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8/11 - 지운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과의 우정]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1. 25.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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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8/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8번째 작품 [지운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과의 우정]이다. 양금섭 교수님께서 "서예로 박사학위를 가진 전주의 臨池堂 이은혁 교수님의 자문"을 받아 해설을 해주셨다. 두 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감상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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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陽通穴來

白矢射中壁

出入風千里

浮游塵萬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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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世誰曾看

億金吾不易

但恨此豪觀

與君未共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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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볕이 구멍 통해 들어

흰 화살 벽 가운데로 쏘도다.

바람은 천 리에 드나들고

떠도는 먼지는 일만 섬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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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서 누가 일찍이 보았을까?

내, 억만금과 바꾸지 않는 것을.

다만 이 장쾌한 풍경을

그대와 한 자리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 한스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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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三月三日 書送于親友毅齋 笑曰 君之土窟大抴(=拽)

有斯豪觀事抑晩學杜甫之踈放事兩人哄笑 芝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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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1966) 삼월삼짓날 써서 친구에게 보내니 (친구)의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토굴이 대단히 길어서 이런 호사스런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또한 늦게나마 두보의 소방(踈放)함을 배우게 되었다.“ 하여 두 사람이 껄껄 웃었다.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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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과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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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을 기치로 삼았던 남한 사회의 정서상, 지운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은 분들을 일반인들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2달에 한 번꼴로 방문하여 묵어갔던 방원 선생 댁에서도 화훼·서예 등 정치와 관련 없는 사사로운 취미활동과 관련된 방문과 소통이었음을 남한의 정보사찰기관이 늘 확인해갔다. 그로 인하여 의재 허백련 화백과의 교류도 서예 교류를 주목적으로 만남을 이어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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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나 의재 선생 주변분들 조차도 두 분의 특별했던 인연을 이야기할라치면 "그다지 친숙했던 사이는 아니었다"고 들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당 스승 서택환으로부터 받은 '芝雲'이라는 호를 버리고 '遲耘'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그 '늦게나마 고향에 내려와 다시 밭갈이를 하게 되었다'라는 뜻으로 '遲耘'이라는 호를 의재 선생이 지어줄 정도로 두 분의 관계는 각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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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 일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유학 시절에 강연회에서 부당한 친일강연을 하는 연사들에게 호통을 치고 쫓아내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의재 선생은 1913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学)에 입학해서 법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 당시 강연회에서 지운 선생의 애국적인 모습을 두 번이나 목격하고 지운 선생을 존경하게 되어 작고하는 순간까지 그 인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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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모습조선 청년회에서 일본의 저명한 문사 三宅雪嶺(미야케 세츠레이, みやけ せつれい, 1860-1945)씨를 초빙하여 시국강연회를 가질때였다. 三宅의 강연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합병하여 사이좋은 형제국이 되었듯이 일본과 조선도 그와 같은 사이라는 내용이었다. 맨 앞 좌석에서 강연을 듣던 지운 선생은 강연 도중에 일어나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것은 강연이 아니오. 이런 강연은 들을 필요가 없으니 三宅은 내려가시오.”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三澤을 떠밀어 내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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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조선총독부에서 지급하는 조선인 관비 장학금 대상자와 신청자 그리고 관심자들을 대상으로 조선인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 유학생을 격려 강연을 하는 자리였다. 지운 선생은 장학금은 천황의 은혜라며 친일강연을 하던 도지사를 향해 연단에 뛰어들어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어찌 조선인으로 그런 연설을 할 수 있냐며 거칠게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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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장학금을 신청하여 마지막 학기를 끝내려던 의재 선생은 그 길로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자신이 원하던 동양화에 매진하여 남도 산수화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작고하는 순간까지 도지사의 멱살을 잡던 김철수 선생의 애국정신에 존경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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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는 1916년 조선총독부 관비 장학생으로 동경대 농학과 실과 청강생으로 입학한 우장춘 박사도 있었다. 김철수 선생은 우장춘 박사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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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가담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우범선과 일본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우장춘 박사는 1919년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원예 육종학의 시작을 알리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1935년에 발표한다. 김철수 선생이 말한 데로 성을 갈지 않고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으로 식물 육종학의 금자탑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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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의 성과를 인정받아 동경대 농학과 실과만 졸업한 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1959년 8월 10일)에게 동경제국대학은 농학 박사학위를 수여 한다. 그리고 지운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1950년 한국의 농업발전에 여생을 받치겠다는 심정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몸을 싣고 영구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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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과 의재 선생 그리고 우장춘 박사는 그분들이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했다. 특히 의재 선생은 남들 모르게 지운 선생을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9년 우장춘 박사 작고 후에는 의재 선생과 지운 선생은 그 금란지교의 특별한 우정은, 이 서화에서 보듯이 수많은 한시 구를 주고받으며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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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의재 허백련 화백

좌로 부터 서울 분원장 방원 이성찬 선생, 농진청 원예과장 고병민 선생,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최영전 선생, 중앙 부산 동래원예시험장 원장우장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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