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陳子昻(진자앙)의 登幽州臺歌(등유주대가)' 서화 작품]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1. 21.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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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不見古人(전불견고인): 앞선 옛사람 보이지 않고

後不見來者(후불견래자): 뒤에 올 사람도 보지 못하여

念大地之悠悠(염대지지유유): 천지의 유구함을 생각하자니

獨愴然而涕下(독창연이체하): 홀로 슬픔에 겨워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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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화도 지운 선생이 내 큰형 泰遠君을 위해 남기신 거다. 내 큰형 집이 크기는 하지만 누가 표구나 부를 해서 주어도 더는 늘어서 놀 자리가 없을 듯하다. 내가 잘 보관했다가 부나 족자나 표구를 해서 선물로 주던가 아니면 박물관을 만들어 보관해 보도록 해야겠다. 함께 올린 그림은 인터넷 서치로 찾은 건데 오래전 어느 중국 작가가 잘 표현한 것 같아 모셔온 거다. 아무튼 화딱지를 이 정도로 장엄하게 표현하다니 陳子昻(진자앙)은 대인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陳子昻(진자앙)을 본받고자 한 지운 선생도 대인이다. 비록 내 큰형에게 내린 서화지만 내가 대신 그 대인의 마음을 본받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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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앞서 간 고대(古代)의 명군(明君), 현사(賢士)와 영재(英才)를 만나볼 수 없고, 뒤를 보면 그들을 계승할 후대인들을 만나볼 수 없구나. 이 영원의 시간 속에서 무변광대한 천지와 다함없는 세월을 생각하자니, 나는 너무나 고독하여 저 가슴 밑바닥에서 우수와 비애가 솟구쳐 오르고 이에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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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題:

이 시는 진자앙(陳子昻)이 신공(神功) 원년(元年:697) 건안왕(建安王) 무유의(武攸宜)의 군막에 참여하여 거란(契丹)으로 원정(遠征)을 가서 유주(幽州)에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무유의는 군사상 무능했기 때문에 처음 접전을 치르자마자 선봉(先鋒)이었던 왕효걸(王孝杰) 등 전군(全軍)이 전멸했다. 위기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진자앙은 무유의에게 군략(軍略)을 간(諫)하여 군사를 나누어 적을 칠 것을 요청하고 앞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유의’는 진자앙의 군략을 받아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직책을 파직(罷職)당하고 서기(書記)로 강등되는 처분을 받았다. 이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감정이 가슴에서 용솟음쳐 계북루(薊北樓)에 올라 연(燕)ㆍ조(趙)의 옛일을 생각하며 이처럼 웅혼하고도 비장한 감회시(感懷詩)를 쓰게 되니 일시에 전송(傳誦)되어 천하에 그 비가(悲歌)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인 자신의 회재불우(懷才不遇)와 적막무료(寂寞無聊)한 정서가 짧은 시편 속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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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註:

1. 幽州臺(유주대) : 유주(幽州)는 지금의 북경시(北京市) 대흥현(大興縣) 지역이다. 일찍이 연(燕) 소왕(昭王)이 황금대를 이곳에 세워 현사(賢士)들을 초치(招致)하였으므로, 현사대(賢士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唐)나라 때 명칭은 계북루(薊北樓)이다.

2. 陳子昻(진자왕) : 661~702. 자(字)는 백옥(伯玉)이다. 대표작에 〈感遇(감우)〉 〈詠懷(영회)〉 등이 있으며 저서에 《陳伯玉集(진백옥집)》이 있다.

3. 古人(고인) : 연(燕) 소왕(昭王)과 같은 현군(賢君)을 가리킨다.

4. 來者(래자) : 현군(賢君)을 가리킨다.

5. 悠悠(유유) : 무궁무진의 뜻으로, 여기서는 시간의 유구함을 의미한다.

6. 獨愴然而涕下(독창연이체하) : ‘愴然(창연)’은 슬프고 아파하는 모양이다. ‘涕(체)’가 ‘淚(루)’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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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위키백과에 의하면, 진자앙(陳子昂, 661년 - 702년)은 당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백옥(伯玉)이고, 안휘성 출신이다. 열여덟 살까지 술에 취해 살아서 글씨를 읽고 쓸 줄 몰랐다. 하지만 배운 것이 없는 자신이 한심하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향 가까이의 긴가산에서 학문에 힘써 진사에 합격하게 되었다. 당시 당 고종이 죽어 묘지 위치 선정 문제가 일어났는데 진자앙은 이 문제에 대해 당 조정에 건의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고 인대정자(麟臺正字)라는 벼슬을 맡게 되었다. 696년에는 거란 토벌군의 참모를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과가 나지 않아 직위가 낮아졌다. 그리고 얼마 뒤 늙은 부모를 돌보기 위해서 귀향하였으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충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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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不見古人(전불견고인): 앞선 옛사람 보이지 않고
後不見來者(후불견래자): 뒤에 올 사람도 보지 못하여

念大地之悠悠(염대지지유유): 천지의 유구함을 생각하자니

獨愴然而涕下(독창연이체하): 홀로 슬픔에 겨워 눈물이 흐른다

   

진자앙(陳子昻)이 신공(神功) 원년(元年:697) 건안왕(建安王) 무유의(武攸宜)의 군막에 참여하여 거란(契丹)으로 원정(遠征)을 가서 유주(幽州)에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무유의는 군사상 무능했기 때문에 처음 접전을 치르자마자 선봉(先鋒)이었던 왕효걸(王孝杰) 등 전군(全軍)이 전멸했다. 위기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진자앙은 무유의에게 군략(軍略)을 간(諫)하여 군사를 나누어 적을 칠 것을 요청하고 앞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유의’는 진자앙의 군략을 받아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직책을 파직(罷職)당하고 서기(書記)로 강등되는 처분을 받았다. 이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감정이 가슴에서 용솟음쳐 계북루(薊北樓)에 올라 연(燕)ㆍ조(趙)의 옛일을 생각하며 이처럼 웅혼하고도 비장한 감회시(感懷詩)를 불렀다.
2살때 내 큰형 泰遠君이 장검대신 숟가락을 들고 한남동 원예화훼농장에 놀러온 교복입은 여학생들을 장미꽃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모습이 마치 登幽州臺歌(등유주대가)를 부르는 아기 陳子昻(진자앙)의 모습같다.
한남동 원예화훼농장에서 내 부친 방원 선생과 아들 내 큰형 泰遠君 그리고 친구분인 신구문화사의 이종익 선생과 그분 아드님이 함께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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