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10/11 - 지운 선생의 혁명동지 毛澤東]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1. 25.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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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10/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 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10번째 작품 [지운 선생의 혁명동지 毛澤東]이다. 양금섭 교수님께서 "서예로 박사학위를 가진 전주의 臨池堂 이은혁 교수님의 자문"을 받아 해설을 해주셨다. 두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감상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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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庚同志 起同時

風雨當年 意氣兒

對立第三 難擧類

長征萬里 亦其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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羨君至死 憂天下

愧我如今 守四肢

再造中原 可安息

億千弟子 接縱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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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동지로 동시에 일어나서

풍우 당년에는 의기의 남아였었지.

이합집산하는 지사들 셀 수도 없었지만

장정만리를 행한 사람은 또 그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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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죽을 때까지 천하를 근심한 걸 부러워하며

나는 여태 사지 멀쩡한 것이 부끄러워라.

중원을 재편하여 편히 쉴 수 있게 했으니

수억 제자들이 그대를 붙좇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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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 九月九日 聞毛澤東同志永眠 而回顧五十六年前 辛酉有中國日本及我國 同志等來往會集于上海 各其奔走於自國之事 慷慨無量而作此輓詞一首 以表哀悼之情 甲子晩春 九十二翁 遲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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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1976)년 9월 9일 모택동 동지가 영면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56년 전을 회고한다. 신유(1921)년에 한 중 일 동지들이 상해에서 회의를 가졌는데, 모두는 자기 나라의 일들로 분주했었다. 강개가 무량하여 이 만사를 지어 애도의 정을 표한다. 갑자(1984)년 늦봄 92세의 늙은이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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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의 혁명동지 毛澤東 - "꺼벙해보"였던 毛澤東 주석의 첫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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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동경 유학 시절 幸德秋水와 片山潛 등의 저서를 통해 사회주의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재일유학생들과 더불어 동우지 『學之光』을 만들어 이 잡지에 '사회주의 경제결정론'에 관련된 글을 2차례나 기고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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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지운 선생은 정노식, 張德秀, 尹顯振, 金孝錫, 金翼之 등과 斷指同盟을 결성하여 향후 독립운동에 일로매진할 것을 기약했다. 그리고 1916년 가을 지운 선생은 國際的 反帝同盟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유학생인 黃覺, 羅害谷, 鄧潔民, 彭革榮 등 조선·중국·대만유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新亞同盟團을 결성하고 “아세아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는데 전력을 다할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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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지운 선생을 비롯한 崔八鏞, 李鳳洙, 朱鍾健, 崔赫, 장덕수 등 신아동맹단 조선유학생들은 3․1운동의 대중적 열기에 고무되어 1920년 6월 서울에서 5차대회를 열고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바꾸었다. 이 "사회혁명당"은 “계급타파와 사유제도의 타파, 무산계급 전제정치와 전국인구의 10분지 7되는 무산자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실행할 것” 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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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명당 결성 소식을 들은 이동휘와 그 측근인 金立은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위해 지운 선생과 상해회동을 하자고 초청했다. 지운 선생은 그 초청 통지를 받고 이봉수, 주종건, 김종철, 도용호, 엄주천, 김달호, 송무영 등 8명이 출발했는데, 여행경비는 지주 金錦東의 도움으로 마련했다. 그리고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이동휘가 창립한 高麗共産黨(상해파)에 참여하면서 상해파 국내지부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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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지운 선생은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金立과 함께 재무담당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레닌과 함께 코민테른에 참여한 러시아 한인사회당 박진순을 통해 고려공산당 공산혁명 군자금으로 전달받은 200만 루브르의 자금 업무를 담당하여 반일독립군 양성, 일본 曉民共産黨 창당, 중국공산당 활동 등을 지원했다. 이 자금 중 일부는 국내로 들어와 崔八鏞에 의해 『新生活』 創刊자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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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가 이 자금을 노리고 金立에게 레닌자금 유용혐의 누명을 씌워 金九가 이끌던 監察團를 통해 암살한 후에는 지운 선생은 혼자서 자금 업무를 전담했다. 파행하는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를 발전적으로 개조하고자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진행된 대규모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의 일원으로 행정적인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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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1916년 일본에서 함께 신아동맹단 활동을 함께했던 黃覺, 羅害谷, 鄧潔民, 彭革榮 등 신아동맹단 중국단원들이 중국에서 항일단체 大同團을 결성하고 지운 선생에게 중국공산당 창당을 위한 '新友會' 결성을 논의하며 제반 경비지원 등 도움을 요청했고 지운 선생은 기꺼이 응했다. 지운 선생과 자임(子任) 모택동(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은 1921년 4월 상해에서 '新友會'를 결성할 때 첫 대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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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지운 선생과 毛澤東은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고 특히 동갑이어서 금방 친해졌다. 모택동과 의견을 나누며 느낀 '사회주의화한' 중국이 미래에는 미국을 앞설 것이라는 신념을 毛澤東에게 말해주었다. 지운 선생은 사심 없는 毛澤東의 자세에서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부강한 중국을 만들 것이라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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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의 자문과 자금지원으로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은 무사히 결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경대 교수인 중국공산당의 아버지 실암(實庵) 진독수(陳獨秀, 1879-1942)와 毛澤東과는 특히 밤을 지새며 수많은 날을 필담하며 혁명을 논의하여 동지애를 유감없이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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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지운 선생은 毛澤東에 대해 말하길, 특히 모 주석은 필체가 수려하고 간결하고 정확히 자기 생각을 써 내려가는 게 비범했다. 모 주석은 5살 때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으며, 7살에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읽었을 정도로 독서를 유일한 낙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했다. 모 주석은 8세부터 저잣거리에서 배추 장사를 했는데 그때도 책을 눈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때 이미 손자병법은 글자 한 자 틀리지 않고 달달 외웠다고 한다. 지운 선생은 모 주석이 중국대륙을 평정한 데는 모 주석의 감동적이고 호소력 깊은 글과 격문 그리고 연설 때문이었을 것이라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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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毛澤東 사망 후 지운 선생이 1986년 작고하기 전까지 매년 毛澤東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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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무렵의 모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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