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 선생이 북으로 가지 않은 이유가 몇가지 있지만 1950년 6.25 전쟁을 통해서 확인한 미국과 러시아의 심중을 확인한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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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彌陀佛非聾漢(아미타불비롱한) 아미타불은 귀머거리가 아닌데
念念彌陀奈爾何(염염미타내이하) 미타를 외고 또 외니 그대를 어찌할거나
辛酉春(1981년 신유년 봄) 叕叟(철수) - [양금섭 선생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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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1945년 해방정국에서 우익과 민족주의 세력 그리고 좌익 성향의 인사들이 일본강점기에 이어 미 군정하에서도 서로 패권 다툼에 혈안이 된 걸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지운 김철수 선생은 그 패권다툼의 아수라판에서 좌익의 박헌영과 우익의 이승만 간의 영수 회담을 주선하는 등 민족의 비극을 막아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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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1926년 6월 조선공산당의 2차후반기 1926년 9월 3차전반기 책임 비서로 1927년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나 조선공산당에 대한 사후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때 국제당에 대한 협력방침을 직접 지도방침으로 바꾼 코민테른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은 1달간에 걸친 국제정세 교육을 받으며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있는 박진순 선생의 모스코바 자택을 방문하면서 들은 스탈린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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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마음은 자신의 조국인 조지아를 포함한 동유럽 장악에 쏠려있어 동양의 혁명화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고려인들이 패권 다툼에 골몰해 자유시 참사를 일으켜 동족 항일무장세력을 몰살했고 미국과 구라파에 우호적인 고려인의 성향을 미국과 일본의 간첩이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운 김철수 선생은 알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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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지운 김철수 선생의 동지였고 절친한 친구인 설산 장덕수 선생과 우남 이승만 박사 등 미국파들을 통해 미국의 심중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볼셰비키 혁명 시기 제1차 적색 공포(Red Scare) 이후 1940년대 들어 제2차 적색 공포 하에 러시아 간첩 색출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위기는 미군정 하의 해방정국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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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미국과 러시아가 패권 다툼 속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남과 북의 통일을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이승만 박사를 통해 남한 내의 적색 공포를 완전히 제거하여 공산혁명을 원천 봉쇄할 것이고 러시아는 김일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와 이어지는 작은 통로조차 말살시킬 것도 예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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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지운 선생은 두 가지 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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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특별한 이유 없이 남한적화의 시기를 놓치고 미군의 개입을 기다리는 듯 3일씩이나 서울에서 지체한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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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시아가 석연찮은 이유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하며 유엔군의 남한파병결의를 반대하지 않은 걸 듣고는 스탈린은 한반도 적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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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운 김철수 선생의 판단이 조선공산당의 원로이면서도 해방이후 그리고 1950년 인민군이 내려와 칩거하던 전라북도 부안지역까지 점령했을 때조차도 철저하게 북한과 거리를 두고 촌노(邨老)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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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주변의 좀 배웠다는 사람이나 알만한 사람에게 이러니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서 이에 대비하자고 이야기를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요 阿彌陀佛非聾漢(아미타불비롱한) 念念彌陀奈爾何(염염미타내이하) 였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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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22세 1915년 일본 유학시절 | 1916년 일본와세다대학 유학인사들 - 앞줄 중앙 지운 김철수 선생. 맨 뒤줄 좌에서 3번째는 조선에 식민사관을 뿌리깊게 심어버린 우봉 이병도 선생도 함께 자리를 했다. 1980년당시 생존인사는 지운 김철수 선생과 양원모 선생 그리고 우당 이병도 선생. 지운 김철수 선생의 동기동창으로는 남길두 선생, 설산 장덕수 선생, 윤홍섭 선생, 최익준 선생, 정상용 선생과 따로 얼굴사진을 첨부한 박인수 선생 등 총7분이다. | 상해 고려공산당시절 지운 김철수 선생 |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현정건(*1) 선생,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계봉우 선생, 이증림(*2) 선생 |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1931년 작성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수형기록표 | 해방을 맞아 출옥후 해방 미군정 시절 수척한 모습의 지운 김철수 선생 |
부산원예시험장에서 좌로부터 당시 서울분원장 고 방원 이성찬 선생, 농진청 원예과장 고 고병민 선생, 고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고 최영전 선생, 중앙에 좌정 시험장 원장 고 우장춘 박사 - 지운 선생이 일본유학시절 동경대 농학과 실과생이었던 우장춘 박사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어 성을 지키고 조국에 봉사하라는 책임감을 심어주어 우장춘 박사는 성을 지켯고 귀국후 작고할때까지 한국 식물육종학 발전에 기여했다. | 지운 김철수 | 지운 김철수 선생 |
말년의 지운 김철수 선생 | 말년의 지운 김철수 선생 |
지운 선생이 1927년 모스코바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을 만난 사실을 보도한 1930년 동아일보 기사 | 1989년 11월 24일 한겨레신문 지운 김철수 사후 3년 특집 보도 | 1999년 한국정신문화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운 선생의 친필 유고와 녹음자료를 토대로 발간한 '지운 김철수' 자료집 |
*2.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했다. 1920년 재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공산주의세력과 연계를 도모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국내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春景園黨]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1929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4월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검거되어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전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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