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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타다 수녀님과 안드레아 신부님] .
아직도 종교를 우습게 생각하는 과학자입네 하는 나도 종교 신세를 참 많이 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신부님 수녀님들에게 받은 신세는 내 목숨이 몇 번은 구제를 받은 정도입니다. 특히 군시절 녹화사업으로 무릎이 결딴나서 대구통합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그곳 파견 보안대 중사로부터 나를 보호하여 준 분들이 군종신부님과 수녀님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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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대에서 부르지 못하게 신부님 비서처럼 데리고 다녔고 수녀님 봉사할 때에는 수녀님 비서 노릇을 했으니 보안대에서 닦달할 시간이 나질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박유식 안드레아 신부님이 계급은 무려 중령. 봉사오시는 옵타다 수녀님은 연로하셔서 내가 부축하며 신자 환자들을 찾아 성물도 주고 치유의 기도도 해주셨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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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옵타다 수녀님은 독일 귀족 집안의 따님으로 내가 불러드리는 린댄바움(보리수)을 그리도 좋아하셨습니다. 제2외국어를 독일어로 해서 사용할 틈이 없었는데 틈틈이 독일어 회화지도를 해주시면서 제대하면 독일 유학을 하라고 격려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원산수녀원 시절 공산당이 감금했던 지옥의 옥사독에서 살아오셔서 독재자에게서 내 목숨 살리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농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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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쁜 처녀에 눈이 멀어 6개월 만에 허겁지겁 퇴원을 해버려서 옵타다 수녀님과의 인연을 잊지는 못했지만, 복에 겨운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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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툿찡포교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관련 사진에 옵타다 수녀님 이름이 보였습니다. 옵타다 뮬러 수녀님은 마침내 주님의 세상에서 행복에 겨운 사랑과 은총을 받고 계신답니다. 세월이 이처럼 많이 흐르기 전에 한번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다음에 한국에 가면 병원 보안대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던 박유식 신부님께 술 한잔 대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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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박유식 안드레아 신부님도 은퇴하셨을 것이니 무척 외로우실 겁니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3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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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0 출처: http://online4kim.net/xe/bbs_pub/19217
대구 베네딕토 수녀원 벨트비나 수녀님 (Sr. M. Bertwina Caesar)
며칠 전 대구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을 방문했다. 꼭 뵐 분이 있었다. 96세의 독일 벨트비나 수녀님이시다. 한국명: 채인숙.
▲ 96세의 벨트비나 수녀님
만포진 남쪽 강계 산골에 북한이 설치 했던 비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지옥같은 세월을 가까스로 살아남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성직자 중에 유일하게 생존하고 계신 분이다. 이 "옥사독"이라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 1949년 함경도 일대에서 강제 체포해온 독일인 남녀 성직자 수도자들이 수용되어 인간으로서 형언할 수없는 고통의 강제 노동을 5년 가까이 겪었다. 그중 신부, 수사 15명과 수녀 2 명이 사망하여 그 곳 외딴 수용소 언덕에 묻히는 비극을 당했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서 독일로 송환 된 수녀와 수사, 신부님들은 망가진 몸을 고국에서 추스른 뒤 다수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와서 전쟁의 폐허 속에 산산이 부서진 한국인들의 심신을 가슴으로 안고 어우르며 일생을 봉사하였다. 벹트비나 수녀님은 그 중에서 생존해 계신 마지막 수녀다. 평양 교화소에서 전원 숨진 8명을 합치면 67명의 독일 성직및 수도자중 벨트비나 수녀님만 생존해있다.
보행이 다소 불편하고 귀도 어둡지만 독일 할머니는 정정하시다. 그 분은 아직도 소녀 같은 장난끼가 있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다 갔어! 나 하나 남았어!"
▲ 틀리지 말고 똑똑히 써야하네! 하며 직접 써주신 자기 소개서
그 밝은 표정은 벨트비나 수녀님을 생지옥이라는 단어가 무색한 "옥사독"의 강제 노동 수용소의 고통을 겪고 돌아오신 분이라고 믿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벨트비나 수녀는 1914년생으로 독일 슈바인푸르트 인근에서 태어났다. 1937년 독일 투찡 (Tutzing)에 있는 베네딕토 수녀원에 입문해서 수도자들의 길을 걸었다. 이모도 수녀로서 일생을 보냈고 언니는 같은 베네딕토 수녀원 소속으로 마닐라에서 사목하다가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수녀님은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었다.
잘 몰랐던 사실로서 벨트비나 수녀가 입회 할 당시 히틀러가 천주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네딕토 수녀원의 투찡 (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 모원 (母院)에서 앞으로 수녀원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여 아직 종신서원을 받지 못한 청원자들 중에 해외 포교를 원하는 수녀들을 서둘러 해외 파견을 했는데 벨트비나 수녀님도 원산으로 와서 종신서원을 했다. 종신서원은 수녀가 일신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의식으로서, 이 의식을 거친 뒤 정식 수녀가 된다.
어떻게 해서 한국 전쟁과 아무 연관이 없는 게르만 민족의 성직자들이 외부 세계와 차단 된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5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가? 북한의 공산 집단이 조선인들의 정신을 오염시킨 잘못 된 사상을 주입시켰다는 이유로 산골에 가두어 두고 죽음의 강제 노동을 5년간이나 시켰기 때문이다. 동족상쟁이라는 6.25 전쟁을 도발한 북한 집단은 정말 그 잔인성에서 이해가 가지 않은 짓들을 해댔다.
벨트비나 수녀님은 고령에다가 귀가 어두워서 긴 대화를 가질 수가 없었다.
▲ "원산 수녀원사"의 저자 베로니카 이정순 수녀.
여기서부터 대구 베네딕토 포교 수녀원의 베로니카 이정순 수녀님이 1989년에 펴낸 "원산 수녀원사"를 참고한다. 아울러서 베로니카 수녀님이 제공한 겔투르드 링크 수녀님의 자서전도 참조하였다. 벹트비나 수녀님은 한국어가 유창해서 북에서 감시원들과 억류 독일 성직자들의 통역을 맡아 했었다. 베로니카 수녀의 "원산 수녀원사" 집필시 독일 자료의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교편을 잡다가 성직에 입문한 베로니카 이정순 수녀님은 미국 유학도 갔다 오고 서울의 베네딕토 수녀원이 설립한 농아 교육원 "애화학교"의 교장을 7년간 역임하였다. 베로니카 수녀가 방대한 자료와 수많은 증언을 수집하고 집필해서 1989년 펴낸 이 "원산 수녀원사"는 김수환 추기경이 발간사를 썼다. 내 생각에 이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치밀하고 체계있게 정리해서 담은 종교 역사서는 한국에서 좀처럼 찾아 보기가 힘들다.
1922년 독일 성 오티리엔 수도원 (St. Ottilien Archabbey)에서 파견한 성직자들은 함경남도의 덕원에 한국의 수도원을 열어 10년 만에 놀랄만큼 훌륭히 키웠다. 신학교,성당, 농장, 학교, 인쇄소, 포도주, 주조장 (세례용)등이 이 덕원 수도원에서 바삐 돌아갔다.
내가 아는 원산 출신 카타리나 할머니라는 분이 계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시다. 처녀 시절 덕원 수도원에 가보신 카타리나 할머니는 이 수도원이 유럽의 오래 된 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이들 만큼 시설이 좋았다고 회고했었다. 성 오티리엔 (St. Ottilien) 성직자들이 조선 파견 10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이곳은 현재 북한의 농과 대학이 들어서 있다.
수도원이 급성장하자 덕원 수도원의 샤우어 (Abbot-Bishop Boniface Sauer, OSB, Dec 10, 1877 - Feb 7, 1950) 주교는 독일에서 자매 관계인 투찡의 베네딕토 수녀원 (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에 수녀 파견을 요청 했다. 수녀 청원자들이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젊었던 투찡 모원[母院]은 해외에 포교 수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네 명 파견의 여비가 없어서 4년을 보낸 끝에 겨우 여비가 마련되자 해외 선교 희망자를 선발하고 그 중 네 명의 수녀를 먼 극동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파견했다. 1925년이었다. 여객선을 타고 먼 바다를 항해해서 이국 조선에 온 네 명의 수녀들은 원산의 소박한 민간 가옥에서 포교의 첫 발을 내디디었다.
▲ 덕원 수도원, Territorial Abbacy of Tokwon.
수녀원도 수도원같이 빠르게 성장하여 함경남북도 여러 곳에 분원도 열고 원산 수녀원에 해성 학교와 호수 천신학교도 문을 열었다. 벨트비나 수녀는 원산 수녀원이 함흥에 문을 연 작은 분원의 분원장을 했었다. 이 겔투르드 수녀는 운명에 따라 지옥의 수용소에서 수녀들을 이끌고 감싸고 돕는 대표가 된다.
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일제하에서도 없던 만행이 시작되었다. 여러 시설이 강제 징발로 빼앗겼다. 그들은 함흥 수도원을 접수하고 그들의 숙소로 사용했다가 교황청의 개입으로 다시 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독일과 조선 수녀들은 난행을 일삼는 소련병사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소련군은 1948년 11월 철수하였다. 그러나 재난의 비극은 다음 해에 몰아 닥쳤다.
1949년 5월 9일 밤. 함경남도 보위부장 김석형의 지휘로 함경남북도 일대의 전 수도원과 수녀원이 일제히 습격을 받아 체포와 구금의 선풍이 불었다. 모든 종교인은 종교 시설에서 추방 되었다. 그리고 전 시설이 폐쇄 되고 압수 되었다.
이 김석형이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울프 독의 블로그에서 소개 했었다. 이 자는 1960년 남파 간첩이 되어 서울로 침투했다가 체포 되어서 30년 넘는 수형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북한으로 돌아갔다. Click! 북으로 간 노간첩 (비전향 장기수 김석형) 이야기
▲ 원산 교구 덕원 수도원의 신부와 수사들, 중앙은 샤우어 주교, 신 보니파시오 압파스 주교.
김석형이 산산조각을 낸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이 남한으로 피난 와서 재건한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과 대구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이 있는 대구 소재 교도소에서 10년간을 복역했는데 대구 지역 성직자들은 이를 몰랐었다.
조선인 성직자는 추방되었고 독일 성직자는 모두 교화소에 수감 되었댜. 독일 수녀들은 함흥 원산 평양등의 교화소에 수감 되었고 샤우어 대주교와 신부들은 평양의 형무소로 끌려갔다. 여기에 함흥 분원장이었던 벨트비나 수녀님이 끌려갔던 함흥 교화소의 모습을 보자.
나는 분원의 다른 세 명의 독일인 수녀들과 함께 끌려갔다. 보위부는 매일 한 명씩 불러내서 수녀원 지하에 무전기를 설치하고 바티칸과 비밀교신을 하며 간첩 질을 하지 않았냐는 혐의로 거친 심문을 받았다. 감방의 넓이는 1m, 세로 3m 정도였다. 죄수들이 먹는 음식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만든 밥 덩어리와 국이라고는 소금물에 가끔 배추 잎이 떠 있는 정도였다. 약 두 달간 이 함흥 교화소에 있는 동안에 고기라고는 단 두 번 생선을 먹은 것 뿐이었다. 걸레는 너무 닳고 더러워서 걸레질도 잘 되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벼룩 빈대등이 감방을 가득 살고 있었고 입감할 때 나누어 준 이불에도 벼룩이 득시글 거렸다. 벼게는 베고 자기 힘든 목침이었다. 방 한구석의 변기는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분뇨가 가득차면 2주에 한번 씩 건물 밖 큰 분뇨 통에 버렸는데 벨트비나 수녀는 오히려 이 시간이 기다려졌다. 왜나하면 바깥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벨트비나 수녀는 50여일 간의 함흥 교화소 수형 생활을 하고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평양에는 60여명의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다 모였다. 이들의 처분 방침이 서서 평양에 집결시킨듯 했다. 재판이 열렸다.
그들이 범죄인으로 선고한 8명의 독일인 성직자와 6명의 조선인 신부들은 그대로 평양 교화소에서 복역하도록 억류 되었다. 그 죄목이라는 것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
엄 다고베르트 엔크 (P. Dagobert Enk) 신부는 밀주를 제조했다고 해서 범죄자로 분류되었다, 5년형.
성당에서 전례용으로 쓰는 포도주를 밀주로 보았으니 세계가 놀랄 일이다.
운전기사를 했던 그레고르 (Br. Gregor Giegerich) 수사는 체포 압송될 때 금지된 카메라를 소지했다고 유죄를 인정 받았다, 5년형.
덕원 신학교 루퍼트 (P. Rupert Klingseis) 교수 신부는 "사후 영의 불멸설"이라는 교재를 집필했는데 이것이 공산주의를 경멸했다고 유죄를 선고 받았다, 5년형.
▲ 단기간에 몰라보게 성장한 원산 수녀원.
내가 이 블로그에 소개했던 함남 보위부장 김석형이, 함경도 일대 천주교의 뿌리를 뽑아 버릴 때 라틴어로 쓰여진 위의 서적을 탄압의 핑계로 사용했다.
7년형의 중형을 받았던 샤우어 (Abbot-Bishop Boniface Sauer, OSB) 대주교는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1949년 2월 평양 교화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5년형의 신학교 교수 루퍼트 신부도 이어서 선종 (천주교에서 말하는 사망) 했다. 다행이 그들의 유해는 북진한 유엔군을 따라서 평양에 들어갔던 인사들에 의해서 남으로 운구 되었다. 다른 6명의 독일인 신부와 수사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생사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다. 단지 UN군 북진 때 북한 공산당에 모두 처형당했으리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무죄로 판결된 성직자들은 석방 된 것이 아니었다.
신부들과 수사들, 그리고 수녀들은 교화소장으로부터 지방의 노동 수용소로 잠시 이동해야 하고 이 수용소는 경치가 매우 좋은 곳에 있다는 감언이설을 들었다. 순진한 독일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그 말을 믿었었다. 이제 덕원 수도원처럼 경치 좋은 곳에서 살 수가 있다고 한 말은 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느꼈다. 1949년 8월 5일 밤 독일 성직자들은 평양역서 야간열차를 타고 미지의 곳으로 출발했다. 8월 6일 기차역도 아닌 곳에서 내려라 하는 지시가 있었다. 일행은 다시 트럭으로 이동 하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전천면 별하리"라고 하는 곳이었다.
▲ 원산 수녀원 첫 한국인 수련자들과 함께 한 보니파시오 주교. 수녀원이 산산조각이 나던 1949년에는 1937년에 원산에 온 겔투르트 링크 수녀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높은 산길 밑에서 내린 가족들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너무 가팔라 수레가 올라가지 못하고 소가 끄는 썰매가 사용되었다. 이 썰매도 나중에 성직자들이 다 만들어야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이고 높은 분지에 있는 마을 이었다. 산골 주민들은 한 명도 안 보이고 10여채의 빈 가옥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 산골 주민들은 모두 추방 당하고 몇 채의 집은 감시원들이 사용했다. 여기에 끌려온 독일인 수도 가족은 신부 17명, 수사 22명, 수녀 20, 합계 59명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중에 임마쿨라타 (Sr. M. Immaculata Martel) 수녀는 독불 혼혈로서 국적은 프랑스였지만 독일인으로 살았었다. 4년 뒤 이들 중에 42명만 살아 독일로 돌아 왔다.
독일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끌려온 그 곳이 어느 곳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수도원 가족들은 쫓겨난 주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에서 반쯤 찢어진 편지 봉투가 발견 되었다. 한자를 아는 신부들이 한자로 써진 그 봉투 겉면 주소에서 구슬 옥(玉)자와 모래 사(沙)자를 구별해서 읽을 수가 있었다. 두 글자를 합쳐서 자신들이 끌려온 지명 불명의 계곡을 "옥과 모래의 언덕"이라고 부르기로 했던 "옥사덕"이 나중에 "옥사독 (Oksadok)"으로 변화 된 명칭으로 고착 되었다.
평양 교화소는 이미 두 달 전 수감중인 에우제비오 로마이어 (Br. Eusebius Lohmeier) 수사를 호출해서 60명 정도가 살 집을 설계 하게한 후 여러 수사들을 이곳으로 파견해서 집 짓는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사들이 6월 25일 도착해서 화전민 외양칸을 개조한 숙사에서 먹고 자며 수도원 가족과 수녀원 가족들을 위해서 긴 집을 지었다. 오랜 교화소 생활과 강제 노동에, 선발대중 1명의 수사가 버티지 못하고 본대가 도착하기 전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 원산교구장이며 덕원 수도원장 샤우어(Abbot-Bishop Boniface Sauer, OSB) 주교, 1950년 2월 평양 교화소에서 선종.
그들 수사들이 지은 집만으로는 주거 공간이 태부족이었다. 식구들은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해서 충분한 공간의 집부터 더 만들었다. 기존에 산촌 주민들이 살던 10채의 집을 해체해서 그 자재를 사용해서 집단생활에 맞는 집을 지어갔다.
그들은 자기 숙소 뿐만 아니라 소장과 감시병을 위해 집을 지어야 했다. 추위가 닥쳐오자 공사는 추위로 인하여 난공사가 되고 말았다. 신부, 수사, 수녀들은 1949년 겨울이 바로 눈앞에 있는 11월 달까지 엄동설한에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 남녀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여러 집을 지었다.
건물 공사는 강제 수용소 생활 4년간 내내 계속 되며, 그 중노동으로 여러 사람을 저 세상으로 가게 했다. 새로 지은 부엌에 세 개의 큰 솥을 걸고 한국식 온돌을 놓아 화전민 집보다 나을 바 없는 집이 완성되었다. 조명을 위한 초나 석유가 보급 되지 않아서 "옥사독" 식구들은 화전민 같은 소나무 관솔을 사용해서 조명을 했다. 덕분에 남녀 식구들은 자고 나면 모두 콧구멍이 까맣게 변했다. 이 관솔 조명은 이들이 "옥사독"을 떠날 때까지 내내 사용해야 했다.
성직자들에게 푸른 죄수복 같은 것이 한 벌씩 지급 되었지만, 이 평안도 북부 산악지대의 추위에 버틸 수가 없었다. 감시원들은 어디서 북한군들이 입다가 버린 걸레 같은 옷을 주워 와서 던져 주었다 얼어 죽기 싫으면 이거라도 알아서 걸치라는 것이다. 이 넝마를 세탁을 해야 하는데 비누같은 것은 주지도 않았다. 바느질 하는 시게벨타 수녀는 나무를 태운 재를 이용해서 아쉬운대로 이 넝마를 세탁하고 수선해서 몸 치수가 맞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넝마지만 얼어 죽는 것보다 나았다. 신발 같은 것은 지급이 없어서 짚신을 만들어서 신어야 했다. 주방에 성냥도 없어서 힘들게 만든 불씨를 잿 속에 묻어놓고 1년 365일 간 보존해야 했었다.
식사는 최악이었다. 주는 것은 옥수수, 콩, 조, 수수 따위였고 가끔 감자가 특식으로 지급 되었다. 독일 수용자들은 봄이 되면 한국인들이 하듯 산과 들에서 먹을 수 있는 풀을 뜯어서 먹기도 했다. 식사담당 옵타다 수녀가 평양 교화소를 떠날 때 소장이 특식으로 제공한 토마토의 씨앗을 모두 모아 간직 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렇게 해서 "옥사독"에서 키운 토마토가 즐거운 간식거리가 되었다. 농장 수녀로 지명 되어서 이산 저산 다니며 양치기를 했던 아르사시아 수녀는 살구나 머루 다래들의 야생 과일을 따와서 단것에 주린 수녀들의 입맛을 맞추어 주었다. 아르사시아 수녀가 따온 머루로 미사용 포도주를 만들고 곡식 자루에서 건진 밀알을 모아 밀밭을 가꾸어 미사용 제병을 만들어서 미사를 거르지 않았다.
▲ "옥사독" 건물들, 독일 성직자 가족을 몰아대서 지은 것들이다.
60여명의 수도가족에게 단 한 마리의 닭이 주어진 일이 있었다. 다 나누어 먹을 수가 없어서 닭요리는 산에서 힘든 일하는 수사들에게 보내졌다. 이 닭고기를 배달했던 아르사시아 수녀는 너무 고기가 먹고 싶어 돌아오는 길에 이 양동이에 물을 부어 다시 끓여 먹었다.
수도원 가족들은 쉬지 않고 농장일과 건물을 짓는 일을 해야 했다. 남녀 성직자들은 자기들이 사는 더 큰 건물과 부엌, 병실은 물론 자신들이 가두어질 수용소 감옥까지 건축했다. 이 정도는 약과고 감시원들과 그 가족들이 거주할 독립가옥까지 지어야 했다. 얼마나 지독한 노동인지 에른스트 지이베르츠 신부가 증언을 들어본다.
나는 집을 지을 때 진흙과 쇠똥 말린 가루, 잘게 썬 볏짚에 물을 부어 이기는 일을 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흙 속에 들어가서 맨발로 진흙을 이기고 있으니 발이 얼어서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 나는 작업 중에 진흙위에 막대기와 같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일은 며칠이 지난 후에 다시 일어났다. 계속되는 중노동을 신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야누아리오 수사님이 감시원에게 "이 분은 도저히 일을 계속하기 힘드니 쉬게 해주세요." 했지만 감시원은 한마디로 안 된다고 거절했다. 나는 나무를 하나 베는데도 열 번을 더 넘어졌다. 나는 젊은 감시원에게 가서 "선생님"이라고 부른 뒤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흐르고 울음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도저히 일을 못하겠습니다."하니, 그는 나를 쳐다 보지도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소장을 직접 만나라는 소리에 소장에게 막상 가서 앞에 서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눕게 되었고 여러 달 동안 몸이 부은 상태로 심하게 앓았다.
농사일 역시 지독한 중노동 이었다. 독일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옛 한국 화전민과 꼭 같은 방식으로 가파른 산비탈 숲을 불태우고 남은 그루터기를 제거한 뒤 소로 이랑을 파서 옥수수, 감자, 조 등을 심어야 했다. 소가 이랑을 일구면 가파른 산비탈에서 구르지 않게 남녀 수도원 가족들은 목에 멜빵을 멘 목판에 담긴 옥수수 알을 네 발로 기다시피 이 이랑에 옥수수를 심었다.
▲ 평양 교화소및 "옥사독" 선종 Missionary Benedictines 성직자와 수도자들.
너무도 힘든 일이어서 소들은 밭갈이를 하다가 더는 못하겠다고 사지를 뻗고 밭고랑에 누어 버리기도 했다. 소가 중노동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수도원 가족들은 아침마다 가마니에 절반쯤 채운 퇴비를 직접 등에 등짐을 해서 메고 목을 제치고 올려다 보아야하는 산언덕을 기어올랐다. 소를 이렇게 아낀 탓에 농사일을 위해서 처음 지급받은 한 마리의 암소는 성직자들이 "옥사독"을 떠날 때 무려 열네 마리로 불어났다. 일이 없는 농한기에는 숯을 굽고 새끼를 꼬는 중노동을 했다.
벨트비나 수녀는 한 시간에 7미터나 꼬는 실력을 발휘해서 감시원들로 부터 7미터 동무라는 별로 반가울 것도 없는 칭찬을 들었다. 이 정도 실력은, 그 무렵 새끼 꼬기에 경험 많은 시골 농부들도 따라하기 힘든 수준이다
아무런 죄도 없이 심심산골로 내몰린 이 수도원 가족들을 더 죽음의 고통 속으로 내몬 인간이 있었다. 정모라는 내무서 소속 대위였다. 북한은 경찰도 군대와 같은 계급을 쓴다. 그는 1950년 4월10일 부임해왔다. 그는 3년 6개월간 이 "옥사독"에서 발생한 남녀 수도원 가족이 겪은 시련과 죽음의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잔인하기가 새디스트 (변태 가학자) 수준 이상 이었다. 이 자는 아버지 같은 연장자인 수도원 가족들에게 욕을 함부로 하고 학대를 했다. "이 개새끼들아 빨랑빨랑 걸으란 말야!”
독일 성직자들이 세월이 오래 지나도록 기억하는 이 쌍욕을 그는 버릇처럼 서슴치 않았다. "옥사독" 가족은 이 자에게 살쾡이라는 별명 (Schleiche)을 붙여 주었다. 감시원들도 살쾡이를 따라서 자기 아버지 나이 또래의 수도원 가족들에게 함부로 반말과 욕지거리를 해댔다.
1952년 6월 28일 선종 (천주교에서 말하는 사망)했던 안 아르눌프 쉴라이허 신부 (P. Dr. Arnulf Schleicher, 1906 - 1952, 덕원 수도원 부원장)는 마지막 숨을 넘기기 전, 감시원들의 욕설을 듣는 고통이 굶주림과 중노동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유언같은 호소를 남겼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고 시키는 강제 노동에만 매달리고 있던 수도원 가족들은 그 해 10월 23일, 갑자기 수용소에 나타난 북한군 군관이 내모는 대로 만포진 교화소로 이동했다. UN군의 북진에 따른 피난이었다. 만포진을 거친 이들은 27일 두만강 건너 중국 집안으로 이동했다. 극한 추위속에 "옥사독" 식구들은 집안 정거장 앞마당에서 이틀간 노숙을 했다. 집결해 있으니 주민들이 몰려와서 미제 포로 놈들이 왔다고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그들이 독일인 천주교 성직자들이라고 하자 비로소 모욕을 멈추었다. 그래도 솜옷을 입은 독일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그런대로 서로 부등켜 안고 추위와 싸워서 버티어 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얇은 전투복만을 입고 끌려와 같이 노숙한 수백명의 국군 포로들은 낮에는 욕과 돌팔매질을 당하고 밤이면 몇 명씩이나 얼어 죽어 아침이 되면 그 동사체들이 들것에 실려 나갔다. 비극적인 그 모습을 보고 독일 가족들은 공포와 슬픔을 견디어야 했다.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온몸이 얼어 붙은 벨트비나 수녀가 거의 사경 (死境)을 헤맬 정도로 위독 했었지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만포진으로 돌아와서 다시 교화소에서 생활 했다. 이 곳에서 카누토 신부가 선종했다. 그는 백작 가문 출신의 귀족이었다.
▲ "옥사독" 거족들의 생존을 위한 물품들. 수녀원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북한 당국은 이들이 북한을 떠나기 전에 소지품 검사를 해서 수용소와 연관 된 것은 작은 물건이라도 모두 압수했었다. 이 정도나마 건져온 것이 다행이다.
11월 12일 미군의 네이팜 폭격이 교화소에 가해지자, 다시 관문리로 이동해서 가건물과 어두운 방공호에서 생활 하다가, 다시 이동하여 엉성한 초막 같은 건물에서 겨울을 지내야 했다.
남성 수도원 가족들은 모두 동상에 걸려 이중에 얼어 죽거나 발가락이 빠지는 중상자까지도 나왔다. 벌써 천지를 얼어 붙게 만드는 이 압록강변의 생 얼음지옥에서 그레고리오 신부 힐라리오, 수사 솔라노가 저 세상으로 갔다. 땅을 파는 도구도 없고 땅 깊숙이 얼어 붙어 있어서 할 수없이 이들을 거적에 싸서 눈 속에 묻을수 밖에 없었다.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다. 묘지 근처 동굴에 서울에서 납치해간 외국인 종교인들이 있었는데 3월이 되고 눈이 녹자, 여우가 마구 헤친 시신의 뼈를 보았다. 뼈가 너무 길어 한국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매장 된 독일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것이었다.
관문리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는 중에 남녀 가리지 않고 어두운 한 방에 가두어 놓고 남녀 공용의 소형 용변기 하나를 넣어주기도 했다. 목욕도 못하고 갇혀 있어서 거지꼴이 된 수도원 가족들은 전황이 공산 측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1951년 1월 17일, 86일간의 지옥생활을 끝내고 네 명의 가족을 잃은 채, 다시 "옥사독"으로 돌아왔다. 강제 노동소이던 "옥사독"이 이 때는 이들에게 마치 고향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고통은 계속 되었다.
먼동이 뜨면 기상 하여 노동을 시작하고 어두어지기 시작 해야 끝나는 10-11시간의 강제노동이 이어졌다. 아침 5시와 동시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도저히 일어나지 못해 들어 누워 있으면 감시원들이 들어와 "죽으려면 밖에서 죽어!" 하며 내몰았다. 영양 부족으로 여러 환자가 생겨 밤이면 이들이 앓는 소리로 잠을 이루기 힘든 밤도 여러 번 있었다. 견디기 힘든 격한 노동을 할 때는 중간 중간 주어지는 5분간의 휴식시간에 밭둑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옥사독" 가족들의 모습을 볼 때도 있었다. 겨울동안 장작을 패다가 경비원 숙소에 가지런히 쌓아 놓는 고통스러운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장작패기는 그래도 쉬운 노동이라고 나이 70 먹은 임 갈리스트 수사와 74세의 야누아리오 수사에게 주어졌다. 이런 고령자들에게도 중노동은 예외가 아니었다. 수용소 간부들의 마나님들은 미안해 하기는 커녕 장작을 마구 처때고 더 가져 오라고 지시했다.
원체가 식물류만 지급되었던 지라 육류를 많이 먹던 독일인 가족들은 육류에 무척 굶주려 있었다. 이들은 감시인들이, 고기는 먹고 버린 소가죽에 붙은 기름기를 긁어서 한국식 곰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한번은 기르던 양이 병으로 죽어서 묻은 일이 있었다. 수녀들과 수사들은 의사 디오메데스 수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밤에 몰래 이 양고기를 파내 끓여 먹기도 했다. 정말 먹을 것이라는 면에서 "옥사독" 식구들은 인간의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다.
이들 독일인 수도원 가족이 그래도 이 지옥에서 다수가 살아 남았던 것은 이들이 가진 신앙의 힘과 단체 생활에서 노동에 단련된 이외에, 이 "옥사독" 식구들 중에 중요한 생존 기술을 가진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디오메데스 (Sr. Diomedes Meffert OSB. 1909 - 1998) 수녀는 의사 였다. 그 녀가 없었다면 병에 걸려 숨을 거둔 수도원 가족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부족한 약품과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의료도구로서 그 녀는 환자들을 힘껏 구제해 냈다. 노동을 하다가 중상을 입거나 동상을 걸린 환자들은 물론 리바니아와 에메릭 수녀같은 폐결핵 환자가 살아 돌아온 것은 오로지 이 디오메데스 수녀의 활약에 힘 입은바 컸다.
1952년 1월 30일 비토 수사가 수도원 가족들을 위해, 감시원 전용 창고에서 옥수수 한 바가지를 담아 가지고 나오다가 발각 되었다. 그는 심한 욕설을 얻어 먹고 내복만 입은 채 감옥에 열흘 넘게 감금되었는데 동사 일보 직전에 감시원에게 발견되어 디오메데스 수녀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다.
▲ 강제 노동소 수형 생활중 손으로 짠 자켓. 그 부족한 재료로도 맵시를 낸 것이 신기하다.
또 있다, 바느질 방을 담당했었던 시게벨타 수녀는 수녀가 되기 전, 독일 바이에른 주의 숙녀들에게 양장을 만들어 주던 솜씨 좋은 양재 전문가였다. 보통, 일상생활과 같이 자유자재로 의류를 구할 수 있었다면 아무 걱정이 없었겠으나, 수도원 가족들에게는 내복도 지급이 없었고 겨울철에는 장갑이나 양말 지급도 없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것 대신에 광목천이 지급 되어서 알아서 만들어 입으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거친 노동으로 각 남녀 식구들의 옷은 수시로 해어져서 수선을 해야 했다. 그 과중한 일을 그 녀는 몸이 약해서 중노동을 못하는 에와 수녀의 도움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완수 했다.
수녀들은 펄프와 방직 찌꺼기 (비날론 폐 섬유?) 에서 실을 뽑아 천을 만드는 강제 노동도 했는데, 손으로 만든 물레로 실을 짜서 베틀로 천을 짰다. 도구들은 수사들이 창의력을 발휘해서 만든 것이다. 이것들은 북한군의 내복으로 공출되었다. 일부는 살쾡이가 착복했다.
시게벨타 수녀는 여기서 남는 실을 살쾡이의 눈을 피해서 조금씩 남겨 모아서 식구들에게 내복을 만들어 입혔다.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수십 마리의 양을 공급 했는데, 이 털을 한 오라기라도 손을 대면 살쾡이는 미친개처럼 짖어대며 난리를 쳤다. 한 올이라도 손대는 자는 수용소 감옥행이 당연했다.
양치는 임무를 담당한 아리사시아 수녀는 양들을 찔레나무들이 있는 덤불 사잇길로 통과하여 덤불에 양털이 많이 걸려 빠지도록 했다. 이 덤불 가시에 걸린 양모는 몰래 수거 되었다. 수녀들은 이 양모를 수사들이 버드나무로 만든 뜨개 바늘로 뜨개질을 하여 장갑을 만들었다. 시게벨타 수녀가 없었으면 겨울에 얼어 죽는 동사자들은 더 많았으리라 .
또 있다. 취사 담당 옵타타 수녀다. 그 녀는 4년 넘게 "옥사독"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담당했다. 옥수수나 콩, 수수들 수준의 잡곡만 지급 되었는데도 그 녀는 머리를 써서 항상 좀 더 맛있는 먹거리를 만들어 주도록 노력했다. 원산 수녀원장 겔투르드 (Sr. Gertrude Link OSB) 수녀도 빼놓을 수가 없다. 이 여장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수녀들을 잘 아우르며 보살폈다.
▲ 수녀들의 단결력을 유지하며 단합의 구심점이 되었던 겔투르드 링크 (Sr. M. Gertrud Link OSB) 수녀.
항상 수녀들의 편에서 북한 당국에게 항의하고 탄원하며 요구를 관철 했었다. 난폭했던 살쾡이도 겔트루드 수녀에게는 상스러운 말을 못하고 존중 했었다.
남자 식구들을 잘 이끈 탁 파비안 신부도 있다. "옥사독" 남자 식구들 중에 덕원 수도원 목공소에서 일하던 솜씨 좋은 일데폰스 플뢰칭거 (Br. Ildefons Flotzinger, 1878 - 1952) 수사와 에우세비우스 수사, 목공예가 야누리우스 수사, 각종 철물을 만들어 내던 대장장이 일데폰스 수사도 있었다. "옥사독" 식구들이 만든 벽을 매끈하게 바르는 미장이 엥엘하르트 수사등이 있었다. 이들의 작은 솜씨들이 모이고 합쳐져 식구들이 이 지옥에서 살아 나오는 기적 같은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옥사독"은 생활환경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더 버티지를 못하고 세상을 뜬 남녀 성직자들이 많이 나왔다. 사람들을 이렇게 비인간으로 학대하니 신앙생활과 수도생활로 단련된 이들도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들 "옥사독" 식구들은 나이가 50이 넘은 고령자들이 많았었다.
후에 남한에서 활동했던 많은 신부들을 길러냈던 이 신학교 교장 노 안젤모 로머 신부 (P. Anselm Romer, 1885 - 1951) 는 1951년 11월 9일 "옥사독"에서 선종했다. 무려 17명의 남녀 성직자들이 이 이국의 산골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제일 먼저 숨을 거둔 식구는 이 산골에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와서 집을 짓던 선발대중의 한 명이었던 베드로 게르네르트 (Br. Petrus Gernert, 1882 - 1949) 수사였다. 그는 식구들 주류가 도착하기 전 1949년 7월 2일에 사망하여 숙소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장례를 치른 최초의 식구가 되었다. 북쪽 만포와 관문리에서 세상을 뜬 네 명의 남자 성직자들을 빼놓고 11명의 남자 성직자들이 세상을 떠서 "옥사독"의 언덕에 매장 되었다.
이 산골에서 숨을 거둔 두 분의 수녀들의 임종 이야기는 특기 할만 하다.
먼저 세상을 뜬 수녀는 원산 수녀원 부원장이었고 시게벨타 수녀님처럼 양재 솜씨가 좋았던 에바 (1899년생, Sr. M. Eva Schütz) 수녀였다. 강제노동 수용소에 끌려오기 전 그 녀는 소련군 장교 부인들의 옷을 멋있게 만들어서 소련군의 탄압으로 옹색해진 수녀원 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 Sr. M. Eva Schütz
에바 수녀는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아 "옥사독" 산골로 끌려올 때 걷지를 못해 소를 타고 올라왔었다. 강심제로 버티며 바느질 방에서 돕고 있었지만, 1949년 성탄 때부터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심장이 쇠약한 터에 갑자기 심한 부종 (浮腫)이 왔다. 이 병, 浮腫을 "옥사독"의 여러 식구들이 앓다가 죽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옥수수만 먹이는 북한의 강제 노동소에서 많이 발생한다는 "펠라그라" 병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말이 병석이지 침대도 없고 침구도 베게도 없으며 가마니를 깐 맨 바닥 이었다. 살아 남기위한 그 녀의 몸부림은 보기에도 안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 녀는 병든 몸을 이끌고 냇가에 나가 물에 몸을 담그는 물 치료법도 해보고 이 약초 저 약초 써서 치료도 해보았다. 효과는 조금도 없었다. 다리가 퉁퉁 붓자 그 녀는 산죽 가지로 찔러서 물을 뽑았는데 물은 일주일 동안 계속 흘러 나왔고 일 주일 뒤 2차 감염까지 와서 1950년 8월 10일 저 세상으로 갔다. 그 녀는 최후를 예감한 날, 원산 수도원장 겔투르드 수녀를 불러 자기 옆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가냘픈 숨을 쉬다가 몇 시간 후에 눈을 반쯤 뜬 채 숨을 거두었다.
프룩투오사 게르스트 마이어 (1888년생, Sr. M. Fructuosa Gerstmayer OSB) 수녀는 원산 수녀원이 빈민층을 위해서 열었던 시약소의 소장 이었다. 간단한 진료도 할 수 있었던 이 시약소는 수 없는 서민들을 질병에서 구했었다. 사실 지금 대구의 대형 파티마 병원은 이 시약소가 모체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넘어서 말하자면, 그 녀는 대구 파티마 병원의 초기 원장이라 할 수있다. 어렸을 때 원산에 사시던 카타리나 할머니는 이 시약소가 수녀원이 세운 "해성학교" 앞에 있었으며 원산 시민들에게 "수녀 병원"으로 잘 알려져서 손님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카타리나 할머니는 이곳에 가끔 가보았는데 발끝까지 오는 길고 하얀 수녀 복을 입고 허리춤에 긴 묵주를 찬 독일 수녀 여러명이 바삐 일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 중 한 명이 프룩투오사 수녀님 이었으리라 생각 된다.
▲ Sr. M. Fructuosa Gerstmayer
그 녀는 함경남북도 일대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었고, 의사 수녀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인기 있었던 수녀였다. 1951년 8월 가벼운 뇌졸중을 일으켜 종부 성사를 받고 난 다음, 좀 회복의 단계로 들어갔기에 바느질 방의 보조 소임을 하다가, 1952년 9월 15일 밤에 잠자듯 저세상으로 떠났다.
살쾡이는 이렇게 중노동으로 죽어가는 "옥사독" 독일인 성직자들이 선종할 때마다 "쓸모없는 사람은 빨리 죽어 버려야한다!"라는 비인간적인 냉혹함을 내뱉곤 했다. 사망한 시신을 함부로 넘어 다니는 몰상식한 감시원도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수용소 근처에 얼씬도 안 해서 독일인 식구들은 도통 바깥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53년 5월 악마 같은 정 소장이 이임하고, 김 소장이라는 사람이 새로 부임했다. 그는 매우 인간적 이었다. "옥사독"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고 마구 내몰아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감시원들에게도 연장자들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지시 하기도 했다. 수녀들은 3년 반이 넘는 잔악한 대우만 받다가 인간적인 취급을 하는 그가 고마워서 예쁜 털장갑을 떠서 선사 했다.
그러나 "옥사독" 식구들은 그가 원래 살쾡이와 달리 품성이 착하기도 했지만, 이미 독일 억류자들에게 잘 대하라는 상부의 지령이 내려 간 것은 몰랐었다. 보급도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8월이 되자 하루가 멀다 하고 상공을 휘젓던 미 전투기들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늦게까지 일을 할 때 산 고개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마을에 전깃불이 반짝이는 것을 보기도 했다. 등화관제가 해제 되었다는 뜻이다. 뭔가 변화가 오고 있는 것 같았다.
9월 어느 날 감시원에게 부탁했던 곡식 종자가 봉투째 배달 되었다. 종자 봉투는 중국 신문으로 만든것 이었다. 한문을 아는 한 수도원 식구가 이를 읽고, 이 중국 신문이 전쟁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과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옥사독" 식구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드디어 1953년 11월 15일, "옥사독"의 독일인 식구는 전부 본국 귀환을 통보 받고 사흘 뒤인 11월 18일 "옥사독"을 떠났다.
▲ 드디어 독일로 귀국한 독일 성직자 가족, 수녀들이 입은 옷들은 북한이 귀국 전 양재 기술자를 시켜서 만들어 준 것으로 5년 가까운 강제 노동에 대한 유일한 노임이다. 뒷줄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벨트비나 수녀님이다.
수녀원장 겔투르드 수녀는 자신들이 목숨을 던지는 전력을 다해 가꾸어 놓아 이제는 풍요의 골짜기가 된 "옥사독"을 떠나는 아쉬움을 그녀의 자서전에서 짧게 언급 했다.
성직자들은 순안의 한 초대소로 옮겨 대우를 잘 받고 영양을 공급하여 모두 보기 좋게 살이 오르자 1954년 1월 7일 기차로 북한을 떠났다. 북한 관리는 이별사로 한마디 했다.
"지금까지의 여기서 겪은 고생에 대한 섭섭함을 잊으시고, 앞으로 조선 독일 민족의 친선을 위해서 노력해 주시오."
그가 살쾡이가 그 긴 세월 어떤 잔인한 학대를 했는지 알았더라면 그런 뻔뻔한 소리는 얼굴이 붉어져서도 못했으리라. 그들은 긴 여행끝에 만주와 소련을 지나 동독에 도착하였다. 동독에서 버스로 바꿔 타고 1954년 1월 22일 저녁 드디어 서독의 헬레스하우센에 도착했었다. 수 많은 인파가 몰려와 있었다.
그간 모국 서독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1949년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 당하고 모처로 끌려간 뒤 소식이 두절 되었던 남녀 성직자들이 5년 만에 마치 지옥에서 돌아오듯 갑자기 나타났으니, 전 국민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귀환한다는 뉴스가 라디오로 전해지자 전 국민들은 들끓듯 흥분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해서 테데움 (Te-Deum: 감사가)를 부르며 환영 했다.
슬픔도 뒤따랐다. 북한 땅에서 숨진 남녀 성직자들의 가족들이 이들이 생환했으리라고 반겨 달려왔다가 북한 땅에 잠들어 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가는 모습은 귀환자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 포로생활에서 해방 되어 Friedland에 도착한 "옥사독"의 선교사 수녀들
▲ 수녀복을 재 착복한 귀환 수녀들.
공산당의 탄압을 받고 해산한 뒤 원산 수녀원에서 뿔뿔이 흩어진 한국인 수녀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을 듯 하다.
모든 독일 성직자들이 붙잡혀 가고 수도원과 수녀원, 그리고 각 분원들은 모두 폐쇄 되고 한국인 수도원과 수녀원 가족들도 교화소에 끌려가 고생을 하다가 몇 주 뒤 석방되었다. 공산당들은 이들을 석방하면서 마치 서양 귀신에게 홀려서 미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해준 듯이 생색을 냈다고 했다. 북한에서 갈곳 없이 방황하던 수녀들은 각기 혈혈단신으로 월남을 했다. 이들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부산 "중앙 성당"으로 집결 하였다. 여기에 집결한 수녀들은 17명, 덕원 수도원 신부와 수사는 16명이었다.
▲ 원산 수녀원이 설립한 "해성학교" 졸업생, 황영희 간호 대위는 육군 15 야전 병원에 8명의 수녀들을 취직 시켜 1년간 숙식을 해결 하게 해주었다.
부산 "중앙 성당"은 함경도에서 피난온 수 백명의 카톨릭 신도들이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피난 성직자들의 잠자리는 있었으나 살길을 찾아야 했다. 박 골롬바 원산 수녀원 부원장이 구심점이 된 이들은 살길을 찾아 수예품도 팔고 미군 부대 빨래도 했고 국군 병원의 환자 도우미등을 하며 살길을 개척하려 몸부림 쳤다.
삶을 향한 몸부림은 최덕홍 주교의 배려로 대구 주교관으로 이동을 하고 나서도 당분간 계속 되었다. 박 골롬바 수녀는 모시를 사다가 모시 적삼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었고 면사포나 수예품을 만들어 팔았다. 미군의 머피 신부, 맥카티 신부들의 큰 도움이 있었으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되지 못했다.
수녀들이 삶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을때 한국 수녀들이 월남했다는 소식을 접한 독일 투찡 모원은 스위스에서 분원장을 하던 오트라마 수녀를 전쟁중의 한국으로 급파했다. 오트라마 수녀는 1928년에 원산에 파견되어 6년간 사목한 바 있어서 한국어도 할 줄 알았고 한국 사정에도 밝았다. 급파 명령을 받은 그녀는 1951년 1월 일본까지 왔으나, 그 녀가 중립국 소속이라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일본에서 5개월을 대기하다가, 겨우 비자를 얻어 한국으로 들어 올 수가 있었다. 그 녀가 오고 동시에 수사들과 수녀들은 대구 최덕홍 주교의 초청으로 부산을 떠나 대구로 옮겨 가게 되면서 대구 베네딕토 수녀원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곳에서 놀랄일이 생겼다. 북한에서 행방불명 되었던 원산 수녀원 김 로사 수녀가 황해도에 은신해 있다가, 1952년 7월 10일 전선을 뚫고 강화도와 소사를 거쳐 대구까지 찾아 왔던 것이다.
오트라마 수녀는 쉬지 않고 독일과 모국에 편지를 보내서 모금을 했다. 첫 결실로 1,700불을 모금해서 100평짜리 일본식 집을 사서 비로소 원산 수녀원 수녀들은 유랑시대를 마감하고 자기 집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기부문화가 강조되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 이 암흑 시절 독일의 신도들이 한국에 보내온 막대한 기부의 성의에 배울 바 크다고 생각한다. 대구 베네딕토 수녀원이 설립되고 빠르게 불어난 교세와 함께 수녀원은 큰 성장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베네딕토 수녀원 보다 더 일반에게 잘 알려진 파티마 병원 탄생의 역사를 말한다.
▲ 부산 피난시절 도움을 준 미군 군종 신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베네딕토 수녀원이 형편이 피면서 과수원을 사서 두 번째 수녀원을 지어 이사 했을 때 수녀원 한 쪽에 자그마 하게 시약소를 열었다. 이를 "안토니오 의원"이라고 이름 짓고 환자들을 돌봤다. 옵트마라 수녀는 약사 자격증이 있었고 원산에서 프룩투오사 수녀와 같이 환자들을 돌본 경험이 있어서 간단한 진단 치료는 의사 수준의 기술이 있었다. 북한에서 사망한 프룩투오사 수녀가 운영하던 시약소에 손님이 많았었고 전도의 성과도 컸던 것에 착안 한듯 하지만, 초기에는 원체가 가난한 수녀원 형편에 약간의 수익이 발생 하면 그것이 다소 생활에 도움이 될듯 했던 것이다. 역시 이 시약소는 대구 지역의 서민 천주교 신도들에게 먼저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많이 왔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약국으로서 감당할 수가 없어, 수녀원은 독일에 의사 수녀의 파견을 의뢰했다. 마침 새로 구입한 대지에 대구의 미군들이 작은 병원을 지어 주었다.
의대를 졸업한 마리아 살루스 수녀가 한국으로 달려 왔다. 마리아 살루스 수녀는 한국의 의사 고시를 보아서 합격하고 본격적인 의료 사업에 나섰다. 파티마는 수녀원의 본당인 대구 신암동 성당에 종각위에 설치한 파티마의 성모상에서 작명 된 것이다.
정식으로 "파티마 의원"은 놀라운 성장을 계속해서 오늘날 대구의 병상 800석의 대형 종합 병원이 되었고 창원에도 그 절반 규모의 종합 병원이 있다. 북한의 "옥사독" 찬 땅속에 누워있는 프록투오사 수녀의 영혼이 알았다면 크게 기뻐하고 있으리라.
▲ 파티마 병원이 탄생한 곳, 대구 수련원과 파티마 병원, 1956년.
베네딕토 수녀원이 재난에서 벗어나 조금씩 궤도에 접어들자 옵트라마 수녀와 역시 북한에서 탈출해온 수녀들은 독일 투찡의 모원에 북한에서 큰 고초를 겪고 돌아온 독일 수녀들을 다시 한국에서 잘 모시겠다고 재 파견을 요청했다.
모원 (母院)은 냉담했다. 그 생각하기도 으스스한 곳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수녀들을 다시 보낸다고 ?
모원 (母院)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수녀들에게 이런 한국에서의 청원 사실을 알려 주지도 않고, 한국 대구에는 귀환 수녀들의 건강이 해외 파견이 불가능하다고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귀환 수녀들의 파견을 거듭 애원 했다. 더해서 북한 수용소의 살쾡이에게 학대를 받았던 건강이 회복 된 수녀들도 거의 모두 한국으로의 파견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모원은 어쩔수 없이 이들의 청을 들어 주었다. 생존 귀환했던 18명의 수녀 중에 결핵 환자같이 건강 관리가 필요한 8명을 제외하고, 10명이 한국으로 돌아 왔다. "옥사독"에서 살아 돌아온 신부와 수사들도 대다수가 한국으로 돌아와 왜관 수도원의 발전에 기여 했다.
▲ 앞이 "옥사독" 귀환 지 에른스트 신부, 오른쪽 앞이 베르비나 체살 수녀, 오른 쪽 뒤가 스위스 출신 오트라마 원장 수녀, 왼쪽 앞이 "옥사독"에서 주방 담당으로 희생적인 활약을 한 옵타다 수녀, 왼쪽 뒤가 역시 귀환한 양치기 아르사시아 수녀.
체포시 원산 수녀원장이던 겔투르드 링크 수녀가 자신이 원장이 아닌 강등된 직책을 받았으나, 이를 개의치 않고 돌아왔다. 겔트루드 수녀는 대구에서 수련원장으로 많은 수녀들을 양성하고 10년간 봉사했다. 1967년 독일 투찡 모원의 총장으로 부임해서, 1982년까지 총장을 역임 했다.
▲ 은퇴 뒤 한국을 방문한 겔투르드 링크 수녀 (중앙), 1991년.
총장을 퇴임하고 70이 넘는 나이에 브라질의 한국 교포 성당에서 다시 6년간 봉사하고 은퇴했다. 독일로 돌아와 은퇴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선종하였다. 그 녀는 평소 "난 한국인 수녀야."라는 말을 자주했었다. 그 녀는 시인이기도 하다. "옥사독"의 극한 상황에서도 썼던 여러 편의 시가 그 녀의 자서전에 수록 되어있다. 블로거 사비나님이 60년대에 읽으셨다는 "귀향의 노래"가 혹시 이 시집이 아닌가 한다.
"옥사독"에서 많은 성직자들의 목숨을 구해낸 디오메데스 수녀도 한국으로 돌아와서 파티마 병원과 상주의 나환자 촌에서 평생 봉사했다.
"옥사독"에서 빈약한 식재료로도 매일 정성을 다하여 식구들을 먹여 살렸던 옵타다 수녀도 돌아왔다. 그 녀는 일생을 한국에서 마쳤다.
옵타다 수녀가 중병에 걸려 선종에 가까웠을 때 남긴 일화는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정신이 몽롱했던 그 녀는 밤중에 일어나서 한사코 주방으로 가려고 했다. 주방으로 들어가면 쌀을 꺼내 씻었다. 만류하면 한 없이 울기 시작했고 두려움에 떨면서 중얼거렸다.
"제발 나를 그냥 두어 주세요! 우리 식구들이 너무 굶고 있단 말입니다. 뭔가 끓여 주어야 해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고요!"
북 공산당들이 "옥사독"의 독일 성직자들에게 안긴 굶주림이라는 죽음의 고통은 수십 년 뒤 남한 땅까지 쫓아와서 이 노 수녀의 마지막 순간에까지 기승을 부리며 괴롭혔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일생을 다 보낸 벨트비나 수녀님에게 물어보았다.
"그 고생을 하시고서 왜 한국 땅에 돌아 오셨어요?"
그 녀는 독일어 액센트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로 태연하게 답하였다.
"내가 종신서원을 원산에서 했지. 여기서 죽어야 겠다고 했는데 한국 수녀들이 다 남한으로 도망쳐 왔다는 말을 들었어. 그래 내 빨리 돌아가겠다고 했지!"라고 당연한 듯 말 하셨다.
벨트비나 수녀님은 상주군 함창의 학교 설립에 수없는 기부 요청 편지로 모금하여 학교 설립에 큰 기여를 했었다 벨트비나 수녀님은 96살의 나이인 지금에도 불편한 다리를 끌고서 매일 두 시간 씩 농사일을 하신다.
회견을 마치고 이 분과 헤어져 수녀원을 나와서 한참 걷다 보니 다리도 불편하신 분이 어느새 수녀원 현관에 나와서 나를 미소 띈 눈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국의 양반집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북한의 강제 노동소 생활을 포함한 평생을 한국에서 봉사한 이 노수녀님에게 한국 정부로 부터 아직 아무런 포상이 없었다는 사실에 나는 다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는 속으로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하고 빌어드렸을 따름이다.
이들 선배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모진 고통과 희생의 덕분에 대구의 베네딕토 수녀원과 왜관의 베네딕토 수도원은 대단한 발전을 했다.
내가 벹트비나 수녀님과 대화중에 뜻밖에도 최 루벤 원장 수녀님이 접견실로 나를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원장이라기보다 국민 이모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게 포근한 인상을 주는 루벤 원장님은 수녀원 일로 정신 없이 바쁘다고 이 베로니카 수녀님이 귀뜸 해 주었다. 정적인 분위기와 달리 엄청나게 성장한 오늘날의 베네딕토 수녀원 방대한 규모가 원장직의 격무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 수녀원 현관에서 출구쪽으로 바라본 수녀원.
현재 베네딕토 수녀원은 미국이나 프랑스등 여러 나라가 한국에 개원한 수녀원들중에서 수녀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 한국 소녀들이 가장 입회하고 싶어하는 수녀원의 하나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P.S: 왜관 수도원을 중심으로 북에서 희생당한 성직들을 복자로 시성하기 위한 바티칸 청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도움말을 주신 한 신자 부부의 부탁으로 첨부한다. 이 곳에 피정하는 영성 체험관이 있다. 그 분은 여러 곳을 다니며 피정을 하는 분이었다.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다른 곳과 달리 이곳에서는 항상 뭔지 모르는, 그러면서 강한 영적체험을 느꼈다고 했다.
나 같은 정신적 무지랭이이야 수녀원의 식사가 무척 맛있었다는 느낌 밖에 없었지만, 수녀원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피어린 희생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심 깊은 신자들은 그런 체험을 능히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References:
Biography - Sr._Eva_Schutz - Bio.pdf
Biography - Sr._Fruktuosa_Gerstmayer - Bio.pdf
http://www.missionsbenediktiner.de/seligsprechung/cms/kategorie/index.php?kategorieid=61&parentid=61
http://124.254.147.11:8080/kyo_guest/2009_02/09.htm
http://www.osb-tutzing.it/de/html/martyrerinnen.html
http://html.erzabtei.de/html/Aktuelles/willibrord/seligsprechung.pdf
http://eos.id-on.de/reihen/missionary-benedictine-texts-and-studies/our-destiny-in-korea
http://www.osb-tutzing.it/de/html/korea.html
http://benedictine.or.kr/
(1)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Sauer, Bonifatius,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
(2) 김치호(金致鎬, 베네딕도, 1914∼1950) 신부
(3) 민종덕 고델리부스 아우어(Auer, Godelibus, 閔鐘德, 1887∼1952) 수사
(4) 나국재 까누토(Canutus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
(5) 장 악네따(1910∼1950) 헌신자
(6) 최병권(崔炳權, 마티아, 1908∼1949?) 신부
(7) 엄광호 다고베르트(Enk, Dagobert, 嚴光豪, 1907∼1950) 신부
(8) 파스칼 팡가우어(Fangauer, Paschalis, 1877∼1950) 수사
(9) 배 루도비꼬(Fischer, Ludwig, 裵, 1902∼1950) 수사
(10) 부 일데폰스(Flötzinger, Ildefons, 富, 1878∼1952) 수사
(11) 베드로 게르네르트(Gernert, Petrus, 1882∼1949) 수사
(12) 마리아 프룩트오사 게르스트마이어(Gerstmayer, Fructuosa, 1898∼1952) 수녀
(13) 기 그레고리오(Giegerich Gregorius, 奇, 1913∼1950) 수사
(14) 함요섭 요셉 그라함머(Grahamer, Ioseph, 咸要燮, 1888∼1950) 수사
(15) 하연근 바실리오(Hauser, Basilio, 河連根, 1886∼1950) 수사
(16) 솔라누스 헤르만(Hermann, Solanus, 1909∼1950) 수사
(17) 허희락 힐라리오(Hoiß, Hilarius, 許喜樂, 1888∼1950) 수사
(18) 김봉식(金鳳植, 마오로, 1913∼1950) 신부
(19) 김종수(金宗洙, 베르나르도, 1918∼1950) 신부
(20) 김동철(金東哲, 마르코, 1913∼1950?) 신부
(21) 김이식(金利植, 마르띠노, 1920∼1950) 신부
(22) 길세동 루페르트(Klingseis, Rupert, 吉世東, 1890∼1950) 신부
(23)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1912∼?) 신부
(24) 이재철(李載喆, 베드로, 1913∼1950) 신부
(25) 이춘근(李春根, 라우렌시오, 1915∼1950) 신부
(26) 노안락 에우제비오(Lohmeier, Eusebius, 盧安樂, 1897∼1951) 수사
(27) 정양리 마르코(Metzger, Markus, 丁洋利, 1878∼1949) 수사
(28) 오이근 에우제니오(Ostermeier, Eugenius, 吳利根, 1885∼1949) 수사
(29) 오 쿠니베르트(Ott, Kunibert, 吳, 1912∼1952) 신부
(30) 박빈숙(朴彬淑, 루시아, 1919∼1950) 수녀
(31) 노병조 안셀모(Romer, Anselmus, 盧炳朝, 1885∼1951) 신부
(32) 홍태화 루치오(Roth, Lucius, 洪泰華, 1890∼1950) 신부
(33) 안세명 아르눌프(Schleicher, Arnulf, 안세명, 1906∼1952) 신부
(34) 에바 쉬츠(Schütz, Eva, 1899∼1950) 수녀
(35) 김 그레고리오(Sorger, Gregor, 金, 1906∼1950) 신부
(36) 전오범 그레고리오(Steger, Gregor, 全五範, 1900∼1950)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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