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말벌통과 이당 김은호 화백]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9. 9.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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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당 김은호 화백, 의제 허백련 화백, 운포 김기창 화백 ... 그러면 동양화가로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그분들 삶의 대부분은 가난과 배고품 그리고 궁색함의 나날 이었습니다. 제 부친 방원선생이 사제를 들여 그분들의 그림을 사서 이사람 저사람들에 선물하고 생활비를 집어주면서 한국동양화는 그 전성기를 맞아합니다. 방원 선생이 병환으로 칩거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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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화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해방후 화가들은 그야 말로 입에 풀칠하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이당 선생은 호구책을 마련하기위해 종로에 허름한 이발소를 운영하는데 그 이발소를 마련하는 비용을 방원선생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동안 그 이발소는 이당 선생댁의 생활을 담당하는 유일한 수입원이었습니다. 한국이 생활이 안정되고 소득이 올라가면서 이당 선생 사랑체에는 돈을 내고 그림을 배우러오는 이들이 많아져 그 이발소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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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종로에 있던 한옥에서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삿짐을 날라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부친 방원 선생이 친하게 지내던 동양화가 중에 한 분이어서 설날이면 세뱃돈 받은 인연도 있고 하여 부지런하게 이삿짐을 날랐습니다. 그런데 그 한옥 안쪽의 나무에 매달려 있던 호박 말벌 통을 두고 이삿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고민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어느 영감님이 그러는 겁니다. 


저 호박 말벌 통은 영물이라 잘 따서 옮겨가야 할 텐데 걱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땅히 어디로 옮겨갈 처지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젊은 사람들이 연기를 피워 봉지에 담아내서 불에 태워 처리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당 김은호 화백은 종로 한옥에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8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문득 호박 말벌 통이 영물이라고 걱정하던 이삿짐을 나르던 영감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천수를 다하고 가셨겠지만,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이당 김은호 화백과 함께했을 말벌들을 생각하니 이당 김은호 화백의 죽음과 그 호박 말벌 통의 소각이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미인도를 잘 그렸던 이당 선생은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는 애국적인 분이었지만 중일전쟁 관련 선무도인 금차봉납도를 그려 애석하게도 친일작가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로 남아있습니다. 그 분의 대표적인 제자는 나의 입만 보고도 대화가 가능했던 청각장애인 운보 김기창 화백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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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용우 선배의 내린천 농막 화장실 서까래 옆에 붙어 있는 말벌 통을 보니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이당 김은호 화백 종로 집에 있던 영물 호박 말벌 통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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