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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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41

한산이씨 (韓山李氏) 9세 광목공(光牧公) 이숙야(李叔野)

한산이씨 #韓山李氏 9世 8代孫(목은3세,牧隱2代孫) #光牧公李叔野 묘소: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월하능마을)선조님은 #麟齋公李鍾學 선조님의 6남1녀중 장남입니다. 부인은 계성판윤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봉유인의 딸인 강화봉씨 #江華奉氏 입니다. 광목공 선조님은 사헌부, 사간원을 거처 정3품 광주목사 #光州牧使 를 지내셨습니다. . 우암 송시열이 지은 [광주 목사공 휘 숙야묘표] 승정 횡예엄무년 (1862년)중춘에 은진 송시열 지음. "우리나라가 개국하고 나서 고려조의 대가댁 자손 중에 어질고 뛰어난 자를 뽑아 등용하니,공이 문보에 적을 두지 않고 사헌부, 사간원을 차례로 거처 광주 목사의 벼슬에 이르렀다.부인은 봉씨이니, 합장 하였다. 지금 10대손인 안사 수언이 추모하여 묘석을 세웠으나 워낙먼 조..

한산이씨(韓山李氏) 5세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이자성

이자성 선조님은 정읍감무를 지내시던 1310년에 4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한살 아래인 울산출신 흥례이씨와 1278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세아들 배(培), 축(蓄), 곡(穀)과 따님 한분을 두셨습니다. 맏아들인 배는 과거에 올라 벼슬이 사복서승에 이르렀습니다. 둘째 아들 축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인 곡은 국가시험 수재과와 황조제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따님은 장씨에게 출가했는데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남편인 정읍감무 이자성 선조가 죽은 다음 40년간 과부로 절개를 지켰습니다. 자질이 영리 민첩하고 자상하면서도 엄하여, 두 아들의 과거 공부를 뒷바라지해서 모두 출세하도록 하였습니다. 자식 이곡과 손자 이색의 공으로 말미암아 정읍감무 이자성 선조는 고려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원나라에서는 비서감승으로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1~25

위키백과에 의하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 선생은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이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활동을 벌였다. 특히 코민테른에서 지급한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7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방원 이성찬 선생

27년생인 작고하신 부친과 아직 생존하신 32년생이신 모친은 세월만큼이나 이런저런 훈장을 달고 사셨고 사십니다. 모친은 심장박동이 약하여 심장박동기를 단체 신경통으로 보행이 불편하시지만 다행히 정신이 맑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셨던 부친을 작고하실 때까지 24시간 보살피셨습니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며 자신의 집도 2체씩 있는 여동생이 기특하게도 부모님과 함께 살아주어 부친의 마지막 길을 편하게 해 주었고 홀로 남으신 모친을 위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니 여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뒤로하시고 동작동 현충원에 영면하신 제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의 모습을 자손들을 위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아 업 겁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서 후손..

[향기 있는 삶의 이야기 2 - 67년 미국유학 선도자 이원복 전 화이저 회계사]

오늘 여러분께 소개할 분은 제가 속한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 한산이씨 종친 일가 아버지 학열의 이원복(William Lee)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1939년생이시니 한국연세로 춘추 80이십니다. 한산이씨 페이스북 그룹 운영자를 맡아하실 정도로 연세가 무색할 만큼 인터넷 사용이 젊은이들을 초라하게 만드십니다. 한국에서는 명문 대전고와 충남대학교를 나오시고 ROTC 1기로 군복무를 마치신후1967년 뉴저지의 명문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로 유학을 나오셨으니 미국에 오신지 51년째에 접어듭니다. 그 대학에서 MBA까지 하셨으니 올드타이머로는 대단한 유학성과를 올리며 세계적 대기업 Pfizer에서 공인회계사로 근무하다 은퇴하셨습니다. 부인께서는 전북대 간호대 전신인 전주간호..

LG맨에서 노인 평생교육 전문가로 거듭난 이정복 박사님

이정복 박사님은 1959년 5월 21일 충남 보령시 주산면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익히고 정곡초등학교와 주산중학교를 마친 후 독립하여 안양에 정착하여 안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경원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인간존중의 경영철학'과 '두려워 말고 도전하..

[여성백과사전인 규합총서를 저술한 '한산이씨'(韓山 李氏) 빙허각(憑虛閣) 이씨]

규합총서(閨閤叢書)는 1809년 (순조9년) 여성실학자이자 서유구의 형수인 한산이씨(韓山 李氏)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아녀자를 위해 엮은 일종의 여성생활백과입니다..이 책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채 필사본 또는 목판본으로 전해져 내려왔었으나 1939년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가 ..

조선의 마지막 국불천위(國不遷位) - 한산이씨 신부(莘夫) 이경직(李耕稙) 대감님

유가에서는 보통 4대봉사라 하여 제사를 고조부까지 모시는걸 법도로 정하여 많은 집안이 4대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문마다 4대를 넘어 윗대 조상님의 제사를 특별히 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 한신이씨 중시조인 목은 이색선생의 경우 조선건국의 사상적 기초를 세웠다는 이..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한 한산이씨 호장공 묘지에 관한 전설

한산이씨 시조 호장공 이윤경의 묘지 저는 호장공 이윤경 시조의 묘지에 얽힌 이야기가 그저 풍수와 관련되어 있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시조 호장공 선조의 묘지에 대한 전설을 접하고 보니 이게 뜬금없고 족보에 기록된 내용과도 너무 상관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출처를 찾아보니 이 전설이 조선서편수회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한산이씨 고적답사보고서 형식으로 이마니시 류가 1925년에 총독부에 보고한 날조된 내용입니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황제칙령의 독립기관으로 확대개편하는 문서에 단국환국을 위조하여 단군환인으로 변조한 이마니시 류가 호장공 이윤경 묘소의 기행문을 작성하여 첨부하며 '앞으로 조선사편수회의 할일은 기록문서가 존재하는 조선의 역사는 물론 조선의 가문조차도 전설 등으로 그 격을 떨어뜨려 조선인..

[성우(性祐) 이명직 선생과 노작 홍사용]

'눈물의 왕' 홍사용과 화성 “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략)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에서 ● 《백조》 창간과 선비정신 ◀ 휘문의숙 시절의 홍사용 일제 식민치하, 나라가 있어도 내 나라가 아니었고 왕은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러한 시국에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지조를 지키고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고고하게 외치며 민족혼을 일깨우던 시인.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고 ‘토월회’와 신극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가며 사그라져 가는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민족시인 노작(露雀) 홍사용(1900∼1947). 홍사용이 경..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한 한산이씨 호장공 묘지에 관한 전설

한산이씨 시조 호장공 이윤경의 묘지 저는 호장공 이윤경 시조의 묘지에 얽힌 이야기가 그저 풍수와 관련되어 있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시조 호장공 선조의 묘지에 대한 전설을 접하고 보니 이게 뜬금없고 족보에 기록된 내용과도 너무 상관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출처를 찾아보니 이 전설이 조선서편수회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한산이씨 고적답사보고서 형식으로 이마니시 류가 1925년에 총독부에 보고한 날조된 내용입니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황제칙령의 독립기관으로 확대개편하는 문서에 단국환국을 위조하여 단군환인으로 변조한 이마니시 류가 호장공 이윤경 묘소의 기행문을 작성하여 첨부하며 '앞으로 조선사편수회의 할일은 기록문서가 존재하는 조선의 역사는 물론 조선의 가문조차도 전설 등으로 그 격을 떨어뜨려 조선인..

한산이씨 가문의 시작에 까지 미친 조선사 편수회의 날조 된 전설

(韓山李씨 1世) 시조 이윤경 (李允卿), 호장공. [조선식민사관 정립을 위한 일본의 공작으로 제작 날조한 묘지에 관련된 전설] 저는 호장공 이윤경 시조 할아버지의 묘지에 얽힌 이야기가 그저 풍수와 관련되어 있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황제칙령의 독립기관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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