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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당 김은호 화백, 의제 허백련 화백, 운포 김기창 화백 ... 그러면 동양화가로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그분들 삶의 대부분은 가난과 배고품 그리고 궁색함의 나날 이었습니다. 제 부친 방원선생이 사제를 들여 그분들의 그림을 사서 이사람 저사람들에 선물하고 생활비를 집어주면서 한국동양화는 그 전성기를 맞아합니다. 방원 선생이 병환으로 칩거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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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화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해방후 화가들은 그야 말로 입에 풀칠하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이당 선생은 호구책을 마련하기위해 종로에 허름한 이발소를 운영하는데 그 이발소를 마련하는 비용을 방원선생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동안 그 이발소는 이당 선생댁의 생활을 담당하는 유일한 수입원이었습니다. 한국이 생활이 안정되고 소득이 올라가면서 이당 선생 사랑체에는 돈을 내고 그림을 배우러오는 이들이 많아져 그 이발소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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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종로에 있던 한옥에서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삿짐을 날라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부친 방원 선생이 친하게 지내던 동양화가 중에 한 분이어서 설날이면 세뱃돈 받은 인연도 있고 하여 부지런하게 이삿짐을 날랐습니다. 그런데 그 한옥 안쪽의 나무에 매달려 있던 호박 말벌 통을 두고 이삿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고민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어느 영감님이 그러는 겁니다. .
저 호박 말벌 통은 영물이라 잘 따서 옮겨가야 할 텐데 걱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땅히 어디로 옮겨갈 처지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젊은 사람들이 연기를 피워 봉지에 담아내서 불에 태워 처리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당 김은호 화백은 종로 한옥에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8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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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문득 호박 말벌 통이 영물이라고 걱정하던 이삿짐을 나르던 영감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천수를 다하고 가셨겠지만,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이당 김은호 화백과 함께했을 말벌들을 생각하니 이당 김은호 화백의 죽음과 그 호박 말벌 통의 소각이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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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를 잘 그렸던 이당 선생은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는 애국적인 분이었지만 중일전쟁 관련 선무도인 금차봉납도를 그려 애석하게도 친일작가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로 남아있습니다. 그 분의 대표적인 제자는 나의 입만 보고도 대화가 가능했던 청각장애인 운보 김기창 화백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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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용우 선배의 내린천 농막 화장실 서까래 옆에 붙어 있는 말벌 통을 보니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이당 김은호 화백 종로 집에 있던 영물 호박 말벌 통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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