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4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 Reason and Revolution by Herbert Marcuse 1941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2. 2.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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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pUPAdyHUY

 

4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 Reason and Revolution by Herbert Marcuse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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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혁명은 마르쿠제가 1941년에 쓴 저작으로, 독일에서 출생하여 미국 국무성 해드싱크로 냉전시대를 관통한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적 마르크스주의를 시작으로 일차원적 인간에서 서구와 미국의 부르주아적 삶을 조롱하는데 그치지 않고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조차 철저하게 관료화되었고 부정적 사고나 비판적 성찰의 힘이 쇠퇴하여 자본주의에 순응했다고 양비론을 펼쳤습니다. 노동계급이 순응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느꼈던 혁명은 결코 일어날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마르쿠제의 성찰은 미국과 서구의 자본계급에게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기존 좌파에 실망한 60년대 대학생들의 신좌파운동과 프랑스의 68혁명등 급진 정치세력, 하다못해 여성의 에로틱화를 경계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열열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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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의 생애 – Life of Herbert Marc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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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1898 7 19일 독일 베를린에서 섬유업체 사장인 유대인 상류층 부부인 칼 마르쿠제와 거트루드 크레슬랍스키 사이에서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마르쿠제의 정식 교육은 몸젠 김나지움에서 시작해서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샤를로텐부르크의 카이세린-아우구스타 김나지움에서 계속되었습니다. 1916년에 마르쿠제는 독일군 징집 되었지만 세계 대전 중에는 베를린의 비행선 교체사단의 마구간에서만 일했습니다. 마르쿠제는 중단된 사회주의자 스파르타시스트 봉기에 참여하여 군인 평의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1919 마르쿠제는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교에 다니며 4학기 동안 수업을 들었습니다. 1920 독일 문학, 철학, 정치, 경제학에 집중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편입했습니다. 1922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마르쿠제는 독일의 예술로서의 소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출판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2 후인 1924 그는 수학자인 소피아 베르트하임과 결혼했습니다. 마르쿠제는 1928 프라이부르크 돌아와 에드문트 후설 함께 공부하고 1929년부터 마르틴 하이데거 밑에서 교수 자격 논문 작업을 시작했으며 , 1932년에 헤겔의 존재론과 역사성의 이론 (Hegels Ontologie und die Theorie der Geschichtlichkeit)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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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삶과 역사의 존재론, 관념론적 정신론과 변증법을 강조하여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헤겔 르네상스의 맥락에서 작성되었습니다. 하지만 1932 마르쿠제는 친나치 성향을 보이는 하이데거 밑에서 교수 자격 논문을 마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결국 하이데거는 1년뒤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마르쿠제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고 반유대주의가 증가함에 따라 나치 정권 하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할 수 없다는 알았습니다. 마르쿠제는 1933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 연구 연구소에서 일하도록 고용되었지만, 연구소는 나치의 인수를 예상하여 네덜란드에 기부금을 예치했기 때문에 마르쿠제는 실제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일하지는 못했습니다. 마르쿠제는 지사가 설립된 스위스로 피신하여 후설의 추천으로 제네바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연구소의 일원으로 비판적 사회 이론의 모델을 개발하고 국가와 독점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이론을 만들었으며 철학, 사회 이론 문화 비평, 독일 국가 사회주의 대한 분석과 비판을 발표하면서 연구소에 있는 동안 다른 이론가들과 긴밀히 교류했습니다. 1933 5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 마르쿠제는 1934 6월 말에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마르쿠제는 1934년부터 1942년까지 컬럼비아 대학 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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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는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W. 아도르노와 교류하며 1940년대에 이성과 혁명을 포함하여 헤겔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변증법적 작품들을 출판했습니다. 이 기간중인 1940년에 마르쿠제는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 2 세계 대전 중인 1942년부터 마르쿠제는 워싱턴 DC 미국 전쟁 정보국(OWI)에서 나치 선전 프로젝트를 담당했고, 1943년에는 중앙정보국의 전신인 전략국(OSS) 연구분석과로 옮겼습니다. 하버드 역사학자 윌리엄 L. 랭거 (William L. Langer ) 지휘하는 연구분석(Research and Analysis)분과는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미국 연구 기관이었습니다. 1943년에서 1945 사이 전성기에는 1,200 이상을 고용했으며 400명은 해외에 주둔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이곳은 2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과학이 탄생한 곳으로,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학 교수들과 수많은 유럽 지식인 망명자들이 연구원으로 참가했었습니다. 연구원들은 설립자 윌리엄 J. 도너반 (William J. Donovan) 따르면 비밀 서비스를 위한 "최종 정보 센터" 역할을 미국 전쟁 기계의 "이론적 두뇌 트러스트" 구성했습니다. 그룹은 전쟁 전략이나 전술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모인 전문가들이 관련 자료를 해석할 있는 고유한 능력 덕분에 워싱턴으로 향하는 방대한 군사 정보 흐름을 수집, 구성, 분석 필터링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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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3 마르쿠제는 연구분석분과의 중부 유럽 섹션에서 수석 분석가로 동료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인 프란츠 노이만 팀에 합류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의 주요 분석가" 빠르게 자리 매김을 했습니다. 1945 전략국(OSS) 해체된 마르쿠제는 국무부에 고용되어 중부 유럽 부서장으로 일했으며 나치즘의 정보 분석가가 되었습니다. 마르쿠제의 보고서 편집본은 나치 독일에 대한 비밀 보고서인 '전쟁 노력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기여' 비밀이 해제된 201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마르쿠제는 1951 번째 부인 소피아 베르트하임이 사망한 미국무부에서 퇴직했습니다. 마르쿠제는 먼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 이론가로 강의 경력을 시작했고 1952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에서 가르쳤습니다. 마르쿠제는 1954년부터 1965년까지 보스톤의 브랜다이스 대학교 에서 가르치며 1964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 출판했습니다. 마르쿠제의 사상이 대학생들의 신좌파운동을 선동한다며 유태인계 브랜다이스 대학이 교수갱신을 거부하자, 1965년부터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UC 샌디에고 대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1968년 켈리포니아 주지사 로란드 레이건이 마르쿠제가 대학생들의 신좌파 폭력운동을 선동한다며 그의 UC 샌디에고 교수 재임용에 반대했지만 UC 샌디에고는 마르쿠제의 교수계약을 1970년까지 2년연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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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는 결혼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수학자 소피아 베르트하임(Sophie Wertheim, 1901–1951)이었고, 1924년에 결혼하여 1928년에 컬럼비아 대학 도시계획과 명예교수를 지낸 아들 피터(Peter) 낳았습니다. 1934 뉴욕으로 이주하기 전에 그들은 프라이부르크, 베를린, 제네바, 파리에 거주했습니다. 그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로스앤젤레스의 산타모니카와 워싱턴 DC 살았습니다. 1951 소피아 베르트하임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르쿠제는 나중에 절친한 친구인 프란츠 노이만 (1900~1954) 미망인 잉게 노이만(1914~1973) 두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마르쿠제는 잉게 노이만 마르쿠제 사이에 자녀가 없었지만 그녀의 아들인 토마스 노이만과 마이클 노이만을 양육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토마스는 오샤(Osha)라는 이름으로 버클리에 기반을 작가, 활동가, 변호사 벽화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이클은 캐나다 온타리오 피터버러에 있는 트렌트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번째 부인 잉게가 1973년에 사망한 마르쿠제는 1976년에 캘리포니아 UC 샌디에고 대학교 대학원생이자 언어강사였던 에리카 셰로버(1938–1988) 세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마르쿠제의 손녀는 소설가 아이린 마르쿠제(Irene Marcuse)이고 그의 손자 해롤드 마르쿠제(Harold Marcuse) UC 산타바바라의 역사학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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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UC 샌디에고 대학교 교수를 지내던 마르쿠제는, 19797 29, 여든한 번째 생일을 맞은 열흘 만에 서베를린 방문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뢰머베르크 회담에서 강연을 마치고 2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초청으로 슈타른베르크에 있는 막스 플랑크 과학 기술 세계 연구 연구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시신은 오스트리아에서 화장되었고 유골함은 그의 아내에 의해 미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유골은 묻히지 않고 잊혀졌고 2003 미국에서 그의 유골이 재발견되어, 유골의 소유권은 그녀의 아들 피터 마르쿠제와 그의 손자 해롤드에게 넘어갔습니다. 2003년에야이후 지인들의 설득에 의해 그들은 결국 마르쿠제를 그의 고향인 베를린의 도로텐슈타트 묘지에 묻혔습니다. 장례식은 2003 여름 베를린 미테에 있는 도로텐슈타트 묘지(Dorotheenstädtischer Friedhof)에서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열렸으며, 그곳에서 수많은 저명한 인물들이 그의 마지막을 추모했습니다. 묘비는 건축 평론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브루노 플리에르가 디자인했습니다. 비석은 앞에서 보면 강단에 놓여 있는 책상 모양이고, 옆에서 보면 1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마르쿠제의 주요 작품인 일차원적 인간 연상시킵니다. 장례식 전날, 1967 마르쿠제가 했던 유명한 강의 '유토피아의 종말' 했던 장소인 베를린 자유대학교 강당에서는 대학 철학연구소의 주최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철학을 주제로 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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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의 사상 – Thought of Herbert Marc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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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는 정치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 주니어와 정치 철학자 로버트 울프의 친구이자 협력자였으며, 신좌파(New Left)운동 창시자 명인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 교수 C.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 일차원적 인간에 대한 그의 소개에서 마르쿠제는 "나는 C. 라이트 밀스 작업의 중요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라고 썼습니다. 레섹 코와코프스키에 따르면 전후 기간에 마르쿠제는 계급 투쟁 이론과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심을 거부하고 "물질적 존재에 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도덕적 명령과 금지는 이상 관련이 없다"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성애적 본성의 실현을 인류의 진정한 해방으로 여겼으며, 이는 제리 루빈과 다른 사람들의 유토피아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대한 마르쿠제의 비판,특히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 에로스와 문명의 1955 종합 , 1964 저서 일차원적 인간은 1960년대 학생 운동의 우려에 공감했습니다. 학생 시위에서 연설하려는 그의 의지와 1965년 판 그의 에세이 억압적 관용때문에 마르쿠제는 언론에서 신좌파의 아버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르쿠제는 60년대의 학생들이 운동할때 자신의 작품 출판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신좌파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미디어의 낙인을 가볍게 무시하며, "나를 신좌파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르쿠제의 작품은 대중문화 대한 지적 담론과 학문적 대중문화 연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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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미국과 서구권에서 많은 연설을 했습니다. 마르쿠제는 프랑스 철학자 안드레 고르츠(André Gorz) 절친한 친구이자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르쿠제는 작고하기 직전 1979"내부로부터의 변화"라는 에세이를 통해, 당시 체포되어 구금된 동독 반체제 인사로 대안: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저술한 루돌프 바로(Rudolf Bahro) 공개적으로 변호하였습니다. 마르쿠제는 에리히 프롬과 함께 정신분석과 사회학의 공동연구서 권위와 가족을 저술하였습니다. 맑스주의를 사회적 변화에 맞게 재해석한 사회학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헤겔학자이자 현대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판자로서 알려져 있지만, 그의 학문의 출발점은 현상학, 특히 프라이부르크에서 사사한 하이데거에 있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정치적 좌파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가로서 마르쿠제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연구가로서 또는 고도산업사회의 비판적 이론가로서 그리고 1960년대 후반의 세계적 규모의 학생운동의 긍정적 이데올로그로서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철학적으로는 헤겔의 변증법, 사회이론으로는 마르크스의 노동의 소외 사상, 문명론으로는 프로이트의 에로스 사상을 통합하여, 현대의 고도산업사회와 산업문명에 대한 변증법적인 부정철학이론인 '비판이론'을 개진하였습니다. 마르크제는 문명의 비평가로 이름을 떨치며 우파학자들 뿐만 아니라 신좌파운동 그리고 프랑스의 68혁명등 급진 정치세력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들에게 조차 열열한 지지를 받는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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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혁명 배경 – Background of Reason and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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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혁명(Reason and Revolution)’은 마르쿠제가 세계평화와 청년들의 정신적 해갈을 위하여 1941년에 저술하였으며 한편으로 영미권에 독일 철학, 특히 헤겔철학을 소개하고, 실증주의자들이 헤겔과 맑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고자 쓰인 책입니다. 따라서 헤겔 철학의 부활보다는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 점점 망각되어 소멸할 위험에 처해 있는 하나의 정신기능인 부정의 힘, 즉 부정적 사유능력의 부활에 작으나마 공헌을 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쓰여졌습니다. 헤겔이 정의했듯이 “본질적으로 사유란 우리 눈앞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면 헤겔 변증법의 중심적 범주를 이루는 헤겔의 이 ‘부정’이란 “상식과 전통적인 과학적 사상은, 세계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물들의 총체로서 파악하고, 인식하는 주체와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대상에서 진리를 구한다. 이러한 것은 인식론적 태도에 그치지 않고 마치 일상적 습관처럼 세상에 팽배하게 번져 있는 태도로,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적 사실들을 인식하고 논의할 때만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도록 한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있는 주체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그리고 주체의 진리가 아닌 진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러한 죽은 객관성을 파괴하지 않고 사물이나 법칙의 고정된 형식의 '배후에 있는'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한, 세계는 소외된 그리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남는다."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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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는 1960년대말경 서구에서 대두되었던 뉴레프트 신좌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맑스의 문장들을 풍부하게 긍정적으로 인용 해설한 책으로서 이성과 혁명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마르쿠제의 ‘위대한 거부’의 정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헤겔의 정식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역시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맑스와 프로이드를 이해한 하면서 허위의식과 무의식을 자신의 이념적 욕구 때문에 과학 대신 희망으로 편집했습니다. '이성' 자유를 향한 역사, 그리고 현실 변혁적인 '부정의 '으로 규정, 모순 개념을 역사를 추진하는 원동력으로 파악합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마르쿠제는 인간의 진정한 욕구를 억압하고, 인간의 노동을 소외 시키는 현대 산업사회의 비인간적 합리성을 비판하며 동시에 우리의 현실 '가짜 긍정의 철학' 실증주의에 대하여 근본에서부터 비판했습니다. 마르쿠제는 이 책에서 헤겔 막스의 사회 이론에 대해 심도깊게 논의합니다. 마르쿠제는 헤겔의 기본 개념이 파시즘 으로 이끈 경향에 적대적임을 입증할 목적으로 헤겔을 재해석합니다.  마르쿠제는 사회학자 레너드 홉하우스( Leonard Hobhouse ) 1918년에 국가의 형이상학적 이론(The Metaphysical Theory of the State)’에서 제안한, 헤겔이 독일 권위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준비를 제공했다는 테제를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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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판의 부록에서 마르쿠제는 "헤겔 철학 해석의 최근 주요 발전은 전후 프랑스에서의 헤겔 연구의 부흥"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르쿠제는 "이상주의와 유물론 변증법 사이의 내적 연결" 명확하게 보여주는 새로운 프랑스어 해석을 인정했습니다. 이성과 혁명 초판은 1941 옥스포드대학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 두번째는 1954 휴머니티 프레스에서 출판되었습니다. 1960년에 책은 비콘출판사에서 문고판으로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정신 분석가 에리히 프롬은 이성과 혁명 "훌륭하고 예리한" 그리고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열어준 가장 중요한 작업을 "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역사가 피터 게이(Peter Gay ) 헤겔과 마르크스에 관한 학술 문헌에서 소외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의 하나로 묘사했습니다. -미셸 팔미에(Jean-Michel Palmier) 마르쿠제의 헤겔 존재론과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영향을 받은 헤겔의 1932 해석인 역사성의 이론 대한 반대 작업으로 이책을 보았습니다 . 마르쿠제는 맑스와 헤겔, 프로이드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프랑크푸르트 학파 속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철학자입니다. 그의이성과 혁명 헤겔의 변증법의 질서를 부정의 철학이라고 규정하고, 역동성을 원동력으로 삼으려 했던 역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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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기에는 변증법적 사유란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전도된 세계의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며, 속에서 존재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부정하려는 것에 맞서 끊임없이 부정하는 역동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가 보기에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적인 것이며, 내적 원동력으로서 모순의 내재적인 변화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인 셈입니다. 부정을 통해 기성질서를 뛰어 넘어서려고 부정은 규정적입니다. 그것은 현실비판의 날카로운 의식적인 해방을 밝히기 위한 변증법적 사유의 부활을 위한 그의 지적 작업을 함의합니다. 그의 헤겔 철학 해석은 독특하게도 삶의 기성 양식에 대한 역사적 부정을 의미하며, 전도된 세계에 대한 실천적 부정을 의미합니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파시즘의 부활에 직면한 상황에서 헤겔 철학을 분석하여 파시스트적 경향과의 대결을 추구하였습니다. 마르쿠제는 파시즘에 맞선 인간해방의 철학적 전략을 구성하기 위하여, 그의 역작에로스와 문명일차원적인 인간이라는 저작들의 기반을 책에서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책은 프랑스의 1968 68혁명을 맞이하기 직전에 마르쿠제가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지점을 보여주는 저작으로써 그가 68혁명의 사상가로서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철학적인 심급에서 다시 한번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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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혁명
의 내용 – Contents of Reason and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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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판 서문 변증법에 대하여를 보면, 마르쿠제는 이 책은 헤겔 철학의 부활보다는 오늘날 망각되어 소멸할 위험에 처해 있는 하나의 정신기능 즉 부정적 사유능력의 부활에 작으나마 공헌을 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쓰여졌다. 세계는 그 자체 모순적인 세계상식과 과학은 이러한 모순을 스스로 피하려 하지만 철학적 사유는 사실이 상식과 과학적 이성이 강요하는 제개념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상식과 과학의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끊임 없는 부정의 변증법을 논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적 기초를 헤겔 철학에서 재조명하는 데 1914년 레닌의 방식과 닮았으나 실천이 아닌 철학에 머무르는 추상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변증법이 상식과 과학 개념들에 적용하는 부정(negative)이란 실재하는 모순을 거부하는 기존 논리학에 대한 비판이며 기존 사상과 체제에 대한 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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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파악하는 것은 사물의 참된 존재양식을 파악하는 것인데 현실의 모순 부정합성을 분석하는 도구가 바로 부정적 사유능력으로서의 철학입니다. 이를 위해 마르쿠제는 기존 논리학을 뒤집은 헤겔을 연구하면서 실증(positive) 철학과 투쟁하는 부정(negative)의 철학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논했습니다. “진정한 존재는 진정한 운동이며, 진정한 운동은 주체가 객체와 완전히 통일되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헤겔에게 진정한 존재는 사상이고 이성입니다. 헤겔은 모든 존재'를 과정이나 운동으로 간주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지극히 역동적인 성격을 재발견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르쿠제는 이성과 혁명의 제1헤겔철학의 기초에서 변증법의 양식은 부정성에 의해 관통된 세계 모든 것이 그 실상과 다른 무엇이며 대립과 모순이 진보의 법칙을 이루는 세계를 표출하는 그러한 세계의 진리인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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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 헤겔; Reason - H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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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의 레닌이 헤겔로 다시 돌아갔을 때처럼 마르쿠제도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 헤겔에게서 기존 관념론인 형이상학과는 다른 요소를 발견하는데 바로 책 제목에 명시한 주요 개념인 이성입니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포괄적 명제를 내놓는데 헤겔에게 이성이란 기존 형이상학이나 논리학에서 규정한 고정된 것이 아닌 운동을 본질로 합니다. 즉 이성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내포한 현실가능태또는 맹아까지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헤겔의 존재론은 물질보다 정신을 우선하는 관념론이므로 그의 정신현상학은 세계의 궁극적 본질인 절대이성정신을 향해 자유를 동기로 자기운동을 하는 이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서술방식을 유물론으로 뒤집은 것이 바로 상품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체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니 헤겔의 변증법적 영향력은 정말 큽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철학적 기초 개념을 토대로 헤겔이 1807년에 발표한  정신현상학’, 1812년부터 1816년까지 집필한 대논리학’, 1816년부터 1821년까지 집필한 정치철학’, 그리고 1822년부터 1831년까지 집필한 역사철학등을 분석했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인간 개별 이성절대이성이라는 총체성을 향해 경험하는 자기운동 과정으로 자유’, ‘노동’, ‘소외’, ‘소유등의 중요한 철학 개념들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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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리학절대지성인 이성과 정신의 기초를 다루는데 모든 사물은 그 자체의 본성에 속하는 부정성으로 인해 대립물과 연결되어 있으며사물이 참다운 자기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현재 그것이 아닌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사물은 그 내적 자기모순을 통해 운동하고 변화하며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논리학으로서, 모든 것을 불변으로 전제하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리학부정합니다. 여기서 마르쿠제는 모순’, ‘대립물’, ‘개별’, ‘보편’, ‘이행’, ‘운동개념을 논하며 현재 그것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변화가능성실재성으로 인식했습니다. 마르쿠제는이성과 혁명의 제1장에서 “… 가능적인 것은 또다른 실재의 조건으로서 파악된 주어진 실재성이다. … ‘사실실존하기 전에 존재한다는 헤겔의 유명한 명제는 이제 그 정확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된다. … ‘사실실존하기 전에 수없이 흩어져 있는 현존하는 제 자료 안에 하나의 조건의 형태로서 존재한다. … ‘사실은 아직 사실이 아닌 것’, 그리고 아직 그 자체를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주어진 현실로 현현하지 못한 것과 관계되는 한에서만 사실이다.이라고 설명합니다.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에 의하면, 헤겔의 정치철학국가절대이성정신으로 상정하고 사적 소유법의 지배를 정당화했으며 헤겔의 역사철학은 지금까지의 논리학적 결론으로 역사의 간지를 끌어들여 헤겔의 관념론적 필연을 완성시키므로 사실 정치철학역사철학에서 물려받을 것은 별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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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마르쿠제는이성과 혁명의 제1장에서 기존 현실의 내용은 새로운 형태로의 자기전환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그 전환은 그것이 우연적인 실재가 현실적으로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에서의 필연의 과정이다. 현실성에 대한 변증법적인 해석은 우연성, 가능성 및 필연성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을 폐기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의 포괄적인 과정의 계기로서 통합한다. 필연성은 우연적인 실재를, 즉 기존의 형태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 유지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필연성은 우연적인 실제가 그것에 합당한 형태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이다. 헤겔은 이것을 현실성의 과정이라 부른다.고 명료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헤겔의 부정(negative) 철학은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긍정하는 실증(positive) 철학을 넘어 철학을 한 단계 진보시켰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철학적 방법론으로 변증법이 완성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선듯 동의할수는 없지만 마르쿠제는 이 책에서 이성은 헤겔에 이르러 변증법을 만나 완성되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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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 마르크스; Revolution – Karl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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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는 이성과 혁명2장 사회이론의 발흥에서 헤겔은 주장하기를 진리는 어떤 단순한 요소 안에도 현존해야만 하는 전체이며 따라서 만일 단 하나의 실질적인 요소나 사실이 이성의 과정과 결합될 수 없는 경우에도 전체의 진리는 파괴된다고 했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요소, 즉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는 이른바 이성의 현실과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이성의 부정을 증명하는 하나의 완전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는 진리가 실현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역사와 사회적 실현 그 자체는 이처럼 철학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 이론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역사적 실천의 작업이 된다.고 돌연 헤겔을 보기좋게 한방 먹입니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헤겔이 완성한 독일의 사변적 관념론은 그 철학의 기초가 되었고, 마르크스-엥겔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하여 물질정신보다 우선한다는 유물론으로 홀라당 뒤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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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그 구조상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한다는 현실을 분석하며 노동의 소외를 새롭게 정의한 바 개별적이고 실존적 노동이 아니라 위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 구조적으로 편입되어 가동되는 착취당하는 노동은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분석의 토대는 역시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총생산의 사회화의 모순을 담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자본가와 노동자를 계급으로 대립시키는 생산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현실과 그 변화 가능성을 매개하는 것은 노동이고 이 보편적 노동을 담지하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존재가 이 체제의 진리를 담보한다는 것입니다. , 다수 노동계급 내에 그 자체로 체제 변혁의 가능성과 운동 그리고 이행의 진리가 있으며 이것의 형식이 혁명이라는 겁니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철학의 이성은 마르크스에 이르러 혁명으로써 그 진리를 궁극적으로 완성한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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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성과 혁명 레닌 혹은 칼 막스; Reason and Revolution – Vladimir Lenin or Karl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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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변혁의 철학적 근거를 헤겔 철학의 변증법으로 운동하는 이성에서 찾고 있는데, 그 현학적 논리를 빼면 결국 내용상 1914년 레닌의 철학노트의 반복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마르쿠제의 초기 저작인 이 이성과 혁명은 이미 쫑나버린 독일 관념론자인 헤겔을 부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현실을 불변의 것으로 선언해 버린 스탈린주의라는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로 변질된 레닌주의를 넘어 끊임없는 부정의 사유방식으로써 지속적인 혁명을 수행하는 새로운 실천적 철학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마르쿠제는이성과 혁명의 결론인헤겔주의의 종언에서 사회의 자연법칙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회주의 혁명은 이 법칙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것 헤겔에게서 정점에 달한 독일 관념론은 사회-정치적 제도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과 일치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반면, 권위주의 체제는 개인의 이해에는 개의치 않은 채 모든 개인을 경제적 과정 속으로 강제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사회질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며 오래전에 헤겔주의가 종언되었고 소련연방의 붕괘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도 종언되었지만, 독점자본이 강화되고 자본가를 넘어 자본 자체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작금의 자본 제국 체제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역시 부정의 철학으로 끊임 없이 갱신되고 혁신되어야 할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철학임에 분명하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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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혁명 (Reason and Revolution)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이성과 혁명을 통해 60년대 대학생들의 신좌파운동과 프랑스의 68혁명등 급진 정치세력, 하다못해 여성의 에로틱화를 경계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열열한 지지를 받았고 아직도 그 흔적을 따라가는 전세계 후학들이 널려있음을 알게합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40번째 책 인문학 부문 10번째 책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1941년에 출간한 이성과 혁명 (Reason and Revolution)”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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