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5/11 -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선생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인연]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1. 1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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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5/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5번째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선생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인연]이다. 해설은 양금섭 교수님의 해설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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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雨初收 萬壑淸

奇花晩發 四隣明

羨子光山 今日在

稱來無等 不虛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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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비 처음 그치니 만 골짜기 말끔하고

기이한 꽃 늦게 피니 사방이 훤하네.

그대의 광주에 오늘이 있게 된 것 부러우니

전해오던 무등산 허명이 아니었네.

*無等 : 견줄 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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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甲寅秋 往訪無等山春雪軒 關以博士學位受否問題議論紛紛然

許百鍊博士學位狀已O? 全南大學事勢難處 故余亦力勸受而祝賀之 芝雲

오른쪽(詩)은 갑인(1974)년 가을에 무등산 <춘설헌>을 방문했는데 (그 때) 박사학위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논의가 어지러웠다. 허백련박사학위장도 이미 발부(?)한 전남대학교는 업무처리에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나 역시 학위를 받아라고 강권하고 축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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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선생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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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지운 선생과 의재 선생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각별한 인간관계를 그분들이 작고할때까지 유지했다. 생전에 의재 선생과 친분이 있던 분들은 다음의 사연을 기억하여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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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는 매사가 분명하여 일본 학생들과도 싸움이 잦았으며 유학생들 중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는 일본에 있는 조선 청년회에서 일본의 저명한 문사 三宅雪嶺(미야케 세츠레이, みやけ せつれい, 1860-1945)씨를 초빙, 시국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三宅의 강연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합병하여 사이좋은 형제국이 되었듯이 일본과 조선도 그와 같은 사이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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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좌석에서 강연을 듣던 김철수는 강연 도중에 일어나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것은 강연이 아니오. 이런 강연은 들을 필요가 없으니 三宅은 내려가시오.”김철수는 큰 소리로 외치며 三宅을 떠밀어 내려하였다. “끝까지 강연을 들어봅시다.”강연을 듣고 있던 최남선이 제안했으나 김철수는 듣지 않았다. 그는 끝내 三宅을 떠밀어내고야 말았으며 장내는 연사를 야유하는 소리와 김철수를 칭찬하는 박수 소리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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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지운 선생과 의재 선생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사연을 들었고 또 오마이 뉴스 등에도 소개한적있다. 그 사연을 다시 소개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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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에게 감화받은 의재 허백련 화백님과 우장춘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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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에 대해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지운 김철수"라는 자료집도 내고 여러 사람이 지운 김철수 선생에 대해 연구도 하여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이어진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돈독한 우정과 그 인연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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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우장춘 박사는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동경대 농학과 실과 청강생으로 입학했을 때 조선인 도자사가 방일하여 조선 유학생을 격려하고자 강연을 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는 일본 명치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허백련 화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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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와세다대학 유학생이던 지운 김철수 선생이 친일강연을 하던 도지사를 향해 연단에 뛰어들어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어찌 조선인으로 그런 연설을 할 수 있냐며 거칠게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모습에 충격과 감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의재 허백련 화백과 우장춘 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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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장학금을 신청하려던 허백련 화백은 그 길로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자신이 원하던 동양화에 매진하여 남도 산수화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작고하는 순간까지 도지사의 멱살을 잡던 김철수 선생의 애국정신에 존경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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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선생은 우장춘 박사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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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우범선과 일본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우장춘 박사는 1919년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원예 육종학의 시작을 알리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1935년에 발표한다. 김철수 선생이 말한 데로 성을 갈지 않고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으로 식물 육종학의 금자탑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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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의 성과를 인정받아 동경제국대학으로부터 농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는다. 그리고 1950년 한국의 농업발전에 여생을 받치겠다는 심정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몸을 싣고 영구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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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그 분들이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했고 그 분들의 민족 사랑의 정신은 아직도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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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지운 김철수 선생, 앞줄 정좌 부산 동례 원예시험장 원장 우장춘 박사, 우측 원예가 최영전 선생, 좌측에서 두번째 종진청 원예과장 고병민 선생, 죄측 당시 서울 분원장 방원 이성찬 선생.

의재 허백련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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