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이영희파 운동권?!]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6. 24. 07:22
반응형

.
한국의 10대 석학에 선정되었던 성균관대 교수 영희(이영희) 형 팀이 네이처에 연구결과를 올렸다. 언론매체에서 부산을 떨며 알려야 할 업적이다. 내가 내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http://blog.daum.net/enature/15852876)의 뒤를 이어 가업인 원예를 전공하기 위해 전북대 농대 농학 계열에 입학하던 때가 1980년이었다. 고등학교처럼 교양과정부 1년을 반을 갈라 다니다가 2학년 때 과를 정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같은 반에 나처럼 서울서 내려온 철도고 출신으로 철도청 공무원 하다 느지막이 대학에 입학한 박래준 형도 있었다. 당연히 같이 자취도 하고 기숙사 생활도 함께했다. 나는 전주에 연고가 없어 외로운 판에 래준이 형은 자신의 철도고 동창으로 이리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하며 이미 전북대 물리학과 3학년에 다니고 있는 영희 형(http://blog.daum.net/enature/7381542)을 소개해 주었다. 
.
나와 래준이형은 천주교 신자여서 가톨릭 학생회를 다녔지만 영희 형은 남문교회를 다녔다. 영희 형 덕에 나와 래준이형은 천주교 신자면서 영희형따라 교회 분위기가 젊고 진보적인 남문교회도 다녔다. 그곳에서 은명기 목사님도 보았고 또 농대 선배인 한상열 선배 또 후일 한상열 선배의 부인이 되는 이강실 선배 또 이강실 선배 언니도 알게 되었다. 영희형 부인이 될 은옥 선배도 알게 되었다. 전주고를 나오고 전북대 농대 학생회장도 지낸 한상열 선배가 남문교회에서 '미친새' 연극을 하고 유신정권에 잡혀간 것도 알게 되었고 난산교회 강희남 목사님(http://blog.daum.net/enature/15849734)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난 보도검열을 피한 타임지 뉴스위크지를 구해와 번역하여 알리는 일을 했고, 대학입학 한 달 반 만에 1980년 5월 17일 학교에 난입한 금마공수에게 이세종 선배의 죽음 앞에서 잡혀가 인생이 쫑나 버렸다.
.
대학입학 1달 반 만에 운동권으로 급조되기는 불가능한 일이나, 분명 래준형 친구 영희 형 또 그 영희 형을 통해 전주 남문교회 출신들인 한상열, 이강실 선배 등을 알게 되었고 은명기 강희남 목사님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게 되었으니 "이영희파 운동권"이라 할만 하다. 그 당시 영희 형이 다니던 전북대 물리학과는 훌륭한 교수 한 분이 학생들의 미국유학을 장려하고 있었고 영희 형이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그 첫 번째로 그 교수님의 인연으로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학 물리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그래서 영희 형 주변에서는 너도나도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김재연, 이승희 등등 전북대 물리학과 출신들은 켄트주립대 학파가 생길 정도였다. 그 덕에 나도 영향을 받아 버지니아텍으로 두려움 없이 유학을 나오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난 "이영희파 운동권"인 셈이다. 영희 형이 나노분야의 세계적인 대가로 이름을 날리고 영희 형 동생 승희가 전북대 교수를 하며 반도체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다. 나도 박사 학위를 받고 학교에 남았으면 훌륭한 연구를 많이 했을 것 같다. 난 박사과정 중에 미국의 쟁쟁한 석학들을 물리치고 환경청과 국방성의 불포화대 오염추적 프로그램 개발 프로젝트(http://www.vadose.net/VG_MODEL/EPHS.HTM)를 수주해서 내가 교수님들 월급을 주며 박사과정을 마쳤고 그 프로그램으로 방사능 오염을 추적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하는 바람에 국방성 공무원을 시작으로 미국연방 공무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내 비록 전북대 농대 콤플렉스에 젖어 마치 뒷골목에 젖은 집단 타듯 투덜거리며 살고 있지만, 전북대에 진학하여 "이영희파 운동권"에 속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성공적인 삶을 죽었다 깨어나도 살고 있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네이처에 등재된 영희 형의 업적에 침묵하는 한국언론이 내 전북대 콤플렉스를 자극하여 이 글을 쓰게 만들었지만, 그래 상관없다. 실력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내 무슨 찌질이처럼 전북대 콤플렉스 타령만 해야겠는가. 아무튼, 이제는 철수는 물러가고 영희가 좀 세상을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
+++

 

 

[한국을 먹여 살릴 과학자] 성균관대 이영희 교수님이 나의 집에서 바다가제를 먹고있다.

철도고 출신으로 역무원 하며 대학 입시 준비하고 美 캔트주립대서 4년 만에 석·박사 마쳤다.

1991년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 사용 투명하면서 휘어지는 트랜지스터·메모리 소자 개발 '탄소나노튜브의 응용 가능성'을 실증한 논문은 지금까지 1000회 이상 인용됐다. 2002년엔 수소 원자를 이용해 금속성 탄소나노튜브를 반도체성으로 바꾸는 기술을 역시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탄소나노튜브는 합성할 때 쓸모 적은 금속성과 쓸모가 큰 반도체성의 두 가지가 동시에 만들어져 골치였는데 그 난제를 이영희 교수가 풀어낸 것이다. 올해엔 수십억원 하는 전자현미경으로도 관찰이 어려운 그래핀 표면을 값싼 광학현미경으로 관찰, 그래핀 합성 공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술을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했다.

나노 연구 붐이 일던 1990년대, 이영희 박사는 연구비 지원도 없이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을 담보로 은행 빚을 얻어 자비로 나노 연구를 시작했던 선구자 였다. 이후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연구비가 몰려들자 학교간부들은 그 연구비를 뺏어 자신들의 학과에 지원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영희 박사는 전북대 모교발전의 꿈을 접고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한 삼성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길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휼륭한 학자에게 쏟아지는 시기와 질투와 앞길을 막아서는 구태들이 없어졌을 것이라 믿어본다.

"창의성은 다양성에서 나와… 연구원 중 40%는 외국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