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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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129

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녹설(綠雪) 이상재(李常宰, 1930~1989) 선생 작품도 눈에 보인다. 녹설 선생은 1930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주로 전남 광주에서 활동한 근현대 한국화가이다. 1952년 국민대학교 2년을 수료했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에게 남종화를 배웠다. 연진회 회원이었으며, 1956년부터 1979년까지 매년 국전(國展)에 작품을 출품하여 2회 특선 및 20회 입선하였다. 1962년에 김옥진, 천경자 등과 함께 를 만들어 활동했다. 1984년에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80년에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현대 한국화전에 참여했고 1982년부터 1987년 사이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 작품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유품인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고 남계(嵐溪) 박진주(朴鎭柱, 1929~2004) 선생의 작품도 몇점 눈에 들어온다. 남계 선생은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이며 고화 감정사로 1929년 (1931년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본인이 29년생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에서 밀양박씨 청재공파 중의 장파집 박선(朴宣)의 후손으로 아버지 박천배(朴天培)와 어머니 진주하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조옥희여사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진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중퇴한 남계 선생은 목재(木齋) 허행면(許行冕, 1906~1966, 의재 선생의 4째아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

지운 김철수 선생의 생전 서화보따리

주말에 부친 방원 선생의 유품중에 둘둘말아둔 지운 김철수 선생의 생전 서화보따리를 풀어 더이상 서화가 상하지 않도록 바인더에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2폭 4폭 7폭 8폭 12폭 병풍용 서화포함 300여점까지 숫자를 세다가 포기를 했다. . 지운이라는 호를 쓰지 않고 김철수라 실명을 서화에 쓰기시작할때부터 모인 서화이니 족히 천점이 넘어가는 것 같다. 그중에 신문 스크랩도 하나 있다. 내 부친은 1989년 11월 24일자 한겨레신문 13면에 실린 이종찬 기자가 작성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전면기사를 오려 놓았다. . 수많은 지운선생 서화중에는 작고한 분들로는 의제, 남농, 구당, 석파, 옥산 선생 등과 나눈 서찰과 서화가 더러있고, 생존하는 분들로는 옥전, 동곡, 향설당, 등등 그분들의 서화도 더러 포함되어..

진정한 사회주의자 김철수 선생 vs. 2020년 자칭 운동권 한국의 사회주의자

지운 김철수 . 1912년 와세다 대학 정치실과에 유학후 조선의 해방과 새로운 조선은 사회주의에 있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사회주의 사상을 간직한체 살다 가셨습니다. 미주 독립자금 횡령과 조직원 살해미수죄로 김구주석으로부터 살해명령을 받은 이승만의 목숨구명을 위해 횡령자금을 코민테른 공산혁명자금으로 대납하여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해방초기 이승만의 집권을 위해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몽땅 죽일때, 김철수 선생은 '사상은 간직하되 시골 고향에 돌아가 정치를 접고 농사지며 조용히 살아간다'는 내용을 일간지에 광고하는 조건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분입니다. . 사회주의 사상을 버리고 이승만에 협조했다면 남한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다 자식과 자..

증조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 - 시계

한국뉴스가 미국 가쉽잡지에서나 볼만한 기사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중에 하나가 신천지교주의 시계사진이다. 박근혜가 새누리국회의원들에게 주었다는 금장시계다. 그게 정말 기사거릴까? 너무 보도가 선정적이고 선동적이고 이것저것 추측과 추론을 늘어놓는다..지난 12월, 난 내 증조부가 문성금광을 했다는 눈이 소복하게 싸인 충주 금방산(국망산)을 내 각시와 오르고 있었다. 700고지의 산이 제법 가파르고 군대 군대 암벽에 밧줄로 이어진 곳도 있었다. 버려진 나무를 지팡이 삼아 눈싸인 밑에 낙엽싸인 길을 오르고 있었다..갑자기 지팡이 끝에 뭔가 툭하고 튀겼다. 시계였다. 제법 근사한 스위스제 티소트 시계로 백불정도 하는거였다. 아직도 열심히 초침이 돌고 있었고 상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날짜는 20여일이 앞섰으니 누..

[단독 발굴]서찰을 통해 본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 김철수 독립지사

1916년 일본에서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과 1920년 조선에서 사회혁명당을 만들었고 1921년 성재 이동휘 선생과 함께 상해 고려공산당 창당의 주역이며 1926년 6월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3000명 이상의 조직원이 일경에 체포되어 조선공산당이 해체된후 2차 후반기 조선공산당과 1926년 9월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1927년 스탈린을 독대하여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특별혁명군자금을 수령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선생, 그는 무슨 이유로 북조선의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한의 시골에 칩거하며 여생을 마처야 했을까요? 2018년 4월 한국에서 허겁지겁 급작스레 작고하신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10월에 휴가를..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화백 그리고 우장춘 박사의 영원한 우정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을 중심으로] .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실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일제에 독살되던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 . 1915년에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울자며 ‘귀곡단’과 ‘열지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한국 대만 중국 유학생을 모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지사의 길에 들어섰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14년을 옥살이했다. (2) . 초기 조선공산당 3차 전당대회 전반기 책임비서로 러시아의 코민테른에 참가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

[1956년부터 1986년까지 지운 김철수 선생과 방원 이성찬 선생이 주고받은 서찰을 통해 본 근대사]

위키백과에 의하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 선생은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반드시 역사가 보복한다]

솔직히 난 사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때 국사, 대학 때 인류문화사 같은 것도 성적이 그리 좋았던 기억도 없다. 1980년대 말 미국유학을 하면서 독신자 아파트 같은 건물에 있던 사학을 전공하던 터키 친구가 술자리에서 풀어놓은 고구려와 돌골의 역사 이야기로 돌골과 고구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 소평전(小評傳)

27년생인 작고하신 부친과 아직 생존하신 32년생이신 모친은 세월만큼이나 이런저런 훈장을 달고 사셨고 사십니다. 모친은 심장박동이 약하여 심장박동기를 단체 신경통으로 보행이 불편하시지만 다행히 정신이 맑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셨던 부친을 작고하실 때까지 24시간 보살피셨습니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며 자신의 집도 2체씩 있는 여동생이 기특하게도 부모님과 함께 살아주어 부친의 마지막 길을 편하게 해 주었고 홀로 남으신 모친을 위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니 여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뒤로하시고 동작동 현충원에 영면하신 제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의 모습을 자손들을 위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아 업 겁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서 후손..

참혹한 고문 이겨낸 조선의 혁명 여걸 김마리아 / 한겨레21 임경석

임경석의 역사극장참혹한 고문 이겨낸 조선의 혁명 여걸한평생 독립에 헌신한 3·1운동의 투사 김마리아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해방 1년 앞두고 목숨 거둬한겨레21 제1196호 | 등록 : 2018-01-16 애국부인회 임원. 번호순으로 김영순 서기, 황에스더 총무, 이혜경 부회장, 신의경 서기, 장선희 재..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다조국의 광복과 통일 - 스러진 혁명의 꿈 - 지운 김철수 <4>

김경민(부안독립신문 전 대표이사)| 2010.07.28 ▲ 지운의 친필 유고와 녹음자료를 토대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김철수 자료집 조선공산당에 참여하다지운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실망과 좌절을 안고 1923년 7월 국내로 들어왔다.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고 독립운동 자금도 마련할 계..

잊혀져가는 독립투사를 기리며 [특별기고] 지운 김철수 23주기와 기억의 역사

정재철 (백산고 교사) | 2009.03.23 80년대 초 12월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저녁때에 몸집이 작은 한 노인이 부안 읍내 구시장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최가축 병원 앞에서 2시간여를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중절모에 정갈한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이 그가 가진 모든 ..

[이승만이 만든 전라도 하와이]

. 1. 1950년 6·25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피난민 1호 이승만이 전라도로 토낀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대구 거처 부산 가는 게 경상도에 빨갱이가 많다고 무장게릴라에 잡힐 수 있을지 모르니 사람들이 순박한 전라도로 피난 여정을 잡아 이리 거처 목포로 가서 배 타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창경원 식물원장 겸 경무대 조경담당관을 하던 내 부친 방원선생도 귀한 식물들과 이승만이 좋아하는 품종들을 그 피난 기차 뒤편에 싣고서 대구 대전까지 따라 갔다가 각자 알아서 살라는 명령을 받고는 전주에다가 피난 식물원을 꾸렸다. 월급도 끈겨서 전북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며 피난 식물원을 지켰다. 그래서 내 부친 방원선생은 전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중공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참전하여 온몸에 수류탄 파편을 맞아 구..

공편공 이유청의 이야기는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시작부에 나오는 중심 인물 이교리의 이야기

벽초 홍명희는 성우공 이명직 선생의 영향으로 일본 대성중학에 유학하던 중 부친 홍범식 금산군수가 1910년 경술국치로 자결하자 공부를 접고 돌아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였다. 늘 가까이서 지켜보던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 선생은 벽..

나의 조부 이성구(李成求)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牧隱20代孫(호장공27世, 호장공26代孫, 목은21세)

https://youtu.be/tVlDRGSl1eA - YouTube www.youtube.com 서울농대 전신인 수원농림학교를 나와 만주국 흥농부 미곡검사관을 지낸 내 조부 이성구 선생의 빛바랜 사진 나의 조부 이성구(李成求) - 한산군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인재공파로 牧隱20代孫(호장공27世, 호장공26代孫, 목은21세) 이성구 (李成求, 1908년 9월 18일~1981년 11월 23일) 선생님은 경기도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서 농공상부 금광국 이철규 기수의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생모이신 영일 정 씨께서는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이성구 선생님이 태어나신 지 1년이 체 못되어 돌아가십니다. 1915년에 7살에는 할아버지 성우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사주를 받고 사랑 체에 장기간 유숙한 일본인 호..

곡귀단(哭鬼團) -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며 결성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이 와세다대 유학시절인 1915년 9월 7일 화성 동탄 석우리(돌머루)에 칩거하며 전국에 똘똘한 자식들을 유학보내 나라 망할것에 대비하라며 사발통문을 돌려 본인 지운 선생과 많은 조선 청년들의 유학을 독려했던 나의 고조부 이명직(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선생이 친일세력에 의해 독살 당하여 돌아가신 소식을 접하자 이에 분연하게 일어나,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뜻으로 1916년 곡귀단(哭鬼團)을 만들어 항일 저항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격려차 동경에 온 한국인 도지사가 친일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단상에 뛰어 올라가 그 도지사 멱살을 잡고 '같은 조선인으로 어찌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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