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71 서화보따리

동양화가 일호(一湖) 이수표(레오) 선생 작품

忍齋 黃薔 李相遠 2021. 1. 13.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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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 이수표 선생은 내 부친 방원 선생의 어린 시절 친구로 내가 1988년 12월 미국 유학을 떠나올 때까지 나도 자주 뵙던 분이다. 나는 수표 아저씨라 불렀다. 내 부친 방원 선생을 비롯해 방원 선생의 친구분들은 다들 기골이 장대하고 큰아기들도 눈을 멈추게 만드는 미남에다 멋쟁이들이었다. 수표 아저씨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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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 아저씨는 내 어린 시절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판매하셨는데 덕분에 우리 집에도 한 질이 구비되어 방원 선생의 친구분 이종익 선생의 신구문화사 아동문학 전집, 한국문학 전집, 세계문학 전집과 더불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내가 심심하면 들추어 보던 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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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기인이셔서 책 팔아서 번 돈을 섬에다 별장을 짓겠다고 배 한 척 없이 인천 앞바다의 어느 섬을 하나 사셨는데 후일담을 들어 본 적은 없다. 그러다 내 부친 방원 선생을 통해 동양화가들에게 동양화를 배우신다고 자주 화실에 다니신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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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학 2학년 때인가 천주교 신자로 본명이 레오였던 수표 아저씨는 드디어 첫 동양화 전시회를 어느 성당에서 하셨다. 그때가 수표 아저씨가 쉰다섯 되던 때였는데 화선지에 그린 산수화가 마치 화사한 서양화 같았다. 그러다 비구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범인은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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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16일 여의도 성당에서 치른 내 혼례 미사 때는 그 비구상을 그려서 축하까지 해주셨다. 그리고 난 그해 말 88올림픽 잡지풀기자단 총무 일 마치고 미국 버지니아텍으로 유학길에 올라 까맣게 '수표 아저씨'의 근황을 모르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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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친 방원 선생의 유품인 서화 보따리 속에서 1982년 서양화 식으로 그리신 산수화와 내 혼배성사 때 주셨던 그 비구상화가 나왔다. 수표 아저씨의 동양화가로서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성당 쪽으로 알아보니 내 혼배성사 이후 '십자가'를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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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10일에는 신세계 본점에서 '이수표 동양화전'을 성대하게 개최했다고 한다. 또 제6회 개인전을 1994년 3월 30일부터 4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동주갤러리에서 '부활절 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최하여 '십자가 성화', '봄이 있는 언덕 위의 교회' 등 신앙을 주제로 한 비구상화 30여 점을 선보이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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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환경공학을 공부한다는 걸 들으시고는 환경운동도 열심히 시작하셔서 배달환경연합의 고문으로도 활동하셨다고 한다. 작가로서는 동남아 미술전 및 국제문화 미술대전, 한국 문화예술제 등의 초대작가였으며 조선일보 미술관, 신세계 미술관 등지에서 6회에 이르는 개인전을 개최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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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친 방원 선생이 작고하신 뒤, 수표 아저씨가 어찌 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미국 유학한다고 날 귀여워해 주고 아껴주셨던 어른들에게 인간 노릇을 못했다. 이제 수표 아저씨는 내 부친이 남겨 놓으신 작품 두 점으로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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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서양화 식으로 그리신 산수화
혼배성사 때 주셨던 그 비구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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