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41.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2. 1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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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Jn-dCw3s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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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입니다. 사르트르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1945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사르트르는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정치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와는 부부적인 관계 이외에도 학문적인 동반자로서 서로의 원고를 검토해주는 평생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라 이름짖고 그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하이데거의 독일 현상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카뮈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메를로퐁티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을 대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의 교황’이라고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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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6.25 전쟁이 벌어지자 사르트르도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에 동조하며 대한민국이 북한을 침략했다가 격퇴당했다 말하면서, 1950년대 초 대한민국의 북침설을 주장하며 북한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북침을 확신했다가 레이몽 아롱, 메를로 퐁티와 심하게 다퉜습니다. 그 후 북한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자 사르트르는 다시 남침유도설로 입장을 바꾸는데,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북한을 사랑했던 철학자였습니다. 비록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소련 지지를 거두긴 했지만 말이지요. 자 그럼, 인간의 내면에서 해답을 얻던 본질주의, 에샌셜리즘(Essentialism)철학에서 본질, 내면을 벗어나 멀리서 인간의 실존을 바라보며 해답을 찾는 실존주의, 엑스탠셜리즘(Existentialism)을 사르트르의 생애와 그의 저작 ‘존재와 무’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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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의 생애 – Life of Jean-Paul Sa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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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6.21 ~ 1980.4.15)는 1905년 6월 21일 파리 16구에 있는 외조부 집인 미냐르로 13번지에서 부르주아 가문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Jean-Baptiste Sartre)와 어머니 안마리(Anne-Marie) 사이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삼촌 조르주는 파리 이공과 대학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나온 조선 공학자이고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도 마찬가지로 파리 이공과 대학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나온 프랑스 해군 장교였습니다. 어머니 안마리(Anne-Marie)는 알자스의 독일어 교사였던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의 딸이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사촌입니다. 그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인 1906년 9월에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의 후유증인 황열병으로 사망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위엄있고 엄격한 외조부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와 사시(斜視) 그리고 외갓집의 낯섦 등으로 심리적 부담이 있었지만, 외조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고, 이에 사르트르는 외조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글쓰기에 전념했습니다. 사르트르는 1915년에 파리의 명문 중고등학교인 앙리 4세 리세・루이 르 그랑에 입학하는데, 이때에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1905년~1940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7년 어머니가 당시 공장장 조제프 망시와 재혼하게 되면서, 양부를 따라 1917년에 라로셸(La Rochelle) 학교로 전학하게 되는데, 사르트르는 잘 적응하지 못했고 이 시기에 어머니의 돈을 훔쳐 할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하고, 아름다운 소녀에게 고백했다 실패하여 자신의 추함을 자각하게 됬다는 에피소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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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라로셸에서의 '나쁜 영향'을 염려한 가족들에 의해 사르트르는 1920년 다시 앙리 4세 리세・루이 르 그랑로 돌아왔고, 폴 니장과도 재회하여 폴 니장이 죽던 1940년까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폴 니장과의 교류로 인해 사르트르는 농담과 장난에 뛰어난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22년부터 2년 동안 앙리 4세 리세・루이 르 그랑에서 국립 고등사범학교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입학을 위한 준비반 과정도 폴 니장과 함께했습니다. 그해에 간행한 동인지 ‘무명잡지(Revue sans titre)’에 사르트르는 관습에 묻힌 삶을 경멸하고 풍자한, 지방 교사의 울적한 이야기를 다룬 짧은 꽁트 두 편을 쓰며 첫 문학 작품인 단편소설 ‘병든 사람의 천사’를 발표했습니다. 동시에 사르트르는 폴 니장과 함께 학급에서 유명한 장난꾸러기로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졸업후 고등사범학교에는 낙방하여 재수해서 이듬해인 1924년 고등사범학교에 수석 입학했습니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과 모리스 메를로 퐁티 등과 교제하였으며, 1927년에는 폴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습니다. 1928년에 1급 교원 자격 아그레가시옹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지만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에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됩니다. 폴 니장도 같은 해에 합격했습니다. 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했습니다. 군복무중에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도 있었으나 극적으로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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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인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 있는 르아브르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20페이지 분량의 ‘진리의 전설’을 집필하는데, 순전히 사르트르 자신의 지식만으로 저술된 이 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출판이 거부되었습니다. 1929년 후설이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한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를 놓친 후, 1932년 베를린 프랑스 문화원의 강사로 있던 레몽 아롱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설의 현상학에 관해 듣고, 다음 해에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생으로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현상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합니다. 1935년에 상상력에 대한 실험을 위해 친구였던 의사 라가슈로부터 메스칼린 주사를 받았는데, 이때 온몸을 게와 낙지가 감싸고 도는 환각을 겪었고 그 때문에 반년 동안 우울증 증세로 괴로워했고 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이후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벽’을 완성했고 1938년에는 소설 ‘구토’를 출판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군에 징집되었다가 1940년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1941년에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귀향한 후, 메를로퐁티 등과 같이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습니다. 1943년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됩니다.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당시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인 알베르 카뮈를 알게 됩니다. 1943년에 발표한 희곡 ‘파리떼’는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에서 뒤랭에 의해 상연되었습니다. 그 후 ‘출구는 없다’가 성공을 거둔 이후 ‘무덤 없는 사자(死者)’, ‘공손한 창녀’, ‘더러운 손’과 ‘악마와 신’, ‘네크라소프’, ‘알토나의 감금자’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고 뒤마의 ‘키인’,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의 번안(飜案) 등을 합하여 실존주의 연극시대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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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인 뒷받침과, 고전적인 극작법의 기술과, 철학자로는 보기 드문 무대적인 감각과, 시사적인 소재 등을 고루 갖추어 세계적인 성공을 얻었습니다. 양식이나 내용상 희곡으로서의 신선미는 약간 부족하나 연극에 코뮤니즘과 크리스차니즘 이외의 사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큰 공적입니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잡지 ‘현대’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1945년 장 폴 사르트르는 보나파르트가 42번지에 자리를 잡아 1962년까지 거기서 거주했습니다. 해방 이후, 사르트르는 현저한 명성과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는 10년 이상 프랑스 문학계에 군림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은 그가 1945년 창간한, 국제적 차원에서 가장 권위있는 프랑스 잡지로 여겨지는 ‘현대’라는 잡지를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회상록(Mémoires)를 통해 밝혀진바에 의하면, 사르트르는 1945년 미국에서 만난 기자 돌로레스 바네티와 5년간의 연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시절, 두 번의 긴 여행 동안 미국을 이해하게 한 모든 열쇠를 사르트르에게 쥐어주어 다른 대륙으로의 문을 열게 한, 뉴욕의 프랑스 기자에게 품은 5년 간의 열정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철학자 사르트르는 1945년 10월 ‘현대’의 창간호의 서문에 ‘돌로레스에게’를 넣어 그녀에게 헌정했습니다. 1948년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경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1949년 11월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현대’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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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6.25 전쟁이 벌어지자 사르트르는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가 격퇴당했다 말하면서, 1950년대 초 남한의 북침설을 주장하며 북한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북침을 확신했다가 레이몽 아롱, 메를로 퐁티와 심하게 다퉜습니다. 그 후 북한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자 사르트르는 다시 남침유도설로 입장을 바꾸는데,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북한 정권을 계속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소련 지지를 거두게됩니다. 1960년대에 실존주의는 침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프랑스 문학과 지적 이념에서 사르트르의 영향은 점점 줄어들었고, 특히 민족학자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푸코나 정신분석학자 라캉같은 구조주의자들과 대립했습니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대립했습니다. 구조주의에서 인간의 자유는 좁은 자리를 차지했고,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구조 속에 배열되었습니다. 사회 구조의 필연성에 대한 자유의, 의식에 대한 의식의 우위의 옹호자이던 사르트르는 구조주의라는 새 흐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학창작과 19세기 연구에, 특히 그를 항상 사로잡은 플로베르의 연구에 헌신하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더욱이, 1960년대에 사르트르의 건강은 심하게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정치와 문학에 과잉 활동을 했고 담배와 술로 인하여 너무 일찍 쇠약해졌습니다. 1960년에 그는 그의 두 번째 주저인 ‘변증법적 이성 비판 1부’를 출간했는데, 이것은 그의 정치적 참여, 즉 ‘앙가주망’을 잘 보여줍니다. 1964년 10월 22일 ‘말’을 출판한 후 노벨 아카데미는 장 폴 사르트르를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했지만, 이틀 뒤 1964년 10월 24일, 그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그것에 관련하여 더 길게 설명했으며, 그 본문은 나중에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와 ‘르 피가로’에 각각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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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습니다. 거절의 이유로 사르트르는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르트르는 1945년 레종 도뇌르를, 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교수직을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널리 알려져있는데 왜냐하면 이런 거절이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한 지식인의 정신 상태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964년 사르트르는 아를레트 엘카임(Arlette Elkaïm)을 입양했습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사르트르는 러셀 등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반전시위를 벌였습니다.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알베르 카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는 1967년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난하고 재판하던 증인과 운동가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지식인의 법정을 자처한 러셀 법정(Russell-Tribunal)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의장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사후에 미완결로 나올 ‘변증법적 이성 비판2부’를 준비하던 사르트르는 1968년 5월 68사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만약 그가 1968년 5월 68사태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거리에서, 강단에서, 신문에서, 파업공장의 입구에서 저항의 반향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계의 학생 운동과 함께 우리가 여기서 표명한 연대는 ... 모든 정치 체제와 조직의 기만에 대한 첫 응답이다. 모든 언론기관은 몇 달간 이 운동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변질시키고자, 혹은 조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라며 1968년 5월 1일 ‘르 몽드’의 논단에서 사르트르는 언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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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의 68운동에서 사르트르는 청년들을 향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샤를 드골 대통령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고 합니다. 한편 한국의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김지하는 풀려났습니다.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귀스타브 플로베르 평전 ‘집안의 천치’ 1, 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에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습니다. 특히 사르트르에게 실명은 죽을 때까지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요독증에 걸린 사르트르는 1980년 4월 15일 74세가 임박한 나이에 지병인 폐기종이 악화되어 치료를 받다가 파리 브루세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프랑스와 세계각국의 신문사들에 특보로 실렸으며, 1980년 4월 19일에 거행된 그의 장례행렬에는 ‘르 아브르나 파리’에서 사르트르가 가르쳤던 옛 제자들, 1950년대의 공산당원과 ‘리베라시옹’ 동지들, 알제리에서의 평화를 외친 사회 운동가들, 그리고 젊은 모택동주의자 마오이스트들을 포함한 무려 5만 명이 모여 파리 도로를 메우며 그 행렬을 따라가며 그의 죽음을 애도 했습니다. 그는 파리 14구 몽파르나스 묘지 20 구— 에드가키네 대로 주 입구 바로 우측에 안장되었습니다. 1986년 4월 14일에 죽은 시몬 보부아르는 그의 옆에 묻혔습니다. 묘비에는 "Jean-Paul Sartre, 1905-1980"이라는 간결한 비명이 쓰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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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장 폴 사르트르는 철학서는 물론 소설, 수필, 연극, 영화시나리오, 문학비평, 정치평론 등등 다양한 형태로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사르트르의 작품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 1946)’와 ‘변증법적 이성 비판(La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1960)’같은 당대 깊은 영향을 준 철학 저술이 있으며, 소설로는 ‘벽(Le Mur)’, ‘구토(La Nausée)’,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 연극작품으로는 ‘파리떼(Les Mouches)’, ‘닫힌 방(Huis clos)’, ‘공손한 창부(La Putain respectueuse)’, ‘악마와 선한 신(Le Diable et le Bon Dieu)’, ‘알토나의 유폐자(Les Séquestrés d'Altona)’ 등이 있습니다. 그는 또한 틴토레토, 말라르메, 보들레르, 포크너와 장 주네 같은 작가들의 생애를 연구한 비평서도 많이 남겼는데, ‘보들레르론’, ‘성자 주네’, 그리고 귀스타브 플로베르에 대한 방대한 연구인 ‘집안의 천치(L'Idiot de la famille, 1971-1972)’을 저술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열한 살 때까지의 자신의 삶을 그려낸 자서전 ‘말(Les Mots, 1964)’을 발표하고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신문 ‘리베라시옹’ 창간에도 기여했는데, 신문 발행을 광고하고자 본인이 직접 길가에서 그 신문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식인들로는 고등사범학교 시절의 동문이었던 폴 니장과 레몽 아롱, 전후 시절의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알베르 카뮈, 피에르 빅토르라는 가명으로도 알려졌던 말년의 베니 레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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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의 사상 – Thought of Jean-Paul Sa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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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철학은 전후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직도 알베르트 카뮈와 함께 참여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독일점령기 당시 애매한 태도로 인해 그의 레지스탕스 참여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1941년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이후로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사르트르는 계속하여 세간의 화젯거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1945년 그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 구조를 밝히고 실존의 결단과 행동과 책임과 연대성을 강조한 실존주의 철학 사상의 선언문으로 여겨집니다. 1945년에 창간된 연간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의 창간자이자 편집장이기도 한 사르트르는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과 매우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 이후로는 레닌주의 사상을 가진 당대 좌파와, 1970년대에는 특히 모택동주의자, 마오이스트와의 관련성을 띤, 정치 참여적인 문학과 철학 작품들로 유명합니다. 행동적 지식인인 사르트르는 세계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발언과 평론을 하는 동시에,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습니다. ‘유물론과 혁명’, ‘변증법적 이성 비판’의 저술들은 이러한 계열에 속합니다. 20세기의 볼테르였던 사르트르는 삶이 끝날 때까지 지치지 않고 활동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과 사르트르 자신에 따르면 그의 삶은 2차 세계 대전에 의해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고로 사르트르의 작품은 두 중요 시기로 구별됩니다. 1943년 ‘존재와 무’의 존재론에 중점을 둔 이론적인 철학적 접근과, 이후 1960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 제시된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하고자 한 보다 실천적인 시기로 구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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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작품의 두 번째 시기는 어빙 고프먼과 같은 질적 연구에 중점두었던 사회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후설의 영향 밑에서 그 자신의 현상학적 존재론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데카르트적 자아를 넘어서 인간은 하나의 실존의 존재임을 밝히고 실존은 본질에 앞서며, 실존은 바로 주체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존재와 무’, ‘현상학적 존재론 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책을 준비하면서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것은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940년과 1941년에 전쟁 포로로 억류되어 있던 시절 사르트르는 후설적 현상학 의 방법론으로 존재론을 고찰하는 렌즈로 사용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전개하였습니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의 가설적인 재조우와 비교하여 인간성(humanity)이 개인적인 성취의 상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방법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사르트르가 ‘자아의 원인이 되는 것(아스쿠자스위드ens causa suid)’라고 부르는 많은 종교와 철학자가 신과 동일시한 "완성 또는 완결"의 환상에 시달리는 피조물입니다. 자신의 몸이라는 물리적 실체로 태어나 물질적 우주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재에 끼워진 것을 인식합니다. 의식은 가능성을 개념화하고 나타나게 하며, 폐기하는 능력입니다.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 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후설(Husserl)의 개념에 따라 사르트르는 의식 내부에 "숨겨진" 자아의 형태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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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근거에서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의식이 본질적으로 자의식이라는 주장에 기초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이론을 철학적으로 비판합니다. ‘존재와 무’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픽션이자 하이데거를 너머서는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작품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이 책의 중심 개념 "무"에 대한 탐구와 성 철학에 대한 새로운 기여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더러는 이 책의 난해함과 프로이트를 다룬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르네 데카르트와 철학적 출발점은 같습니다. ‘구토’에서 주인공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현기증은 생각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유발됩니다. 이 현기증은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의 자유와 책임 앞에서" 발생합니다. 이러한 데카르트와 단절하는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며 지식의 우위를 거부하고 지식과 의식에 대한 다른 개념을 제시 합니다. ‘존재와 무’의 중요한 아이디어는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기반으로 합니다. 후설과 사르트르, 두 철학자 모두에게 의식은 의도적이며, 이는 무언가에 대한 의식만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르트르에게 지향성은 의식 안에 숨겨진 후설의 초월적 자아의 형태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에고는 에고의 의식이 있을 수 있도록 의식 밖의 구조여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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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의 배경 – Background of Being and Nothing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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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 ‘존재와 무: 현상학적 존재론 에 관한 에세이’에서 사용한 특수 용어는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번역가 헤이즐 반즈(Hazel Barnes)의 영어판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 부록에 나오는 용어 설명을 미리 읽어보면 좋을것 같습니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의식, 지각, 사회 철학 , 자기기만, "무"의 존재, 정신 분석 및 자유 의지 의 문제 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자신의 실존주의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설명을 전개했습니다.그는 존재를 ‘즉자존재(être en-soi)’, ‘대자존재(être pour-soi)’와 ‘대타존재(être pour autrui)’ 3가지로 구분합니다. 의식은 존재를 무화(無化)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대상을 의식하는 것은 암묵리에 그 대상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의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 곧 대자존재(對自存在)라고 불리며, 사물처럼 의식을 갖지 않은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 곧 즉자존재 (卽自存在)라고 불립니다. 대자(對自)가 자유롭다는 것은 즉자(卽自)를 무(無)에 의해 침식하는 것이며, 대자는 즉자로부터 무에 의해 단절되어 있으므로 지탱이 없는 불안으로서 자기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불안을 피하기 위하여 대자는 자기 기만을 하려하고, 즉자와의 일치를 바라지만 의식이 대자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그 소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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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는 즉자와의 결여이기 때문에 충족된 전체, 곧 도달 불가능한 즉자를 가치로 삼고 이와 함께 나타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구하면서 자기를 투기(投企)합니다. 대자의 투기에 의해 세계는 시간의 질서 밑에 나타나는데, 시간은 이미 끝나서 즉자가 된 과거와 대자 그 자체인 현재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라는 3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근저에 있는 것은 바로 대자의 자유입니다. 대자의 새로운 기도는 반성에 의해 자기와의 일치를 구하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일반적으로 반성하는 의식과 반성되는 의식의 분열을 일으키고 좌절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반성이 자기 기만적으로 즉자와의 일치를 구하는 불순한것이 아닌 순수하게 대자에 철저하여 자유로운 자기에의 전적현전(全的現前)을 수행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렇게 해서 근본적 회심(回心)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순수반성 또는 정화적(淨化的) 반성의 동기부여에 대한 연구를 과제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반성은 스스로 타자가 되려는 의식이며 다른 의식의 존재를 예상하지만, 의식은 대자존재인 동시에 대타존재(對他存在)이므로,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는 주체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객체에 불과한 신체를 갖는 존재이며, 타인의 시선 밑에서는 그 주체성은 부정되고 자기에 속하는 세계가 상실되어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주체와 객체의 이러한 불일치를 피하려고 하는 대자의 기도는, 한편에서는 스스로의 주체성을 지워버리려 하여 사랑·언어·마조키즘의 동기를 부여하고, 한편으로는 다른 주체를 전멸시키려고 하여 무관심·욕망·증오·새디즘의 태도라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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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의식 상호간의 관계를 상극적(相剋的)인 것으로서 복수의 인간의 협력관계가 성립하여 공동존재 내지 '주체로서의 우리'라는 경험이 생겨도 그것은 변하기 쉬운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집단이 타로부터 객체화되는 경우에는 '객체로서의 우리들'이라는 근본경험을 통해서 연대성(連帶性)이 탄생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체의 자유는 타의 자유에 의해 한계지어지지만 이 한계조차 자기의 책임하에서 초극하려 하는 데에 자유의 무한성·절대성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대자의 자유로운 투기는 일반적으로 '갖는다' '한다' '있다' 중 어떤 양상을 가지며, 처음 두 가지는 결국 대자가 어떻게 '있는가'에 귀착하고 대자의 투기(投企)는 근본적으로 존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즉자적으로 존재하려고 하는 모든 기도는 좌절이 숙명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기도에 있어서는 본원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으로부터 여러 가지 2차적 선택이 파생·응결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소급해서 판독하고 근본에 숨겨져 있는 자유로운 동기부여를 이해시키는 것이 실존적 정신분석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치의 원천에 자유가 있는 것을 보여주고,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 자신의 책임을 명백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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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의 내용 – Content of Being and Nothing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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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에서 사르트르는 후설과 하이데커 같은 초기 현상학자와 관념론자, 합리론자, 경험론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의식, 존재, 현상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칩니다. 현대 철학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현상학인데, 그 이유는 현상학이 존재자를 "숨겨진" 임마누엘 칸트의 본성으로 설정하는 이원론을 반증했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본질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사르트르는 존재의 두 가지 유형인 존재 자체인 사물의 존재와 존재 자체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그 자체가 인간에 의해서만 접근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는 의식의 존재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사르트르는 나쁜 믿음과 자유에 대한 설명의 중심인 무(無) 이론을 전개합니다. 1장 1절의 ‘부정의 기원’에서 사르트르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무(無)는 경험된 실재이며 단순히 주관적인 실수일 수 없습니다. 친구의 부재와 돈의 부재는 무(無)의 존재를 암시하며 그것은 현실의 일부입니다. 그에게 무는 단순히 "친구 피에르가 없다", "나는 돈이 없다"와 같은 부정적인 판단을 요약한 정신적 개념이 아닙니다. "비존재가 항상 인간 기대의 한계 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구체적인 무는 네모난 원과 같은 단순한 추상적인 비존재와 다릅니다. 구체적인 무, 볼 수 없다는 것은 눈먼 사람의 삶입니다. 이 전체성은 그것의 일부인 무(無)에 의해 수정됩니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의 의식과 현상의 총체성에서 양자는 별개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의식의 지향성인 전체로서만 존재합니다. 탐구하고 질문하는 인간의 태도는 의식을 세상과 거리를 두게 합니다. 비존재는 존재자체의 일부가 될 수도 없고 그것의 보완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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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존재는 부정의 근원입니다. 세상에 무를 가져옴으로써 의식은 사물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1장 2절의 ‘나쁜 믿음’은 사르트르가 인간 현실에 대한 자기기만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실제 자신이 아니라고 잘못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직업과 동일시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자유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식당웨이터, 식료품점원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 인간 존재와 동일하다고 믿는 겁니다. 자신의 직업, 사회적, 인종적 또는 경제적 계층에 의해 정의된 삶을 사는 것은 "나쁜 믿음"의 본질이며, 사람들이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과 자신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자신의 상황을 초월할 수 없는 이런 조건입니다. 인간은 웨이터나 식료품점원 등이 아닙니다. 부정이 사르트르가 "위대한 인간의 흐름"이라고 부르는 것에 자아가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또한 존재자에게 필수적입니다. 인간의 위대한 흐름을 무(無)를 통해 우리가 인간 자체로 평가되는것이 아니라 직업이나 개인적인 조건으로 평가되는 ‘나쁜 믿음’을 설명했습니다. 사르트르는 나쁜 믿음의 예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동성애자의 태도를 들며, "동성애자는 동성애자가 아니다"라고 느낍니다. 사르트르는 그러한 태도가 "인간 현실의 환원 불가능한 성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만, 동성애자가 자신이 동성애자의 패턴을 채택했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완전히 옳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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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나쁜 믿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와 자아에 대한 공식적인 투영이 분명히 분리되어 있으며 인간의 통제수단 내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일관되게 언급합니다. 무(無)는 사르트르가 순수한 존재와 정체성을 분리하는 내적 부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도 마찬가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단순한 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악의를 특징 짓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사르트르는 "나는 결코 내 태도나 행동 중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식당 웨이터라는 화자는 자신이 웨이터라는 악의에 사로잡혀 웨이터처럼 말하는 화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지, 즉 ‘존재하는 존재’와 우리가 아닌 것, 즉 ‘사회적/역사적 선입관’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자인 인간이 진정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존재와 역할, 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나쁜 믿음의 진정한 영역은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살고 미래를 향해 투사하되 악의를 버리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전통 윤리에 의한 "도덕적인 사람"은 진정한 충동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의 의지가 자신의 행동을 바꾸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이처럼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가장 심각한 형태의 ‘나쁜 믿음’ 중 하나입니다. 사르트르는 본질적으로 이것을 사르트르의 견해로는 존재의 중심에 있고 있어서는 안 되는 ‘나쁜 믿음’으로 특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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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전통적인 윤리를 대중을 통제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도구라고 비난하면서 전통적인 윤리의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나쁜 믿음은 또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분명한 과거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기 시작할 때 발생합니다. 자신의 자아를 현재가 아닌 예전의 모습으로 봄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자신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3장 1절의 ‘모양’에서는 다른 사람의 존재 가능성만으로도 자신을 대상으로 보고 자신의 세계를 상대방에게 보이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 외부의 특정 위치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비위치적입니다. 이것은 타인의 주관성 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잠시 실존 인물인지 헷갈리는 마네킹을 보았을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이 사람이라고 믿는 동안 그들의 세계는 변형됩니다. 객체는 이제 부분적으로 탈출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속한 측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이 알 수 없습니다. 이 시간 동안 사람은 더 이상 완전한 주관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제 타인의 세계, 더 이상 자기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오는 이질적인 세계입니다. 그것이 마네킹이고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은 뒤로 이동하는 것 같고 그들은 다시 우주의 중심에 있게 됩니다. 이것은 존재의 사전 성찰 모드로 돌아가서 "항상 존재하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 카메라의 눈"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성찰을 하기에는 너무 바쁩니다. 이 과정은 계속적이고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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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많은 관계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람의 매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주관성을 경험하는 것을 피하는 정서적 소외 상태입니다. 이런 타인을 위한 존재의 결과는 갈등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출생지가 같다든가 동년배 그룹이냐 등의 ‘사실성’으로 타인을 통제해야 하지만 타인의 자유도 통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기 자신이 타인의 자유로 대체됨에 따라 "나쁜 믿음"의 심오한 표현입니다. 두 참여자의 목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참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도록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시스템은 종종 "사랑"이라고 잘못 불리지만 실제로는 타자와의 갈등을 통한 감정적 소외와 자유의 부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극단에서 소외는 참여자들이 자신을 믿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상대방의 시선에 대한 통제력을 증명하려 함으로써 서로에게 고통을 줄 때 발생합니다. 자신의 주관성을 경험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선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섹스(性 Sex)에 대한 생물학적 동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외모"가 성적 욕망의 기초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사르트르가 묘사한 것처럼 일종의 주관성에 대한 상호 인식이 포함됩니다. 섹스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욕망이 충족되어 의식과 육체적 존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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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행되는 마법 행위, 몸짓, 키스, 욕망 등을 사용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의식을 몸의 표면으로 가져오려고 노력하지만, 오르가즘의 순간 환상은 끝나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스키 타는 사람이 산기슭에 내려 오거나 한때 우리가 원했던 상품을 구매한 후 끝납니다. 사르트르에게는 존재론적 증명의 신인 ‘그 자체로 존재(ens causa sui)’가 되려는 "인간은 쓸모없는 열정"이기 때문에 그러한 완성의 순간은 없을 거라는 겁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우리 각자가 살아있는 동안 무(無Nothingness)의 전반적인 상태, 즉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의식을 허용하는 상태에 존재하는 수수께끼라고 주장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존재 내 물리적 세계에서 우리는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고뇌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이분법인데, 주관적 선택은 생각의 제한이 없는 범위 내에서 자유에 대한 제한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필요, 운명, 결정론적 신 등과 같은 의미 있는 목적을 향해 우리를 인도하도록 고안된 탈출, 시각화 또는 비전, 꿈과 같은 행동 지향적 구성을 통해 우리의 괴로움을 피하려고 합니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노동자, 당원, 프랑스인, 캐나다인, 미국인 등 각자가 선택한 캐릭터의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무의식적 인 배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우리의 의식적인 종종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선택이 우리의 지적 자유에 반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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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어떤 형태의 행동이 항상 요구되는 속박되고 물리적인 세계에 묶여 있습니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묘사한 것처럼 완성에 대한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과 일치하는 ‘존재와 무’사이에서 실패한 꿈으로 이어집니다. 사르트르의 결론은 의식이 안정적인 진지함보다 자발성에 더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무가 되기 전에 존재가 감소한다는 것 같지만, 진지한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사이에서 계속 투쟁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르트르의 견해에 따르면 의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만 발생합니다. 따라서 의식은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무언가에 대한 의식입니다. 이 "무언가"가 사물인지, 사람인지, 상상의 대상인지 등입니다. 현상학자들은 종종 이러한 의식의 품질을 "지향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공헌은 의식이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일 뿐만 아니라 항상 그 자체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 입니다. 즉, 모든 의식은 정의상 자의식 입니다. 사르트르가 "자기의식"이란 대상, 예를 들어, 자신의 "자아"로 생각되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현상으로서 의식이 동시에 자신에게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각, 그 자체로 나타남으로써 사르트르는 의식이 완전히 투명하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인 "대상", 예를 들어 모든 측면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집과는 달리 의식은 자신의 모든 측면을 한 번에 인식할수 있습니다. 의식의 특성은 그것을 고유한 유형의 존재,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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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비판 – Critique of Fre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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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의식이 본질적으로 자의식이라는 주장에 근거 하여 정신 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대한 비판을 제시합니다. 사르트르는 또한 프로이트의 억압 이론이 내부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의 임상 작업에서 프로이트는 특정한 종류의 역설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자를 만났습니다. 프로이트는 환자 행동의 기저에 있는 트라우마의 "진실"을 포함하는 무의식의 존재를 상정했습니다. 이 "진실"은 능동적으로 억압되며, 이는 분석하는 동안 그 계시에 대한 환자의 저항에 의해 명백해집니다. 그러나 환자가 자신이 무엇을 억압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저항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사르트르는 프로이트가 "검열"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답을 찾습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거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준은 검열관의 수준"이라고 썼습니다. 환자의 저항은 검열자의 수준에서 그 자체로 억압된 것에 대한 인식, 정신 분석가의 질문이 이끄는 목적에 대한 이해를 의미합니다. 차례로 이러한 다양한 작업은 검열 자체가 의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사르트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같은 정보를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역설의 희생양으로 봅니다. 역설을 완화하는 대신 프로이트는 단순히 그것을 검열로 옮겨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나쁜 믿음의 자율적 의식"을 확립합니다. 사르트르에게 프로이트가 억압이라고 규정한 것은 오히려 악의의 더 큰 구조를 나타냅니다. ‘존재와 무’의 끝을 향하여 사르트르는 프로이트의 생각 중 일부를 채택하여 인과적 범주가 목적론적 범주로 대체되는 "실존적 정신분석"을 발전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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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에 대한 평가 – Evaluation of Sa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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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학자들은 사르트르가 최초로 성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학자로 확인했습니다. 철학자 로저 스크루튼(Roger Scruton)은 사르트르가 성욕에 대한 "아마도 가장 예리한 철학적 분석"을 제공하고 성욕을 식욕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성적 반응의 대인 관계 요소"를 무시한다는 주장이 올바르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는 사르트르가 "사도 마조히즘에 대한 놀라운 사과"를 제공했다며 ‘존재와 무’를 "후기 기독교 신학의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했습니다. 의사 프랭크 곤잘레스 크루시(Frank Gonzalez-Crussi)는 사르트르가 성적 욕망을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과 동일시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확인했습니다. 철학자 맥신 시트-존스톤(Maxine Sheets-Johnstone)은 사르트르가 인간의 성에 대한 미묘한 분석을 제시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욕망에 대한 사르트르의 이해를 칭찬하고 주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견해를 예상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견해에 중요한 진실과 내부 모순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프로이트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르트르의 견해가 어떤 면에서 프로이트와 유사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나오미 그린은 사르트르의 작품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혐오"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존재와 무’에 존재하는 분명한 "반성적 편견"을 확인했습니다. 감독 리차드 에어는 1960년대 영국 학생들 사이에서 ‘존재와 무’가 인기가 있었다고 회상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보통 그 작품이 너무 여러워 읽히지 않았음도 시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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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존재와 무를 통해 인간의 내면에서 해답을 얻던 본질주의, 에샌셜리즘(Essentialism)철학에서 본질, 내면을 벗어나 멀리서 인간의 실존을 바라보며 해답을 찾는 실존주의, 엑스탠셜리즘(Existentialism)을 보여 주었습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40번째 책 인문학 부문 10번째 책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1941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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