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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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14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의 생애와 사상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의 생애와 사상 -선생이 가신지 30주기를 돌아보며- 강행원 (화가/동양미학) 1) 들어가는 말 근대미술의 선구를 살아오면서 공로가 지대하였던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이 가신지 30주기를 맞아 추모전의 뜻 깊은 자리에 참여의 예를 올린다. 선생께서 세상에 태어난 시기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구한말(舊韓末)의 불운한 시대였다. 그로부터 일제강점(日帝强占)의 식민시대에서 8·15광복을 전후한 격동기를 살다 간 한국예원의 추사(秋史)정신과 소치(小癡)를 잇는 마지막 남종화의 거장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삼애사상(三愛思想)'은 의재(毅齋)선생이 평소에 지녔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큰 정신이었음을 상기한다. 선생은 화가로써의 삶을 살아오면서 ..

[멸사봉공 (滅私奉公)이 멸사봉공(滅私俸公)이 된 이유]

멸사봉공(滅私奉公)은 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위하여 힘쓴다는 말이다. 이 말의 출전은, 당나라 시인 원진(元稹)이 쓴 '최릉수상서호부시랑제(崔稜授尙書戶部侍郞制)'라는 글이다. 그 가운데 " 其職嚴而不殘. (기직엄이불잔) 辟名用物者逃無所入, (피명용물자도무소입) 滅私奉公者得以自明. (멸사봉공자득이자명) . 그 직책은 엄격하고 결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문서를 허위로 작성하거나 물건을 제멋대로 쓴자는 도망치다가도 들어갈 수 없으며,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변됨을 받드는 자만이 스스로 명백함을 얻을 수 있다 " 에 나온다. .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을 공(公)의 상징으로 삼아 전제왕정의 전체주의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도입한 국민수신(國民修身)의 원리가 멸사봉공(滅私奉公)이다 보니, 식민지를 거친 한국에..

지운 김철수 선생이 북으로 가지 못한 이유 ...

[비사] . 초기 조선공산당 창설의 주역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는 러시아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스탈린이 아끼던 러시아 비행 장교 이봉섭 선생의 주선으로 스탈린을 독대하여 코민테른의 공산혁명 자금을 수령하여 공산혁명 대신 조선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습니다. . 그 자금 중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받은 분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김원봉 선생이었습니다. 또 일부는 미국에서 임시정부에 보내야 할 독립자금을 횡령하고 독립군 조직원을 암살하려 한 이승만에게 살해 명령이 떨어진 것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만의 횡령자금을 대납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 지운 김철수 선생은 공산혁명 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한 이유로 북으로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지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육할..

1900년대 초 미국유학자, 담재(淡齋) 정재원(鄭載謜) - 淡齋의 寬忍

구한말 1900년초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나라 망할것을 예견한 내장원경, 규장각직학사, 궁내부특진관 칙임관1등을 지낸 이명직 대감이 전국에 똘똘한 자식 둔 부모는 나라 망할것에 대비하여 세계각지로 유학을 보내라는 사발통문을 돌린다. 이 사실은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으로 레닌의 40만마르크 공산혁명 자금을 집행했고 3차 책임비서로 코민테른에 참가하여 스탈린을 독대하여 추인받고 군자금을 수령받아 조선독립운동 자금으로 전용했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의 증언으로 김철수 선생이 와세다대학 유학을 하고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제거되던 1915년 조선독립투쟁에 길에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 http://blog.daum.net/enature/15854888) 정재원(1893년~1954년, 鄭載謜, J..

인연

[세상이 참으로 좁다.] 1. 오늘 정말 우연하게 함흥고보 출신으로 선후배를 줄줄 꾀고 있는 분이 함흥여관집 아드님으로 곽재구 시인의 포구 연작시 '화진포'에도 등장하는 내 장인어른을 잘 안다시며 친구분들을 줄줄 꾀는데 몽양 여운영 선생의 비서를 지낸 재작년에 작고 하신 이기형 시인과 내 장인 어른 김기선 어른이 함흥고보 동창으로 친한 친구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형 시인에 대하여 구글링을 해보니 나의 친구로 콜롬비아에서 화학박사를 받고 지금은 한양대 화학교수로 있는 이휘권 박사의 부친이라니 ... [세상이 참으로 좁다.] 2. 어제 나의 지인 이진태(Jintae Lee) 박사와 워싱톤주정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박민재(MinJae Park) 선생과 점심을 함께 했다. 그런데 내 외가 6촌동생의 부인..

월간조선 2016년 9월호 - “우장춘 박사는 찰스 다윈에 비견될 만한 세계적인 석학”

문갑식의 하드보일드우장춘 박사 알리기 나선 세계적 육종학자 한상기“우장춘 박사는 찰스 다윈에 비견될 만한 세계적인 석학” 월간조선 2016년 9월호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명성황후 시해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 홀어머니 밑에서 온갖 차별 겪으며 유전육종학 연구⊙ ..

지운 김철수(遲耘 金隋(綴)洙) 선생을 만나다

지운 김철수(遲耘 金隋洙,金綴洙를 잘못 기억했을 듯) 선생을 만나다 修菴 金徹重 나는 이 하숙집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을 처음 만나 뵈었다. 어느 날 하숙집에 한복 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쓰고 탐스러운 수염이 넉넉하게 나신 청수한 노인 한 분 이 오셨기에 이 댁의 어느 시골에 사는 친척이겠거니 하였더니 인사를 드리고 보니 말로만 들었던 독립투사요 조선의 초기 공산당을 이끌었던 ‘원천리 독립투사 김철수’ 바로 그 분이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주인 주인식씨의 고종 4촌 형님이었던 것이다. 지금 계화면의 돈지에 사는 지운 선생의 둘째 따님 김용화 여사도 이 무렵에 이집에서 처음 뵈었다. 그 후로는 변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김용술 아저씨가 부안읍내에 문방구점을 개업한 이후 그곳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고 우리들이 결..

[스크랩] 지운선생님의 약력(고미술네트워크 펌)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1893-1986) -일제 감옥살이 13년 8개월 1893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아버지 김영구(金永九)와 어머니 신안(新安) 주씨(朱氏) 사이에서 태어남 1906 김아로와 결혼. 3남2녀 낳음(금남,용선,용일,용화,용덕) 1908 이평면 말목에 있는 구례군수를 역임한 한학자 서택환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에 눈뜸. 군산금호(金湖) 학교에서 신학문 공부시작 1912 와세다대학 정치과 입학 1915 재일본유학생들과 ‘열지(裂指)동맹’결성 1916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과 함께 ‘신아동맹단’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선언함. 귀국 1920 ‘사회혁명당’결성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최혁, 장덕수 ) 1921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창립(상해), 재무담당 ..

[스크랩] 독립운동가 故 김철수 선생 별세 26년만에 대전현충원에

부안 백산 출신 독립운동가 故 김철수 선생 별세 26년만에 대전현충원에 하청리 선영서 옮겨 안장 2012년 05월 15일 (화) 00:07:34 정진우 epicure@jjan.kr ▲ 부안 백산출신의 독립운동가 고(故) 지운(遲耘) 김철수 선생의 유해를 백산 하청리에서 옮겨 대전현충원에 안장하고 있다. 부안 백산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고(故) 지운(遲耘) 김철수 선생(1893~1986)이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고인이 별세한 지 26년만이다. 국립대전현충원 직원들은 이날 오전 고인이 영면한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의 선영을 방문, 유해를 현충원에 모신 뒤 독립운동가묘역에 이장하는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날 이장식에는 유족들이 참석해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고인의 뜻을 기렸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사의 거..

[스크랩] ㆍ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지낸 지운 김철수 서예 회고전

독립운동가의 옥중 한시 ㆍ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지낸 지운 김철수 서예 회고전 항일애국지사이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독립운동가 지운(遲耘) 김철수(1893~1986)의 서예 회고전이 열린다. 김철수는 남북 분단의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사회주의자라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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