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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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129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글픈 이야기]

지운 김철수 선생의 이야기를 페이스북, 블로그에 그분의 서화와 함께 소개하다 보니 별 인간들이 빨갱이라 비난하고 또 어떤 이는 잘못된 이야기라 항의하고 또 어떤 이는 소설 쓰지 말라며 비난한다. 아무튼, 아직 절반도 숙독하지 못하였으나 해방 이후부터 시간대별로 정리하여 주마간산 격으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서찰과 메모 등을 훑어보았다. . 해방 이후부터 지운 김철수 선생이 작고하던 1986년까지 일분일초도 남한 땅에서는 좌익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지운 선생이 조선의 사회주의 역사에 차지하는 부분의 무거움을 알고 수많은 관심자들이 몰려들어 물어보고 녹음하고 취재도 하여 언론 보도도 더러있었지만 지운 선생은 주변 지인들과 남아있는 식솔들을 위해 말을 아끼고 살수 밖에는 없었다. . 지운 선..

[독립운동을 망친 여운형과 박헌영 그리고 이루쿠츠크파(irkutsk派) '고려공산당']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은 1900년 5월 충남 예산에서 몰락한 양반·지주 영해(寧海)박씨 박현주(朴鉉柱)와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서자로 출생했다. 생모는 과부에서 재가한 이학규(李學圭)다. 대흥소학교 졸업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을 했다. 미국 유학을 꿈꾸었고 일본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도 했다. 그러다 상해 고려공산당에서 구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20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 당시 중국 상해는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 ~ 1935년 1월 31일)의 러시아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지운(芝雲 혹은 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의 조선 사회혁명당이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독립운동을 망친 여운형과 박헌영 그리고 이루쿠츠크파(irkutsk派) '고려공산당']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은 1900년 5월 충남 예산에서 몰락한 양반·지주 영해(寧海)박씨 박현주(朴鉉柱)와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서자로 출생했다. 생모는 과부에서 재가한 이학규(李學圭)다. 대흥소학교 졸업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을 했다. 미국 유학을 꿈꾸었고 일본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도 했다. 그러다 상해 고려공산당에서 구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20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 당시 중국 상해는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 ~ 1935년 1월 31일)의 러시아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지운(芝雲 혹은 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의 조선 사회혁명당이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원조(元祖)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https://youtu.be/qVfp1QEiP6g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고려인들이 코민테른의 혁명자금만 노리는 분파와 분열만 획책하는 혁명화 대상의 적성 민족으로 각인시키는 비극의 실마리 제공 . 러시아 조선인들은 레닌을 도와 1917년 러시아혁명을 성공한다. 1918년 이동휘 선생은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1919년 레닌의 측근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을 코민테른에 파견한다. 하지만 한인사회당의 부실한 조직력과 사회주의 정강의 미숙함을 들어 코민테른 국제당 승인과 지원을 보류한다. . 이동휘 선생은 조직력 강화를 목적으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단행한다. 1919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강 요건을 맞추지 못하자 코민테른에서는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8폭, 4폭 병풍 ⼈問寒⼭道(인문한산도) 작품]

청말(淸末) 화가 육회(陸恢)의 '한산행려(寒山行旅)' - ⼈問寒⼭道(인문한산도) . 人問寒山道(인문한산도) : 사람들은 한산 가는 길 묻지만 寒山路不通(한산로불통) : 한산 가는 길은 통하지 않는다오 夏天氷未釋(하천빙미석) : 여름날에도 얼음이 녹지 않고 日出霧朦朦(일출무몽몽) : 해가 떠도 안개가 자욱하다오 似我何由屆(사아하유계) : 내 흉내 내려도 어찌 그렇게 하나 與君心不同(여군심부동) : 그대와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을 君心若似我(군심약사아) : 그대의 마음이 나와 같다면 還得到其中(환득도기중) : 그 가운데에 있을 수 있으련만 . 한산(寒山)이란 인명(人名)임과 동시에 산 이름(山名)이기도 하고 또한 수행을 통해 도달해야 할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산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

[지운 선생과 방원 선생]

1945년 해방되던 해 1927년생 내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 선생은 경성원예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왕직에서 운영하던 창경궁 식물원 원장으로 취직했다. 말이 원장이지 혼자 서구식 유리온실을 관리하는 막일꾼이었을 거다. 만 18세 청년으로 그 창경궁 식물원은 사회에 첫걸음을 걷는 직업이었다. 1893년생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은 해방을 맞아 공주감옥에서 출옥하여 서울에서 장안파들과 남북으로 갈려질 조국의 운명에 노심초사하며 좌우익을 설득하여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서로 우두머리가 되어야겠다고 치사하고 야비한 음모나 꾸미는 좌우익 정치가들을 대하며 얼마나 골머리를 썩여야 했을까? 지운 선생에게 창경궁 식물원은 그나마 머리를 식힐 곳..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해방이후 서찰 1/2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이 해방이후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에게 보낸 서찰 1/2 1945~1955 서울 종로구 종로1가 신신백화점 화원 1956~1965 서울 용산구 한남동 544번지 식물원 1966~1973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방산식물원 1974~1977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199-2번지 방원식물원 이어서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이 해방이후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1927~2018)선생에게 보낸 서찰 2/2 로

[忍齋書巢(인재서소)]

지운 김철수 선생과 의재 허백련 선생이 내게 내린 휘호 '忍齋(인재)'와 '忍齋書巢(인재서소), 인재의 작은 책방'이다. '忍齋'라는 호는 내 초등학교 시절, 동네 오학진 국회의원 흉내를 내며 연설을 하고 초등학교 어린이회장에 출마하여 4, 5, 6 학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보시곤 3형제 호를 지어 주신다며 내린 호다. 기억에 큰형은 신재, 작은형은 노재, 나는 인재다. 언젠가 작은형 집에 가보니 액자를 만들어 잘 간직한 걸 보았다. 어린 시절 위아래 가리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리려 드는 내 모습을 보시고 참을 忍자를 생각하며 살라고 지어 주셨지만 난 지운 선생과 의재 선생의 그 깊은 뜻을 받아 담을 그릇이 없었다. . 1. 참을 忍자를 명심하고 살았다면 고등학교 1학년 ..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

https://youtu.be/dwI4WVvi1ok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이주의 이유 -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에만 골몰하는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찰 등을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분열(分裂)과 자멸(自滅)을 막는 길은 수신(修身)일 겁니다. 바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야'만 한다는 거지요. . 1917년 박진순 선생,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선생 등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한 민족적 ..

[식분(識分) - 자기 분수를 알라! -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야']

https://youtu.be/dwI4WVvi1ok 백낙천 시에 '식분지족(識分知足) 외무구언(外無求焉)'이라고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밖에서 또 뭘 구하리요'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불교도인 동정 선생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식분(識分)' 휘호로 방원(芳園) 선생의 중년 시절 호인 방산(芳山)을 위해 남기셨다. 미천한 입장에서 그 심오한 뜻은 뒤로하고 '자기 분수를 알라'는 확실한 거 같다.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찰 등을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분열(分裂)과 자멸(自滅)을 막는 길은 수신(修身)일 거다. 바로 '배고픈 건..

[己未回羊(기미회양) - 지운 선생과 2.8독립선언서]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己未回羊(기미회양)' 작품 지운 선생의 이 작품은 '기미회양(己未回羊)'이다. 지운 선생이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 동지들과 함께 1919년 동경 YMCA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할때가 1919년 기미(己未)년이었다. 다시 기미년이 돌아온건 1979년이다. 60갑자의 기미년을 다시 맞이하신 1979년이 의미가 크셨을 거다. 그러니 '기미회양(己未回羊)'을 여러장 남기셨다. . 생전에 지운 선생은 용서하기 힘든 미운 놈 하나를 들라면 정읍의 나용균(羅容均)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나용균은 함께 와세다대학에 유학했는데 인간이 되어 동지로 사귀었다고 한다. 미적거리는 춘원 이광수도 달래고 또 나용균도 달래서 2.8독립선언도 함께했다. 글 잘..

[先從隗始(선종외시) - 허헌(許憲, 1885~1951) 선생]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先從隗始(선종외시)' 작품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화 휘호 선종외시(先從隗始)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의 재상 곽외는 죽은 말의 뼈를 천금으로 살 정도로 천리마(千里馬)를 귀하게 구했다는 매사마골(買死馬骨)처럼 인재를 모을 때는 곽외부터 먼저 시작하여 인재를 모으라는 뜻이다. . 참고로 양금섭 선생님의 새김 순서를 보면 '먼저[先] 외[隗]로부터[從*전치사 from] 시작하소서[始]'로 의미는 '모수자천(毛遂自薦)과도 같은 훌륭한 인재를 구하시려거든 보잘것없는 사람, 즉 자신인 외와 같은 사람을 등용 시켜 천하에 소문부터 내라는 뜻'이다. . 지운 선생이 허헌(許憲, 1885~1951) 선생을 만난 게 19..

[堅持直操(견지직조) - 金立 선생의 삶]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堅持直操(견지직조)' 작품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화 휘호 중에는 '堅持直操(견지직조)'도 많이 보인다. 원래 堅持雅操(견지아조)라고 '굳게 맑은 지조를 간직하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에 "군자는 편안하게 거처하며 명을 기다리지만(居易以俟命) 소인은 험한 짓을 일삼으며 요행을 구한다(行險以行)"고 하고 '좋은 벼슬이 저절로 얽혀든다'는 호작자미(好爵自縻)가 후구로 쓰인다. 하지만 지운 선생은 우아할 아(雅) 대신 곧을 직(直)을 사용했다. 군자는 그 지조가 확고부동(確固不動)하여 항구한 덕이 있는 반면, 소인은 그 마음이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그러니 올바른 지조(志操)를 굳고 곧게(直) 유지..

[다반향초(茶半香初) - 박진순(朴鎭淳, 1898~1938)과 스탈린의 고려인강제이주음모(高麗人强制移住陰謀)]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다반향초(茶半香初)' 작품 . 차는 절반을 마셔도 향은 처음과 같다. 녹차가 끝까지 같은 향을 유지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삶이 한결같은지 수시로 돌아보아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지운 선생은 허헌 선생으로부터 시작한 함경도 서북학회 인사들과 만남을 특별하게 여기셨다. 그 덕에 내 부친과 나도 살면서 함흥과 북청분들과 인연이 생겼고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학교를 설립한 북청출신 해청 선생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박진순 선생도 부친이 함흥에서 연해주로 이주한 함흥의 피가 흐르는 분이다. 1926~7년 지운 선생이 조선공산당 2차후반기와 3차전반기의 책임 비서로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스탈린을 독대하여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군자금을 받..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어부사(漁父辭)' 6폭병풍

[굴원(屈原) 어부사(漁父辭)] . 屈原旣放 遊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굴원기방 유어강담 행음택반 안색초췌 형용고고. 굴원이 쫓겨나 강호에서 노닐며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모습은 야위어 보였다. . 漁父見而問之曰 ;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於斯? 어부견이문지왈 ; 자비삼려대부여? 하고지어사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 屈原曰 ;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굴원왈 ; 거세개탁 아독청 중인개취 아독성 시이견방. 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있는데 나만이 깨어 있으니 이런 까닭에 쫓겨나게 되었소” . 漁父曰 ;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백이송(伯夷頌)' 8폭병풍

백이송(伯夷頌) 백이를 기리며 -한유(韓愈, 768~824) . 士之特立獨行(사지특립독행): 선비로서 빼어난 뜻을 지니고 탁월한 행동을 하여 適於義而已(적어의이이): 오직 의로움에 맞게할 따름이오 不顧人之是非(불고인지시비): 사람들의 시비는 돌아 보지도 않는 다면 皆豪傑之士(개호걸지사): 모두 위대하고 뛰어난 선비로서 信道篤而自知明者也(신도독이자지명자야): 도를 믿음이 독실하여 스스로 지혜가 밝은 사람인 것이다 一家非之(일가비지): 온 집안이 그를 비난하더라도 力行而不惑者寡矣(력행이불혹자과의):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至於一國一州非之(지어일국일주비지): 심지어 온 나라와 온 고을이 그를 비난한데도 力行而不惑者(력행이불혹자): 힘써 할 일을 행하며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라면 盖天下..

[연이관지(憐以觀之) - 박진순(朴鎭淳, 1898~1938)과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참변)]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연이관지(憐以觀之)' 작품 생전에 지운 선생은 '연이관지(憐以觀之)'의 휘호를 쓰면서 "같은 동포 민족을 불쌍히 보라"는 뜻으로 설명하곤 했다. 양금섭 교수님이 해석하셨듯,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연민의 정으로써 보다"가 될 것 같다. 생전에 남기신 회고록을 보면 박진순(朴鎭淳) 선생을 특별히 언급하곤 길게 사연을 남기신 게 아마도 그런 연민의 마음으로 보셨던 것 같다. . 박진순 선생은 1898년, 김막심 니콜라예비치가 개척한 러시아 연해주 파르티잔스크 콜라예프카 마을에서 밀양박씨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박진순의 선조가 16세기에 함경도로 귀양 갔고 부친이 1890년대에 연해주로 이주하여 박진순 선생을 생산했으니 박진순 선생은 러시아 교민 2세..

[橫槊賦詩(횡삭부시) - 李東輝橫槊賦詩(이동휘횡삭부시)]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橫槊賦詩(횡삭부시)' 작품 https://youtu.be/rAcg737TCok 삼국지(三國志)에서 ⾚壁⼤戰(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수일 전, 보름달이 휘영청 뜨고 하늘은 청명하고 양쯔강은 달빛을 받아 긴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다. 조조(曹魏, 155~220)는 흥이 일어 배 위에 큰 잔치를 준비시켰다. 문무백관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조는 창을 가로 들고 시를 지었다. 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조조가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는다), 이 장면을 바로 '橫槊賦詩'(횡삭부시)라고 한다. '횡(橫)'은 '가로 들다'라는 동사이고, '삭(槊)'은 길이가 긴 창이며, '부(賦)'는 '시문(詩⽂)을 짓는다'라는 뜻이다. . 황개가 투항하기로 되어 있고 감녕이 호..

[군현필지(群賢畢至) - 중국공산당 창당 이야기]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군현필지(群賢畢至)' 작품 동진(東晋)의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 삼짇날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320~385), 손작(孫綽 314~371) 등 소흥(紹興)의 명사 41명은 특별한 하루를 만들기로 모의했다. 좌장인 왕희지는 41명의 모임을 ‘군현필지(群賢畢至), 소장함집(少長咸集)’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현명하다는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니, 나이를 초월한 모임이 되었다'는 감개무량한 표현이다. 입구의 땅바닥에 거대한 서각으로 군현필지(群賢畢至)를 새겨 그 특별한 모임을 기념했다. . 1921년 7월 2일 상해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를 개최하고 북경대학 교수 실암 진독수(陳獨秀, 1879~1942)를 총서기로 선출하며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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