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다반향초(茶半香初) - 박진순(朴鎭淳, 1898~1938)과 스탈린의 고려인강제이주음모(高麗人强制移住陰謀)]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2. 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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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다반향초(茶半香初)'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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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절반을 마셔도 향은 처음과 같다. 녹차가 끝까지 같은 향을 유지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삶이 한결같은지 수시로 돌아보아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지운 선생은 허헌 선생으로부터 시작한 함경도 서북학회 인사들과 만남을 특별하게 여기셨다. 그 덕에 내 부친과 나도 살면서 함흥과 북청분들과 인연이 생겼고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학교를 설립한 북청출신 해청 선생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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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 선생도 부친이 함흥에서 연해주로 이주한 함흥의 피가 흐르는 분이다. 1926~7년 지운 선생이 조선공산당 2차후반기와 3차전반기의 책임 비서로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스탈린을 독대하여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군자금을 받고 코민테른의 정세교육을 받는 동안 박진순 선생의 거처를 오갔다. 그래서 회고 메모지에 박진순 선생 부부의 애정표현을 기이하게 보신걸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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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레닌 사망 이후 볼셰비키의 실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형제당을 지원하는 방침을 바꾸어 볼셰비키가 직접 형제당을 지도하겠다고 하여 박진순 선생을 상해로 가지 못하게 했다. 그때 박진순 선생은 스탈린의 지도 방식에 반발하여 볼셰비키 업무를 모스크바국립대학 진학목적으로 피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지운 선생이 한 달 가까이 볼셰비키 정보사찰 담당 부서에서 국제정세 교육을 받게 된 것을 박진순 선생은 필경 스탈린이 운영하는 비밀특경대가 담당할 것으로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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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밀특경대는 사법보안을 담당하는 내무인민위원회와는 별개로 후일 스탈린의 패권을 지키고 대숙청을 담당했던 비밀경찰(NKVD)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스탈린은 반혁명분자, 테러분자, 부패분자, 분파분자 등을 근절하고 미국과 일본의 간첩을 색출할 목적으로 정보사찰 부서를 신설하고 비밀경찰(NKVD)로 확대 개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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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 선생은 모스크바 국립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26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스탈린을 도와 다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스탈린이 고려인만 콕 집어서 재러고려인들이 유발한 자유시사변과 볼셰비키 붕괴를 목적으로 고려인들이 미국과 일본의 첩자 행위를 한 사람들의 명단을 들고 1926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고려인들을 처리할 방안을 논의하여 고려인 혁명화를 위한 집단 이주 안을 고안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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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 선생은 그것은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고려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하게 반발했지만, 박진순 선생의 의견은 무시당했다고 지운 선생에게 이야기했다. 지운 선생도 코민테른에서 세계정세를 교육받을 때 수백 명에 달하는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과 조선의 독립단체에서 활동하는 미국과 일본의 첩자명단과 그자들의 첩자 활동 내용의 진위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때 박진순 선생은 그런 식으로 첩자를 구분하면 첩자 아닌 인사가 있겠느냐고 하여 지운 선생은 머리가 복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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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스탈린이 1926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언급한 고려인의 집단이주 안은 1930년부터 1937년까지 시행된 20만 명에 대한 고려인 집단이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박진순 선생은 수백만 명을 숙청한 스탈린의 대숙청 피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1937년 테러 단체에 참가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고 1938년 3월 19일 총살형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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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던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험난한 길을 뚫고 조선에 들어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애를 썼고 첩자명단에 언급되었던 인사들의 접촉이 많아지자 일경의 검거가 눈앞에 다가옴을 알고 일부러 경찰서 앞 여인숙에 묵었더니 진짜로 일경들이 알고 아침에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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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의 모스크바에서 지운 선생과 박진순 선생은 볼셰비키 스탈린 치하에서 일반인들이 전혀 접할 수 없는 고급첩보를 접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마음만 조금 고쳐먹고 행동했다면 고난의 험난한 길을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다반향초(茶半香初)의 마음으로 박진순 선생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지운 선생은 기나긴 감옥생활을 자초하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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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향초(茶半香初) - 차는 절반을 마셔도 향은 처음과 같다. 녹차가 끝까지 같은 향을 유지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삶이 한결같은지 수시로 돌아보아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
다반향초(茶半香初)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1) 선생,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역사학자 계봉우 선생, 이증림(李增林, 1897~?) 선생

*1.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근대화 및 중립외교의 주역이었고 임시정부 평정관(評定官)을 지낸 고종의 최측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상건(玄尙健, 1875년-1926년)은 그의 재종형이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약력 - 조선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義烈團)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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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했다. 1920년 재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공산주의세력과 연계를 도모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국내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春景園黨]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1929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4월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검거되어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전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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