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이 바라 본 해방후 남과 북]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1. 9.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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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 북으로 가지 않은 이유가 몇가지 있지만 1950년 6.25 전쟁을 통해서 확인한 미국과 러시아의 심중을 확인한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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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彌陀佛非聾漢(아미타불비롱한) 아미타불은 귀머거리가 아닌데

念念彌陀奈爾何(염염미타내이하) 미타를 외고 또 외니 그대를 어찌할거나

辛酉春(1981년 신유년 봄) 叕叟(철수) - [양금섭 선생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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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1945년 해방정국에서 우익과 민족주의 세력 그리고 좌익 성향의 인사들이 일본강점기에 이어 미 군정하에서도 서로 패권 다툼에 혈안이 된 걸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지운 김철수 선생은 그 패권다툼의 아수라판에서 좌익의  박헌영과 우익의 이승만 간의 영수 회담을 주선하는 등 민족의 비극을 막아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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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1926년 6월 조선공산당의 2차후반기 1926년 9월 3차전반기 책임 비서로 1927년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나 조선공산당에 대한 사후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때 국제당에 대한 협력방침을 직접 지도방침으로 바꾼 코민테른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은 1달간에 걸친 국제정세 교육을 받으며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있는 박진순 선생의 모스코바 자택을 방문하면서 들은 스탈린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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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마음은 자신의 조국인 조지아를 포함한 동유럽 장악에 쏠려있어 동양의 혁명화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고려인들이 패권 다툼에 골몰해 자유시 참사를 일으켜 동족 항일무장세력을 몰살했고 미국과 구라파에 우호적인 고려인의 성향을 미국과 일본의 간첩이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운 김철수 선생은 알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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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지운 김철수 선생의 동지였고 절친한 친구인 설산 장덕수 선생과 우남 이승만 박사 등 미국파들을 통해 미국의 심중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볼셰비키 혁명 시기 제1차 적색 공포(Red Scare) 이후 1940년대 들어 제2차 적색 공포 하에 러시아 간첩 색출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위기는 미군정 하의 해방정국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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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미국과 러시아가 패권 다툼 속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남과 북의 통일을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이승만 박사를 통해 남한 내의 적색 공포를 완전히 제거하여 공산혁명을 원천 봉쇄할 것이고 러시아는 김일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와 이어지는 작은 통로조차 말살시킬 것도 예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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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지운 선생은 두 가지 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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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특별한 이유 없이 남한적화의 시기를 놓치고 미군의 개입을 기다리는 듯 3일씩이나 서울에서 지체한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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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시아가 석연찮은 이유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하며 유엔군의 남한파병결의를 반대하지 않은 걸 듣고는 스탈린은 한반도 적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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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운 김철수 선생의 판단이 조선공산당의 원로이면서도 해방이후 그리고 1950년 인민군이 내려와 칩거하던 전라북도 부안지역까지 점령했을 때조차도 철저하게 북한과 거리를 두고 촌노(邨老)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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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은 주변의 좀 배웠다는 사람이나 알만한 사람에게 이러니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서 이에  대비하자고 이야기를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요 阿彌陀佛非聾漢(아미타불비롱한) 念念彌陀奈爾何(염염미타내이하) 였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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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彌陀佛非聾漢(아미타불비롱한) 아미타불은 귀머거리가 아닌데 念念彌陀奈爾何(염염미타내이하) 미타를 외고 또 외니 그대를 어찌할거나 辛酉春(1981년 신유년 봄) 叕叟(철수) - [양금섭 선생님 해설]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22세 1915년 일본 유학시절
1916년 일본와세다대학 유학인사들 - 앞줄 중앙 지운 김철수 선생. 맨 뒤줄 좌에서 3번째는 조선에 식민사관을 뿌리깊게 심어버린 우봉 이병도 선생도 함께 자리를 했다. 1980년당시 생존인사는 지운 김철수 선생과 양원모 선생 그리고 우당 이병도 선생. 지운 김철수 선생의 동기동창으로는 남길두 선생, 설산 장덕수 선생, 윤홍섭 선생, 최익준 선생, 정상용 선생과 따로 얼굴사진을 첨부한 박인수 선생 등 총7분이다.
상해 고려공산당시절 지운 김철수 선생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현정건(*1) 선생,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계봉우 선생, 이증림(*2) 선생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1931년 작성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수형기록표
해방을 맞아 출옥후 해방 미군정 시절 수척한 모습의 지운 김철수 선생
부산원예시험장에서 좌로부터 당시 서울분원장 고 방원 이성찬 선생, 농진청 원예과장 고 고병민 선생, 고 지운 김철수 선생, 원예가 고 최영전 선생, 중앙에 좌정 시험장 원장 고 우장춘 박사 - 지운 선생이 일본유학시절 동경대 농학과 실과생이었던 우장춘 박사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어 성을 지키고 조국에 봉사하라는 책임감을 심어주어 우장춘 박사는 성을 지켯고 귀국후 작고할때까지 한국 식물육종학 발전에 기여했다.
지운 김철수
지운 김철수 선생
말년의 지운 김철수 선생
말년의 지운 김철수 선생
지운 선생이 1927년 모스코바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을 만난 사실을 보도한 1930년 동아일보 기사
1989년 11월 24일 한겨레신문 지운 김철수 사후 3년 특집 보도
1999년 한국정신문화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운 선생의 친필 유고와 녹음자료를 토대로 발간한 '지운 김철수' 자료집
*1.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근대화 및 중립외교의 주역이었고 임시정부 평정관(評定官)을 지낸 고종의 최측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상건(玄尙健, 1875년-1926년)은 그의 재종형이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약력 - 조선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義烈團)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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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했다. 1920년 재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공산주의세력과 연계를 도모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국내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春景園黨]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1929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4월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검거되어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전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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