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제목 : 모래바람으로 쓰는 독후감- 은미희 장편 <바람의 노래>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5.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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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모래바람으로 쓰는 독후감- 은미희 장편 <바람의 노래> 이름 : 김규성 그들은 다만 타인들이었고, 생계를 위해 구성된 잡 패밀리였다.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는, 그 유효기간조차 가늠할 수 없는 조직된 패밀리. 효용가치가 다하면 미련 없이 그들은 스스로 떨어져 나갔고, 또 서로를 자신의 삶에서 떼어냈다. 상처 위에 앉은 묵은 딱지처럼 그들은 한 점, 통증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분리됐다.(p 22) 질 들뢰즈의 담론 중에 "노마드 시대"의 "생성"과 "차이와 반복"에 대해 이른 구절이 있다. 싫든 좋든 21세기는 "신 유목사회"라는 미증유의 신 문명권에 그 발을 들여놓았다. 원시 유목과 달리 현대의 유목은 '다양한 욕망의 산물'인 '가수요적 유행'을 먹고사는 '소비 중독증 환자'들의 행군이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병의 '말짱한 중환자'들은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모호한 '유목적 자본주의' 시장에 "주체이자 타자"의 양면 점퍼를 걸치고 참여한다. 한편 원시 유목 시대의 초원인 "유행"은 포장만 바꿀 뿐 그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대동소이한 반복을 거듭하듯이, 현대판 유목인들은'콜라주'나 '리좀' 식의 '패러디적 차이'를 양산함으로써 자기 기만적 눈가림에 다름 아닌 말초적 흥분으로 "시지푸스의 올림포스 산"을 지루하지 않게 오르내린다. "노마드 시대"의 "생성"은 "유행"의 정체인 "시물라시옹"의 '한계와 가면'을 이끌고 가는 "차이와 반복"의 이중주인 것이다. 「바람의 노래」라는 제목이 상징하듯이 이 소설은 정처 없는 유랑인 들의 떠돌이 일기다. 끊임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이동과 그 후유증인 만성피로를 달래기 위한 노상체류, 즉 바람 잘 날 없는 신작로와 노상방뇨 하듯 急造한 간이정류소의 살풍경이 그 주소다. 엿목판을 펼치는 것도,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섹스까지도 현지 조달인 인스턴트 인생 역정이다. 그들의 공연은 판에 박은 레퍼토리이기 일쑤다. 바깥에 한눈 팔 여유가 없는 그들의 고단한 길이 오나가나 풍찬 노숙이듯이. 그러니까 그들은 닳고닳은 목쉼과 피곤의 소재를 반복하는 쳇바퀴 속 다람쥐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지루한 반복의 메커니즘을 털고 다시 구두끈을 바싹 조이는 것은, 도착지마다 낯선 관객과 새 호흡을 맞출 수 있고, 달리는 차안에서 눈 지긋이 감으면 늘 부대끼는 시간만큼의 부피로 엄습해오는 자신과의 모놀로그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절망에 길들여진 '반복 속의 차이'이며 '허허벌판 속에 꼭 닫힌 일상'의 숨구멍이다. 그들은 저마다 참담하게 외면당하고 배반당한 과거를 스스로 거세함으로써만이 '종점이 없는 길' 위에서의 존재가 가능한 '무국적적 현재'의 내시들이다. 그들에게 미래는 과거처럼이나 황량하고 내키지 않는 '생각 밖의 시간'이다. 패배의 연속이었던 그래서 한사코 지워버리고만 싶은 좌절의 경험철학에 너무도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한 패자들이다. 사회로부터 무참히 소외된 음지식물들이다. '계산하고 싶지 않은 적자인생들'이다. 그들에게 욕망은 헤아려지지 않는 절망이자 '중독이 된 실패'의 전주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결같이 최소한의 저항도, 새 출발에 대한 하찮은 시도도 성공해 본 적이 없는 집단 패배증후군을 동병상련으로 안고 있다. 그들의 만성이 된 현실 부적응은 곧 정신분열의 다른 이름이다. 한 발에서 다음 한 발이 그들의 수명이듯 당장 주어진 발 밑의 현실만이 허락된 그들은 내일을 떠올리기 싫은 것처럼 죽음에도 무감각하다.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시장 구조 속의 무한 경쟁'과 그 브레이크 없는 과속, '소음 광장 속의 자폐아적 이명', 살벌한 이해관계의 거미줄인 이합집산, 오직 과소비만이 그 추악한 연명의 수단인 '변태적 자본주의'는 자기 제어가 불가능한 '집단 정신분열증'을 낳는다. 어제 한 일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 할 만큼이나 혼을 빼며 살아야하고, 대책 없이 적체되어 가는 '일상성의 쓰레기'를 누군가를 향해 투사하거나, '파계승의 주정' 같은 '정처 없는 독백'이라도 내뱉어야 순간순간 견딜 수 있는 정신병동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이다. 상위 10 퍼센트를 위한 90퍼센트의 하위 희생물로 추락한 '신자유주의 시장의 미아'들은 '텍스트의 해체와 부재' 즉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탈 영토"와 "탈 중심"의 급류를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리며 떠내려가야 하는 각설이 장단 속의 "목 쉰 시니피앙"인 것이다. 각설이의 사설이나 즉흥적 멘트, 숨가쁜 애드립을 들여다보면, 광기와 흥분, '울분과 조소' '멀쩡한 헛소리' '체념적 희화화' '자학의 집단 최면' 등, '세상의 중심'에 뛰어들지 못하고 그렇다고 등지지도 못한 채 변두리를 얼쩡거리는 '속물적 무의식'의 '사유화'와 "사회적 집단화" 그리고 "욕망의 코드화"가 휴지통 속에 섞인 음식물 쓰레기처럼 고여있다. 그 '탈 문법적 방언'은 상처받고 뒤틀어진 정신 분열적 독백에 가깝다. 그 악보 없는 랩송은 '정신분열이 오히려 정상'인 자본주의 사회의 외곽에서, 그 '사각지대의 음습한 굴절상'들을 투사하듯, 아니 최면에 빠진 듯 털어 내고 있다. '타락한 자본주의 + 타락한 민주주의의 합성사회'인 현대의 선병질적 병리현상을 '낡은 音聲렌즈'로 더듬듯이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존재해야 하는 안개 경보 속의 유목사회, 저마다 나름대로 얼마쯤의 정신지체를 앓지 않고서는 견딜 도리가 없는 '유치 찬란의 정신병동'에서 상처받고, 소외당하고, 누구나 패자인 "어둠의 자식들"을, 작가는 음지의, 관심 밖의, 그러나 나름대로 명맥을 지탱해 온 '야생적 문화유산'인 각설이 패의 노상객담 같은 哀恨을 통하여 마치 "책 읽어주는 여자"처럼 조분조분하게 들춰주며 구석구석 각주를 달아주고 있다. 원래 엿은 각설이 패에서 유래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은어다. 난장에서 이문 좋고 값나가는 여러 상품을 두고 하필 몇 푼 안 되는 소품인 엿을 파는 것으로 설정한 작가의 의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책에서 성은 가족의 구성과 해체의 동력이자 메신저로, 효과장치나 배경음악처럼 전편에 걸쳐 면면히 각을 세우며 장단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노골적이며 대담하게 그려져 있는 몇몇 컷의 춘화도를 보면서도 왠지 소슬하고, 슬프고, 삭막하기만 하다. 담론화 되지 못하고 '사회화한 성'은 그 사회가 각박할수록 일회용품처럼 건조하고 실제적인 임시방편적 대증요법으로 간소화되고 마는 탓이다. 작중의 각설이 패 전체가 하나같이 성의 비정상적 소외집단이자 희생물이듯 유목의 삶이 가져다 주는 성은, 담론의 과정을 생략하고 '즉결처분하듯 사회화함'으로써 그만큼 건조하고, 불안하고, 즉흥적이며, 젖동냥 같은 '디지털 식 결핍'을 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중에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합창처럼 "남근만의 욕망을 부각시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가부장적 편견"이 도처에 천연덕스럽게 도사리고 있다. 가정도, 성욕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서 일방적이고 엽기적 특권을 누리는 동현과 태식은 가히 폭력적이며 전근대적이다. 정도 역시 결합하기 전부터 애자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다. 유석이 태식의 위세에 짓눌려 오열하는 순미를 곧장 해방시키지 못하는 것도 태식의 가부장적 기득권에 대한 묵시적 동의에 가깝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남자들 역시 여자들에게 버림받거나, 무시 당하거나, 결별의 위협에 시달리는 피해자이다. 그렇듯 '승자 없는 게임'이 유목사회를 암시하는 그들만의 성 풍속도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기의를 차단 당한 기표만의 삶'을, 구개음화나 자음접변처럼 입술과 혀의 미끄러짐을 따라 떠밀리듯 겨우겨우 꾸려 간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난 뒤의 단잠을 위한 자장가인 몇 잔의 술과 생리적 섹스다. 성 결핍과 성도착이 길 위에서의 섹스를 주도하는 그들은 저마다 얼치기 부속품인 '조립 가족'이다. 한결같이 원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비정상적 패가망신들'이 모여 야전 텐트 속에서 '저마다의 구린내를 공유'하는 새 가족을 이룬 것이다. 실패한 '게마인샤프트'가 우연과 필요의 통로를 따라 불안한 '게젤샤프트'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익집단의 동거는 경제적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집단화하기 위한 상호 보완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때 그때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보완의 틀이 깨지면 즉시 허물어지고 말 모래성이다. 그 인위의 산물인'이차적 가족'은 결국 '일차적 가족'으로 귀환하기 위한 과도기적 가건물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만남이 우연의 집합인 것처럼 해체는 필연적이었다. 해체 뒤의 재구성인 정도와 애자, 동현 내외의 잔류 역시 임시방편적 봉합일 뿐 그들도 머지않아 제각기 흩어지고 말 것이다. 분산의 명분이자 수단인 돈이 벌리면 벌릴수록, 벌리지 않으면 또 안 벌리는 대로 그들의 해체는 앞당겨질 것이다. 그리고 태식과 선화, 유석까지 포함한 그들 모두의 유목에 길들여진 유랑 벽은 정상적 가정을 끊임없이 방해할 것이다. 그들의 '탈 영토적 원심력'은 이미 후천적 본능으로 자리잡아 그 중독성을 떨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들뜬 욕망과, 그 파장인 이기심과 자기분열, 파격적 변화와 해체의 초원을 뜯어먹고 사는 신 유목사회에서 정착시대에 누리던 가족의 맹목적 신뢰와 끈끈한 유대는 기대할 수 없다. 한 우물을 마시고, 한솥밥을 먹고살며, 한 지역 방언이 유일한 공용어이던 '가족의 식물성적 의미'는 이미 핵가족 문화를 분수령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도시화, 산업화, 서구화 등 '동물적 유동성'은 가족의 '수직적 절대가치'를 '수평적 민주주의'로 상대화했고, 마침내 신 유목시대의 자기 중심적 '우울한 핵분열'을 불러오기에 이르렀다. 작가는 각설이 패의 集散을 통하여 신 유목시대에 다양하게 이루어질 가족 형태의 한 모형도를 그려주며, 어쩌면 전통적 가족의 점액질이 원상회복 불능의 비인간적 사막화로 변질될지도 모르는 음울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탈 영토화"하면서 기억상실과 '회귀불능의 리모델링'으로 "재 영토화"하는 신 유목의 무궤도한 발굽이 부추길 급격한 인간성의 상실. 배아복제 기술이 판을 치는 문명의 대 격변기에 이르러 다투어 양산될 인조 인간. 그 징벌적 후유증으로 정상인들도 최후의 보루인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서와 감각을 익혀, '개인이 최후의 보루'인 변조인간이 되어야만 존속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끔직한 상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길 위에서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생이 쓸쓸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알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그러나 인간은 생득적으로 "피투적 존재"의 의식을 치른다. "불안"과 "실존"의 낯선 운명권에 홀로 내던져진 미아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거기에다 현대인은 유목의 길 한구석에 또 한번 "피투적 존재"로 버려지는 이중고를 치르게 된다. "유행"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시시각각 길을 되물어야하는 나그네에게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걸을 만큼"의 여유가 없다. 앞서 간 발자국이 금세 지워져버리는 아스팔트 사막에서는 우선 살아남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다. 그러니 누구나 치명적 실패와 회한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군상들일 수밖에 없는 신 유목시대의 숙명적 한계를 작가는 예언적으로 이르고 있다.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모두가 치러야할 미증유의 업장을 유마힐처럼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시리다"고. "그 누구든 삶이 아프고 버거울 텐데 그런 모습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더불어 아프다"고. 우울하다. 더 늦기 전에 아직은 끈적끈적한 친지들과 진한 소주 몇 잔 나누어야겠다. 물론 그 원탁의 중앙에 작가를 앉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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