 물 한 그릇을 청했다. 물을 마신 뒤 그릇을 내밀며 김구는 슬쩍 처자에게 물었다. 눈이며 입매가 다부져 보였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칼이 강하오, 꽃이 강하오?”

처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소를 띠고 답했다.

“칼은 무 써는데 강하고요, 꽃은 열매 맺는데 강하지요.”

처녀는 물그릇을 받아들고 냉큼 부엌으로 사라졌다. 김구는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처녀에게 그토록 쉬운 답을 나는 왜 며칠 동안이나 가슴에 담고 헤매고 있었던고? 


차례가 돌아와 해월 선생 앞에 나아가면서도 김구는 자꾸 눈으로 처녀의 모습을 뒤쫓았다. 그렇다. 꽃으로 무를 벨 수 없듯이, 칼 꽂은 자리에서 호박이 달릴 수는 없을 것이니….

김구가 젊은 처자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을 때,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보고에 이어 어떤 고을 원이 동학도인의 전 가족을 잡아가두고 가산을 강탈했다는 보가가 속속 들어왔다. 3월 이후 태인, 금구, 부안, 전주, 고부 등지에서 연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4)

해월은 진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는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워야 한다는 결의들이 방안을 가득 채운 대접주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해월은 좌중의 여론을 충분히 들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결기가 더욱 강하게 서렸다.


김구 일행은 각각 연비 명단을 제출하고 갈 길이 먼고로 그곳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다음 날 해월에게서 접주 도첩을 받고는 큰절을 하고 일어섰다. 김구는 도소를 떠날 때 동작 빠르게 부엌 쪽으로 가 최윤 앞에 우뚝 섰다.

“어머, 깜짝이야.”

부엌 문턱을 넘으려다가 놀라 비틀 하는 최윤의 팔을 김구가 얼른 잡아주었다.

“놀라셨다면 미안하오. 어젯밤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내 주변에선 아가씨 같이 지혜로운 분을 만날 수 없었거든요. 내 옆에 아가씨 같은 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절이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더 머무르면 좋으련만, 시국이 어수선하고 일행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니 너무 섭섭하구료.”

김구는 자기 팔목에 끼고 있던 염주를 빼어 처녀의 손목에 끼워주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지만 가운데에 자수정이 한 알 박혀 있는 것으로 해주에서 내려올 때 들린 사찰에서 스님 한 분이 김구에게 범상치 않은 상을 가졌다며 주머니에서 꺼내어 건네주었던 물건이다.


“어제 아가씨에게서 크게 배웠소. 후일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소만….”

김구는 잡고 있던 윤의 손을 아쉬운 듯 놓아주었다.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 했으나 저쪽에서 일행이 부르는 소리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발걸음이 안 떨어져 자꾸 뒤를 돌아보던 열아홉의 김구는 열일곱의 윤에게 그렇게 마음을 주고 떠났다. 한쪽에서 삼촌뻘 되는 다섯 살짜리 동희를 돌보고 있던 태희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킥킥대고 웃으며 다가왔다.


“윤이 이모, 맨날 나이 많은 아저씨들만 보다가 총각을 만나니 기분이 어떻수? 호호 어머, 수정이 박힌 염주네? 가지 말라고 붙잡을 걸 그랬지? 호호”

“계집애가 까불기는….”

“이모나 나나 이제 곧 시집가라는 말이 나올 나이인데 뭘 그러우? 처녀총각이 서로 관심 갖는 거 하나도 이상할 거 없지 뭐. 이모는 어떤 남자가 좋우?”

그야 동학을 제대로 하는 남자라야겠지. 지혜롭고, 부지런하고, 당당하고, 구차하지 않고, 마음 씀씀이가 자상하면서 통이 크고….”

“나두 나두…. 호호호” 

윤은 태희의 뺨을 토닥거려주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목의 염주를 저고리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다음주 금요일에 이어집니다. 언니 연화의 죽음에 슬픔을 초월하는 윤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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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 해월의 딸 용담할미(9회)-오빠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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