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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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미덕, 법정스님의 무소유 / 은미희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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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미덕, 법정스님의 무소유

 

소설가 은미희


 세계는 전쟁 중이다. 여기저기서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복수를 위해 보다 더 극적인 테러를 모의한다. 사람들은 이제 어디에도 안전하게 자신을 부려놓을 곳이 없다. 아이들은 보다 더 풍요로운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학교로, 학원으로 내몰리고, 가장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

 

 더 잘살기 위해, 한 가지라도 더 문명의 이기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신없이 도는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 자신들을 내던져버린 채 물질의 좀비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에 머물지 않고 사람까지 소유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얼마나 많은 자본을 가졌는가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계급이 생긴다. 사람마저도 물질로 변질된다. 아무도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한 미덕과, 없는 것에 대한 홀가분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는 순간 사람들은 멀미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잠시 비껴나 있는 것을 소망한다. 적막하며 청정한 기운 속에서 그동안 방기해온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삶의 가치의 기준을 재정비하며 그렇게 내일을 향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싶어 한다. 그동안 헌신해왔던 물질의 압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호젓하고 고즈넉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무소유.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는, 그 도저한 이치를 깨다는 것은 한순간이며,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한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글에서 그 득도의 순간을 자분자분,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키우던 난과의 관계를 통해 관계란 것이, 혹은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구속력을 지니며 자신을 통제하는지 설파하고 있다. 소유욕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그만큼의 부작용을 낳는다. 비단 물질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다정도 병이라고, 정도 넘치면 병인 것이다.

 

 삼보사찰가운데 하나인 승보사찰 송광사, 그 본전 뒷길, 허리를 곧추세운 채 하늘을 향해 고개 내밀고 있는 왕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소박한 암자 하나 만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불일암이다. 불일(佛日). 날마다 부처 같은 삶을 살기를, 아니면 성불을 꿈꾼다는 뜻일까. 어찌됐든 무소유가 탄생되기에 딱 알맞은 장소다.

 

 살아가는데 있어 채움도 중요한 일이지만 비움 역시 채움 못지않게 필요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귀가 멀고, 눈이 침침해지며, 행동이 느려지는 것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서히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과정은 아닐까. 그 역시 비움의 한 과정일 터이다.

 

 그렇다. 지금, 자유화라는 미명으로 세계를 속박하려하는 것도, 또 남을 해하는 것도 더 가지지기 위해 용을 쓰는 것이다. 조금씩만 무소유의 미덕을 실천한다면 이 세상은, 참 넉넉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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