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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남도문학-17. 법정 무소유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9. 13.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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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남도문학-17. 법정 무소유


입력시간 : 2006. 09.04. 12:56


17. 법정 무소유

나를 비워야 '진짜 나'가 들어찬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 기거 '무소유' 집필

난의 집착 통해 나눔의 삶 진리 일깨워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인생사. 모든 것을 버릴 때 진정한 소유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

취재진은 지난 26일 법정스님의 대표작품 '무소유'의 작품 배경지인 전남 순천 송광사를 찾았다. 작품에 대한 해설은 소설가 은미희씨가 맡았다.

여름인가 싶더니 어느덧 느껴지는 선선함. 더운 기운 대신 피부에 와닿는 아침바람은 어느덧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산사는 때마침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즈넉한 산속, 빗방울에 촉촉하게 젖어든 송광사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난을 기르면서 느끼는 애착과 집착이 얼마나 자신에게 굴레가 되는지를 깨달아 체험한 내용으로 독자들을 잔잔한 공감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무소유라는 개념은 분명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것이지만 스님의 깨달음에 독자들이 쉽게 동조할 수 있는 것은 이 글이 매우 진솔하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은 이 책에서 개인의 소유욕을 버릴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허락됨을 일깨우고 있다.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마음의 평온과 해방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스님은 인류 역사의 소유사와 자신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소유에 대한 집착의 괴로움을 있는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 소유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며 작은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다시한번 일깨워준다. 특히 자신이 느낀 생각을 개인적으로 피력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역사와 사회의 문제까지 연관지어 보편적인 생각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무소유는 지난 1954년 송광사에서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한 법정스님이 70년대 후반 송광사 뒤편 불일암을 지어 홀로 20년을 보내며 쓴 작품 중 하나다.

스님이 기거하며 작품을 쓴 불일암을 찾아가기로 했다.

송광사 아래 길게 이어진 오솔길. 참나무와 대나무가 경쟁하듯 하늘로 쭉 뻗어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여기에 산을 오를때마다 취재진 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절경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불일암에 거의 다다를 쯤 한 스님이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곳이 불일암 가는 길이 맞는지 묻는 질문에 간단히 응답만 하고 바삐 산을 내려가던 이 스님은 알고보니 불일암에 기거하며 수행을 하고 있는 또다른 스님이었다.

아쉬웠다. 스님을 뵙고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산길로 10여분쯤을 더 오르니 왼쪽으로 대나무로 엮은 대문이 보였다. 이곳이 불일암.

대문을 지나 불일암을 들어가는 입구는 또다른 세계였다. 세상의 모든 잡념을 버리고 무욕의 상태로 들어오라는 듯, 길게 우거진 대나무숲 길 너머로 보이는 보이는 불일암은 지상낙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숲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두채의 암자가 보였다. 산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불일암 아래로는 밭과 우물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다.

불일암에 손수 만든 것처럼 보이는 나무의자에 앉아 산 너머를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만사 소유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법정 스님의 말이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있다.

글=김옥경기자·사진=프리랜서 오종찬·그림=화가 송필용

비움의 미덕을 배우자

은미희 소설가

세계는 전쟁 중이다. 여기저기서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복수를 위해 보다 더 극적인 테러를 모의한다. 사람들은 이제 어디에도 안전하게 자신을 부려놓을 곳이 없다. 아이들은 보다 더 풍요로운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학교로, 학원으로 내몰리고, 가장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

더 잘살기 위해, 한 가지라도 더 문명의 이기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신없이 도는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 자신들을 내던져버린 채 물질의 좀비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에 머물지 않고 사람까지 소유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얼마나 많은 자본을 가졌는가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계급이 생긴다. 사람마저도 물질로 변질된다. 아무도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한 미덕과, 없는 것에 대한 홀가분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는 순간 사람들은 멀미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잠시 비껴나 있는 것을 소망한다. 적막하며 청정한 기운 속에서 그동안 방기해온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삶의 가치의 기준을 재정비하며 그렇게 내일을 향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싶어 한다. 그동안 헌신해왔던 물질의 압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호젓하고 고즈넉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무소유.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는, 그 도저한 이치를 깨다는 것은 한순간이며,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한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글에서 그 득도의 순간을 자분자분,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키우던 난과의 관계를 통해 관계란 것이, 혹은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구속력을 지니며 자신을 통제하는지 설파하고 있다. 소유욕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그만큼의 부작용을 낳는다. 비단 물질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다정도 병이라고, 정도 넘치면 병인 것이다.

삼보사찰가운데 하나인 승보사찰 송광사, 그 본전 뒷길, 허리를 곧추세운 채 하늘을 향해 고개 내밀고 있는 왕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소박한 암자 하나 만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불일암이다. 불일. 날마다 부처 같은 삶을 살기를, 아니면 성불을 꿈꾼다는 뜻일까. 어찌됐든 무소유가 탄생되기에 딱 알맞은 장소다.

살아가는데 있어 채움도 중요한 일이지만 비움 역시 채움 못지않게 필요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귀가 멀고, 눈이 침침해지며, 행동이 느려지는 것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서히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과정은 아닐까. 그 역시 비움의 한 과정일 터이다.

그렇다. 지금, 자유화라는 미명으로 세계를 속박하려하는 것도, 또 남을 해하는 것도 더 가지지기 위해 용을 쓰는 것이다. 조금씩만 무소유의 미덕을 실천한다면 이 세상은, 참 넉넉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무등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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