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공초 오상순과 고양이]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7. 6.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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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끼 길고양이들 덕분에 정신이 없습니다. 강아지들을 좋아해 어린 시절 강아지들과 뛰어놀았던 것에 비하면 내가 고양이를 돌보고 씻기고 먹이고 가축병원을 가고 한다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어린 시절 부터 고양이 하면 공초 오상순 선생이 떠오릅니다. 어른들이 공초 오상순 선생 생전에 술이 얼마나 마시고 싶었으면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가 죽자 딸이 죽었다고 부고를 내서 사람들이 부조금을 들고 찾아가니 상복을 입은 공초 오상순이 상주로 조문객을 맞더라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나도 키우던 암놈 길양이가 로드킬을 당해 집 앞에서 죽었으니 공초 오상순 선생의 고양이 초상이 더 자주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공초 오상순과 고양이] 이야기를 들려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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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 오상순과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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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집을 떠나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내 아들이 세워두고 간 자동차 아래서 길고양이가 암수 두 놈의 아기 길량이를 나은지 1년 3개월이 넘어간다.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먹이는 주어도 만지지 않아 새끼고양이 두 마리는 길량이도 아니고 집고양이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살고 있었다. 그중에 암놈이 한 살이 되기 전 내 아버지 상중에 집 앞에서 차에 치여 죽어 집구석 선인장 앞에 묻어주었다. 옛 어른들 말마따나 집안에 어른이 돌아가시면 키우던 짐승을 한 마리 데리고 간다더니 그놈이 간택되었나 보다. 울 아버지 가시는 길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새끼 고양이들이 먹이 훔쳐 먹으러 오는 아저씨 고양이들과 함께 찾아들었다. 그중에 한 놈은 자기 힘으로 먹이를 먹질 못하고 구석에서 오돌오돌 떨기만 했다. 다가가도 다른 길고양이들은 잡힐까 봐 달아나는데 이놈은 달아날 생각도 안 하고 겁먹은 꿩처럼 구석에 머리만 처박고 있었다. 잡아다 주사기에 고양이 깡통 먹이를 물에 풀어먹였다. 다음날 놓아 줄까 보다 보니 그보다 좀 큰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눈 한쪽에 진물이 흐르고 털이 벗겨진 체 벌겋게 염증이 있는게 보였다. 낚시할 때 쓰는 뜰채로 잠자리채로 잠자리 잡듯 그놈을 잡았다. 너무 더러워 두 놈을 목욕을 시키고 다음 날 가축병원에 한나절 입원시켜 종합검진을 받게 하고 데려왔다. 내 눈은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벌겄치만 이놈들은 며칠째 잘 먹고 잘 자라고 잘 놀고 있다. 월맛에 일이 있어 갔다가 새끼고양이 밥그릇 두 개와 고양이 장난감을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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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양이들을 바라보자니 공초 오상순 선생이 떠오른다. 1894년 장충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의보통학교(효제초등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집을 나와 외가에 살며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독교에 의지했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하여 동지사대학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동국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3.1운동이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하자 허무주의에 빠진 공초 오상순은 염상섭 등과 함께 허무주의 문학지 '폐허'를 창간하고 그 창간호에 "황량한 폐허의 한국 식민지 현실을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움을 창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생사를 걸만한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시대고와 그 희생"을 게재하며 문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또 동국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때 불교에 입문하여 1926년에는 범어사에 입산하여 불교 공부에 심취한다. 비록 불교에 입문하여 수계나 승적을 받지는 못했으나 뭇사람들은 공초 오상순을 득도한 고승에 준하는 대접을 해주었다. 폐허를 통해 시인으로 수필가로 문학인의 길을 시작하면서 한대 두대 피우던 담배는 공초 오상순의 유일한 낙이자 인생이 되어 담배를 피우며 결혼식 주례를 볼 정도로 골초가 되었고 하루 한 갑에 10개들이 담배 20갑이 필요한 진짜 골초가 되었다. 140개비는 자신이 피고 나머지 60개비는 접대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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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입문한 이후, 줄곧 독신으로 살아온 공초 오상순은 요절한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의 작가 이장희의 제삿날을 기억했다가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줄 정도로 열렬한 팬이었다. 그리고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를 생각하며 고양이를 벗 삼아 길러왔다. 한번은 기르던 고양이가 죽자 주위에 딸이 죽었다고 부고를 돌리고 몸소 상복을 입고 곡을 하며 정중하게 장례절차까지 밟아 장사를 지내주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어른들이 공초 오상순이 술이 마시고 싶어 고양이까지 딸이라고 하여 부고를 돌리고 부조금을 받아 술을 마셨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고양이 하면 늘 공초 오상순이 자신의 딸이라며 고양이 제사를 지냈다는 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이가 들고 공초 오상순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고 또 그 당시 일제 치하의 민족적 암흑기를 생각하면 공초 오상순이 인생의 화두로 시작한 허무주의가 이해가 되고, 공초 오상순이 술을 마시고 싶어 고양이 제사를 지냈다기보다는 시인 이장희와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에 대한 공초 오상순의 애도와 존경의 기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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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 오상순은 그의 수필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에서 집에서 기르던 거위 한 쌍 가운데 한 놈이 죽자 남은 한 놈이 식음을 전폐하고 먼저 간 제짝을 찾으며 슬프게 우는 것을 남길 정도로 애정이 풍부하면서도 무소유를 실천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전화기가 귀했던 시절 원고 청탁을 받기 위해 명동의 다방에 움집 했던 그 당시 문인들처럼 공초 오상순도 청동다방 구석에 앉아 대부분의 문학 생활을 했다. 그 청동다방에서 청동 문학 사인북을 가지고 자신의 글을 평가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글을 모아 청동 문학을 줄기차게 간행하는 열정을 보였다. 시와 수필을 사랑했고 대한일보에 수필을 연재했던 내 어머니도 나를 둘러업고 쓴 글을 보이고 평가를 받으려고 담배 한 보루를 사 들고 청동다방에 가신 적이 있다 하니 공초 오상순의 문학적 위치가 짐작이 간다. 살아생전 시집 한 권 남기지 않고 40여 년의 문학 인생을 40여 편의 시와 23편의 수필을 남긴 공초 오상순은 조계사 헛간 방에서 고혈압으로 1963년 담배 피울 때 사용하던 담배 파이프 한 개와 청동 문학 사인북 하나만 남기고 죽었다. 그의 유해는 수유리 북한산 등산로 옆에 누였다. 공초 오상순 비문의 시작은 '나와 시와 담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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