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소설 - 스토커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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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

은미희

놈의 차가 들어왔다. 고래처럼 육중하면서도 미끈한 세단. 벤츠 CLS-class. 놈의 차는 막 대양을 유영해 온 고래처럼 푸릉푸릉, 짧게 숨을 끊어 쉬면서 주유기 쪽으로 미끄러져 왔다. 놈의 차는 웬만한 서민 아파트 한 채 값에 맞먹었고, 흠집 하나 없이 늠름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양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축감이 들게 만들었다.


고래를 닮은 놈의 차는 이 백일주유소를 드나드는 차들 가운데 단연 돋보였다. 윤기 도는 검은 빛 몸체는 그 무채색만으로도 지느러미를 팔랑거리며 재빠르게 몸을 바꾸는 현란한 색의 관상어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관상어들은 놈의 육중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에 기세가 눌려서는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며 물러섰다. 놈도 그걸 알았다. 주변 사물을 반사시키는 짙은 선탠으로 내부를 가린 차창이 내려가고, 드러난 놈의 기름기 도는 얼굴에 우월감이 야릇한 표정으로 들어있었다.


하고많은 주유소 가운데 하필 이 백일 주유소라니. 기름때가 묻어 꼬질꼬질해 보이는 유니폼을 걸친 시급 아르바이트 녀석들은 놈의 차가 들어오면 황감한 표정으로 뛰어나와 반갑게 소리 질렀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녀석들이 놈의 차에 대고 내지르는 소리는 다른 차들에 비해 더 우렁찼고, 깍듯했으며, 경쾌했다. 그 깍듯함이란 것도 다른 차들과는 의미가 달랐다. 놈의 차에 보내는 깍듯함은 일종의 존경심이자 경외감의 표출이었고, 녀석들은 스스로 그렇게 놈에게 굴복해서는 백일주유소에 보이지 않는 서열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녀석들은 자신들이 만든 그 서열을 때때로 보완 수정했으며, 그 서열에 따라 기꺼이 시종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서열을 보완 수정할 때는 인정이나 연민 같은 것은 없었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서열의 재정비는 냉혹하면 냉혹할수록 질서가 바로 선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물질이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어쩌다 한 밑천 두둑이 잡으면 그들 자신 역시 서열의 우선순위를 보장 받을 테고, 그 교리 같은 진리를 맹신하며 그들은 오늘의 빈 주머니를 한탄하며 내일을 꿈꾸었다.
그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소리보다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놈의 출현을 반겼다.


종철은 흘깃, 그녀가 일하고 있는 자동세차장 쪽을 일별했다. 챙이 넓은 흰 색 모자를 쓰고, 푸른색 스웨터에 고무재질의 커다란 검정 색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하얀색 승용차에 물을 뿌리다말고 자석에 이끌리듯 놈의 차에 시선을 붙여놓고 있었다.


  “오만 원 어치.”


  언제나 그렇듯 놈은 연료탱크를 가득 채우는 법이 없었다. 아파트 한 채를 끌고 다니면서도 놈은 당장에 필요한 연료만 보충해갈 뿐, 넉넉하게 다음을 예비할 줄 몰랐다. 놈의 주머니가 부실해서 그런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놈은 수고스럽게도 매일 이 백일 주유소를 들리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았는데, 종철은 놈의 그런 수고 속에서 어떤 불순한 저의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고래의 뱃속을 빠져나온 놈은 천천히 고래 주위를 돌며 행여 어느 한 곳 생채기가 나있는지 살피고 나서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어깨에서 팔로 떨어지는 각도가 직각을 이루고 있는 양이 놈의 지난 세월들이 결코 순실하거나 평범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놈의 수작에 그녀는 몸을 비틀며 행복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수줍은 듯 살포시 내리 깐 눈에 유난히 숱이 많은 속눈썹은 파르르 떨릴 테고, 입가에는 알듯 모를 듯 미소가 고이며 햇볕에 가칠해진 얼굴에는 설렘이 깃들 것이다. 저 나이에 수줍음이라니. 앞치마 끈이 질끈 묶여있는 그녀의 허리가 벌써 교태를 띄고 있었다.


그녀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호스를 단속하며 놈의 진행을 유도했다. 물줄기가 방향을 바꾸며 춤을 출 때, 얼핏 햇빛에 반사된 수분 알갱이들이 무지개를 품었다가는 이내 해체했다.


많으면 예순 이쪽저쪽. 아니, 이마가 넓고, 눈썹이 진한 놈의 정확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잘 먹어 피둥피둥 살이 오른 그의 면상은 주름 하나 없었지만, 오히려 그 주름 없음이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만들어냈고, 늘 바짝 치켜 깎은 머리는 그의 나이에 대한 의혹을 더 심어주었다. 그랬다. 놈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있는지도 몰랐다. 놈은 그만큼 노회했다.


차르르르르. 주유기 속에 내장돼 있는 요금계의 회전이 그 여느 때보다 더디기만 했다. 오만원의 시간은 유난히 놈에게만 늦장을 부렸다. 빨리 채워주고 놈을 보내버려야 하는데. 하긴 놈은 언제나 주유가 끝나고도 냉큼 사라지지 않고 차를 한쪽에 대놓고는 느긋하게 서비스로 내주는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금연구역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워 물며 그녀와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거만한 행동과는 달리 놈의 오줌발은 신통치 않았다. 어쩌다 옆에서 오줌을 누는 놈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힘없이 떨어지는 오줌줄기는 간혹 놈의 발등을 적시기도 했고, 바지 앞 쟈크 밑 부분을 얼룩지게도 만들었다. 육중한 고래를 끌고 다니는 놈의 품새와 오줌줄기는 비례관계가 아니었다. 종철은 비록 놈과 같은 근사한 고래는 없었지만 오줌 줄기만은 자신 있었다.  


종철은 속이 뒤틀렸다. 놈도 놈이었지만, 놈을 보면 간들간들 물풀처럼 허리를 휘는 그녀가 더 서운타면 서운했다. 놈이 이 백일주유소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자신의 여자였고, 연인이었고, 친구였으며, 살가운 누이였고, 든든한 어머니였으며, 동료였다. 놈이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밤마다 그녀는 그 숱 많은 속눈썹을 떨며 자신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품안에서 웃음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기이한 소리를 내지르며 행복해했었다. 그 소리는 미래에 대한 찬미였다. 그것은 몽상도 아니었고, 공상도 아니었으며, 거짓 환상도 아니었다. 든든히 사실에 뿌리를 내린 현실이었다. 그녀역시 이 사실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둘 사이에는 가슴 뻐근한 미래만이 있을 뿐이었다.


헌데 놈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깨져버렸다. 달큼했던 사랑도, 살 떨리는 행복도, 미래에 대한 기대도 모든 것이 끝이었다. 마치 파팟,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방금 전까지 수다스럽게 대사를 주고받으며 끌어안고 핥던 배우들이 다시 서름한 관계로 돌아와서는 냉랭한 표정으로 분장실로 돌아오듯 그렇게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고통과 절망과 원망과 복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상한 일은 사랑의 밀약을 깨버리고 놈에게 날아가 버린 그녀가 원망스럽다거나 염오의 감정이 들지 않고, 오롯이 놈에게만 그 증오가 괸다는 것이다. 놈이 즐거워하면 할수록 종철의 내부에 고이는 증오와 분노는 더 그악스럽고 사박스러워져만 갔다. 그 증오와 분노는 종철에게 새롭고도 가상한 각오를 심어놓고 있었다. 그랬다. 놈이 그녀로 인해 받은 기쁨만큼 배로 돌려줄 것이다.


푸른 색 제복을 입은 아르바이트 직원이 놈의 차에서 주유호스를 빼 주유기 몸체에 걸고 나서 계산까지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놈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기는커녕, 아예 차를 그녀가 있는 세차장 쪽으로 빼놓고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호스를 들고 서있는 그녀 주변을 얼찐거리며 그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놈의 등 뒤에 붙은 날개에서 미세한 가루들이 떨어져 흩날렸다. 놈의 날개는 종철과 그녀에게만 보였다. 놈은 나비가 아니라 나방이었다.


그녀의 웃음이 햇살 속에서 더욱 빛이 나고 있었다. 질끈 뒤로 묶은 그녀의 윤기 나는 흑갈색 머리카락에 앉았던 한줄기 햇살이 그녀가 움직이자 주룩, 흘러내리고, 옅은 화장으로 피부의 결점만 가린 그녀는 언제 봐도 순실하고, 아름다웠다.


정말,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설령, 그녀가 자신의 애인이 아니다 할지언정 놈에게 그녀는 과분했다. 그녀는 성처녀처럼 남아있어야 했다. 자신 역시 그녀를 포기하더라도 그녀는 더 이상 남자들의 음흉한 손을 타면 안됐고, 상처를 입으면 안됐다. 향기를 잃은 조화로라도, 분재로라도, 아니면 박제로라도 그녀는 저 아름다움을, 순결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녀가 누구던가. 풍을 맞아 방 아랫목에서 미라처럼 말라 들어가는 늙은 아비의 묵은 기억들을 들춰내며, 그 아비의 삶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우쳐주던 그녀가 아니던가. 물관이 말라버린 졸가리처럼, 그래, 시나브로 말라죽어가는 나뭇가지처럼, 오래 전에 감각을 잃어서는 거뭇거뭇 죽어 들어가는 아비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그 아비에게 질기게도 생의 주문을 걸어주던 그녀가 아니던가. 헌데 정작 자신이 죽을 자리를 넘보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종철은 칙, 잇새로 침을 쏘아버리며 회색 점퍼 주머니를 뒤졌다. 종철의 손에 끝이 잘 벼리어진 길쭉한 쇠 조각이 잡혔다. 못이었다.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길이의 못은 주머니 속에서 체온을 품은 채 불온하게 결행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놈의 차가 들어올 때를 대비해서, 아니, 놈이 그녀를 희롱할 때를 생각해서 준비해둔 것이었다.


종철은 못을 빼들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못의 완강함은 물론이고, 함부로 자신의 손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저릿하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랬다. 이 날카로움으로 놈의 심장을 쪼아주어야 했다. 어떤 경우라도 약해지면 안 되었다. 그는 행여 따라붙을지 모를 타인의 시선이 염려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봄볕아래서 고물고물 일을 하느라 그에게 무관심했다. 종철은 놈의 차 뒤꽁무니로 다가가서는 뾰족한 못의 끝으로 슬쩍 놈의 차에 대고 그어버렸다. 반들반들, 거울처럼 윤이 나는 놈의 차에 균열 같은 실선이 생겨났다. 놈은 애지중지 아끼는 자신의 차에 불순하게 드러난 속살을 보면 불 맞은 짐승처럼 펄쩍펄쩍 뛸 것이다. 그녀가 놈을 향해 허리를 꼴 때마다 자신의 속이 뒤틀릴 때처럼. 아니, 놈은 더 속이 쓰릴 지도 모른다.


“이런 우라질. 대체 언제 이런 거야?”


한참동안 그녀 주변을 얼찐거리며 노닥거리던 놈이 차로 돌아와 길고 깊게 패인 흠집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구긴 채 이를 악문 소리를 냈다.


“어떤 새끼가 이런 거야? 응? 어떤 새끼야? 방금 전 까지도 없었는데.”


놈의 독기 어린 음성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백일주유소 마당이 들썩였다. 태극기는 물론이고, 일장기와, 성조기와 오성기와, 삼색의 푸른 줄을 가진 프랑스 국기와, 사막의 땅, 중동 국가의 국기들이 사이좋게 함께 푸르릉거리는 백일 주유소 마당에 놈의 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놈의 쇳소리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한걸음에 다가왔다. 어떻게 해. 그녀의 안타까운 음성이 화음처럼 놈의 소리에 섞였다. 종철은 그런 그녀가 마뜩찮았지만 표정을 숨긴 채 하던 일을 계속했다. 놈의 차를 긁은 못은 아직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고 서고 앉을 때마다 날카로운 끝이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댔다. 그 예리한 통증이 이상하게 저릿한 쾌감을 안겨줬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이거 보이요?”


밖의 소란이 심상치 않았는지 사장이 뛰어나와 묻자 놈은 허옇게 드러난 차의 속살을 가리키며 사박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인데……”


얼굴이 큰데 반해 코가 작은 젊은 사장은 놈의 차에 난 생채기를 곤혹스럽게 만져보며 연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 주유소에 들어오기 전까지 흠집하나 없이 말짱하던 차가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손상을 입었다는 놈의 소리에 사장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굴었다. 업체끼리의 과당경쟁으로 고객 확보가 쉽지 않은 때에, 사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려주는 놈이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사장은 놈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뭇 우는 표정으로 비손의 시늉까지 냈다. 하지만 사장의 수고는 헛될 것이다.


“어이, 김 부장! 사장님 차 좀 봐 드려.”


사장이 부르는 소리에 종철은 느릿느릿 놈의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다시 봐도 실선은 대견스러웠다. 놈의 차가 미끈하면 할수록, 검은 빛 몸체에 나있는 희디흰 실선은 유난히 더 눈에 잘 띄었다.  


종철은 흠집을 손보는 척하다 놈의 차안에 있던 수첩을 슬쩍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놈이 사기꾼인지, 아니면 속도 실한 물건인지, 겉만 요란한 룸펜인지, 어떤 놈인지, 보다 더 자세하게 알기위해서는 놈의 주변을 알 필요가 있었다. 검은빛 가죽 표지의 수첩 안에 들어있는 인물들과 정보들은 놈의 정체를 알려줄 것이다.


놈의 수첩이 든 주머니가 묵직하게 처졌다. 순간 그녀의 냉랭한 시선이 종철에게 날아와 꽂혔다. 놈과 시시덕거릴 때 입가에 달려있던 수줍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표정이 차갑고 심술궂게 굳어 있었다. 종철은 그녀의 시선을 쨍쨍하게 맞받아쳤다. 조심해. 게다가 무언의 경고까지 보냈다. 종철의 경고에 그녀는 더욱 메꿎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휙 돌아가는 고개가 단호해보였다.  


종철은 그 놈을 만나고 나서부터 좀체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가 마뜩찮았다. 그녀에게 여러 차례 놈을 경계하라 주의를 주었건만, 그녀는 자신의 주의를 허투루 여기고는 보란 듯 놈과 눈을 맞추고, 수줍게 웃고, 말을 섞고, 몸을 비비 꼬기까지 했다. 오늘의 일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데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랬다, 종철은 어제 오후. 퇴근하는 그녀를 쫓아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단단히 단속을 시켰었다.

“놈은 아냐.”


종철의 말끝에 그녀는 눈 꼬리를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미 오래 전에 그녀의 마음과 몸과 영혼은 놈에게 붙들려있었다. 그것도 스스로 제물을 자처해서는 놈의 편에 제 순정을 걸어놓고는 숱 많은 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사랑의 최면은 너무도 강렬해 그녀를 어떻게 깨울 수 없었다. 게다가 놈은 그녀의 순진한 애정에 힘입어 종철의 작은 신체와 볼품없는 외모를 빈정대며 틀림없이 사타구니의 물건 또한 작을 거라고 키들거렸다. 그런 놈 곁에서 그녀는 따라 웃었다. 분명, 그녀의 목덜미가 뜨듯한 게 얼굴 또한 붉게 상기돼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종철의 심사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놈의 말에 간드러지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종철의 자지는 놈의 말에 나흘 넘게 입은 꼬질꼬질한 팬티 속에서 분노와 증오로 힘 있게 꿈틀거렸다. 종철의 자지는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녀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놈이 그녀를 유린하기 전에, 먼저 놈이 비웃은 이 자지로 그녀를 철저히 정복할 것이다.


종철은 들고나는 차들을 수신호로 유도하며 놈의 모욕적인 언동을 참아냈다. 사냥의 기본 법칙 하나,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놈처럼 함부로 거들먹거리지 않고 진중하게 먹잇감을 정하고, 그렇게 낮은 포복의 자세로 납작 엎디어 있다가 먹잇감이 방심할 때, 그런 완벽한 기회를 포착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예외가 있는 법. 놈처럼 다른 사냥꾼이 먹잇감의 주변을 얼쩡거릴 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한데, 다른 사냥꾼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지금이 그때였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당신이나 잘 해요. 남의 일 간섭하지 말고.”


그녀의 음성 속에 탱자나무 가시 같은 사나움이 묻어 있었다. 가시가 함부로 종철을 긁어댔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가시가 억셌다. 종철은 코스모스 꽃대처럼 가는 그녀의 손목을 우악스레 붙잡고 백일 주유소 뒤편, 야트막한 야산으로 끌고 왔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만 다져지고 다져져서는 사람 키만한 폭의 길이 생겨나있을 뿐, 주변은 덤불이 우거져 있었고, 우거진 덤불만큼이나 저녁 무렵의 야산은 어둡고, 괴괴했다. 그날따라 달빛마저 인색했다.


종철은 그녀를 덮쳤다. 그녀를 확실하게 제 여자로 만들어 놓기 위해, 놈의 야비한 웃음을 뭉개놓기 위해 종철은 지금 그녀가 필요했다. 훅, 콧속으로 파고드는 시큼한 그녀의 체취가 종철의 아랫도리를 자극했다. 으마낫! 째지는 듯한 그녀의 비명 또한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종철의 아랫도리를 더 풀무질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손톱을 치켜세운 암 고양이었다. 활갯짓을 하듯 함부로 내휘두르는 손은 종철의 등을 할퀴고, 얼굴을 할퀴고, 손등을 할퀴었다.  


“사람을 부르겠어요.”


종철의 완력에 눌려 버둥거리느라 그녀의 발음이 뭉개졌다.


“놈은 네 상대가 아냐. 그걸 알잖아?”


“정말, 정말 비키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그녀는 종철에게서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거센 저항 때문에 외부로 끌려나온 종철의 자지는 길을 잃은 채 그렇게 허공에서 덜렁거리고만 있었다.


“사랑해.”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전에 우리 좋았었잖아.”
“착각이에요.”
“그러지 말아. 넌 정말 날 좋아했었어.”
“오해에요.”
“거짓말 하지 마. 당신은 거짓말 할 줄 몰라. 내가 당신을 품을 때마다 당신은 행복해했었잖아.”
“무슨 말이에요? 난 당신에게 한 번도 안긴 적 없어요.”
“왜이래? 놈에게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군.”


한 번도,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그녀는 완강히 기억마저도 거부했다.  


“당신 돌았어요.”


마침내 그녀는 종철을 미친 사람으로 내몰았다. 그 숱한 말들. 그 많던 언약들. 헌데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다고 매정하게 잘라 말했다. 정말, 그녀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하긴, 기억이라는 것도 신뢰할 수 없었다. 마치 깊고 깊은 잠 속에서 언뜻 꾸었던 꿈 마냥 어떤 것은 희미한 영상으로 남아있거나 어떤 것은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고, 또 어떤 것은 이야기의 중심도, 끝도, 시작도 없이 그렇게 조각으로만 따로 떠돌다가 어느 날 불쑥 의식에 투영되었다.

 

아니, 그 꿈이라는 것도 기실 믿을 것이 못됐다. 어떤 땐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풍경마저도 현실이 아닌, 자신의 상념이 빚어낸 환상이거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여겨지기도 했었고, 한편으로는 또 기시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그뿐일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상마저도 어느 날은 생뚱맞게도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헌데 이 확신에 찬 기억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 종철은 말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지나치게 들어있는 힘 때문인지, 마치 윽박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당신 그랬잖아. 얼마 전 사무실에서. 당신의 사랑은 나뿐이라고. 사람들 귀를 피해 은밀하게 이야기 했잖아. 근데 이제 와서 없었던 일이라니. 당신 꼭 이렇게 할 거야?”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WBC 야구경기가 열리던 날, 버짐 핀 얼굴에 여기저기 기름때가 얼룩 진 유니폼을 걸친 사람들은 사뭇 흥분된 표정으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고, 그런 탓에 차도 뜸하게 들어오던 한가한 오후였다. 그녀는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빼와 완만한 태도로 자신에게 한 잔을 내밀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봄볕에 적당히 그을린 그녀의 얼굴은 복사꽃 색을 띄었고, 어투는 은근했다. 그녀의 말이 커피 향과 뒤섞여 사무실 안에 낮게 떠돌았다. 그때 종철은 분명히 보았다. 그녀의 엉덩이 사이로 비죽이 삐어져 나온 꼬리가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제가 언제요? 언제 내가 그랬어요? 당신이 만들어낸 기억일 뿐이에요.”
그녀가 새된 음성으로 종철의 기억을 완강히 부정했다.
“그런 적 없단 말이야?”
“그래요. 당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이래요?”


그녀가 이를 드러내놓고 으르렁거렸다. 종철은 머리가 아팠다. 머릿속에 터무니없는 기억을 잣거나 파먹고 사는 벌레가 들어있는 듯 지끈지끈 아팠다. 정말,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장면들이 너무나 선명한 것을 보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의 기억이 조작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우린 단지 동료일 뿐이에요. 게다가 당신을 한 번도 내 사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보내줘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타구니로, 사타구니로만 모아지던 힘이 이번에는 급격하게 길을 바꿔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 힘을 주체지 못해 바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손은 힘의 집합소였다. 종철의 손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손을 그녀의 목에 갖다 대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 날 것이다. 저 꽃대궁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목에 자신의 불덩이 같은 손을 갖다 대기만 하면 영원히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내줘요.”


시커먼 어둠이 점액질처럼 들러붙어 있는 덤불속으로 그녀의 애절한 음성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애원이, 눈물이 묻어있는 그녀의 말이, 불덩이 같은 종철의 손을 붙잡았다.


놓아줘요. 제발요. 그녀의 비손은 계속됐다. 놈에게도 이랬어야 했는데, 놈에게도 이렇듯 사정을 하며 놈의 부정한 손길로부터 자신을 지켰어야 했는데. 그녀는 도망치기는커녕, 놈만 나타나면 넝쿨손처럼 슬금슬금 놈에게로 뻗어가서는 몸을 꼬며 은근짜처럼 굴었다.


종철은 그녀를 제압하고 있던 팔을 풀었다. 자신을 거칠게 억누르던 외부의 압력이 느슨해지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빼 백일 주유소가 밝혀둔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전, 야구경기가 열리던 날, 그녀의 엉덩이사이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던 꼬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이내 그녀를 집어삼켰다. 아니, 그녀 역시 속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어둠이었다. 종철은 그녀가 사라진 지점을 응시하며 점퍼 윗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들었다. 아직 손샅에 남아있는 불덩이 같은 힘 때문인지 담배 한 개비를 빼내는데, 손이 달달 떨렸고, 몸 여기저기에 종철의 손길을 거부하던 그녀의 완강한 몸짓이 얼얼한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 놈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놈에게로만 모아지는 그녀의 은밀한 웃음과, 상냥한 어투와, 교태 섞인 몸놀림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분명 한때나마 자신에게 향하던 사랑의 표상들이었기 때문이다.


놈만 없다면…… 놈만 없어진다면 그녀는 예전의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래, 놈만 없어진다면……


카악. 종철은 목울대쯤에 걸려있는 가래침을 울궈 뱉은 채 천천히 덤불 우거진 야산을 내려왔다.
  
그녀에게 할퀴고 덤불에 긁힌 상처는 쓰리고 아렸다. 아리고 쓰릴수록, 욱여대는 그 통증만큼 그녀에 대한 간절함은 깊이를 더해갔다. 애착, 집착, 편집증, 그 어떤 것도 좋았다. 어쨌거나 종철은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고, 가슴에 묵직한 동통이 일며 한곳에 진득하게 마음 붙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미래의 시간 속에는 그녀가 쌍태아처럼 늘 자신과 함께 들어있었는데.


문득 종철의 머릿속을 긋고 지나가는 영상이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 그 이빨 끝에서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침, 귓가로 죽 찢어진 이와 으르렁거리는 소리까지, 개였다. 한번 물었다하면 절대 놓지 않는 도사견. 입안에서 침과 함께 굴리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지옥에서 울리는 소리와 동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래, 사나우면 사나울수록 좋을 것이다.


종철은 시꺼멓게 기름때가 묻은 목장갑을 벗어두고 주유소 뒤편, 야산 끝자락에 들어앉은 귀머거리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단속하지 않은 백발에 오랫동안 비누를 묻혀본 적 없는 낡은 옷을 걸치고 하루하루를 느릿느릿 살아가는 노인은 이미 오래전에 삶의 끈을 놓아버린, 영락없는 귀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우줄우줄 거죽만 남은 육신에서 감지되는 억센 뼈 마디마디들은 노인의 젊은 시절이 만만치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노인에게는 야차 같은 개들이 있었다. 아무도 노인을 돌보아주지 않듯, 개들의 살점만 필요한 노인 역시 개들에게 필요이상으로 곰살궂은 애정 따윈 나눠주지 않았고, 그들의 동거는 비정한 가운데 나름의 결속감이 있었다. 개의 목숨이란 것은 단지 귀신같은 노인의 말라비틀어진 삶을 연장시켜 줄 예비 된 생명에 지나지 않았다.


노인은 으르렁 대는 이빨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주고, 자신의 몸피보다도 더 큰 개들의 목에 걸린 쇠사슬을 풀어 개를 사러온 업자에게 넘겨주곤 했다. 넘겨주면서도 노인은 함께 지내온 시간들을 아쉬워한다거나 얼마 남지 않은 개의 생에 대해 안쓰러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키우던 녀석들이 한 마리씩 돈으로 바뀔 때마다 노인은 하나씩 자신의 추억을 지우고, 삶의 궤적을 지우고, 생의 미련을 지워내는 듯했다.  


컹컹. 종철의 기척을 감지한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목청 좋은 소리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야산을 뒤흔들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노인은 귀로 듣지 못하고 몸으로 들을 것이다. 희미하게 전해오는 땅의 진동으로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감지해고는 침침한 눈으로 끔벅끔벅, 길을 더듬을 것이다.


소리가 사라져버린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종철은 문득 궁금했다. 자네 별명 하나 지어줄까? 좀씨. 좀씨, 그래, 좀씨 좋다. 기분 나빠하지 마. 작은 고추가 맵다고, 나폴레옹도 키가 작았어. 세상을 바꾼 영웅들은 대개 다 작았단 말이야. 거, 왜 키가 크면 싱겁다잖아. 하긴 형씨도 따글따글 다부지게 생겼어. 놈은 서비스로 가져다 준 커피를 홀짝이며 종철의 작은 키를 웃음거리로 만들며 키들거렸다. 그것도 그녀 앞에서. 아마도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면 놈의 비아냥거림도 듣지 못했을 터이다. 아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소리는 어떤 식으로든 전달될 것이다. 달팽이관이 아닌, 내부의 어떤 비밀스러운 경로를 따라 음파는 그렇게 의식으로 파고들며 보다 더 생생하게 재생될 것이다. 아니면 무음(無音)역시 또 다른 음(音)일 것이며, 어쩌면 무음(無音)이, 진음(眞音)일지 모른다.


노인은 미세한 진동을 몸으로 느꼈던지 부직포와 비닐로 겹겹이 둘러쳐 만든 움막 안에서 느린 동작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삶의 지겨움도, 노곤함도, 이미 오래전에 탈색돼버린 감정인 듯 노인은 무심하게 종철을 맞았다.


여기저기, 터가 비어있다 싶으면 말뚝 박아 고리 끼워 묶어놓은 개들은 금방이라도 목줄을 끊고 덤벼들 듯 사납게 짖어댔다. 목줄에 팽팽하게 걸리는 녀석들의 힘이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했다. 무슨 일이누? 노인이 뀌적뀌적한 눈으로 묻고, 종철은 노인에게 개를 가리키며 답했다.


“저 개, 팔아요.”


노인의 시선이 종철의 뭉툭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갔다. 다른 개보다 몸피가 작고 다리는 뭉툭 짧았으며 목 또한 짧고 굵어 다리 근육사이에 파묻힌 갈 색 털을 가진 녀석이었다. 말랐지만 이빨만큼은 어느 개보다 더 날카롭고 사나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크르르릉, 녀석은 금방이라도 목줄을 끊고 덤벼들어서는 갈기갈기 살점을 찢어놓을 것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종철은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로 흔들어 보이며 더 몸집이 크고, 튼실한 개를 가리켰다. 근수가 더 나가. 노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 눈의 흰자위가 개나리 꽃빛깔을 띄고 있었다.


“아뇨. 저 개요.”


노인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집스럽게 한 녀석만을 가리키는 종철을 바라보았다.


“그냥, 키울 거예요.”


종철은 듣지 못하는 노인을 위해서 천천히 입모양을 움직였다. 그제야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개 값이었다.


“내일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다 좀 두세요.”


아무 소리도 잡아내지 못하는 노인의 귀에 들릴 리 없었지만 종철은 큰 소리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음파로 소리를 접수했는지, 노인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종철은 그제야 두 다리에 짱짱하게 힘이 생기는 듯했다.


컹컹. 백일주유소로 되돌아오는 종철의 가슴 속에 개가 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한 마리 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철은 놈의 수첩을 넘겨보았다. 심하게 흘려 쓴 이름들과 정자로 또박또박 적어놓은 이름들이 한데 뒤섞여 있는 수첩은 부박한 놈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종철은 더욱 알 수가 없어졌다. 놈이 무얼 하며 먹고 사는지, 놈이 결혼을 했는지, 놈의 나이가 얼마인지, 수첩 안의 정보들은 그것까지 친절하게 종철에게 일러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놈이 사는 곳을 확보했으니 그것만으로 수확이다 싶었다.
  
여전히 놈은 하루에 한 번씩 고래를 몰고 백일 주유소를 들렸다. 들려서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시시덕거리고, 서비스로 내준 커피를 마시고,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고래에 흠집이 났나 살펴보고, 담배를 태우고는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놈은 한 번도 수첩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게다가 찾지도 않았으므로, 수첩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놈이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놈이 방심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아마도 놈의 수첩을 손에 쥔 다음날부터였을 것이다. 종철은 놈이 사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놈의 동태를 살폈다. 놈의 집뿐만이 아니었다. 유난히 후각이 발달한 개처럼 킁킁거리며 그녀의 뒤를 밟았고, 놈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와의 만남을 주의 시키고 경고를 주었다. 경고는 놈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그녀를 희롱하는 모든 남자에게 무차별 가해졌다.


“그녀는 내 여자야. 누구든 그녀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 이번에는 좋게 말로 하지만 다음번에는 각오해. 확 눈깔에서 먹물만 쪽 빨아 뱉어낼 테니까.”


때론 점잖게, 때론 과격하게, 때론 소름끼치고 진저리쳐지게, 대상에 따라 경고의 수위도 달라졌고, 내용도 달라졌다. 그녀만 자신의 수중에 붙잡아 놓을 수 있다면, 남은 삶을 사는 동안 그녀 곁에 머물며 호호백발 늙어갈 수만 있다면, 종철은 그 어떤 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설령 그 수가 무리하게 두는 수이거나 자충수가 될지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허나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왜 그녀는 자신과 나누었던 지난 일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일까? 그 달콤했던 추억도, 가슴 뻐근하던 기억도 다 없었던 일이라고 매몰차게 우기는지. 종철은 그녀와의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한데, 그녀는 왜 그 기억자체를 자신의 환상이라고, 미친 소리라며 매도해버리는지.


그녀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다가왔다. 금빛 쨍쨍한 봄볕 탓인지 그녀 얼굴이 붉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한걸음에 다가온 때문인지, 아니면 심화 때문인지, 그녀의 숨이 가팔랐고, 그 가쁜 숨결을 따라 그녀의 앞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종철은 손님이 맡겨놓고 간 다이너스티에서 와이퍼를 갈아 끼우다 말고 진달래꽃빛깔을 띄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 도대체 내 주변 사람들한테 뭐라 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앙칼지게 따져 물었다. 종철은 조만간 그녀가 죄를 추궁하러 들이닥치는 형사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올 줄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 밑밥을 던져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 정말, 이럴 거예요? 이런 식으로 나갈 거예요? 정말 정신 차리게 만들어줘요?”


코끝에 찍혀 있는 점이 그녀가 말할 때마다 입술 근육을 따라 실룩였고, 그 모양이 마치 저 혼자 살아 움직이는 작은 벌레 같았다. 종철은 그 점이, 그 벌레가, 그녀의 인상을 더 귀엽고, 질리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예요?”
“그 놈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 같아?”


“묻는 말에만 대답해요. 도대체 내 주변 사람들한테 뭐라 하고 다닌 거예요. 내가 당신 여자라구요? 그것도 모자라서 아이까지 있다구요?”


분노로 이글거리는 표정 밑에 절망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랬다. 그녀가 따져 묻는 것처럼 종철은 그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자신의 여자라고 못박아두었다. 그러니 손대지 말라고, 군침 흘리지도 말고, 관심도 갖지 말라고. 될 수 있는 대로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아예 사라지도록, 아니, 그녀라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 지도록 만들었다. 호된 기억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므로.


어떤 사람은 종철의 전화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화를 내며 끊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그녀에 대한 비밀한 사연들이 궁금해 귀를 기울이고 듣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면 더없이 좋았다. 자신의 전령사처럼 굴어줄 터이니까.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소문은 빠르게 확산될 테고, 오히려 그 사람의 입을 통해 퍼져나가는 이야기들은 자신이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더 신빙성 있게 퍼져나갈 것이다. 바람을 타고 떠도는 포자들처럼, 그렇게 가볍게, 사방으로, 어디로든 날아가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더 극적이고, 더 야비하게, 더 그럴 듯하게 들려줘야만 했다. 어디 이 세상이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세상이던가. 그러므로 이전에는 없었던, 그렇게 놀라운 이야기들만 들려줘야 했다. 그래야만 이야기들은 무성생식 하는 미생물들처럼 그렇게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서 세상 속으로 힘차게 뻗어나갈 것이다.  


종철은 어디선가 읽었던 주간지의 한 페이지나, 신문의 가십 란에 등장했던 사건들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쓰레기처럼 떠돌던 이야기를 조합해 하나의 내용으로 구성한다면 그것은 더없이 재밌고도 무서운 이야기가 될 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여자라는 것. 그녀의 모든 것은 거짓투성이며, 뱀을 삼키는 능사처럼 그렇게 사람을 집어삼키는 여자라고 그녀를 재창조했다. 이 얼마나 가상한 스토리인가. 그녀는 철저히 다시 태어났다. 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한번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 종철의 입을 빠져나온 말들은 스스로 생명을 얻어 세상에서 힘차게 떠돌았다. 사람들의 입을 거칠 때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야기는 스스로 진화하고, 분화해서는 또 다른 모양을 띠었고,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제 살만 하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내일을 꿈꾼다고 그녀를 몹쓸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교리를 믿듯 충실하게 그 이야기를 믿었고, 그녀를 나쁜 여자로 간주했다. 사실 종철 자신도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당신 정신병자야.”
그녀는 분에 겨워 씨근덕거렸다. 거친 들숨과 날숨에 따라 그녀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그러게, 내 마음을 받아줬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진작에 당신을 알아봤어요.”
“다 당신 생각해서 한 일이야.”
“당신 정신병자야. 한번만 이런 일 있으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꿈 깨. 당신은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 불행할 거야.”


“당신이나 꿈 깨요. 당신이 이런다고 해서 내가 당신한테 갈 것 같아요? 천만에요. 당신이 이러면 이럴수록 당신한테 갈 일은 전혀 없을 거예요. 아니,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휙, 몸을 돌려 자신이 일하는 세차장 쪽으로 가버렸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쨍쨍한 햇빛 탓인지 그녀가 여신처럼 너무 눈이 부셨다. 비너스도 좋았고, 헤라도 좋았고, 아테나도 좋았다. 종철은 절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 여신의 뒷모습에 대고 맹세를 했다.


종철은 느릿느릿 뒷산, 노인의 집 쪽으로 갔다. 심판자. 종철이 개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컹컹. 우웡우웡. 개들의 짖는 소리가 나른한 봄볕을 불온하게 뒤흔들었다. 울림통 좋은 북처럼, 몸집 큰 개들에게서 나온 소리는 그 울림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종철은 심판자의 소리를 알았다. 뒤섞여있는 소리가운데 정확이 심판자의 소리를 구분해냈다. 이제 종철은 냄새만으로도, 목에 걸려있는 쇠사슬의 절그렁거림만으로도 심판자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벌써 며칠 째 굶고 있는 심판자는 붉게 슨 녹이 가루로 부서져 내리는 조악한 철제 우리 안에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먹이를 찾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심판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먹잇감으로만 보일 터이다. 주린 배를 채워줄. 신체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배 가죽에 이를 깊숙이 박아 넣고 그렇게 살점을 뚝뚝 떼어먹는 것만을 상상하고 있을 터이다.  


심판자는 어제보다 더 포악해져 있었다. 털은 그새 윤기를 잃은 채 비루먹은 것처럼 듬성듬성 빠져있었고, 눈은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져 있었으며, 주둥이는 어디엔가 심하게 부딪힌 듯 피까지 맺혀 있었다. 심판자는 종철이 다가오자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숨통을 끊어놓을 듯 으르렁댔다.


“이봐. 언제까지 굶길 거야.”


여전히 귀신의 몰골을 한 노인이 우물우물 물었다. 듣지 못함으로 정확한 발음을 내뱉지 못하는 노인의 말은 이상한 언어였다. 하지만 그 음성 속에 종철에 대한 마뜩찮음이 들어있었다. 키우고 있는 개들을 근수로 따져 돈으로만 환산하는 노인은 그래도 어느 구석엔가는 개들이 자식처럼 생각되어 지는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만 더 굶기십시오.”
“이 사람아, 아무리 개들이라지만 그러면 못 써.”
“알았어요.”
노인은 쩝,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조만간 심판자는 순치의 기억은 접어두고 본능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배신감에 포악한 야성의 습성을 저도 모르게 깨우치고, 충실히 그 본능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종철이 심판자에게 원하는 것이었다.
  
놈의 차가 들어왔다. 놈은 언제나 이 시각, 백일주유소를 찾았다. 오늘도 역시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놈을 바라봤고, 놈은 언제나처럼 그녀 곁에서 신소리를 늘어놓으며 시시덕거렸다. 백일 주유소에 걸어놓은 만국기 또한 바람에 푸릉푸릉, 몸을 떨며 그놈의 출현을 반겼다. 어쨌거나 좋았다. 만국기가 펄럭이든, 그녀가 놈의 등장에 수줍은 표정으로 허리를 꼬든,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놈의 차에 대고 구십도 각도로 인사를 하든,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놈의 머리위로 쏟아지든, 여하튼 오늘로 끝이 날 것이다. 종철은 그쯤이야 얼마든지 봐줄 수 있었다.  


이제 응징의 시간이었다. 놈으로 인해 지난 시간들이 고통스러웠던 만큼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끌며 천천히 갚아줘야 했다.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쓰라린지, 놈도 겪어봐야 했다.  


종철은 준비해 두었던 염산을 놈의 차에 뿌렸다. 주유소 곳곳에 새로 설치한 CCTV는 자신의 행동을 고스란히 잡아 낼 터였지만 종철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에게 보다 더 확실하게 경고와 주의를 주기 위해서는 그만한 모험쯤은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염산을 뒤집어 쓴 고래의 살갗이 흰 거품을 내뿜으며 빠르게 부식돼갔다.
“뭐야? 이런 씨팔. 또 어떤 놈이 이렇게 해놓은 거야?”


예상대로 놈은 빠르게 삭아 들어가는 고래의 피부를 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놈의 모양이 마치 미쳐 날뛰는 돼지 같았다. 쩌렁쩌렁, 주유소를 울리는 고함소리에 황급히 사장이 뛰어나왔다.


“어쩌다 이런 일이…… 죄송합니다. 자꾸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사장은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사장의 독기 창창한 눈이 종철에게 날아와 꽂혔다. 순간 종철은 움찔했지만 명치 끝 저 밑바닥에서는 배뇨 후에 오는 그런 저릿한 쾌감이 뻐근하게 올라왔다. 종철은 천천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놈의 차로 다가갔다.


“네 놈이지? 네 놈이 그런 거지? 그래, 네 놈 짓이야.”
놈이 거칠게 종철의 멱살을 잡아챘다. 목울대쯤에서 느껴지는 놈의 악력이 그악스러웠다. 종철은 천천히 자신의 숨통을 그러잡고 있는 놈의 손을 잡아뗐다. 놈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종철 역시 놈에게 질 수 없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실어 보내며 놈의 손가락을 목에서 떼어냈다.
“어쩔 거야? 저 문짝, 어쩔 거냐고?”


종철은 히죽, 웃었다. 아니, 웃은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입가 한쪽이 비틀려 올라가더니 이내 웃음이 삐져나왔을 뿐이었다.
“이 새끼가 사람 말을 우습게 알아듣나? 비웃기까지 하네. 네놈의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놈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종철의 손이 강단지게 놈의 손을 잡아챘다. 잠깐, 허공에서 얽힌 두 사람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김 부장!"


사장의 쇳소리가 쨍하니, 백일 주유소를 울렸다. 종철은 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천천히 노인의 집 쪽으로 향했다. 이제 축제를 즐길 시간이었다. 예상대로 놈이 거친 걸음으로 따라왔다. 놈이 따라오는 만큼, 종철은 앞서 걸었다.  


오후 햇살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놈은 종철의 그림자를 밟고 부지런히 쫓아왔다. 컹컹. 심판자의 울음이 종철의 귀에 또렷이 잡혔다. 불협화음처럼 섞여 날아오는 수많은 울음 가운데서 심판자의 소리가 가장 음울하고 잔혹하게 들려왔다. 심판자는 야생의 들개였다. 아마도, 녀석은 예리하게 버려진 후각으로 종철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발톱을 세운 앞발을 치켜들고 살갗을 찢어놓을 기세로 버둥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를 옥 물고 뒤쫓아 오는 놈이 자신을 덮치는 순간 심판자의 목줄을 풀어놓으리라. 그럼 심판자는 놈을 향해 달려들어서는 잔인하게 물어뜯을 것이고, 자신이 떼어내지 않는 한 녀석은 절대 놈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컹컹.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판자는 미친 듯 짖어댔고, 저 죽을 줄 모른 채 놈은 부지런히 뒤쫓아 오고 있었다.


생각대로 심판자는 이를 드러낸 채 진득한 침을 흘리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입가는 귀에까지 가 닿아있었고, 목줄은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쫓아온 놈은 금방이라도 종철의 뒷덜미를 낚아챌 듯 가까워져 있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종철은 심판자를 가두고 있던 우리의 걸쇠를 풀었다. 푸는 순간 심판자는 거칠게 우리를 박차고 나왔다. 종철은 심판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며칠 동안 굶은 심판자의 몸속에 어떻게 그런 힘이 남아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종철은 몸을 옆으로 비켰다. 심판자가 보다 더 정확히, 그리고 한 번의 일격에 놈의 몸에 깊숙이 이빨을 꽂아 넣을 수 있도록.
컹!


외마디 비명처럼 몸을 날린 심판자는 정확히, 그리고 한 번의 일격에 먹잇감을 공격했다. 놈도 비명을 질렀다. 놈의 비명이 오후의 햇살 속에서 불온하게 흩어졌다. 종철은 희미하게 웃었다. 공포에 질린 놈의 비명만으로도 종철은 오줌을 저렸다. 뜨듯하게 바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오줌줄기가 더없이 종철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심판자는 끈질기게 먹잇감을 물고 늘어졌다. 저항하면 할수록 심판자의 이빨은 더 깊숙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놈의 비명은 여전히 대기를 찢어놓을 듯 사박스러웠다. 사람들이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오고 심판자를 떼어놓기 위해 온갖 위협을 가했지만 심판자는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녀석은 완벽한 한 마리 야수였다. 귀머거리 노인 역시 허둥지둥 뛰쳐나와 녀석을 떼어내려 했지만 야성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종철은 앞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점차 사람들의 소리도 가늘어지고, 목에 깊숙이 박힌 심판자의 이빨의 감각도 둔해져가고 있었다. 단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냐… 저 놈을 공격해야 해……”


종철은 자신의 목을 물고 늘어지는 심판자를 향해 희미하게 말했다. 그녀가,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데 그녀가 물풀처럼 흐느적거렸다. 종철은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자꾸 헛손질만 해댈 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종철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그녀가 환한 웃음을 머금고 들어와 있었다. 이제야 드디어 종철은 그녀를 자신 안에 가두어놓을 수 있었다. 이제 영원히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은미희  1960년 전남 목포 출생. 1996년 전남일보,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1년 장편소설 <비둘기집 사람들>로 삼성문학상 수상. 지은 책으로 장편 <환 -그 폐허의 집>, <소수의 사랑>, <바람의 노래>, <만두 빚는 여자>, <18세, 첫경험>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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