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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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129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 병풍 서화 작품 299~309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 병풍 서화 작품 299~309 . 지운 선생의 서화를 정리하면서 나름데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지운 김철수'도 읽어보고 또 지운 선생을 소재로 한 학위논문 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다분히 소설처럼 쓰인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그나마 나름 사실에 부합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김경민 전 부안독립신문 대표이사가 2010년 7월 28일자 부안독립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지운 선생이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여 활동한 상황을 정리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 *****************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다조국의 광복과 통일 - 스러진 혁명의 꿈 - 지운 김철수 / 김경민(부안독립신문 전 대표이사)] . 조선공산당에 참여하다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222~235

지운 선생의 서화를 정리하면서 나름데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지운 김철수'도 읽어보고 또 지운 선생을 소재로 한 학위논문 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다분히 소설처럼 쓰인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그나마 나름 사실에 부합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김경민 전 부안독립신문 대표이사가 2010년 7월 28일자 부안독립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지운 선생이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여 활동한 상황을 정리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 *****************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다조국의 광복과 통일 - 스러진 혁명의 꿈 - 지운 김철수 / 김경민(부안독립신문 전 대표이사)] . 조선공산당에 참여하다 . 지운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실망과 좌절을 안고 1923년 7월 조선으로 들어왔다. 동지들을..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176~200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서화가 처음에는 대충 천몇백점인줄 알았는데 그 몇배는 되는것 같다. 화선지가 압축되었다가 풀어 펼치니 이게 장난이 아니다. 박물관 건립을 위해 모금을 해야 할 판이다. 아무튼. . 근대사의 인물들 - 1916년 일본와세다대학 유학인사들 . 앞줄 중앙 지운 김철수 선생은 나의 고조부 이명직 선생의 '망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유학을 나가라!'는 사발통문에 감화되어 한학을 접고 일본유학을 결행한다. 나의 고조부 이명직 선생이 친일파에 암살당한 1915년, 그소식을 듣고 지운 김철수 선생은 귀곡단을 조직하고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아래의 사진은 내 부모님의 중매를 했던 인연으로 내가 지운 김철수 선생을 친할아버지 이상으로 접했던 연고로 보관하게 되었다. . 맨 뒤줄 좌에서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주자십장부시(朱子十丈夫詩) 중 서화 2폭 병풍 1300-1304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주자십장부시(朱子十丈夫詩) 중 서화 2폭 병풍 1300-1304 나의 부친 방원 선생의 서화 유품보따리에는 이미 액자로 또 족자로 또 배접이 되어있는 작품들은 다른 분들이 잘 보관하기 위해 챙겨 놓으셨지만, 내가 정리하는 것은 쓰레기처럼 화선지가 비닐보따리에 휴지처럼 남겨져있던 것들이다. 어쩌면 쓰레기통에 버려져 영영 사라질 뻔한 것들을 다행스럽게 챙겨서 미국으로 가져온 것들이다. 나름 정리하여 소개하는 것이니 보관상태가 안타까워도 꾹 참고 감상하길 바란다. 내가 여유가 되고 형편이 되면 배접하여 잘 보관해 볼 방도를 찾아볼 예정이다. . 지금 소개하고 있는 지운 선생은 잘 알다시피 북으로 간 동생분들이나 자녀분들 중에는 철도부상을 지낸분도 있고 또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주자십장부시(朱子十丈夫詩) 중 서화 2폭 병풍 236~239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주자십장부시(朱子十丈夫詩) 중 서화 2폭 병풍 236~239 . [지운 김철수 선생 – 좌우익 소아병을 극복한 정치인이자 독립지사.] . 2005년 8.15 광복의날에 독립장을 추서 받은 지운(遲耘) 김철수(1893~1986) 선생은 일찌기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고 실천에 옮긴 분이다. 지운 선생은 한중일 동양3국에서 가장 먼저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며 일본•러시아•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3년8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분의 독특한 점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운 선생은 혼란스런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북조선을 택하지 않고 1986년 돌아가..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적벽부 서화 10폭 병풍 작품 240~250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적벽부 서화 10폭 병풍 작품 240~250 . [지운 김철수 선생 – 좌우익 소아병을 극복한 정치인이자 독립지사.] . 2005년 8.15 광복의날에 독립장을 추서 받은 지운(遲耘) 김철수(1893~1986) 선생은 일찌기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고 실천에 옮긴 분이다. 지운 선생은 한중일 동양3국에서 가장 먼저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며 일본•러시아•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3년8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분의 독특한 점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운 선생은 혼란스런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북조선을 택하지 않고 1986년 돌아가실때까지 남한 땅..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126~150

내 부친 방원 선생의 유품 지운 선생 서화보따리를 정리하여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리다 보니 많은 분들이 응원하고 격려하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공부할수 있어 좋다는 메세지를 보내오셔서 보람을 느낀다. 헌데 꼭 무식하고 한심한 자신의 생각을 용감하게 전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당신도 빨갱이냐며 빨갱이 원조를 찬양하냐고 상스런 욕을 포함해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참으로 한심한 군상들이라 생각된다. 말로 섞기 싫어진다. . [지운 김철수 선생 – 좌우익 소아병을 극복한 정치인이자 독립지사.] . 2005년 8.15 광복의날에 독립장을 추서 받은 지운(遲耘) 김철수(1893~1986) 선생은 일찌기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고 실천에 옮긴 분이다. 지운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101~125

방원 선생의 유품 보따리 중 지운 선생의 서화중에 세월의 부침에 헤지고 찢어진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 빛바랜 작품들을 접하니 지운 선생이 와세다대학 정치학 실과를 마치고 본과 진학을 포기하고 중국 대만 조선 유학생을 규합하여 신아동맹단, 곡귀단 등을 만들어 본격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연이 생각난다. . 지운 선생이 와세다대 유학시절인 1915년 9월 7일 화성 동탄 석우리(돌머루)에 칩거하며 전국에 똘똘한 자식들을 유학보내 나라 망할것에 대비하라며 사발통문을 돌려 본인 지운 선생과 많은 조선 청년들의 유학을 독려했던 나의 고조부 이명직(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선생이 친일세력에 의해 독살 당하여 돌아가신 소식을 접하자 이에 분연하게 일어나, 조국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76~100

지운 선생은 생전에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는데 많은 지운 선생의 한문 서화 보따리를 정리하다보니 그중에서도 재미있게 들었던 러시아 코민테른 공산대학에 만났던 모택동 호지명 같은 분들과 서로 밤을 세워 한문으로 필답을 나누셨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더군다나 모택동과는 동갑으로 더 정감이 갔고 모택동의 글이 흠잡을때 없는 명문들이었다고 하셨다. .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지운 선생의 증손주 이야기다. 잘 알다시피 북으로 간 동생분들이나 자녀분들 중에는 철도부상을 지낸분도 있고 또 중국으로 러시아로 혁명유자녀 자격으로 유학하여 북한 정권에 기여한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남한에 남은 자식과 식솔들은 가난과 정부의 감시에 힘들게 살아갈수 밖에는 없었다. . 장손주였던 김소중 선생은 배우지 못했지만 기품이 있는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51~75

같은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뒤집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을 1935년에 발표해 ‘종의 합성’의 시작을 알린 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한국농업에 큰 기여를 했다. 민비(명성황후 추증) 살해를 돕고 일본으로 도망간 역적 우범선의 아들이 자신의 부친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국말도 모르면서 죽을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장춘을 조국에 헌신하도록 의식화시킨 사람이 바로 조선운동권의 시조 지운 김철수 선생임을 알리며 그분의 서화작품 25점을 연이어 소개한다. .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을 중심으로] . 부안이 배출한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은 성우 이명직 대감님이 돌린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선진국 유학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1..

지운 김철수 선생과 울릉도 '고고고고(古枯孤高)' 201~221

어린시절 부친 방원 선생의 화훼원예농장 한편에는 카나리아를 비롯한 가지가지 새들을 키우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방원 선생이 꽃을 좋아하니 아름다운 새도 좋아하셨겠지만 새를 키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시절부터 오랜세월 춤을 전공하신 김백봉(1) 선생과 친분을 나눠오셨는데, 바로 김백봉 선생이 새를 좋아하여 집에 많은 새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새 알러지에 큰아들 안병철, 딸 안병준과 안병헌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결국 화훼원예농장으로 그 새들을 몽땅 가져오셨습니다. 그덕에 어린시절 여러해동안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를 벗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 1972년 어느날, 부안 백산에서 지운 선생이 종다리 여러쌍을 들고 오셨습니다. 지운 선생 말씀이 몇년전 신문에 보니 울릉도에 종다리와 진달래가 없어서 종..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26~50

'조선공산당' 2차후반기와 3차 집행부 책임비서'를 지내고 또 스탈린을 만나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과 동양공산혁명자금을 직접 수령했던 지운 김철수. 한중일 동양3국중, 1920년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당의 강령을 갖춘 '사회혁명당'을 창당했으며 1921년 레닌의 자문으로 이동휘의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결합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만든 지운 김철수. 그런 지운 김철수 선생은 북으로 가지 못하여 정작 북한의 공산정권 창립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남과 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사회주의 혁명가 지운 김철수에게는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제가 여러분의 그 의문을 풀어 주겠습니다. . [지운 김철수 선생이 북으로 가지 못한 이유] . 초기 조선의 공산당 창설..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서화 작품 1~25

위키백과에 의하면,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 선생은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이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활동을 벌였다. 특히 코민테른에서 지급한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7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6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어느분이 난을 치고 방원 선생이 글을 쓴 작품 3

몇날 몇일을 정리한 내부친 방원 선생의 서화보따리엔 천여점에 이르는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화가 있다. 지운 선생 서화를 찍어서 정리하려고 '지운 선생 서화보따리'라 이름 지었다. 그런데 지운 선생 서화 이외의 작품들을 따로 정리하여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에 정리하고 난 뒤에 지운 선생 서화를 정리할까 했는데. 그 이외의 작품들 숫자나 수준이 만만하지 않다. '세월아 네월아 ~'하며 처리하여야 할 판이다. . 어느분이 난을 치고 방원 선생이 글을 쓴 작품이다. . 양금섭 교수님 해설: . 蘭之貴, 何? 香耶? 非也. 四時不變與? 亦非也. 氣也? 節耶? 幽也? 淡耶? 皆非也. 極其言俱此衆美而友其善者之致也. 若非屈原無以爲蘭之友亦無蘭難以爲屈原之友矣. 噫! 是千古之大貴也歟 遲耘先生詩 (난초가 귀한 것은 왜일까? 향..

옥산(沃山) 김옥진(金玉振, 1927 ~ 2017) 선생 작품 1

부친 방원 선생 유품 서화보따리에는 옥산 김옥진 선생의 작품도 있다. 액자나 족자로 보관되어 있던것들은 두형과 누나 여동생이 챙겨가고 남은 것들이다. .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을때 오랜 친구분인 옥산 김옥진 화백에게 받아 놓으셨던 축하 水仙花(수선화) 부가 있다. 재작년에 내 누나가 액자 족자를 행기다가 찾았다고 알려주었던 그 그림이다. . 金盤露積珠襦重(금반로적주유중) 금반에 이슬이 쌓이니 구슬져 고리가 무겁고 . 玉佩風生翠帶長(옥패풍생취대장) 옥매에 바람이 생기니 푸른 띄가 길도다 . 아마도 날 주려고 받아두셨다가 깜박하고 잊어버리셨거나, 그 사이에 부친에게 치매가 찾아왔나 보다. 이제 학위 받은지도 많은 세월이 흘러 가물거리는데 내 아바지 방원 선생이 미국까지 와서 많이 기뻐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

석파(石波) 선생 서화

부친 방원 선생 서화꾸러미 속에 석파(石波) 선생의 서화도 눈에 띈다. 그런데 몇일동안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느분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도통 검색이 되질 않는다. 혹시 아는분이 있거나 검색의 단초를 알려주실 분이 있다면 댓글 부탁드린다. . +++ 石波(석파) - 素砂閑人(경기도 소사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분. 방원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분으로 추정) - 작품속 내용을 통하여 양금섭(Kyzbma Yang) 교수님 해설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1921~1983) 선생 작품

액자나 족자는 두형과 누나 여동생이 챙겨가고 남은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 유품 중에 한지를 둘둘마라둔 지운 김철수 선생 서화 보따리에는 지운 선생이나 방원 선생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분들의 서화가 잘 보존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지난 주말 서화들을 정리하다 보니 고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선생의 작품도 제법 눈에 띈다. 소강 선생은 1921년 제주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오사카의 경판상업학교(京阪商業學校)를 중퇴하고 돌아와 인천에 정착하였다. 소강 선생은 소강서도원(小岡書道院)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검여 유희강 선생과 송석 정재흥 선생 등과 함께 인천서단을 이끌었다. 1962년 처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7년 연속 입선하였고, 인천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경기도전 초대..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 작품 1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목은 선생의 21대손으로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 선생과 순창 조씨 조언례 여사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한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다. .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한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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