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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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韓山李氏 906

공편공 이유청의 이야기는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시작부에 나오는 중심 인물 이교리의 이야기

벽초 홍명희는 성우공 이명직 선생의 영향으로 일본 대성중학에 유학하던 중 부친 홍범식 금산군수가 1910년 경술국치로 자결하자 공부를 접고 돌아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였다. 늘 가까이서 지켜보던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 선생은 벽..

단군성전 건립주역(檀君聖殿 建立主役, PEOPLE) -이숙봉 여사와 세자매

단군성전 건립사(檀君聖殿 建立史, HISTORY) 영상 자료 -1968년 신축한 단군성전 및 사직기념관 낙성봉축제 2. 출처 : 대한뉴스 제 692호 - 단군 성전 및 사직기념관에 낙성봉축제 (단군성전 건립 기념 경축 제전) - 1968년9월14일 보도 단군 성전 및 사직 기념관에 낙성 봉축제 ( 이숙봉 여사,이희..

이질감만 없다면 붉은색 계열의 선글라스가 눈에는 제일 좋겠군

----- 어느 물리학자의 글: 자외선은 피부암이나 백내장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심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근적외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 같다. 근적외선은 피부를 쉽게 투과한다. 손으로 전등을 가리면 붉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볼 수 ..

안성 성은리 한산이씨와 동탄 석우리(돌머루) 한산이씨

회승지공 이회의 아들은 좌승지를 지낸 이덕기입니다. 이덕소의 장자 이중연이 자식이 없어 차남 이충연의 장남 이흠직을 양자를 보냅니다. 이흠직은 이수열을 낳고 이수열은 이제상을 낳고 이제상은 이규동을 낳고 이규동은 이의재를 낳고 이의재는 이원기를 낳았습니다. 이덕소의 차남 이충연은 이창직을 낳고 이창직은 이수해를 낳고 이수해는 이사목을 낳고 이사목은 이규첨을 낳았습니다. 이규첨이 자식이 없어 판춘추공파 이원재를 양자로 받아 이원효(필재)를 낳았으나 또 자손이 없어 안성 성은리 이중연에게 양자간 이흠직의 5대손 이원기의 5남 이승태를 양자로 받아 후손을 이었습니다. 오산 이승태 공의 장자는 조선조 마지막 진사시에 입격하고 탁지부 주사를 지낸 성우공 이명직 선생입니다. 이덕소의 차남 이충연이 안성군수를 지낸 ..

(15世) 한산이(韓山李)씨 14代孫 (목은9세, 牧隱8代孫)

[1] 1912년 부안 백산의 청년 김철수는 수원 동탄 돌머루에 칩거하며 나라를 되찾는 길은 해외 선진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는 성우공 이명직 선생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실과에 입학합니다. 1915년 이명직 선생이 독살당한 소식을 접하자 조국 해방 독립투쟁에 떨쳐나섭니다. 만주를 오가며 만주국 미곡검사관을 하던 이성구 검사관의 도움으로 은신처와 노자 그리고 독립자금을 조달받았습니다. 그 인연으로 이성구의 아들 이성찬을 임실 독립지사 보굉 이봉욱 선생의 손녀 이춘연과 중매를 섭니다. 그리고 우장춘을 통해 이성찬을 원예가로 거두게 합니다. 그런데 지운 김철수는 자신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이성구가 자신을 독립지사의 길로 인도한 성우공 이명직 선생의 손주인지는 까맣게 ..

대한민국을 망친 이승만

내 부친이 경무대에 조경담당관으로 근무할 때, 이승만 박사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꽃 화분을 잘 배치한다고 따로 불러 꽃 화분 남는 건 내다 팔아 애들 분윳값에 보태라고 했단다. 꽃 화분 살만한 국민이 일천했던 시절, 나라 사정도 모르는 이런 영감이 대통령이란 게 참 걱정되더란다. 이런 독대가 있고 나면 특무대 김창룡이 부하들이 불러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온종일 닦달을 하더란다. 결국, 나의 부친은 이 구실 저 구실을 붙여 경무대에서 도망 나오셨단다. 4.19가 일어나기 한참전에…. [[진실은 불편합니다. 불편해도 이만 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을 직면했을때 도망가고 싶고 외면해 버리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진실을 가리는 악마들에게 비굴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 [대한민국을 망친 ..

(1世) 한산이(韓山李)씨 (戶長公)

(1世) 시조 이윤경 (李允卿), 호장공. [조선식민사관 정립을 위한 공작으로 제작 날조한 묘지에 관련된 전설] "고려시대에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몹시 가난하여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며 근근히 살았다. 이윤경(李允卿)은 어느날 관가의 현감이 앉아있는 마루에 널빤지가 매년 조금씩 썩어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습기도 없는 집에 마룻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은 분명히 명당의 지기(地氣)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 이인간에게 자기가 죽으면 그곳에 몰래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유언에따라 어둠을 틈다 관가의 마룻방 밑으로 뻗쳐맺힌 혈장에다 그의 시신을 암장했다. 그 명당에 발복으로 이곡(李穀), 이색(李穡)과 같은 명인을냈다.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이 고려말 원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

(2世) 한산이(韓山李)씨 1代孫 (李仁幹)

(2世) 1代孫 이인간 (李仁幹), 정조호장. 금석문 '경선사금구(景禪寺禁口)'에는 '고려국(高麗國) 용령(龍領) 대정(隊正) 이인간(李仁幹)이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나온다. 슬하에 장남 충진(忠進)과 차남 효진(孝進)을 두었다. 참고자료: 1. 국가의 눈을 피해 국경에서 일어나는 밀무역은 고려 전시대에 걸쳐 변경지대에서 성행되었다. 예를 들면, 1101년(숙종 6) 정주(定州)의 장금남(長今男)이 관가 창고에 있는 철갑옷 네 벌을 훔쳐서 동여진에 판 경우도 있고, 서북면병마사 이지명(李知命)은 용주(龍州) 창고에 있는 저포(紵布)로 거란사(契丹絲) 5백 속(束)을 교역하여 바치라는 왕명에 따라 국법을 어긴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밑으로는 일반 백성까지 밀무역에 관여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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