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82_五.一八

내가 만난 가련하고 불쌍하고 초라한 인간 예수를 생각한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5. 1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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ελωι ελωι λαμα σαβαχθανι

Eloi Eloi Lama Sabachtani




"수도자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한국군 군내 프래깅 (Fragging) 사고와 사병 간 구타 사망사건 등으로 한국인은 유사이래 마음과 가슴에 심한 상처를 받았고 아직도 전혀 치유가 되지 않은체 비겁한 세월만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18일 5.18민주항쟁 36주년을 맞아, 36년 전 5월부터 10월까지, 고문 속에서 만난 나의 가련하고 불쌍하고 초라한 예수님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사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소리 소문 없이 살인마 전두환의 졸개들 손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불쌍한 나의 어머니는 전라도로 유학 간 아들이 80년 5월에 행방불명되었다고 아직도 구순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찾아다니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혹 살아남었어도, 어쩌면 나는 아직도 실성한 정신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화살기도와 로사리오기도


잡혀가서 벌거벗겨지고 젖은 모포로 싸인 몸은 복날 개 잡듯이 몽둥이찜질부터 당했습니다. 그때 패는 놈들에게도 목숨을 구걸했지만, 살려달라고 제일 많이 내 목숨을 구걸한 분이 주님이었습니다. 화살기도며 로사리오기도며 손가락을 꼽아가며 1달 반을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수천 수만단의 로사리오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구하는 기도가 소용없다는 걸 깨닫던 어느 날, 나는 나보다 더 한심한 꼴로 가시관을 쓰고 무거운 십자가를 끌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보잘것없는 지도자 예수님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같은 민족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실패한 민족지도자 인간 예수


내가 자기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는 양반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니. (Oh My God! I prayed to the wrong person for saving my life.)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처럼 불쌍한 예수도 죽으러 가는데 나쯤이야' 하는 생각과 '그래 죽자' 하는 다짐이 일었습니다. 그 순간, 고문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나의 삼촌, 큰 형뻘 되는, 고문을 가하던 보안대 중 상사들에게 "당신에겐 나 같은 동생도 조카도 없느냐?"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노련해 보이던 상사 한 명이 "이 자식 맛이 갔군." 했지만 난 그들의 눈빛에서 그들의 두려움을 느꼈고, 내가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삶의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으려고 하는 자 살 것이라는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또 저 버러지 같은 인간들은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잔인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난 그 인간적인 예수를 경험하고 난 후로는 쓸데없는 걸로 기도 별로 안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앞서 '꽁지머리의 비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내가 경험했던 그 초라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를 2016년 5.18민주항쟁 36주년을 맞아 느껴보길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 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도 가물거리고 감흥도 떨어지는데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나마 나의 이 소중한 경험을 나눕니다. 지지난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그 가족 그리고 한국 군대 내에서 벌어진 프래깅사건과 사병 간 구타 사망사건의 피해자들에게도 이러한 죽음을 넘어서는 은총의 체험이 있길 간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가련하고 불쌍하고 초라한 예수님 고만 팔아먹고, 인간으로서, 같은 민족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실패한 민족지도자 인간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가 되는 그 과정을 2016년 5월 18일 5.18민주항쟁 36주년을 맞아 묵상해 보길 바랍니다. 


찬미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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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개의 말씀 중에 네 번째 말씀입니다. 이 절규는 다윗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 22:1)을 인용한 겁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자신의 찢어지는 고통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절규는 하느님께 외면당한 절망감 속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주님께서 당한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마지막 말씀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김으로써 죽음을 초월하셨습니다. 


저 역시 삶의 미련을 포기하고 죽기로 작정했을 때 인간적인 예수님이 마지막 말씀에서 평정심을 되찾고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마음과 같은 평화를 얻으신 그 순간을 경험했답니다. 참고로 읽는 분들이 잘 이해가 되셨으면 하는 마음에 사족을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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