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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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33

[대한민국 건국의 아바지와 오마니]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인도인 KPS 메논(Kumar Padmanabha Sivasankara Menon, 1898 - 1982)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의 어머니(?) 한국인 모윤숙(1910 - 1990). . 메논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서 유엔 감시 하에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로 이승만을 집권시킨 당사자이고 모윤숙은 낭랑구락부를 운영하며 미인계를 통하여 메논에게 남한단독정부 구성을 공작한 인물이다. . 우리는 농담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아바지(?)는 인도인 메논이고 대한민국 건국의 오마니(?)는 한국인 모윤숙이라고 하지만 태극기 부대는 진지하게 추앙하고 있다. . 극우신문 NewDaily는 '건국을 도와준 '고마운 인도인' 메논, 그리고 모윤숙'이라는 편집장이 직접 작성한 기사를 2015년 5월 ..

[11/11 - 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모색한 정치지도자]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11/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11번째 작품[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모색한 정치지도자]이다. 이 작품의 해설 역시 댓글로 재능기부를 해주신 양금섭 교수님의 해설을 함께 공부해 보고자 한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해설은 다음과 같다. . " 巖身徑晝 别風塵 惟我江山 一恨新 寇倭方驅 臨近海 相殘南北 是邦人 . 바윗 몸체 하룻 새에 먼지로 날려 흩어지니 오직 내 강산에 한 슬픔이 새로워라. 섬도적 방금 달려와 근해에 이르려는데 서로 죽이는 남과 북은 우리나..

[7/11 - 지운 선생의 역사 속의 공적과 과오]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7/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7번째 작품 [지운 선생의 역사 속의 공적과 과오]이다. 해설은 양금섭 교수님의 해설을 인용한다. . 纔渡東江 淚自衿 只存碑閣 老松深 子規何事 啼留客 最憶(?)端王 曉月心 . 동강을 건너자마자 눈물 흘러 저절로 옷깃 적시는데 다만 노송 숲 깊은 곳에 비각만 있구나. 두견새는 무슨 일로 울어 나그네를 붙드나 가장 슬픈 건 단종의 새벽달 마음이네. . 丙辰五月二十日 獨訪寧越古跡 而宿於淸泠浦津頭賣店 初夜一巡深林 卽翌夜未明更渡東江 飽聞杜宇之聲 卽切憶幼王之悲哀史 . 1976년 5월 20일 홀로 영월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398~410

지운 선생의 서화 작품 해설이 돌팔이가 왈가왈부 할 사안이 아니다. 주변에 한문 공부 좀 했다는 일본 중국 대만 친구들 조차 돌팔이 내 한문실력(?)에 감탄 할 정도로 한국이 한문실력의 종주국이긴 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한문에 한소식 하신 분들의 댓글 재능기부에 맞기고자 한다. 난 내 기억과 지운 선생이 사사로이 내 부친에게 보냈던 서찰 내용 중에 한국정신문화원 간 '지운 김철수' 증언집에 거론된 내용을 중심으로 비사형태로 남겨보고자 한다. . [코민테른 군자금의 행방과 지운 김철수] . 증언집에는 코민테른에서 받은 군자금의 내용(200만루브르, 100만루브르 금괘)도 나름 나온다. 지운 선생은 그 엄청난 공로조차 증언집에서는 자신과 함께 움직였던 동지들에게 돌린다. 사회혁명당과 러시아 한인사회당이 박진..

진정한 사회주의자 김철수 선생 vs. 2020년 자칭 운동권 한국의 사회주의자

지운 김철수 . 1912년 와세다 대학 정치실과에 유학후 조선의 해방과 새로운 조선은 사회주의에 있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사회주의 사상을 간직한체 살다 가셨습니다. 미주 독립자금 횡령과 조직원 살해미수죄로 김구주석으로부터 살해명령을 받은 이승만의 목숨구명을 위해 횡령자금을 코민테른 공산혁명자금으로 대납하여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해방초기 이승만의 집권을 위해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몽땅 죽일때, 김철수 선생은 '사상은 간직하되 시골 고향에 돌아가 정치를 접고 농사지며 조용히 살아간다'는 내용을 일간지에 광고하는 조건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분입니다. . 사회주의 사상을 버리고 이승만에 협조했다면 남한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다 자식과 자..

[푸에르토리코와 대한민국과 미국 -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에 붙여]

.푸에르토리코는 121년 동안 미국의 자치령으로 운영돼오고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 주민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지만, 대통령 선거권이 없습니다. 국방, 외교권을 제외한 세금 운영 등 내치는 주민 직선으로 선출한 주지사가 독자적으로 행사합니다. 2012년에 치른 주민투표에서 61%의 찬..

[단독 발굴]서찰을 통해 본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

1916년 일본에서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과 1920년 조선에서 사회혁명당을 만들었고 1921년 성재 이동휘 선생과 함께 상해 고려공산당 창당의 주역이며 1926년 6월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3000명 이상의 조직원이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공산당이 해체된후 2차 후반기 조선공산당과 1926년 9월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1927년 스탈린을 독대하여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특별혁명군자금을 수령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선생, 그는 무슨 이유로 북조선의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한의 시골에 칩거하며 여생을 마처야 했을까요? 2018년 4월 한국에서 허겁지겁 급작스레 작고하신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10월에 휴가를..

지운 김철수 선생이 북으로 가지 못한 이유 ...

[비사] . 초기 조선공산당 창설의 주역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는 러시아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스탈린이 아끼던 러시아 비행 장교 이봉섭 선생의 주선으로 스탈린을 독대하여 코민테른의 공산혁명 자금을 수령하여 공산혁명 대신 조선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습니다. . 그 자금 중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받은 분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김원봉 선생이었습니다. 또 일부는 미국에서 임시정부에 보내야 할 독립자금을 횡령하고 독립군 조직원을 암살하려 한 이승만에게 살해 명령이 떨어진 것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만의 횡령자금을 대납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 지운 김철수 선생은 공산혁명 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한 이유로 북으로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지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육할..

[6.25 피난민 1호 이승만]

1950년 6·25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피난민 1호 이승만이 전라도로 토낀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대구 거처 부산 가는 게 경상도에 빨갱이가 많다고 무장게릴라에 잡힐 수 있을지 모르니 사람들이 순박한 전라도로 피난 여정을 잡아 이리 거처 목포로 가서 배 타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창경원 식물원 주임 겸 경무대 온실장을 하던 내 부친 방원선생도 귀한 식물들과 이승만이 좋아하는 품종들을 그 피난 기차 뒤편에 싣고서 대구갔다가 대전갔다가 수원으로 왔다가 다시 대전까지 따라 갔다가 각자 알아서 살라는 명령을 받고는 전주에다가 피난 식물원을 꾸렸다. 월급도 끈겨서 전북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며 피난 식물원을 지켰다. 그래서 내 부친 방원선생은 전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중공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참전하여 ..

[캘리포니아 레이들리(Reedley)를 통해 본 초기 미주 한인사회와 독립운동]

https://youtu.be/9fT10ZhvzG0 - YouTube www.youtube.com Reedley, CA 조미수호통상조약 레이들리(Reedley)는 캘리포니아 중앙에 위치한 샌 호아킨 밸리에 있는 인구 2만5천 명가량의 작은 도시입니다. 농업 중심도시 프레즈노에서 동남쪽으로 22마일 떨어져 있고 엘에이와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라스베이거스 삼각의 중간쯤에 위치한 조용한 시골 농촌 마을이지만 초기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 조선은 미국과 외국과는 첫 번째로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을 제물포..

이기형 선생과 김기선 어른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여민(與民) 이기형(李基炯) 선생은 함흥고보를 나와 일본대 창작과를 2년 수료했다. 일제시절 학병거부등 항일투쟁혐의로 1년간 옥살이도 했다. 해방후 일간지 기자생활을 하며 여운형의 지지자로 가까이 했다. 1944년 몽양 여운형의 6촌여동생 여운창과 결혼을 할때 몽양이 주례를 서고 임화와 김태준이 축사를 했다. 1947년 여운형이 이승만에게 암살당하자 가족동반 월북하여 민주조선의 기자를 했다. 6.25동란중 종군기자로 빨지산 취재를 할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북에는 여운창과 삼남매를 남겼다. 감옥에서 나온 후 1959년 방현주와 재혼을 했고 학원강사, 번역일, 사설학원 운영을 하며 1961년 아들 휘권이 태어나자 구멍가게 운영에 전념하여 휘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영원한 우정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을 중심으로] .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 . 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한국 대만 중국 유학생을 모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다. (2) . 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기 책임비서로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참가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

[1956년부터 1986년까지 지운 김철수 선생과 방원 이성찬 선생이 주고받은 서찰을 통해 본 근대사]

위키백과에 의하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 선생은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의 영원한 우정]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의제 허백련 화백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님의 영원한 우정] .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나의 인연] .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내 고조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 . 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16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습니다. (2) . 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

[이승만이 만든 전라도 하와이]

. 1. 1950년 6·25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피난민 1호 이승만이 전라도로 토낀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대구 거처 부산 가는 게 경상도에 빨갱이가 많다고 무장게릴라에 잡힐 수 있을지 모르니 사람들이 순박한 전라도로 피난 여정을 잡아 이리 거처 목포로 가서 배 타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창경원 식물원장 겸 경무대 조경담당관을 하던 내 부친 방원선생도 귀한 식물들과 이승만이 좋아하는 품종들을 그 피난 기차 뒤편에 싣고서 대구 대전까지 따라 갔다가 각자 알아서 살라는 명령을 받고는 전주에다가 피난 식물원을 꾸렸다. 월급도 끈겨서 전북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며 피난 식물원을 지켰다. 그래서 내 부친 방원선생은 전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중공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참전하여 온몸에 수류탄 파편을 맞아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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